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올림픽 6연패 神弓들이 수험생·취업 준비생에게 전하는 ‘특수 심리훈련법’

‘철심장’만들려면 ‘생각하는 기계’가 되라

  • 글: 김현미 동아일보 미디어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9-23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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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대용 단말기로 선수의 기록과 심신을 관리하고, 시뮬레이션 장비로 실제 경기처럼 훈련한다.
    • 한국양궁의 전술 프로그램을 구입하겠다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팀의 핵심기술은 장비가 아닌 심리훈련. 지난 1년 동안 양궁대표팀의 멘탈 트레이닝을 맡은 서울대 스포츠심리연구센터가 비법을 공개했다.
    올림픽 6연패 神弓들이 수험생·취업 준비생에게 전하는 ‘특수 심리훈련법’
    8월월20일 그리스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자양궁단체 결승전. 한국팀은 3엔드에서 중국의 맹추격을 받고 다소 흔들렸다. 윤미진(21·경희대) 선수가 9점 2개와 8점 1개에 그친 데다 이성진(19·전북도청) 선수의 23번째 화살이 7점을 쏘고 말았다. 중국은 마지막 엔드에서 실수 없이 세 발 모두 9점 과녁을 쏘아 240점으로 경기를 끝냈다.

    이제 박성현(21·전북도청) 선수의 세 발만 남았다. 실수 없이 9점만 쏘면 우승. 그러나 두 번째 화살이 빗나가 8점을 쏘았다. 중국팀은 우승이 결정되기라도 한 듯 좋아했다. 이제 박 선수의 마지막 화살에 운명이 걸렸다. 8점이면 패배, 9점이면 동점 연장전, 10점이면 우승. 긴장의 순간, 한국팀의 27번째 화살은 보기 좋게 10점을 쏘았다. 올림픽에서 여자 개인전 6연패에 이어 단체전 5연패의 신화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남자양궁단체 결승전이 치러졌다. 단 4점만 쏘아도 이기는 게임. 박경모(29·인천계양구청) 선수는 끝까지 침착하게 10점을 쐈다. 올림픽 남자단체 2연패도 달성됐다.

    한국 양궁이 아테네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까지 선수와 함께 마음속으로 시위를 당기는 이들이 있었다. ‘자, 좋은 느낌으로 쏘는 거야. 힘 하나도 안 들이고 화살이 쑥쑥 잘 나가네. 좋았어! 이 느낌이야. 내 타이밍을 지키며 슈팅하는 거야. 떠난 화살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 거야. 그래, 이 시합은 이길 수밖에 없었어.’

    서울대 스포츠심리연구센터 정청희 교수(책임연구원·체육교육·61)를 포함한 5명의 연구원은 한국 양궁이 무난히 목표치를 달성했을 때 지난 1년간 매달린 심리기술훈련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 여자양궁 신화와 기업 경영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 양궁의 경쟁력 요인을 생산요소, 연관·지원사업, 전략·구조·경쟁메커니즘, 수요 여건 등 4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생산요소란 바로 최고의 코치진과 선수층. 한국에서 80위면 세계랭킹 5위나 마찬가지고, 한국 여자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기가 올림픽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은 선수들은 하루 300~500발 이상 연습하고 올림픽에 임박해서는 1000발씩 쏘며 강행군했다.

    이들의 실력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선수육성 시스템이다. 1986년 이후 양궁은 시력측정기, 시신경감응도 측정기 등 첨단장비를 훈련에 적극 도입해왔고 여기에 선수 개인별 성향에 맞춘 고도의 심리훈련을 병행함으로써 20년 동안 세계 1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눈앞의 금메달을 놓치는 이유

