2018년 2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줌 인

은퇴 앞둔 남자농구 대들보 김주성

“마흔까지 온 건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

  • | 이영미 스포츠 전문 기자

    입력2018-0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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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부산아시안게임, 2014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주역

    • 허재·허웅 부자와 함께 선수 생활 기연(奇緣)

    • 16년 국가대표 비결은 태극마크가 주는 애국심 때문

    • 내 농구 인생 80점…팬 서비스 더 잘 못한 게 아쉬워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한국 남자농구의 대들보, 김주성(39·원주 DB)이 2017-2018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1월 5일 서울SK전을 시작으로 9개 경기장에서 은퇴 투어를 진행 중이다. 김주성은 2002년 프로농구 원주 TG삼보 입단 후 16시즌을 원주에서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16년간 정규리그 4회, 챔피언결정전 3회 우승을 거뒀고, 국가대표 선수로 뛰며 2002부산아시안게임, 2014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했다. 

    신인상(2002-2003), 정규리그 MVP 2회, 챔피언결정전 MVP 2회를 차지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농구 전설의 퇴장은 농구팬들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정작 선수 자신은 소속팀 성적이 1위에 오른 상황을 빗대 ‘은퇴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라며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은퇴 투어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나. 

    “아직까진 확 와닿지 않는다. 은퇴 투어를 하다 보니 내가 은퇴하긴 하는구나 싶더라. 대부분 은퇴를 앞두면 우울하고 힘들다고 하는데 팀 성적이 좋아서인지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올 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유니폼을 입지 못한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은퇴 투어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난 야구의 이승엽, 농구의 서장훈 선배처럼 엄청난 성적을 올리고 인기를 얻은 선수가 아니다. 나보단 은퇴 투어를 준비하는 다른 팀이 부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SK전(1월 5일)에서 나와 함께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춘 동료들의 모습이 담긴 피규어를 선물 받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받아 만감이 교차했다. 난 그냥 후배들과 함께 기념사진 한 번 찍는 걸로 충분히 만족한다. 선물을 받게 되니 그걸 기획하는 팀에 숙제를 떠안겨준 게 아닌가 싶다.” 

    SK는 김주성의 은퇴 투어 첫 번째 경기를 맞아 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일궜던 문경은 감독, 전희철 코치, 2014인천아시안게임 우승 주역 김선형과 김주성이 함께 있는 피규어를 제작해 김주성에게 전달했다. 

    한 팀에서만 16시즌을 보냈다. 

    “처음 프로 입단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내가 프로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이겨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부터 앞만 보고 달렸다. 뒤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코트 안에서 모든 걸 쏟아냈고 코트 안에서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이번 시즌부터는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농구 인생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책임감의 실체

    운동선수의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서면 은퇴를 종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난 그런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은퇴는 강요당한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5~6년 전부터 은퇴를 떠올렸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이번에 은퇴해야 하나, 아니면 1년 더 뛰어야 하나 고민했다. 이상범 감독님이 팀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내 역할이 필요하다면서 1년 계약을 이끌어주셨다.” 

    이전 이상범 감독 인터뷰 때 들은 얘기다. 김주성 선수에게 역할을 부여한 내용인데 경기에서 활약하기보다는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부분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았다고 하더라. 

    “1년 더 선수 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야간 훈련 때마다 후배들을 이끌었다.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한테 책임이 있는 터라 어느 때보다 열심히 가르쳤던 것 같다. 후배들과 함께하면서 책임감의 실체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 시즌 우리 팀 1라운드 목표가 3승이었다. 그런데 5승 3패를 이뤘다. 이후엔 연승 행진도 이어갔고 지금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1위 팀이 됐다. 시즌 마칠 때까지 이 순위를 유지할지 모르겠지만, 올 시즌은 농구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걸 배우는 중이다.” 

