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 대표는 “골프 코스는 후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문화유산”이라는 자부심을 지녔다.
오감이 살랑거리고, 육감마저 신이 내린 듯 명료해지는 골프장이 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른바 ‘스타급’ 골프장에서 그런 느낌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좋은 골프장을 가름하는 요소는 뭘까. ‘세계 100대 골프코스’ 운운하는 심사를 맡은 이들은 흔히 샷밸류(shot value), 코스 관리 상태, 심미성, 리듬감, 기억성, 종업원의 친절 및 전문성 등을 따지는데, 주말 골퍼가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한국의 내로라하는 스타급 골프장을 다수 설계한 이에게서 좋은 코스 고르는 법을 들었다. 송호(56) 송호골프디자인 대표는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2012~2013 베스트 뉴코스 10’ 가운데 드비치 등 세 곳을 설계했다. 23년간 63개의 코스를 설계한 그는 “골프장에선 연애할 때 마음으로 네 가지를 보라”고 조언했다.
“첫째, 좋은 코스란 눈으로 봐서 아름다워야 해요. 마치 연애할 때처럼 첫눈에 반하는 끌림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플레이를 재밌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이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핸디캡이 13개 안팎쯤에 이를 때 그 재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샷밸류입니다. 골퍼의 샷이 좋고 나쁨에 따라 위험과 보상이 정확하게 주어지도록 코스가 설계돼야 해요. 넷째, 18개 홀이 모두 달라야 라운드하는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으로 코스에 가요. 좋은 코스에 가면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해집니다.”
7월 3일 강원 춘천시 신동면 남춘천 컨트리클럽(6813m). 이곳도 송 대표가 설계한 곳이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코스를 봤다. 우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현재는 18홀 코스이지만 27홀 코스 설계도 가능한 곳이었다. “드라이브는 편하게, 페어웨이는 넓게”라는 송 대표의 철학 때문에 27홀짜리가 18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빅토리 코스 9홀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다채로웠고, 챌린지 코스 9홀은 거친 산세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호연지기를 느끼게 했다.
송 대표는 “남춘천CC는 ‘10대 뉴코스’에 오른 골프장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녔지만 산악지형이라는 점 때문에 선정되지 못했다”며 “위험과 보상(risk and reward) 차원에서, 어려운 요소들을 이기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고수들이 선호하는 골프장이다”고 귀띔했다.
골프는 상상력으로
과연 기자는 이 코스와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먼저 마음속으로 골프장에 말을 건넸다. 챌린지코스 1번홀 519m(화이트 티 기준) 파5. 페어웨이 폭이 최장 93m에 달했다. 기자의 드라이브는 호쾌했지만, 세컨드 샷이 러프에 빠지고 서드 샷도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시작부터 골프장은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듯했다.
송 대표의 스윙은 루크 도널드의 그것처럼 ‘예쁘고’ 리드미컬했다. 크지 않은 체구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은 외모를 지닌 그는 힘들이지 않고 툭툭 공을 잘도 쳤다. 평균 드라이브 거리는 220~230m. 자기 손으로 설계했으니 코스 지형을 속속들이 알고 있겠지만 송 대표는 벙커로 공을 보냈다. 카메라가 신경을 건드렸을까. 송 대표는 퍼팅에서도 실수를 해 보기를 기록했다. 하지만 금방 회복했다. 2번홀 파4(356m)에서 곧장 버디를 낚았다. 세컨드 샷이 깃대에 붙어 이글을 할 뻔했다.
“그립에 힘을 빼고, 임팩트 때 왼쪽 눈으로 공의 오른쪽 끝을 보세요.”
일관성 있는 샷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머지는 쇼트게임에 달렸단다. 연습장에서 드라이버와 아이언 샷만 죽어라 연습하는 아마추어가 새겨들을 말이다.
“골프는 힘이나 비거리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 하는 운동입니다. 프로들도 그린 주변에서의 기술과 퍼팅력에 따라 실력이 판가름나요. 쇼트게임을 잘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해요.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처럼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꾸 길러야 해요.”
“골프장은 문화유산”
골프 설계를 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로 복무한 게 계기가 됐다. 제대 후 대림산업에 근무하면서 비행장 설계 프로젝트를 맡았다. 군에서 공항 설계를 했던 경험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마침 그 비행장이 골프장과 연결된다는 걸 알고 골프장 설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군에서 상사로 모시던 이가 운영하던 골프장 설계 회사에 합류한 것이 34세 때.
“송추CC를 처음 설계했어요. 그때 제게 골프장을 설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감과 통찰력, 상상력 같은 게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골프장 디자이너는 90만㎡의 드넓은 땅 위에 그림을 그립니다. 토목은 말할 것도 없고 조경과 미학까지 알아야 해요.”
코스 설계에 발을 들인 뒤에도 그는 골프를 칠 줄 몰랐다. 골프를 모르면 제대로 된 설계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제야 골프를 시작했다. 처음 1년 동안은 연습장에만 나갔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연습했다. 1992년 첫 라운드에서 130타를 쳤다. 그 뒤 5개월 만에 88타를 쳤고, 1994년 경기 용인 레이크힐스에서 79타를 쳐 싱글패를 받았다.
송호 대표가 설계한 곤지암CC(왼쪽)와 드비치CC.
송 대표의 고집은 골프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골프장 사장이 아무리 사정해도 자신의 철학에 맞지 않으면 애초 설계한 내용을 웬만해선 바꾸지 않는다. 최근엔 송 대표에게 코스 설계를 의뢰한 모 대기업이 그에게 설계 저작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창작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골프장은 제게 문화유산과 같아요. 한번 만들어놓은 코스는 대를 이어 후손들이 운동을 하게 됩니다. 나무 한 그루, 벙커 하나도 소중한 가치를 지녔어요. 열정과 영혼을 바쳐 만드는 골프장인데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다고 자존심을 통째로 넘겨줄 순 없는 거죠.”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72. 아직 홀인원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가 꼽은 가장 인상적인 라운드는 2003년 페블비치에서다. 7번홀 90m 거리의 파3,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맞서 그는 아이언 5번을 휘둘렀다. 일반적인 코스에서 그는 5번 아이언으로 170m 정도의 비거리를 내는데, 그 절반 거리에서 5번 아이언으로 풀 스윙을 했다.
“날아가던 공이 밀려서 되돌아오는 게 보일 정도로 강풍이 불었어요. 그런데 바다를 향해 클럽을 휘두르는 그 느낌이 정말 특별했습니다. 골프장에서 자연이 주는 감동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송 대표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골프를 통해서 느끼도록 코스를 설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줄 명품을 만들겠다는 송 대표의 열정과 장인정신은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명문 코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드비치(사진), 세인트포CC, 곤지암(리뉴얼·사진), 프리스틴밸리, 백암비스타(현 BA비스타), 비전힐스, 남촌, 엘리시안, 서원힐스….
송 대표의 스윙은 루크 도널드처럼 ‘예쁘고’ 리드미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