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알라의 빛,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퍼지다

  • 정수일 박사

    입력2005-04-08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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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교는 아라비아반도의 위기와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났지만 민족이나 국가,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한 세계종교다. 이슬람교의 확산과정은 신속하고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원래 인간이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종교와 관련돼 있다. 종교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비종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문명사에서는 종교를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로 보기도 한다. 종교는 어떻게 생겨났기에 이러한 편재성(遍在性)을 지니게 되는가. 종교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한 19세기 이래 그 해답을 각방으로 구했지만 보편타당한 정의는 아직껏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는 성싶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학이 종교심리학, 종교철학, 비교종교학,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종교민족학, 종교고고학과 같은 여러 분야로 세분되면서 한 대상을 놓고 각기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구촌(global village)’시대에도 종교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물음은 종교학계 초미의 관심사로 제기되고 있다. 근자에 와서 분명해진 사실은 세계화를 향한 ‘문화적 동질화’와 전근대적 전통의 ‘문화적 이질성’ 간에 마찰과 긴장이 조성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을 비롯한 전통종교들이 다시 부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3대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신통하게도 선후 약 6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나타났다. 이슬람이 마지막으로 출현한 지도 이미 140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또 다른 보편종교를 맞이하지 못했다. 이제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보편종교의 출현을 조심스레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전통종교인 이슬람의 출현과 그 확산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사료된다.

    ‘신기루’ 같은 이슬람의 출현

    흔히 이슬람의 출현을 ‘사막의 신기루’에 비유한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신기루는 지면이나 해면에서 갑자기 공기가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면 공기의 밀도가 급변함으로써 일어나는 빛의 이상굴절(異常屈折)현상이다. 멀리 있는 물체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거꾸로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은 모래로 뒤덮여서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고 기후 변덕이 심한 사막지대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신기루’ 하면 으레 사막을 연상하는 것이다. 물론 기온의 급격한 엇갈림으로 일어나는 한갓 잠정적인 환각현상이기에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보면 당대의 여러 사회적 마찰과 갈등의 결과로 출현한 이슬람을 기온의 엇갈림(마찰)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막의 신기루에 비유하는 것은 발생론적(發生論的) 측면에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 신기루처럼 착각현상이나 혹은 잠깐의 일로 유추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기루적’인 환각에 불과하다.

    무릇 종교, 특히 보편종교는 발생론적 관점에서 ‘신기루성’을 공유하고 있다.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5~6세기의 인도는 한마디로 대변혁기로서 사회적 갈등이 극심했다.

    지방의 군소국가들이 중앙집권 체제로 통합되고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가 변모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카스트제도를 비롯한 전통적인 사회악 속에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는 사회적·종교적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도 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해결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불교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발생한 기원 전후 시기의 서아시아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압제에서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이념적 기초인 헬레니즘과 전통 유대교 이념 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강대한 로마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 개개의 민족적·국가적 종교는 고유의 기반을 잃고 해체되어, 이른바 종교의 혼효(混淆, 싱크레티즘)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요컨대 헬레니즘적 로마세계와 헤브라이즘적 전통세계 간의 부조화가 격화되면서 전통적인 체제와 가치가 붕괴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지중해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해결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출현한 것이 바로 기독교다. 이슬람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종교 출현의 발생론적 해석으로부터 우리는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 즉 종교란 사회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물음)에 대한 해답의 상징적 체계로서 인류문명 속에 상존(常存)하는 것이다. 물론 철학도 이러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종교는 경전과 같은 지적 구조물이나 제의(祭儀), 예배, 공동체 운영 등 정형화(定型化)한 행동과 구체적인 양태를 가진 점에서 철학과는 다르다.

    비록 그 형태는 상징적이지만 ‘사회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본질적으로 종교가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과 부조화적 현상을 극복해야 하는 당대 사회의 지적 요청에 부응해 출현한 사회생활의 소산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 특히 보편종교는 대체로 역사의 격변기에 출현하는 것이 통례다.

