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으로 남한의 최전방인 경기 파주시는 벚꽃 세계에선 남한의 최후방이다. 서울에서는 이미 벚꽃을 보기 힘들어진 5월 3일, 파주시 광탄면 서서울컨트리클럽은 벚꽃이 절정이었다. 후반 6번홀 티잉 그라운드의 다섯 그루 왕벚나무에선 벚꽃이 눈처럼 휘날렸다. 화사한 꽃기운으로 가득한 라운드를 김재은(37) KLPGA 프로와 함께 했다.
김재은 프로는 투어(프로 대회)에선 수년 전 은퇴했지만 방송진행자, 대학과 기업 강의 등으로 제2의 골프 인생을 보내고 있다. 스포츠심리학 박사인 김 프로는 골프 채널에서 해박한 골프 지식을 통통 튀는 말솜씨로 귀에 쏙쏙 들어오게 전달해 낯익게 여기는 이가 많다. 2005년부터 SBS 골프채널의 렉서스배 부부골프챌린지, 골프 아카데미, 시크릿 등을 진행했고, 올해 6월부터 고덕호 프로와 함께 시크릿2를 진행할 예정이다. 디지털타임스 골프다이제스트 골프 포 우먼 등에 골프 레슨 기사를 연재했으며, 시립대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서서울CC(파72, 18홀)는 ‘유리알 그린’으로 유명하다. 잘 관리된 그린에서 퍼팅 ‘손맛’을 느껴보려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린은 벤트그래스, 티와 페어웨이는 들잔디다. 분지 105만㎡(약 32만 평)에 들어앉은 서서울CC는 웅대하고 남성적인 ‘힐(Hill)’ 코스와 아기자기하고 여성적인 ‘레이크(Lake)‘ 코스로 이뤄져 있다. 계단식으로 정렬된 홀들은 하나같이 개성적이어서 공략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레이크 코스 1번홀은 파4 363m(레귤러 티). 김 프로는 남성용인 레귤러 티에서 부드럽게 연습 스윙을 몇 번 하더니 드라이브샷으로 260m를 날렸다. 페어웨이가 내리막 경사이긴 했지만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바로 옆에서 엄청난 비거리를 보여주자 첫 홀에서부터 남성 동반자들의 기가 푹 꺾였다. 김 프로는 정교한 세컨드샷으로 버디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솥뚜껑 그린에서 공이 흘러내려 아쉽게도 파에 그쳤다.
“비거리를 만드는 요인은 팔다리의 길이, 근육의 힘, 그리고 유연성입니다. 장타를 내려면 이 가운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해요. 제가 가진 장점은 유연성밖에 없어요. 유연성은 헤드 스피드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잘 알아야 해요. 백스윙 톱에서 다운스윙으로 전환할 때 먼저 허리를 최대한 쓸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인 뒤 손을 쓰면 원심력에 의해 헤드 스피드가 자연스럽게 높아집니다. 몸이 뻣뻣한 사람들은 톱에서 멈추는 게 되지 않고, 팔과 상체의 힘으로 스윙을 하려 하니 비거리가 늘지 않아요.”
김재은 프로는 요즘 인기 골프강사로 인생 2라운드를 보내고 있다. 봄 정취 가득한 서서울CC에서.
김 프로는 요즘 인기 절정의 골프 강사다. 기업의 강의 요청도 쇄도한다. 다른 사람의 강의를 즐겨 듣던 그는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 씨의 ‘7전8기’ 강의를 듣다가 영감을 얻었다. ‘골프 강의도 홍수환 씨가 하는 인생 강의처럼 흥미롭게 한다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텐데….’ 또한 스포츠심리학을 강의에 접목해 골프의 정신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김 프로는 인기 진행자답게 말을 참 맛깔스럽게 했다. 긴장감이 조성되면 말 한마디로 풀어버렸다. 동반자가 퍼팅으로 홀컵과 1m 조금 넘는 거리까지 붙였다. 그러자 김 프로는 “우정에 금 가는 거리”라며 깔깔대더니 “파이팅!”을 외쳤다. ‘OK’(컨시드 혹은 인정의 의미)를 주기 어려우니 한 번 더 퍼팅하라는 소리다.
2번홀(파5)에서 김 프로가 세컨드샷한 볼이 페어웨이 벙커로 들어갔을 때다. 그는 서드샷으로 깔끔하게 공을 그린에 올려놓은 뒤 청산유수로 설명을 이어갔다.
