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푸른 초원을 향해 달린다/ 아침 이슬 내린 잔디를 밟고/ 십팔 홀이라는 멀고 먼 여행을 떠난다/ 나의 욕망과 자유와 승리를 위하여/ 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나는 새가 된다….’
5월 29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울·한양컨트리클럽. 김영진(69) 시인은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기자를 만나자마자 자작시 ‘흰 새는 초원 위에서 난다’를 읊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모드’를 급전환해서 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짐작했겠지만 ‘흰 새’는 골프공이고, ‘초원’은 페어웨이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미래를 꿈꾸던 경북 예천의 시골마을 초원과 골프장의 푸른 페어웨이가 겹치고, 신산한 삶의 여정과 그것의 축소판인 골프 라운드의 은유가 교차하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골프에 ‘미친(狂)’ 사람이야 차고 넘치지만, 골프를 철학적으로 궁구해서 골프 시(詩)에 ‘미친(及)’ 이는 드물다.
올드코스 12번홀 파5. 오른쪽으로 굽은 도그레그 홀이다(위). 그린의 깃발에 이 골프장의 역사적 의미가 담긴 ‘192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한국잡지협회장을 지낸 김영진 시인은 성경·찬송 전문출판사 성서원 회장이자 어린이 잡지 ‘새벗’ 발행인이기도 하다. 한국문인협회 동포문학상(1994), 한국수필문학상(1997), 한국문학예술대상(2004),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골프 실력은 한때 출판계 1인자였다. 칠순에 다다른 지금도 핸디캡 3의 고수다.
서울·한양CC는 한국 골프의 초창기 역사와 함께했다. 그린에 꽂힌 깃발에는 ‘192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1927년은 영친왕이 서울 군자리 코스를 조성하도록 거금을 하사한 해다. 서울·한양CC는 1921년 효창원 코스에 만들어진 경성골프구락부의 후신인 서울CC와, 1964년 지금의 원당 코스에 들어선 한양CC가 합쳐져 탄생했다.
이곳의 구코스는 서삼릉(정릉, 효릉, 예릉) 자락의 자연림 안에 펼쳐져 있다. 홀 사이엔 수령 1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노송들이 들어차 그 기운이 특별하다. 가히 ‘왕가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할까. 페어웨이의 굴곡이 심하고 그린이 잘 관리돼 매끄러운 편이라 쉽지 않은 코스이지만,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전장이 비교적 짧아 특히 여성 및 시니어 골퍼들이 좋아한다. 신코스는 전장이 길고 골프대회가 자주 열린다.
구코스 첫 홀 파5 444m. 새벽까지 장맛비가 쏟아졌는데도 배수가 잘 되는지 코스엔 빗물이 고인 흔적이 거의 없다. 김 시인은 드라이브샷으로 공을 230m쯤 보냈고, 안정적인 아이언샷으로 버디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퍼팅한 공이 홀 컵을 약간 벗어나 파를 기록했다.
“신기한 건, 요즘 나이 칠십이 다 됐는데 비거리는 오히려 더 늘어난다는 겁니다.”
허를 찔린 느낌이다. 60이 넘으면 해마다 3야드씩 비거리가 줄어든다고도 하는데 어떤 비결이 있는 걸까.
“나이 들수록 비거리 늘어”
“힘을 빼고 그립을 고쳐 잡으니 헤드 스피드가 더 빨라져요. 클럽도 가벼운 것을 씁니다. 70대가 되면 여성용이나 시니어용 클럽을 사용하는 게 좋아요. 그런데 한국 골퍼들은 노인이 돼도 남자의 자존심 때문인지 가벼운 클럽을 잘 사용하지 않지요.”
그의 스윙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핵심은 기마 자세였다. 요즘 선호되는 오각형 어드레스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는 백스윙 때 체중을 오른쪽 다리에 충분히 옮겨서 오른쪽 무릎이 기둥이 되도록 했다. 백스윙 톱(top)에서는 오른쪽으로 옮겨온 체중을 지탱하기 위해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단단해지는 긴장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스윙 때 왼팔을 곧게 뻗어야 강력한 스윙이 나오지만, 팔이 좀 굽는다 해도 백스윙 때 팔과 손과 어깨로 만든 삼각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단다.
“공을 때리는 순간 회초리로 때리듯 휙 하고 휘둘러요. 치고나갈 때까지 하체는 되도록 움직이지 말아야 공이 똑바로 나갑니다. 골프 교본에는 하체의 중심을 잡고 상체로 쳐야 한다고 나오지만 나이가 들면 하체로 이끄는 것도 필요합니다.”
김 시인은 골프 잡지에 골프 칼럼을 연재했을 정도로 이론에도 밝다. 이론과 실기에 아무리 밝아도 어렵기만한 게 골프다. 티샷을 잘 해도 세컨드샷이 조금 빗나가면 러프나 벙커에 빠지기도 한다.
“18홀 하나하나가 다 한 편의 드라마죠. 잘 되는 홀에선 깔끔한 버디도 기록하지만 어떤 홀에선 클럽을 집어던지고 상소리를 내뱉기도 해요. 골프장의 자연은 또 얼마나 다채로운가요. 계절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날씨도 같은 날이 하루도 없어요. 시가 안 나올 수가 없답니다.”
