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언론사 세무조사 충격속에 숨진 안경희 여사의 삶과 죽음

  • 안기석 기자

    입력2005-04-06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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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 내조만 하며 살아온 전통적인 한국 여성이 정치권력과 언론이 정면 충돌하는 상황에 속만 태우다가 동아일보 제단에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 아니냐”
    “저도 그날 저녁 8시반쯤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아내가 여동생 집에 택시를 타고 갔다는 거예요. 밤 11시가 넘어서 아내의 여동생들이 왔는데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많이 다쳐 중환자실에 있나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점심까지 먹고 가족들도 모르게 13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시작된) 지난 2월부터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어요. 연일 방송에 제 얼굴이 비치고 친구와 친지들이 국세청과 검찰에 소환당하자 더 미안한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제 대신 죽은 겁니다.”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7월16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안암병원 빈소에서 문상온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부인 안경희(安慶姬) 여사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를 침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김전대통령은 말문이 막히는 듯 “허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나라가 걱정이다”며 안여사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7월14일 타계한 고 안경희 여사는 평생을 가정과 가문에 헌신해온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이 때문에 최근 벌어진 언론사 세무조사와 검찰 고발중에 벌어진 ‘비보’는 청와대와 행정당국, 여야 정치인과 언론계 등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충격을 받았다”며 한광옥 비서실장을 통해 조의를 표했고 국세청과 검찰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여당인 민주당의 김중권 대표는 조문을 한 자리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유족을 위로했고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비보를 듣고 “가슴 아픈 마음 금할 길 없다”며 빈소를 방문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정치인과 신문 방송사의 고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치권에서는 ‘몸이 약해 최근의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거나 ‘사정당국이 안여사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모질게 몰았으면 저런 결심을 했겠나’라는 해석들이 나왔다. 그러나 안여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일생 내조만 하며 살아온 전통적인 한국 여성이 정치권력과 언론이 정면 충돌하는 상황에 속만 태우다가 동아일보 제단에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 아니냐”며 안여사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



    경남 밀양의 전통 있는 유교 집안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고인은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한 뒤 24세 때 당시 경성방직에 근무하던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그후 고인은 남편의 곁에서 나서지 않고 동아일보가 겪은 영광과 수난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봤지만 마음속에는 동아일보 구성원들과 뜻을 같이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 신동아사태 당시의 일화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기부는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의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인터뷰기사를 빼라고 압력을 가했고 기자들은 철야농성으로 저항했다. 이때 사주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기자 대표들이 서울 가회동 김병관 당시 부사장 자택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기자들이 남편에게 설명하는 ‘투쟁논리’에 공감한 안여사는 기자들이 돌아갈 때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며 격려했다고 한다.

    안여사는 1993년 4월 동아일보가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할 당시 혼자 사찰을 찾아 3000배를 올릴 만큼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안여사는 인촌 김성수 선생 가문의 맏며느리였지만 일평생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생활해 왔다. 실제로 김명예회장은 ‘돈을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여사도 수중에 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 안여사로서는 이번에 국세청이 동아일보사 대주주인 김 명예회장 일가에 부과한 469억원이라는 세금 추징액이 상상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게 친지들의 이야기다.

    특히 안여사는 자녀들에 대한 동아일보사 주식의 명의신탁과 관련해 친구와 친지들이 강도 높은 국세청 조사를 받는 등 유무형의 시달림을 당하게 되자 몹시 괴로워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명의신탁은 1997, 1998년의 ‘비상장주식 실명전환 한시법’ 실시 이전에는 보편적으로 행해졌고 이 건은 1980년대에 이뤄진 것이다.

    고인은 7월17일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읍에 있는 선영에 편안히 잠들었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고인은 동아일보 안팎을 향해 의미있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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