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햇볕정책의 그늘, 무너지는 대북공작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5-04-06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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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내 대북공작조직 와해
    • 발호하는 대북 에이전트
    • 총풍사건과 북한인 납치
    • 황장엽의 다짐과 지혜
    • 북한 상선의 NLL 침범과 해주항
    • 대북 공작망 와해가 초래한 장길수 가족 사건
    • 남북정상회담 1년이 지난 지금 대북관계는 전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은 그들의 상선으로 하여금 NLL과 제주해협을 무단 통과케 해 김대중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4강 관계도 삐걱거리고 있다. 미국은 황장엽씨를 초청해 김대중 정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탈북자들을 핑퐁 치듯 떠넘기며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다. 불과 1년 만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위기를 맞은 이유는 무엇인가. 국정원의 공작 기능이 와해됐기 때문인데….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대북정책이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전후해 정부와 여당은 연일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촉구했으나, 북한은 요지부동 대꾸가 없다. 김위원장은 과연 서울을 방문할 것인가? 김위원장의 흉중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므로, 아무도 이 질문에 정확히 답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을 짐작케 하는 증거는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2000년 6월15일, 북한의 ‘로동신문’은 제1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서울을 방문하시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는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문구가 또렷이 박힌 북남공동선언 전문을 대문짝만하게 게재했다.

    쌓여만 가는 남북관계 악재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1년 6월15일자 ‘로동신문’은 제5면에 ‘위대한 수령님의 통일 유훈 관철에서 획기적인 전진을 가져온 역사적 사변’이란 제목을 단 남북정상회담 1년을 평가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조국통일의 리정표’란 제목하에 북남공동선언을 실은 상자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상자기사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거론한 문구가 감쪽같이 빠져 있었다(사진 참조). 북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김위원장은 서울을 방문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김위원장의 답방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정부 여당의 태도와 완전 반대되는 것이다.

    북한은 김위원장의 답방 여부에 대답하는 대신, 호의를 갖고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김대중 정부를 오히려 골탕먹이고 있다. 북한 상선을 제주해협과 북방한계선으로 무단 통과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6·15정상회담 후 자취를 감췄던 북한 삐라가 7월9일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에서 발견된 것과, 지난해 요란하게 시작된 경의선 복구사업이 북한측의 비협조로 오래 전에 ‘스톱’된 것도 북한의 어깃장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 김위원장과 북한은 그들에게 호의적인 김대중 정부를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꼬이는 것은 남북관계만이 아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도 대북 문제를 놓고 상당한 긴장이 형성돼 있다. 황장엽(黃長燁) 전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의 방미 문제를 둘러싼 한미 갈등이 좋은 사례다. 미국 공화당은 황씨를 초청하는 방법을 통해 햇볕정책을 펼치는 김대중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씨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국에 가겠다며 적극 호응하고 있다.

    지난 7월12일 기자는 황씨를 명예회장, 김덕홍(金德弘)씨를 회장으로 한 탈북자동지회를 방문했다. 동지회는 탈북자 중에서도 엘리트들이 중심이 된 단체인데, 국가정보원(이하 國情院)은 예산을 지원하며 이 단체를 관리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 이 단체가 햇볕정책에 반대한다는 명확히 밝히자, 지원을 중단했다. 그로 인해 동지회는 월간지 ‘민족통일’의 발간을 중단한 상태다. 이곳에는 10여명쯤 되는 탈북자들이 모여 있었다. 동지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정부가 황선생의 방미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조처를 취할 것에 대비해, 열흘째 집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숙식하며 비상근무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왜 우리 언론은 동지회 회원들이 이렇게 단결해 있는 것을 보도하지 않는가. 한국 언론이 우리의 주장을 보도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외국 언론에 우리의 성명을 밝히겠다”며 한국 언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한 관계자는 이러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정부가 황선생의 방미를 막기 위해 이중 간첩죄를 걸어 구속하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연금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황선생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자신의 방미시기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협의해서 결정하라며 한 발짝 물러서는 지혜를 발휘했다. 한·미 정부가 방미시기를 결정한다면, 이는 곧 한국 정부가 방미를 허가한 것이 되므로 황선생의 인신을 구속하지 못하게 된다. 황선생과 우리는 황선생의 방미가 성사되도록 그야말로 노심초사하고 있다.”