골프 시는 일종의 목적시다. 시상이 떠올라 시를 쓰기도 하지만 전국 클럽대회나 골프장의 요청을 받고 쓰기도 한다. 뉴코리아CC, 렉스필드CC 등은 그의 시를 새긴 시비를 코스 안에 세워놓았다. 그는 뉴코리아CC의 각 홀을 주제로 연작시를 쓰기도 했다.
“혼자만의 감흥에 빠져 흥분해서도 안 되고, 여러 사람이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려면 완성하기가 무척 힘들어요. 그래도 잘 풀려서 시 한 수 짓고 나면 암이 낫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하하.”
김 시인은 1965년 스무 살 때 첫 시집 ‘초원의 꿈을 그대들에게’를 펴낸 뒤 지금까지 5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안동사범병설중, 경안고, 건국대 국문과를 거치며 문학수업을 했고, 황금찬 시인의 추천으로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이 돼 여러 시인과 교유하며 시를 썼다.
불같은 성미, 강렬한 삶
대학 졸업 뒤 동양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다. 그는 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어느 출판사 사장이 그에게 “당신은 정치나 사업에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시 쓰지 말고 그쪽으로 나서보라”고 권유했다. 말이 씨가 됐는지 28세 때인 1972년 그는 성서원을 차리면서 사업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때 전국에 500명의 직원을 둘 만큼 출판사 규모를 키웠다. 최근엔 스마트폰 때문에 매출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가족의 크고 작은 일을 진솔하게 기록한 758쪽짜리 화보집 ‘진순가족대소사’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김영진은 불같은 성미로 강렬한 삶을 엮어나갔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의식 속에 들어야 흡족했다. 회사 경영 또한 가장 확실한 신념으로 운영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다. 취할 것이 있으면 투쟁을 해서라도 기어이 얻어내는 적극적인 태도로 나갔다. 그것이 오늘의 성서원을 이룩한 경영 철학이었다.’
그가 골프를 만난 건 우연이다. 사업을 시작하고 술, 담배를 많이 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다가 십이지장궤양으로 입원했을 때 의사가 골프를 권했다. 키도 몸집도 크진 않지만 유연성이 좋아 금세 빠져들었다. 1992~1997년 뉴코리아CC 대표선수를 지냈고, 1996년엔 69타로 뉴코리아CC 챔피언에 올랐다. 2003년엔 제37회 한국골프협회 주관 전국 클럽대항전에 뉴코리아CC 경기위원장으로 대표선수를 인솔해 출전했는데 종합·개인·임원 우승으로 3관왕이 됐다.
“20년을 넘게 쳐도 라운드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입니다. 그러니 늘 꾸준히 노력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요즘도 잠들기 전에 퍼팅 연습을 20개 이상 합니다.”
김영진 시인이 서울 성북동 자택 정원에서 칩샷 연습을 하고 있다.
의사가 권한 골프
전반 6번 홀(16번홀 파4)에 서자 다시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기가 밀려들었다. 페어웨이 너머로 서삼릉이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IP(Intersection Point·세컨드샷 하기 좋은 지점) 근처에 감정가가 7억3000만 원이라는 반송(盤松)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자도 드라이버샷을 멀리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날렸지만 세컨드샷이 생크가 나고 말았다. 김 시인처럼 연습 스윙 없이 어드레스 상태에서 곧장 스윙한 탓이다.
“연습 스윙을 하지 않고 바로 치니까 사람들이 저를 특이하게 봅니다. 그러나 연습 스윙을 하지 않는 대신 스윙하기 전에 어디로 공을 보낼 것인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후 어드레스를 잡으면 배짱 있게 휘둘러요. 시원시원하게 움직이는 게 남 보기에도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의 퍼팅은 신중하고 정교했다. 퍼터로 가볍게 공을 맞추는 작은 움직임도 시인의 눈에는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이미 내가 기록해 온 숫자들은 의미가 없다/ 오직 지금의 퍼팅이/ 빗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 남은 생애를 퍼팅하듯이’(자작시 ‘퍼팅’ 중에서)
후반 3번홀 파3(158m). 김 시인은 1989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다. 공이 그린을 구르지도 않고 곧장 홀컵으로 빨려들어가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했다. 홀인원은 생애 6번 기록했다.
“30년 전보다 요즘 건강이 더 좋아요. 밤 10시까지 작업해도 아침에 7시40분이면 출근합니다. 그게 다 골프를 열심히 한 덕분이라고 봐요. 제 인생에 골프가 없었다면 제가 암이나 우울증 같은 병에 걸려 고생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라운드를 하면 이렇게 5시간씩 풀밭을 걷고, 몸을 움직이며 성취감도 갖게 되니 얼마나 좋아요. 골프는 정말 예찬할 만합니다.”
김 시인의 마음은 오늘도 그린을 향한다. ‘희망의 깃발이/ 그곳에 꽂혀 있었기에/ 그린은 언제나 내 젊은 날을 부르고/ 나는 오늘도 꿈과 사랑을/ 힘차게 스윙한다’(자작시 ‘그린의 깃발이 나를 부른다’ 중에서)
김영진 시인의 서재. 골프 시가 새겨진 패를 들고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