“페어웨이 벙커샷은 톱볼을 얼마나 잘 치느냐에 달렸어요. 어드레스 상태에서 평상시보다 공을 몸 중심의 오른쪽에 두고 클럽도 짧게 잡습니다. 그 대신 거리가 덜 나갈 것을 예상해서 긴 클럽을 골라 4분의 3 스윙으로 치면 공 머리부터 맞혀서 멀리 보낼 수 있어요.”
김재은 프로는 퍼팅할 때 자세보다 ‘동물적 감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수한 뒤 당황하지 않으려면 결과를 예측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드레스 자세에 들어가면 확신을 갖고 그 샷에만 집중해야 해요. 평소 8번 아이언으로 공을 보낼 수 있는 거리가 남아 있을 때 앞바람이 분다고 가정해봐요. 7번 아이언을 잡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결정을 못하고 어정쩡한 마음 상태에서 샷을 하면 어김없이 실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골프에선 의외의 실수가 있으면 의외의 버디도 생겨요. 자신감이 최고의 무기입니다.”
후반 7번홀 파4, 327m. 김 프로는 호쾌한 드라이브샷에 이어 깔끔한 아이언샷으로 공을 깃대 가까이 붙였고, 안정된 퍼팅으로 버디를 낚았다. 기자가 먼 거리 퍼팅을 놓치자 김 프로는 ‘동물적 감각’ 이론을 설파했다.
“특히 먼 거리 퍼팅일 경우 불편한 자세를 취하며 긴장하는 것보다 동물적 감각을 믿고 퍼팅하는 게 거리감과 정확도를 높일 수 있어요. 골프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초등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가 있는데요. 일정 기간 A집단에게는 퍼터의 원리, 자세 등을 학습시켰고, B집단에게는 아무런 설명 없이 퍼터와 공을 갖고 자유롭게 놀게 해서 두 집단을 비교했어요. 어느 쪽이 더 나았을까요? 뜻밖에도 B집단의 성공률이 더 높게 나왔어요. 쇼트 게임을 할 때는 본인이 가진 감각에 최대한 의존하는 게 좋아요.”
김 프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운영하던 서울 서초동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골프를 시작했다. 서일중·서초고를 다니며 골프 선수 생활을 했지만 특기자 전형이 아니라 수능 시험 성적으로 단국대에 진학했다. 입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홀인원을 기록해 자신감을 가졌다고 한다.
鬪 病 아버지와의 라운드
KLPGA 정회원이 된 건 석사학위 취득 뒤인 2003년으로 27세 때였다. 김 프로는 김미현, 강수현 등 동갑내기들보다 투어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2004년 탤런트 최재원 씨와 결혼해 딸 유빈 양을 낳았다. 유빈 양은 요즘 아빠와 함께 SBS ‘스타주니어 붕어빵’에 출연하고 있다.
“대학 진학 뒤 잠시 골프를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버지가 몹시 서운해 하셨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때 선택이 잘된 것 같아요. 꾸준히 공부하지 않았다면 골프 강의와 방송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골프 선수로 성공하기는 너무 힘들어요. 골프에 기울이는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면 못 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딸에겐 골프 시키지 않으려 해요(웃음).”
김 프로는 자신을 골퍼로 길러준 부모에게 무한한 사랑을 표시했다. 그가 생애 최고의 라운드로 꼽은 건 프로 대회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라운드였다. 2011년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은 뒤였다.
“의사들은 위 절제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위 없이 사는 삶이 싫다고 거부했어요. 결국 3개월마다 시술하는 방식을 택했고, 1차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였지요. 미국에 사는 오빠가 잠시 귀국하자 아버지는 아들, 딸과 골프 라운드를 하고 싶어 하셨어요. 원래 아버지는 장타자에 기술도 좋았던 분인데 그날은 비거리도 짧고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하셨죠. 너무 슬픈 라운드였지만 골프를 통해 가족이 한마음이 된 잊을 수 없는 라운드였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 즐기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김 프로는 그 마음을 다 드러내기가 쑥스러운 모양이다.
“그게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요. 저는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요. 골퍼는 추울 때는 추운대로, 비 올 때는 비 다 맞고 운동해야 하잖아요(웃음).”
김재은 프로의 스윙 동작은 물 흐르듯 유연하다. 특히 피니시 동작이 매끄럽다. 김 프로는 “임팩트 때 클럽 샤프트가 활처럼 휘기 때문에 손에서 힘을 빼야 헤드가 쭉 뻗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