    1997년 4월20일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황씨는 성명을 통해 자신은 “전쟁도발을 막고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민족 앞에 속죄하고 싶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동지회 관계자들은 “황선생은 그때 이미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작심했다. 이러한 신념을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그런데 기대했던 한국에서는 햇볕정책 때문에 이러한 투쟁을 할 수가 없어, 황선생은 미국에 가서 이를 알리겠다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미국 공화당은 황씨를 초청함으로써 김대중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한일 관계도 상당히 굴절돼 있다. 작금의 한일 갈등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한국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일본 보수층의 불만이 깔려 있다. 지난 6월23일 일본 경시청 공안부는 일본에서 폐선 조치한 어선을 동남아로 가져가 개조한 후, 북한에 몰래 판매한 브로커들을 조사한다고 발표했다. 경시청을 비롯한 일본 보수층은, 북한이 밀수입한 일본의 중고어선을 대일(對日) 공작선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고어선이 한국 동해안의 한 항구를 거쳐 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항구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나, 한국 사람이 개입한 데 대해 심히 불쾌히 여기는 눈치다.

    한·중, 한·러관계도 답답한 국면

    한중, 한러 관계도 대북 문제를 둘러싸고 삐걱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과 마찰을 빚어도, 그래도 큰 틀에서는 한국과 한편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보다는 오히려 북한 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을 준다. 중국과 러시아가 탈북자를 붙잡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러한 증거다.

    특히 중국은 예상외로 많은 탈북자를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다. 1999년 2월부터 7월12일 사이 중국의 모 국책연구소는 단둥(丹東)·옌지(延吉)·룽징(龍井)·훈춘(琿春) 등 북한과 인접한 중국의 국경도시를 조사한 후, ‘북한의 불법월경 기아자(饑餓者) 및 북한사회 현상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 공안이 북한으로 송환한 탈북자 수를 최초로 밝힌 자료다. 중국 공안은 1996년 589명, 1997년에는 5439명, 1998년에는 무려 6300여 명의 탈북자를 북한으로 송환했다.

    한러 관계는 더욱 나쁘다.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개칭한 직후인 1998년 7월1일, 러시아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해온 국정원 직원 조성우(趙成禹)씨를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해 추방했다.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정보요원들을 대개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해 내보내는데, 이때 상대국 정보기관에게 ‘우리 기관의 아무개를 □□ 타이틀의 외교관으로 내보낸다’고 알려주는 게 불문율이다. 이런 정보원을 ‘공개 정보원’ 혹은 ‘화이트(white)’라고 한다. 반면 상대국 정보기관을 속이기 위해 상사 직원이나 선교사 등으로 위장해 내보내는 요원은 ‘비공개 정보원’ 혹은 ‘블랙(black)’이라고 한다.

    조성우 참사관은 러시아 정보 당국에 통보된 화이트였다. 그런데도 조참사관을 추방한 것은, 한러 정보당국간의 협조를 중단하겠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나온 이상 한국도 같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7월8일 한국은 서울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참사관 타이틀로 나와 있는 해외정보부 직원 올레그 아브람킨을 맞추방했다. 정보요원 맞추방 사건으로 한러 관계는 더욱 얼어붙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 한국은, 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한 탈북자 7명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에 완전 우롱당했다.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온 탈북자 7명을 체포한 것은 1999년 11월10일이었다. 이들이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부가 이들을 난민으로 판정해주어야 한다. 모스크바 주재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는 이들을 난민으로 판정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난민 판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한러 관계가 좋았을 때, 러시아는 난민 판정을 하지 않고도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2월8일 러시아 외교부는 탈북자들에게 출국비자를 발급해, 비공식으로 한국에 보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직후 러시아 외교부는 “직원의 실수로 비자가 잘못 발급됐다. 그 직원을 문책했다”고 밝히고, 12월30일 “탈북자 7명을 러중 국경조약에 따라 이들이 넘어온 중국으로 되돌려보낸다”며 중국으로 추방했다.

    한술 더 뜬 것은 중국이었다. 2000년 1월12일 중국은 러시아에서 돌아온 7명을 전격적으로 북한에 송환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 정부를 쳐다보며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기다린 한국 정부만 ‘바보’가 됐다.