    한편 이번 올림픽에서 호주, 이탈리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미얀마, 멕시코, 룩셈부르크가 모두 한국인 감독을 영입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한국양궁의 ‘전술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려는 나라가 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양궁팀의 심리기술훈련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정청희 교수는 “장비라면 가져다 쓸 수 있고 감독은 모셔 가면 되지만 심리기술훈련법은 설령 알려준다 해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양궁의 슈팅 동작은 안정된 자세를 유지한 채 신체적, 정신적 몰입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강한 근력과 근육의 정교한 사용이 함께 요구된다. 슈팅 순간의 미세한 오차는 화살의 비행거리가 길어질수록 커져 기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선수는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서 정확하고 일정한 슈팅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수한 양궁선수는 슈팅 자세에 동요가 없는 신체적 안정성과 고도의 긴장감 및 심리적 압박감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성, 일정한 페이스로 계속 슈팅할 수 있는 생리적 안정성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정청희 ‘운동수행 향상을 위한 심리기술 훈련’에서).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경기에서 긴장해 서두르다가 혹은 겁먹어 경기를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 배드민턴에서 ‘라켓을 거꾸로 들어도 금메달’이라던 나경민·김동문조가 8강에서 탈락한 후 나 선수는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50m 권총에서 은메달을 딴 진종오 선수는 우승을 눈앞에 두고 실수로 6.9점을 쏘는 바람에 금메달을 러시아 선수에게 내주고 말았다. 남자 50m 소총3자세 결선에서 2관왕을 노리던 미국 선수가 옆 선수의 표적을 쏘아 0점으로 꼴찌를 한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양궁에서도 종종 남의 표적을 맞히거나 과녁을 못 맞히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여자양궁 단체전 준결승전에서 바로 그런 상황이 재현됐다. 대만과 중국의 경기. 5점만 쏘아도 이기는 상황에서 중국 선수가 쏜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버렸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의 선수일수록 반드시 ‘담력훈련’을 한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을 벗어나 야구장에서 공개 훈련을 가진 이래 양궁 대표팀은 야구장, 경정장, 경륜장같이 관중이 몰리고 소음이 많으며 돌풍이 잦은 곳에서 실전 훈련을 해왔다. 올해도 아테네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야구장과 경륜장 두 곳에서 남녀 혼성대결, 남녀 성대결을 펼쳐 관중들에게 뜻밖의 볼거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이밖에 10m 하이다이빙, 전방 입소, 야간 행군, 공동묘지에서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한 훈련법이 담력 키우기에 동원됐다.

    신중한 박경모, 속전속결 장용호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학적으로 입증된 개인별 맞춤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5월부터 올림픽이 열리기까지 서울대 스포츠심리연구센터 홍길동 수석연구원(37)과 임태희 연구원(30)이 각각 남자, 여자팀을 전담했다.

    심리기술훈련은 크게 이완기술, 심상기술(image training), 집중기술, 목표설정, 자화(self talking), 인지재구성 등의 전략과 기법이 있으나 무엇보다 선수 개인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각 선수의 심리특성과 시합내용 분석이 우선돼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격검사, 심층면담, 비디오촬영, 심박수 측정, 뇌파 측정 등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조준하고 슈팅할 때까지를 슈팅타임이라고 합니다. 그 시간이 1초도 안 걸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5초 이상 걸리는 선수도 있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바라보는 관객 눈에 빨리빨리 쏘면 왠지 더 자신감이 있어 보이고 설령 실수를 하더라도 믿음직한 반면, 슈팅타임이 길면 답답하고 불안하죠. 그러나 짧다고 반드시 좋은 건 아닙니다. 선수마다 적정 슈팅타임이 있어요. 예를 들어 박경모 선수는 5.5초로 긴 편인데 2.5초까지 줄이려고 노력했고 반면 장용호 선수나 임동현 선수는 1.5초에서 2초 사이로 빠른 편입니다. 그러나 막상 선수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10점을 쐈는지 정확히 모르고 감에 의존해 경기를 해왔습니다. 심리기술훈련은 관찰과 면담을 통해 각 선수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모두 끄집어내고, 수정할 부분을 정확히 꼬집어내는 것이죠.”(홍길동)