    이상범 감독이 식스맨들에게 출전 시간을 보장해주면서 비주전 선수들의 기량이 부쩍 늘어난 걸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부분이 원주 DB가 1위에 오른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비주전 선수들은 실수를 두려워한다. 모처럼 코트에서 뛰다가 실수하면 바로 교체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님은 비주전 선수들에게 출전 시간을 약속했다. 어떤 실수를 해도 5분에서 7분의 출전 시간을 보장해주신 것이다. 처음엔 나조차 감독님의 약속을 긴가민가했는데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프로에 올 정도의 선수라면 비주전과 주전의 실력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게임을 더 많이 뛰고 못 뛰고의 차이인 것이다. 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감독님은 그걸 떠올리고 밀어붙인 것이다.”

    꼴찌 후보의 1위 돌풍

    이상범 감독은 올 시즌 김주성의 체력 안배를 위해 주로 3쿼터 후반이나 4쿼터에 투입했다. 이는 원주 DB의 후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리고 DB의 센터로 활약 중인 유성호, 서민수의 야간 훈련을 전담케 했다. 남은 시간 동안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꼴찌 후보’로 꼽히던 DB는 1위 돌풍을 일으켰다. 3년간 야인 생활을 하고 코트로 돌아온 이상범 감독의 매직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주전으로 풀타임을 소화했을 때 ‘혹사’라는 단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혹사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강행시키는 게 혹사 아닌가. 난 그런 경기를 한 적이 없다. 선수라면 누구나 코트에서 오래 뛰고 싶어 한다. 휴식 차원에서 경기에 넣고 빼기를 반복하면 오히려 컨디션을 망치기 마련이다. 감독님이 알아서 시간을 배분해주기 때문에 혹사당했다고 느낄 만큼 힘들게 뛰지 않았다.” 

    올 시즌 1쿼터가 아닌 3쿼터 후반부에 뛰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난 뛰는 시간에 구애하지 않는 편이다. 주전으로 뛰지 못한다고, 후반부에 투입된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내가 처한 현실을 인정했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다. (출전 시간에) 욕심을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최근 3점 슈터로 변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센터가 슈터로 나선 이유가. 

    “3년 전 내측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두 달가량 쉬었다. 회복 과정에서 무릎이 안 굽혀지더라. 트레이너에게 은퇴해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일단 지켜보자고 하더라. 시즌 개막 10일 전까지 슛을 제대로 던지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3점 슛을 연습했다. 부상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슛이 잘 들어가면서 재미를 느끼게 됐다.”

    “왜 이 좋은 걸…”

    1월 5일 열린 원주 DB와 서울 SK 경기에 앞서 SK 윤용철 단장이 김주성 선수에게 은퇴투어 기념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DB]

    1월 5일 열린 원주 DB와 서울 SK 경기에 앞서 SK 윤용철 단장이 김주성 선수에게 은퇴투어 기념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DB]

    3점슛 연구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현역 슈터들의 특징을 자세히 관찰했다. 어떤 슈터는 손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했다고 해서 그 연습도 병행했다. 미들슛은 종종 던졌는데 3점슛은 생소한 터라 연습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3점슛을 해보니 그 나름의 재미가 있더라. 그래서 3점슛 잘 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혼자만 했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 

    어떤 선수의 슛폼을 벤치마킹했나. 

    “(문)태종이 형의 슛폼이 예쁘다. 대표팀에서 만났을 때 슛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팀의 (두)경민이에게도 많이 물었다. 내려 쏘는 것, 올려 쏘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질문했고 대답을 얻은 후에는 연습을 통해 내 걸로 만들려 했다. 그렇다고 연습량이 많았던 건 아니다.” 

    골 밑을 지키는 센터의 역할에 충실하던 김주성. 2015-2016시즌부터 시즌 경기당 2.53개의 3점 슛을 시도할 만큼 3점 슛 시도 횟수가 부쩍 늘었다. 올 시즌에는 잦은 슛 시도와 높은 성공률까지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몸싸움에서 밀리며 선택한 득점 방법이 큰 효과를 본 셈이다.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틈틈이 무빙 스텝을 밟고 쏘는 3점슛 연습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올스타 휴식기 전까지 김주성은 155차례의 슛을 던졌고 이 중 80개가 3점슛이었다. 이 가운데 31개를 성공시켜 성공률 38.8%로 나쁘지 않다. 농구인들은 김주성에게 식스맨상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주성은 “나보단 후배가 받아야 앞으로 더 나은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한국 농구의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재와의 특별한 인연

    2002년 프로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김주성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나. 