    러시아가 추방한 탈북자 7명이 북한으로 송환된 것은 상당한 쇼크였다. 러시아와 중국이 핑퐁 치듯 떠넘기다 탈북자들을 사지(死地)로 집어넣을 때까지 국정원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이같은 일련의 정세속에서 그 동안 심혈을 다해 중국에 구축해온 대북 공작망을 철수하는 최악의 사태가 초래됐다. 남북 대치가 엄연한 현실인 이상, 국정원이 구축한 대북 공작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정원이 중국에 구축한 대북공작망은 1999년 5월27일 대한항공 선양(瀋陽) 지점장 원용수(元容秀·38)씨 연행을 계기로 철수했다. 원씨는 1989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김포국제공항 여객운송지점에서 일하다 92년 퇴사했다. 그리고 퇴사 6년 만인 1998년, 재입사해 심양지사장으로 발령 받았다. 대한항공을 들락거린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씨는 대한항공 직원으로 위장한 국정원의 블랙요원이었다(원씨 사건은 1999년 6월9일 몇몇 언론에 간단히 소개된 바 있다).

    원씨는 동북 3성 일대의 탈북자 문제를 담당했는데, 국정원과 비슷한 중국의 정보기관 ‘국가안전부’에 노출돼 간첩죄 혐의로 조사받게 됐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원씨를 연행한 지 11일째인 6월7일 풀어주었다. 풀려난 원씨는 한국으로 들어와 대한항공에 사직서를 내고 종적을 감추었다. 한 소식통의 말이다.

    “북한은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원씨를 눈엣가시로 여겼을 것이다. 북한은 중국 정보기관에 대해 계속해서 왜 국정원의 공작을 허용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동시에 북한은 중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그에 대한 결과가 원지점장 검거였다. 북한의 요구에 부응한 중국은 원지점장 석방 조건으로 중국에 설치된 국정원의 대북 공작망 철수를 요구했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 요구를 순순히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원지점장은 기소되지 않고 석방됐으나 우리는 대북 공작망을 철수해야 했다.”

    소식통은 “여기서 우리는 크게 판단 미스를 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요구대로 대북 공작망을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북중관계가 날개를 단 듯이 회복되었다. 2000년 3월5일 김정일 위원장이 극히 이례적으로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것이나, 2000년 4월5일 북한 고려항공이 평양-베이징에 이은 두 번째 북중 정기노선인 평양-선양 노선을 개설한 것, 그리고 2001년 1월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 이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 시기 우리가 얻어낸 것은 2000년 4월8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전격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원지점장 석방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는 남북 관계의 개선 속도가 너무 빨라, 중국에 설치한 대북 공작망의 철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1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김위원장의 답방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교착시키고 있다. 한국이 중국에 있는 대북공작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추진한 남북 관계가 꼬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설치됐던 대북공작망의 철수는 혁혁한 전과를 쌓아온 최대의 공작망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이 조직이 거둔 대표적인 성과 중의 하나는 지난 5월1일 도미니카 공화국 여권을 들고 일본의 나리타(成田) 공항으로 입국하려다 검거된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 김정남(金正男)의 정체를 샅샅이 파악한 일이다.

    대북공작망의 활약상

    김정남이 일본에 검거됐을 때 한국 언론은 ‘김정남의 정체를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미국의 CIA일 것이다’ ‘미국의 CIA가 첩보를 흘려줘 일본의 출입국관리국이 김정남을 검거할 수 있었다’는 등의 추측보도를 쏟아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들은 “소설이 너무 심하다”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정남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국정원이었다.

