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한국 골퍼의 품격’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 글|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2012-08-23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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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41년 역사의 남서울CC(파72·6368m). 나무들이 각 홀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어 옆 홀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자연의 품속에 안긴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골퍼들이 새벽길을 내달리며 골프장을 찾는 것도 이런 느낌에 중독되기 때문일까.

    그런 첫인상과 달리 티 박스에 서니 만만한 홀이 거의 없다. 드라이버 샷이 떨어지는 지점이나 그린 주변엔 예외 없이 벙커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도전에 성공하면 그만큼 이점을 갖게 되는 ‘리스크 앤 리워드(risk and reward)’개념이 적용된 코스다. 그린은 저마다 변화 많고 경사져 곧잘 골퍼를 ‘멘붕(멘탈 붕괴)’ 상태로 내몬다.

    “47년 구력, 리드미컬한 스윙”

    16번 홀, 내리막 476m 파5. 허광수(66)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이 티오프 자세를 가다듬을 때 모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가 공중에 팔을 한 번 휘저어 모기를 쫓은 뒤 다시 어드레스 자세를 취했을 때 살짝 불안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쨌든 그는 리드미컬한 스윙으로 공을 강하게 타격했고, 약간 슬라이스가 났다. 캐디가 “가서 확인해봐야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허 회장은 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카트를 타고 이동했는데 볼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2, 3분을 찾았을까. 카트 도로 옆 높게 자란 러프에 떨어진 공을 캐디가 찾아냈다. 공이 도로를 탔는지 300m는 족히 굴러간 것 같았다. 오히려 행운의 샷이었다.



    세컨드 샷은 그린 오른쪽 샌드 벙커의 경계에 떨어졌다가 좀 더 굴러 그린에 안착했다. 홀컵에 4m 정도 붙이는 실력이 결코 행운만은 아닌 것 같다. 이글에 대한 기대감이 동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먼저 부풀어 올랐다.

    “최근 몇 년 사이 이글을 기록하지 못했는데, 한번 해볼게요.”

    그는 특유의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그린의 기울기를 확인하고 퍼팅 어드레스를 취했다. 그는 독특한 퍼팅 습관을 갖고 있다. 먼저 퍼터를 공 뒤쪽에 두고 홀컵을 향해 방향을 잡는다. 그다음 반드시 퍼터를 홀컵 방향으로 공 앞쪽에 두고 거리와 방향을 측정한다. 허 회장의 퍼팅은 거의 정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은 홀컵을 핥듯이 천천히 반 바퀴 휘돈 다음 밖으로 흘러나왔다. 동반자들 사이에서‘아~’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글은 놓쳤지만 깔끔한 버디. 그다음 그의 말이 더 인상 깊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요. 그런데 실수했어도 버디잖아요. 아마추어한테 버디가 어딥니까?”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허광수 회장은 어드레스 자세에서 왼발을 과도하게 연다. 나이가 들수록 비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스스로 고안해낸 방식이다. 그는 오픈 자세에서 스트롱 그립에다 오른팔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드로를 막고 비거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8월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남서울CC에서 허 회장을 포함해 3명의 동반자가 라운드를 같이 했다. 허 회장은 평생 운동을 좋아해선지 동년배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한때 드라이버 거리가 275야드(252m)까지 나갈 정도로 장타자였던 그는 66세인 지금도 드라이버 샷으로 250야드(229m)까지 내보낼 수 있다. 47년 구력의 힘이다. 라운딩 전 평균 스코어를 묻자 “글쎄요, 보통 75±3 정도.” 말대로 그는 정확히 77타를 기록했다.

    2번 홀에서 허 회장의 세컨드 샷이 OB(아웃 오브 바운드)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감정에 별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위기가 올 때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누구든지 한두 번은 실수하는데 이때 화를 내면 스스로에게 지는 겁니다. 나만 실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분명히 실수해요.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해봐야 안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허 회장은 역도와 아이스하키로 다진 몸을 갖고 있다. 그를 골프에 입문시킨 부친 허정구 전 삼양통상 회장은 “골프에선 강한 것보다 부드러움이 이긴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허 회장은 강인함을 우선시했다. 근육을 키우고, 체력단련을 열심히 해서 감각을 기르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17번 홀 페어웨이를 걸어가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하신 말씀처럼 요즘엔 부드러움이 이긴다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이 말을 한 뒤 그는 벙커 샷으로 공을 깃대의 50cm 가까이 붙였다. ‘오늘의 샷’이었다.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골프 실력엔 공짜 점심 없어요”

    허 회장은 초등학교 때 골프를 처음 접했다. 골프를 무척 좋아했던 부친 허정구 회장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골프와 친해졌다. 그러면서 골프에 대한 믿음과 감각 같은 것이 생겼다고 허 회장은 말한다. 허정구 회장은 72세 때 에이지 슈팅(자신의 나이와 같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을 할 정도로 실력파였다.

    “중학교 때는 아이스하키를 본격적으로 배웠고, 경기고에 입학해서는 대표선수가 됐어요. 스틱으로 퍽을 때리는 아이스하키 동작은 허리를 이용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골프를 본격적으로 익힐 때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데 고려대 상학과 1학년 때 아이스하키 연습을 하다가 얼굴을 크게 다쳐 운동 종목을 골프로 바꿨어요.”

    이후 그는 골프계의 신성(新星)이었다. 21세 때인 1967년 아시아태평양골프클럽의 노무라컵 3등, 1969년 한국오픈의 아마추어 부문 우승, 1974년 아마추어선수권대회 우승, 1982년 동해오픈 아마추어부문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65타를 세 번 기록했다. 그가 프로골퍼로 전향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골프를 너무 늦게 배웠다는 것.

    사업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 MBA 과정에 진학했고, 졸업 뒤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GS그룹 대주주이면서 삼양인터내셔날을 설립해 나이키 제품 유통, 석유화학제품 생산, 핑(Ping) 골프채 수입판매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사람들을 사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도 골프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됐고, 많은 교훈을 줬다.

    “골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강인함을 요구합니다. 실제 골프 라운드를 할 때도 깨닫게 되는데,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요. 골프세계에선 미국 속담처럼 공짜 점심이 없어요(There is no free lunch).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만, 참고 견뎌나가면 나중에는 웃을 수 있습니다.”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라운드 중에 허 회장은 그린에 생긴 볼 마크를 수리하거나, 페어웨이의 디벗(divot·뜯겨진 잔디) 자국을 메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골프계의 IOC 위원’격인 영국 왕립골프협회(R·A) 회원답게 에티켓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의 부친도 R·A 회원이었다. 현재 한국인 회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허 회장 둘뿐이다.

    “골프 예절은 선진 골프문화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예절을 무시하고 이기는 데만 집착하는 건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과 같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예절을 지키는 문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허 회장은 현재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APG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 대한골프협회(KGA) 회장도 맡고 있다. 영어실력까지 겸비해 해외 협회에서도 인기가 높다. KGA 회장으로서 요즘 골프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골프 위상이 매우 높아졌어요. 여성은 최고 수준이지만 남자는 조금 처집니다. 회장으로서 훌륭한 선수들을 기르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또 골프가 더 이상 사치성 스포츠로 여겨지지 않도록 불합리한 골프 제도와 문화를 바꿔나가려 합니다. 이제 중산층도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줘야 해요.”

    “골프가 곧 내 인생입니다”
    ▲허광수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클럽은 샌드웨지다. 한때 그는 샌드웨지가 1년에 하나씩 닳을 정도로 벙커 탈출 연습을 많이 했다. 그린에 직접 올리지 못할바에야 러프보다 벙커가 낫지 않으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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