    “감독님 말씀을 잘 듣는 선수였다. 대신 질문이 많았다. 특히 선배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루키 때는 앞만 보고 뛰었던 것 같다. 중반 때는 후배들 플레이를 살려주는 데 중점을 뒀다. 지금은 베테랑답게 벤치에서 후배들을 독려하고 경기에 나가면 외곽에서 역할을 해주려 노력한다.” 

    2002년 프로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 플레잉코치였던 허재 감독과 함께 코트를 누볐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이후 허 감독 아들 허웅이 원주 DB에 입단하면서 함께 경기를 치렀다. 쉽지 않은 경험인데. 

    “지금도 2002년을 떠올리면 기분 좋은 설렘이 전해진다. 농구의 전설, 영웅, 대통령이었던 분과 함께 운동하고 밥 먹고 시합에 나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선배님’이라고 했더니 ‘야,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고 해 지금까지 ‘허재 형’으로 부른다. 코트에선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셨지만 코트 밖에선 가슴이 따뜻하고 넉넉한 진짜 형이었다. 술도 자주 했다. 그런 분의 아들이 이번에는 내 후배가 된 것이다. 솔직히 신기했다. 허재 형이랑 14살 차이인데 웅이랑도 14살 차이다. 웅이가 입단했을 때 허재 형이 전화해선 혼낼 일 있으면 인정사정없이 혼내라고 하시더라. 허재 형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로웠다.” 

    중앙대 시절 최고의 센터였지만 프로 데뷔 후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두 명의 외국인 선수가 뛸 때는 합작해서 60점을 낸 적도 있다. 나의 부족함, 실력 없음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어떤 외국인 선수들이 기억에 남아 있나. 

    “프로 첫해 인연을 맺은 리온 데릭스와 자밀 왓킨스, 빅터 토마스, 최근의 로드 벤슨을 꼽을 수 있다. 올 시즌에 만난 디온테 버튼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혈질로 소문이 났는데 실제 만나보니 귀여운 선수였다. 신장이 작은 선수(194cm)는 개인 기술이 뛰어나 자기 멋대로 플레이하는 편인데 버튼은 시간이 지날수록 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잘 웃고 농담도 하면서 선수들 속으로 들어왔다. 24살의 선수인데 행동은 30대 베테랑처럼 한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선수다.”

    2개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부산아시안게임과 2014인천아시안게임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김주성 선수가 유일했다. 

    “나로선 영광이다. 부산아시안게임의 결승전 상대가 중국이었다. NBA 스타 야오밍이 중국대표팀 센터로 활약했다. 그를 마크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지만 선배들의 도움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야오밍한테 감명받은 순간도 있었다. 결승전 다음 날 선수단 숙소에서 마주쳤는데 아침에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나오더라. 전날 치열한 결승전을 치른 탓에 나를 포함해 모든 선수가 숙소에 퍼져 있었는데 야오밍은 출국하는 날 아침에도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것이다. 그가 왜 NBA에서 뛰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중앙대 시절 처음 대표팀 선수로 발탁된 후 16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2014인천아시안게임 이후 대표팀 은퇴를 천명했는데 16년이나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애국심 때문이다. 태극마크를 달아본 선수들만 알 수 있는 감정이다. 부상과 체력 난조로 더 이상 뛰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태극마크의 중요성을 알기에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맞붙은 이란은 NBA 출신의 하메디 하다디와 신체 조건과 실력 면에서 NBA급인 니카 바라미 때문에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함성 덕분에 힘을 냈고 값진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바로 태극마크의 힘이다. 중요한 순간에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함께 미치는 경험을 한다.”
     