    1994년 안기부 공작팀은 베이징 시내 한 호텔에서 김정남과 그의 부인 신정희를 비밀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 안기부 공작팀의 움직임이 중국 공안 외사 당국에 포착되었다. 안기부 공작팀이 김정남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자, 중국 공안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으면 어떻게 하느냐. 사진 배경을 보면 베이징에서 찍었다는 사실이 금방 밝혀진다. 그렇게 되면 중조(中朝) 관계가 어려워진다. 자제해달라”며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만 23세의 성인 김정남의 사진을 충분히 촬영해, 김정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진 판독만으로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때까지 미국의 CIA는 김정남 사진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안기부는 협조 차원에서 김정남 사진 일부를 CIA에 넘겨주었다. 안기부 공작팀은 김정남을 촬영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 반경과 그가 사용하는 위조여권도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검거될 때 김정남은 ‘팡 시옹(PANG XIONG)’이란 이름이 기재된 도미니카 여권을 갖고 있었다. 안기부는 이 여권을 포함해 김정남이 사용하는 10여 개 가명 여권도 일찌감치 파악해 놓고 있었다(따라서 김정남이 위조 여권을 갖고 제주도를 다녀갔다는 소문은 신빙성이 약하다. 국정원이 묵인하지 않는 한 김정남의 제주 밀입국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소식통은 “1994년의 김정남과 2001년의 김정남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부인 신정희는 7년 사이에 상당히 살이 쪘다”며 이렇게 말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CIA가 안기부보다 대북정보가 많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안기부가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한중 수교를 계기로 안기부가 중국에 대북공작망을 구축한 것이 계기였다. 만주 지역을 떠도는 탈북자와 북한을 드나드는 조선족 등을 통해 북한을 손금 보듯이 파악한 안기부는 이때부터는 CIA에 자료를 협조해주는 등 우월한 위치를 점유했다.

    미국에게 있어 북한은, 가상적국이 아닌, 7개 불량국가(rouge state) 중의 하나이지만, 안기부에게 있어 북한은 모든 것이었다. 때문에 중국과 국교를 맺은 후 안기부는 총력을 다해 북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중요한 성과를 거둬온 공작팀을 우리는 너무 쉽게 내준 것이다.”

    국가안보는 대화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만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국 지도부의 속셈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국 지도층 인사를 망명시키거나 납치하는 공작이 필요하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임무를 국가 정보기관에 부여해놓고 있다. 남북 대립이 치열하던 시절 한국에서는 안기부가 이 임무를 수행했다.

    김정남의 행적을 파악하기 훨씬 전인 1982년 9월28일 안기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인 이한영(李韓永·본명은 리일남)을 데려온 적이 있었다. 이한영은 납치도 아니고 귀순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울에 왔다. 당시 21세의 이한영은 북한 여권으로는 미국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국 여권을 받아 미국 여행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제 발로 제네바 주재 한국 대표부를 찾아갔다가, 참사관 타이틀로 나와 있던 안기부 직원 황모씨(당시 가명은 김영철이었다)를 만났다. 황참사관은 이한영에게 서울에 가서 여권을 만들어주겠다며 그를 서울로 데려온 것이었다.

    안기부는 이한영 외에도 숱한 북한 요인들을 데려온 전력이 있다. 그중 몇몇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 요인들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박○○씨다(박씨는 몇 해 전 작고했다). 박씨는 해외 공작을 전담하는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차관급에 해당)으로 태국에서 일을 하다, 서울에 들어왔다. 그후 한국의 실상을 제대로 안 박씨는 귀순해 ‘신평길’이라는 가명으로 ‘김정일과 대남공작’(북한연구소 간행)이라는 책을 쓰는 등 반(反) 김일성 운동가로 변신했다. 이에 대해 북한도 요인 납치로 대항했다. 1978년 북한의 대외정보조사부가 신상옥-최은희씨를 납치한 사건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한영을 비롯한 북한 요인을 데려올 정도였다면, 안기부가 행적이 완전 파악된 김정남을 데려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기부는 김정남을 포기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김정일의 후계자도 아니고 북한의 실력자도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한 소식통의 분석이다.

    “우리 언론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김정남을 김정일의 후계자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한참 틀린 분석이다. 김정남도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 성혜림이 김정일과 헤어져 살게 된 연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11세 되던 해 그보다 열살 많은 이한영이 실종된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24세 되던 해 이한영의 어머니자 이모인 성혜랑씨 가족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성혜랑씨는 딸과 함께 서방국가로 망명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정남은 권력무상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버지인 김정일에게 접근하기보다는 밖으로 맴도는 것을 선택했다. 김정일도 아들을 곁에 두고 후계자 수업을 시키지 않았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후계자가 아니다.”