    “박성현 선수는 리듬을 타고 쏠 때 10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릴리즈(슈팅시점)하고 나서 심박수가 100에서 109까지 올라갔다 다시 90대 초반 혹은 80대 후반으로 내려갑니다. 이때 슈팅하면 좋은 점수가 나오죠. 이 패턴이 아주 일정합니다. 리듬을 타려면 슈팅타임을 1.2초로 유지하라고 알려줍니다. 윤미진 선수는 의외로 약간 흥분된 상태에서 좋은 점수가 나오죠. 승부를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템포가 빠른 음악을 들으며 기분을 고조시키도록 했습니다. 이성진 선수는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만큼 심박수의 기복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대신 호흡과 이완에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슈팅타임은 1.0초에도 못미칠 정도로 아주 짧은 편이죠. 이런 점을 감안해 감독께서 전략을 잘 세우셨어요. 드로잉 전에 깊은 호흡으로 이완한 뒤 일단 사선(射線)에 들어가면 빨리 쏘고 나오는 전략이었죠.”(임태희)

    심리훈련 효과 입증

    스포츠심리연구센터 연구진이 양궁 대표팀 선수들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5월. 이때부터 각 선수의 특성을 파악하고 모든 대회 기록을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가 9월부터 본격적인 심리기술훈련에 돌입했다.

    당시 대표팀은 남녀 각각 8명으로 실업팀 소속 9명, 대학팀 2명, 고교생 5명으로 구성됐다. 16명의 실력은 이미 세계 최강. 2003년 7월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는 개인전 금(윤미진), 은(박성현), 동(이현정)메달과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 남자는 은(임동현)과 단체전 금메달(장용호, 박경모, 임동현)을 따서 각각 3장의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했다. 한 달 후 열린 프레올림픽에서는 남녀 모두 개인전, 단체전 금메달을 휩쓸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듬해 열릴 아테네올림픽 참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다시 원점에서 출발해 ‘죽음의 라운드’라 불리는 4차례 국가대표 선발전과 3차례 평가전을 통과해야 한다. 서바이벌게임의 마지막 생존자는 남녀 각 3명. 올림픽이 열리기 3개월 전에 최종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선수들은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피 말리는 긴장상태가 수개월 지속되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는 선수도 나왔다.

    “평가전에서 특히 이성진 선수가 심리훈련 효과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 선수는 불안수준이 높은 편이어서 슈팅타임이 길어지면 실수할 확률이 높아요. 선발전에서 7위까지 떨어져 대표팀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3차전부터 슈팅 스타일을 속전형으로 바꿔 결국 3위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죠.”(임태희)

    올림픽 6연패 神弓들이 수험생·취업 준비생에게 전하는 ‘특수 심리훈련법’

    지난 1년 동안 양궁대표팀 심리기술훈련 프로젝트를 담당한 서울대 스포츠심리연구센터 정청희 교수(가운데)와 홍길동 수석연구원(왼쪽), 임태희 연구원.

    이들이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나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포츠심리연구센터 연구원들의 스트레스도 이에 못지않았다. 만약 지난해부터 이 훈련을 받아온 16명의 대표선수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모두 떨어져 1명도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면 심리훈련은 무용지물이 된다. 다행히 16명 가운데 6명이 무난히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금메달 3개와 은메달 1개로 훈련효과를 입증했다.

    올해초 대표팀의 말레이시아 전지훈련에 동행했던 연구진은 지난 2월 ‘개인별 심리기술훈련서’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파악된 선수들의 성격특성과 자신감 수준, 경기중 심박수와 뇌파, 면담결과, 개인별 심리훈련 프로그램 내용이 총망라돼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루틴(routine)’이라는 항목. 루틴이란 활을 쏘기 위한 준비자세에서 수행까지 일관된 절차를 가리키는 말로 행동절차와 인지절차로 나뉜다.