    2014인천아시안게임 이란과의 농구 결승전이 드라마 같은 역전승으로 종료되자, 코트에서 뛴 선수들과 벤치에 있던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기쁨을 만끽했다. 5개월간 동고동락한 동료 선후배들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도 있었고,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코트 위를 뛰어다니는 선수들도 눈에 띄었다. 대표팀 맏형 김주성은 후배들로부터 금메달 헹가래를 받았다. 첫 번째 헹가래는 난적 이란을 꺾고 1위에 올랐다는 기쁨이, 두 번째는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 그리고 세 번째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격려의 마음이 담긴 헹가래였다.

    롤모델 서장훈

    맨투맨 수비할 때 가장 괴롭힌 선수가 누구인가. 

    “(서)장훈이 형이다. 만약 형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면 난 벌써 지워졌을 것이다. 나보다 5살 많은데 난 형을 따라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만큼 대단한 선수였다. 장훈이 형은 다양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똑똑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잘 불렀다. 형을 보면서 나의 단점을 보완하려 했다. 이전에는 인터뷰도 단답형 스타일이었다면 형을 보면서 깊이 있는 내용의 대답을 내놓으려 노력했다.” 

    원주에서 만난 감독들 개성도 다양하다. 전창진, 강동희 감독을 거쳐 이충희, 김영만, 그리고 지금의 이상범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전창진 감독님을 좋아했다. 형님 리더십을 발휘하며 선수들을 끔찍이 챙기셨다. 난 감독님과 한배를 탔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은 선장이고 난 노를 젓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만큼 존경했다. 프로 첫해,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김주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많이 부족한 내게 꾸준히 출전 기회를 주었다. 믿고 경기에 내보내주셨다. 그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강동희 감독님은 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한 가지 아이템을 얘기하면 10가지의 새로운 아이템이 쏟아져 나온다. 기술적인 지식이 매우 뛰어난 분이다. 운동 시간이 1시간이면 30~40분을 토론하며 아이템을 만들어갔다. 정말 재미있게 농구했고 우승도 경험했다. 드롭존을 활용한 질식 수비를 통해 ‘동부산성’을 구축한 부분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이상범 감독에겐 어떤 부분을 배우고 있나. 

    “전창진 감독님이 ‘내 선수’라고 표현하셨다면 이상범 감독님은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마인드가 선수들한테 굉장히 크게 다가온다. 말로는 ‘내 자식’ 운운하면서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지도자도 있다. 두 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셨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염두에 둔 나로선 전창진 감독님, 강동희 감독님, 그리고 지금의 이상범 감독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것 같다.” 

    은퇴 후 지도자 수순을 밟기로 결심한 것인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겠지만 선수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배워나간다는 마음으로 도전해보고 싶다.”

    “충분히 행복한 농구 했다”

    2014년 10월 3일 열린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자농구 결승에서 한국이 이란을 꺾고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선수들이 김주성 선수를 헹가래 치고 있다. [동아DB]

    2014년 10월 3일 열린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자농구 결승에서 한국이 이란을 꺾고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선수들이 김주성 선수를 헹가래 치고 있다. [동아DB]

    자신의 농구 인생을 점수로 환산한다면 몇 점을 주고 싶나. 

    “80점이다. 100점 만점에서 20점이 모자란 것은 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같이 찍으면서 팬들과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그게 내 농구 인생의 옥에 티로 남았다. 지금은 열심히 해주려 한다.” 

    은퇴한다는 소리를 듣고 부모님이 가장 아쉬워하셨다고 들었다. 아들이 뛰는 모습을 보러 경기장 찾는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안타까움도 크신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죄송하다. 부모님만 생각하면 1, 2년 더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겠지만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님한테 은퇴 발표 시기를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나중에 기사 보고 전화를 걸어선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셨다. 그동안 나 때문에 농구 경기를 가슴 졸이며 보셨는데 다음 시즌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인 김주성이 선수 김주성을 보는 시각이 궁금하다. 김주성은 어떤 선수였나. 

    “단 한 번도 내가 농구를 잘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운 좋게 소속팀과 궁합이 잘 맞았고, 감독님들의 배려 덕분에 출전 시간, 훈련량 등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농구는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많다. 노력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게 있다. 참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포기하지 않고 마흔 살까지 뛸 수 있었던 건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선수 김주성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주성아, 그럼에도 넌 충분히 행복한 농구를 했다’라고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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