    정보기관은 소중한 정보일수록 다른 정보기관에 절대 제공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반면 별 볼일 없는 정보는 다른 기관으로부터 받을 미래의 협조를 위한 ‘떡밥’으로 나눠주게 된다. 김정남 정보가 여기에 해당했다. 이렇게 해서 김정남에 관한 정보는 세계 여러 정보기관으로 퍼져나갔다.

    5월1일 일본에서 검거된 김정남은 “오사카에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려고 일본에 왔다”고 밝힌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김정남이 일본에 들어오기 전 날 오사카부(府) 경찰이 VIP급 외국인이 오사카에 온다는 첩보를 받고 경계 강화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김정남에 관한 정보는 일본의 지방 경찰에까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대북 에이전트의 문제점

    정보기관원은 추진해야 할 공작과 첩보가 위험한 것이면, 에이전트를 고용해 일을 맡긴다. 예를 들어 북한의 식량난 참상을 알고 싶다면 북한 출입이 자유로운 조선족을 고용해 첩보를 수집해 오게 하고 주석궁 내부를 알고 싶다면 북한 요인과 가까운 사람을 에이전트로 활용한다.

    에이전트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이가 1997년 황장엽 비서를 망명시킨 이연길(李淵吉·74)씨다. 이씨는 6·25전쟁 때 크게 활약한 KLO 부대 고트(goat)대 대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남포 앞바다인 초도에 머물며 인민군 대좌를 납치해오고, 신의주로 침투해 함정을 나포해온 바 있다. 담대하면서도 신중한 이씨는 학식도 풍부해, 북한의 제1호 철학박사이자 당대의 이론가인 황장엽씨와도 충분히 대담할 수 있다. 이씨는 오래 전부터 베이징 등지에서 황장엽씨를 접촉하며, 시국담을 나눠왔다.

    황장엽 비서는 1997년 1월30일 일본을 방문해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재개와 쌀 추가지원 문제를 논의하고, 2월7일부터 9일 사이 주체사상 국제연구소가 주최한 ‘21세기와 인간의 지위에 관한 국제세미나’에 참가했다. 이때 이연길씨도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친 황씨는 2월11일 오후 2시55분 중국항공(CA) 926편으로 일본을 출발해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황씨가 도쿄를 떠나기 두 시간 전 이씨가 먼저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이씨는 황비서가 올 것을 준비했고, 얼마 후 베이징에 도착한 황씨는 이연길씨와 사전 약속한 대로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들어와 망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에이전트는 이연길씨와 달랐다. 이들 중 일부는 에이전트 경험을 이용해 사업에 나섰다. 북한 진출을 노리는 국내 기업체에 접근해 합영사업을 추진해 주는 브로커가 되었고 북한에 있는 가족을 애타게 찾는 월남민과 재북(在北) 가족만남을 주선하는 상봉사업가가 되기도 했다.

    북한에서 공작원으로 남파됐다가 생포된 ㅇ씨도 재북 가족의 탈북을 시도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공작원으로 남파된 사람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빼낼 생각을 할 만큼 대북 사업 에이전트들의 발호는 심각했다. 이산가족 상봉 사업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1994년 중국의 한 언론인을 만났는데, 그는 ‘공안당국이 조중(朝中) 국경 일대에서 암약하는 한국의 안기부나 일본의 내각조사실, 미국의 CIA 에이전트를 검거하면 이는 일체 보도하지 말라는 중앙당 보도지침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에이전트들이 너무 설쳐 북한이 불만을 토로하는 등 문제가 일어나자, 중국 공안은 에이전트 검거에 나선 것이다. 대북 에이전트의 발호가 결국 안기부 대북 공작망의 철수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에이전트들은 정치권에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미 식품상총연합회 회장 김양일씨다. 김씨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와 김광일(金光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족인 ㅈ씨와 한국인 ㅂ씨는 국민회의 쪽에 접근한 에이전트였다.

    정치권과 가까운 대북 에이전트가 속속 생겨나자 정치권과 안기부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되었다. 에이전트로부터 솔깃한 첩보를 들은 정치권은 안기부가 대북 정보를 독점하며 자기네에게 유리한 정보만 흘린다고 의심했다. 반면 안기부는 대북 에이전트들이 검증되지 않은 첩보를 정보인 양 흘려 혼란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국정원은 환골탈태하는 변화를 겪었다. 대북 에이전트와 연결돼 정치인들에게 접근한 국정원 직원들을 처벌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98년 터져나온 총풍과 북풍 사건이 그런 사례다. 북풍 사건은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을 비롯한 전직 안기부 고위간부를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여기서는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 부분은 따지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북한으로 하여금 판문점에서 총을 쏘게 해,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도우려 했다는 혐의로 시작된 총풍 사건은 쉽사리 마무리되지 않았다.