    한마디로 선수가 만점을 기록한 최적의 상황(행동과 인지)을 정확히 분석해내 연습 때나 실전에서나 똑같은 행동과 마음자세로 활을 쏘도록 만드는 일종의 시나리오다.

    평소 3시 방향에서 바람이 불면 9시 방향으로 8점에 오(誤)조준하는 훈련을 하다가 정작 시합 때 당황해서 7점 또는 9점으로 오조준한다면 행동의 일관성이 깨지고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또 연습 때는 활을 든 상태에서 왼팔 어깨를 의식하며 힘점을 지키면서 ‘슈팅’하는 루틴을 사용하던 선수가 잡념으로 자신의 루틴을 잊게 되면 슈팅 타이밍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양궁 선수가 긴장, 불안감을 잊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행동적 루틴이 표적의 노란 부분 응시하기, 화살을 회수할 때 라인만 보고 걷기, 바람에 살랑거리는 깃발 응시하기 등이다.

    양궁선수들은 ‘생각하는 기계’

    정청희 교수는 루틴이란 잡념이 생기는 것을 막고 실수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1~2초의 슈팅 순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대개는 ‘이번 발을 놓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자세가 흔들리는데 이를 막기 위해 ‘스톱 싱킹(stop thinking)’ 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불가능해요. 그래서 생각을 멈추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생각만 하도록 만드는 것이 인지적 루틴입니다. 인간의 뇌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7±2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화살을 쏘는 데 필요한 요소로 7가지를 꽉 채우면 잡념이 끼여들 틈이 없게 되죠.”(정청희)

    홍 박사는 루틴을 완벽히 체화한 선수를 ‘생각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몇 달의 면담과 관찰을 통해 만들어낸 루틴을 완벽히 자기 것으로 만든 선수는 ‘생각하는 기계’입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죠. 이번 올림픽에서 이성진 선수가 활을 쏘고 난 뒤 돌아서서 중얼중얼하다가 ‘파이팅’ 하고 외치는 것을 자주 보셨을 텐데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미 약속된 ‘루틴’대로 한 거죠.”

    경기장에 도착해서 잠시 대기하다 신호에 따라 사선으로 걸어들어가 화살을 쏘는 동작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 ‘루틴 전략’은 선수마다 섬세한 차이가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박경모 선수가 구사한 루틴 전략을 살펴보자.

    경기장에 도착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들으며 심리적 안정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연습할 때는 ‘오늘 나의 슈팅 감각은 최고다. 나의 슈팅을 믿는다’고 자기암시를 한다. 경기시작 5분 전. 방송음이 들리면 자신의 슈팅 큐(아래 설명)를 2회 인식하고 신체적 이완훈련과 심호흡을 해서 불안감을 해소한다. 경기시작 1분 전. 장비를 확인하고 서 있는 위치에서 과녁을 보며 마음 속의 화살을 쏜다. 사선으로 걸어들어가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이완을 하는데 첫 엔드 첫 발은 더 크게 한다. 슈팅 중 자신의 슈팅 단서에 집중하여 자신 있게 쏘되 2.5초 이내를 유지한다.

    사선에서 돌아올 때 걸음걸이와 호흡조절(하나, 둘, 셋, 넷 들이마시고 다섯에서 열둘에 내쉬기 2~3회)을 한다. 특히 1, 2엔드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호흡조절을 잘 하고 다시 과녁으로 갈 때는 머릿속에 이미 날 떠나간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련을 두지 말라는 말과 ‘좋아하는 음악 한 소절’을 떠올린다.