    북풍 사건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오익제 편지를 비롯한 증거물이 나왔다. 그러나 총풍사건에서는 총풍을 모의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이를 입증할 증거가 신통치 않았다. 이 시기 국정원은 국정원 공작사(工作史)에서 ‘가장 추잡하고 위험한 공작’으로 기록될 만한 공작을 시도했다. 총풍 혐의자들이 북한에 대해 총격을 요청한 증거를 잡으려고, 중국에 나와 있는 한 북한인을 납치해온 것이다. 이 북한인은 국정원에 협조해온 사람으로 영어에 능통했다.

    이 북한인을 한국으로 데려온 국정원의 모 공작팀은 이 사람을 안가로 데려가 총풍 사건에 대해 아는 바를 털어놓으라고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신체적 고문도 가했다. 그러나 북한인은 총풍사건에 연루된 장석중씨 등과는 오래 전부터 만나지 않았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다. 안가 지하실에서 조사받던 이 북한인이 탈출해 버린 것. 그는 고문을 받아 험상 궂은 몰골을 하고, 안가를 빠져 나와 택시를 탔다. 이 북한인은 서울에는 처음 왔지만, 베이징에서 오래 생활한 관계로 택시를 세워 탈 줄은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들은 △△일보를 떠올려, “△△일보로 가자”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택시 기사는 △△일보 앞에 차를 세웠다.

    북한인은 돈이 없었다. 그가 신문사 경비원을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하자, 신문사측에서 택시의 번호를 적은 후 대신 요금을 지불해 주었다. 그리고 퇴근한 북한 담당 기자를 불렀다. 북한인은 황급히 달려온 기자에게 자신의 신분과 서울에 오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 시각 국정원의 모 공작팀은 북한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해, 사방으로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일보에서 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국정원으로 연락할 때까지 행방을 찾지 못했다. △△일보의 연락으로 국정원은 북한인의 신병은 되찾았으나, 그가 기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국정원의 한 공작팀이 총풍 사건 재판에 쓰기 위한 증거를 얻기 위해 북한인을 납치해왔다가 감시 소홀로 놓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국정원 간부들은 경악했다. 국정원은 이 공작팀을 징계하고, 북한인 불법 납치 기사를 막는 선에서 이 사건을 덮었다. 그후 북한인은 더 이상 한국에서 보이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안기부는 이 북한인을 다시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기로에 선 햇볕정책

    국정원이 북한인을 납치해오고 또 관리를 소홀히 한 사건은 국정원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국정원의 공작은 크게 위축됐다. 북한인 납치로 인해 결정타를 맞은 국정원은 대한항공 선양 지점장 사건으로 크로스 펀치를 맞아, 말 많고 탈 많은 중국의 대북 공작망을 접어 버렸다. 이어 김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자, 국정원은 대북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다. 대통령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가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김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1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에 대해 침묵한 채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한 대북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옳은 정책은 없다. 상황이 변하면 정책도 변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까지는 옳았으나, 북한이 약속 이행을 회피하는 지금은 적절한 정책이 아니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일방적으로 북한에 혜택을 주는 햇볕정책에는 반대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쳤음에도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정책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조직은 국정원뿐이다. 북한 상선이 무단으로 NLL을 통과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남북한 사이에 아직 신뢰가 구축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북한과 미일중러 4강 모두로부터 고립된 채 한국이 독자적으로 통일을 모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을 우리 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과 일본 관계는 북한에 대해 엄격한 상호주의를 채택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과 러시아 관계인데, 두 나라와의 관계 회복도 결국은 음지에서 일하는 국정원이 풀어줘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4강의 지지를 얻은 다음 북한을 압박해야 우리 주도의 통일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에게 정확한 판단보고를 할 수 있느냐, 정파나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공작할 수 있느냐가 국정원의 사활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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