    여기서 슈팅 큐(단서)란 화살을 쏠 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자신만이 유지하는 일종의 ‘속자세’를 뜻한다. 예를 들어 화살을 끼우고 활을 들어올려 과녁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힘점 지켜주기’ ‘앞팔과 뒤팔 균형 유지’ ‘앞팔 쭉쭉 뻗어주기’와 같은 슈팅 큐를 활용한다. 임태희 연구원은 속자세를 가장 잘 활용하는 선수로 윤미진을 꼽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성현 선수는 과녁만 바라보고 무념상태에서 쏘는 스타일로 우뇌가 활성화되어 있고, 윤미진 선수는 조준하면서 ‘앞팔 지켜주고 어깨힘 잡고 쏘자, 쏘자’ 하는 식으로 계속 생각하면서 고쳐나가는 좌뇌 활성형입니다. 외국의 선행연구를 보면 우뇌 알파파가 정서적 긍정효과가 있어 운동선수에게 적합하다고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량을 지닌 윤 선수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성진 선수는 좌우뇌가 거의 비슷한 활성패턴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윤 선수가 사선에 나가기 직전까지 현재 기분과 상태, 사선에 가서 할 일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하면서 자신의 루틴을 점검한다는 겁니다. 윤 선수는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이렇게 훈련했다고 하는데 서예가가 글씨를 쓰면서 감정조절을 하는 것과 비슷해요. 사소한 것 같지만 이완과 집중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덕분에 다른 선수들도 언제부턴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런 철저한 자기관리가 한국 양궁의 성공비결이라고 봐요.”

    또 ‘나의 슈팅을 믿는다’처럼 선수가 머릿속으로 떠올리거나 혹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자화(self talk)라고 하는데, 이런 자화를 통해 경기중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이 짜증, 오늘 시합 종쳤다’ ‘미치겠다. 언제 끝나나’ ‘재수 없네’ 등등)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회복한다.

    자화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인생목표처럼 늘 품고 다니는 자화가 있는가 하면 시합 직전, 강자를 만났을 때, 약자를 만났을 때, 막상막하일 때, 종료직전 접전이 벌어졌을 때, 지고 있을 때, 시합종료 직전 그리고 시합에 이겼을 때 등과 같이 상황별로 꺼내 쓰는 자화가 있다.

    예를 들어 장용호 선수의 자화는 ‘나는 세계 최고의 궁사,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렸다!’ ‘강한 자신감과 차분한 경기 운영이 바로 금이다’였다. 이밖에도 경기장에서 활용하는 장 선수의 자화카드는 다양하다. 경기 시작 1분 전 머릿속으로 첫 엔드 첫 발의 슈팅 감각을 느끼며 생각한다. ‘그래! 멋지게 첫 발 들어간다, 오늘 게임 문제없어.’ 첫 엔드를 마치면서 ‘그래, 됐어!’ 사선에서 돌아올 때는 ‘감각 좋은데.’

    나비야, 나비야…

    홍 박사가 임동현 선수에게 준 이미지는 나비. 어린 나이에 대표팀에 선발되어 느끼는 부담을 줄여주고 자연스럽고 가볍게 자기 스타일대로 경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임 선수의 자화는 ‘흘러가는 내 몸의 느낌대로 쏘자!’ 만약 실전에서 첫 발이 잘 맞지 않았을 때는 ‘돌’을 떠올리기로 약속했다. 돌이란 항상 처음 위치에 있는 ‘나’의 이미지로 여유와 편안함을 상징했다. 실수발이 나오면 심호흡을 한 후 ‘잠시 흥분한 거야. 돌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나를 편안하게 하자’고 중얼거리며 다음 발을 준비했다.

    아테네올림픽 남자단체 결승전에서 임 선수는 1엔드 마지막에 7점을 쏘고 ‘나 때문에 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점수는 신경 쓰지 마. 마음 편하게 쏘면 우승이야”라는 선배들과 코칭 스태프의 격려에 평정심을 되찾고 2엔드에서 10-9-10을 쏘아 승리를 굳혔다. 홍 박사는 “임 선수는 실수를 하면 조급해지는 경향이 있어 이완훈련을 많이 한 것이 7점을 10점으로 만회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여자 선수들은 훈련중 자화카드를 만들어 전통(箭筒)에 매달고 다니면서 수시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성진 선수는 올림픽 티켓을 딴 후 짬짬이 치열했던 대표팀 선발전을 회상했다. 노란 과녁 한가운데 박힌 화살.

    ‘그날 시합 전에 느꼈던 자신감….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말레이시아 전지훈련 리그전에서도 1등을 했지. 그때도 자신감이 넘쳤어. 집중도 잘 되고 마음도 편하고. 그 느낌을 살려보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자신 있게 쏴라.’

    윤미진 선수의 심상훈련은 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시드니올림픽 2관왕이 되는 순간, 나는 얼마나 게임을 즐겼던가. 전광판에 불이 켜지고 관중들의 호응 속에 나는 쏜다.’

    이것은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하는 심상훈련 기법 중 하나다. 심상훈련에는 자신이 활을 들고 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활의 느낌, 드로잉 때의 팽팽한 긴장을 실제 느껴보는 내적심상과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외적심상이 있는데 외적심상은 경기가 끝난 후 녹화테이프를 보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최고 기록을 낸 경기 상황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감각을 체화하는 것이다.

    내적심상을 하다 보면 실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간다.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그러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고 화살을 끼운다. 드로잉해서 늘어나는 포인트에 힘을 느끼며 슈팅. 골드다. 연결이 아주 부드럽다. 다시 슈팅, 역시 골드다.’

    이렇게 모든 감각을 유지하면서 경기 상황을 재현한다. 때로는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자신의 자세를 냉정하게 관찰하기도 한다. 홍 박사는 “심상훈련을 할 때 상대를 잘 아는 선수, 처음 맞붙은 선수, 기량이 우수한 선수, 기량이 낮은 선수 등 다양하게 설정해서 연습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끼리 맞붙는 상황을 간과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자 개인전에서 노메달에 그쳐 안타까웠는데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누군가 16강에서 이기더라도 8강에서 다시 우리끼리 붙어야 한다는 데 심리적 부담이 컸다고 하더군요. 8강에서 이기면 또 4강에서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나도 모르게 ‘그 상황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연구진은 올림픽을 앞두고 심상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선수별로 가상체험 동영상을 제작했다. 7분2초짜리 이 동영상에는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으로 이동하면서 선수들이 타고 가는 버스 내부, 길, 경기장 도착 후 마지막 연습실이 나오고 경기장으로 걸어나가는 긴 터널 끝에 환하게 출구가 보인다. 선수들은 이 길을 걸을 때 가장 긴장한다. 박경모 선수용 프로그램은 이 대목에서 “여유 있게 하자”는 말이 흘러나온다. 가득 찬 관객들의 환호, 응원 박수가 이어지고 사선에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자신 있게 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12발은 모두 과녁 한복판을 뚫는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홍 박사는 “원래 선수별 특성에 따라 배경음악도 바꿔 넣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각자에게 필요한 자화 부분만 강조했다”고 아쉬움을 전하면서 “아이글래시즈라는 첨단 장비를 활용해 선수들이 수시로 가상훈련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20년 동안 올림픽 무대를 석권한 한국 양궁의 성공비결은 스포츠 과학의 승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청희 교수는 역대 올림픽 메달 순위는 곧 스포츠 과학이론을 얼마나 현장에 접목시켰느냐로 판가름났다면서 이제 종목별 멘탈 트레이너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양궁대표팀 정도면 세계 어느 대회에서라도 금메달을 딸 ‘실력’인데 이번 올림픽 남자 개인전은 1점차로 줄줄이 떨어졌어요. 특히 1점차 패배는 실력 탓만 하기 어렵죠. 종합성적에서도 금메달 9개, 은메달 12개였는데 금과 은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여기서도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합니다. 심리기술이란 생각과 감정의 조절을 통해 스포츠 상황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경기력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전략과 기법입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은 중국, 호주, 대만의 거센 추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중국은 선진국의 스포츠심리 이론을 엄청나게 빨리 받아들이고 있어 상당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실전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심리기술 훈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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