    이슬람학자들은 이슬람이 알려지기 이전 시대를 ‘자힐리야(al-Jahiliyah)시대’, 즉 ‘무지(몽매)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대를 학자에 따라서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이해한다. 넓은 의미로는 태고로부터 성천(聖遷, 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천거, 서기 622년)까지의 시대이고, 좁은 의미로서는 성천 이전의 150~ 200년간을 말한다. 보통은 좁은 의미의 시대를 말하는데, 이 시대에 아랍부족 간에 전례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영웅호걸들이 난립했다고 하여 이 시대를 일명 ‘아랍시대’, 혹은 ‘영웅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무려 1700여 차례의 부족간 전쟁이 발생했으니, 실로 이 시대는 이슬람의 여명을 앞두고 아랍사회 전체가 혼란과 상잔에 휘말려 있던 이슬람의 회임과 산고(産苦)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부터 아라비아반도는 사막의 유목민(베두인, Bedouin)과 오아시스 정착민으로 구성된 이중적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부장적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유목사회는 느슨한 정치구조와 집단주의 의식으로 유지되었다. 가족장이나 씨족 대표로 구성된 장로회(長老會)에서 선출된 부족장(샤이흐)의 기능은 중개자이지 결코 지휘자의 권능은 아니었다. 그 밖에 부족사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축제나 제사 등을 관장하는 카힌과 구성원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하킴, 타부족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까뒤 등 직책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관할하에 부족사회 성원들은 나름의 사회생활규범을 지켜나갔다. 황막한 사막환경에서 개별적인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므로 자연히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방목지나 수원지 등 사회적 부에 대해서 공유관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부족사회적인 행동과 의식은 후일 이슬람교 교리와 이슬람문명에 잠재적으로 반영되었다.

    유목사회와는 달리 오아시스의 정착민들 속에서는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동쪽의 사산조(朝) 페르시아와 서쪽의 비잔틴제국 간의 장기적인 대결로 말미암아 페르시아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경유해 지중해로 통하는 동서 통상로가 차단되면서부터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지방이 주요한 교역통로로 떠올랐다.

    이러한 통상의 요로에 위치한 메카나 메디나에는 교역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져 부의 축적과 더불어 사회적 분업도 생기고 유목민과의 유대도 강화됐다. 그리하여 전래의 이중적 사회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빈부의 차가 생기고, 사유(私有)에 기초한 경제권을 추구하면서 쟁탈이 불가피해졌다.

    간혹 생존 차원에서나 이웃과 마찰을 빚던 유목민들도 변혁의 와중에 정착민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경쟁의 역군에 편입되었다. 무역권이나 대상로(隊商路)의 확보를 위한 쟁탈전은 비일비재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유년시절에 해당하는 575년부터 590년 사이에 메카지방의 맹주들인 꾸라이쉬 부족과 하와진 부족 간에 발생한 네 차례의 유혈적 상권 쟁탈전은 그 일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혈연에 기초한 씨족제도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종래의 씨족적 평화나 평등, 선린관계에 바탕을 두고 수평적으로 결성된 사회조직은 원추형(圓錐形)의 계층적 사회구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생존과 영리를 위한 경쟁과 보복 등 대립의식이 점차 자라났다.

    기껏해야 15~20개의 천막에 분산하여 수백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는 소규모 씨족집단으로서는 날로 심해지는 상쟁국면(相爭局面)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큰 조직으로 뭉쳐야 했으니, 그 조직이 바로 부족들간의 연맹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메카를 중심으로 20개 씨족이 연합한 꾸라이쉬 부족연맹이다. 부족연맹의 형성은 미래에 있을 범지역적인 국가 출범의 기틀로서 주변의 위협세력인 사산조 페르시아나 비잔틴과의 대결을 위해서는 더욱더 절박한 과제로 다가왔다.

    이슬람교 출현 배경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내부변화는 의식구조의 개변을 필연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사막의 유목민은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오아시스의 정착민들 속에서 원시적인 물신신앙(物神信仰)을 비롯해 각종 우상숭배가 구태의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큰 바위나 나무, 샘물 등에 신령이 살고 있으며, 진(Jinn, 정령)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부족마다 고유의 신이 있었다.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그 인근 부족들은 라트와 웃자, 마나트라는 세 여신을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카아바라는 육면체 운석(隕石)과 그 주변에 산재한 수백개의 돌도 아울러 숭배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시대의 변천을 반영하듯, 아라비아반도 주위에 뿌리 내린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선진 종교의 영향은 구습의 종교를 극복하고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촉매제 구실을 했다. 기원 1세기부터 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예멘에는 유대교가 서서히 전파되어 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히미리아조의 자누와스왕이 유대교로 개종할 정도로 번성했다. 북쪽의 메디나(야스리브)에는 일찍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피란 온 유대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4세기 말 아나톨리아에 비잔틴제국이 건립되면서부터 기독교도 반도의 북부와 중부지역으로 뻗어갔다. 특히 기독교의 단성론자(單性論者, Monophysites)와 네스토리아파(Nestorians) 선교사들은 갓산과 라흐미 등 ‘비옥한 초승달지역’과 반도 북부의 여러 아랍 부족 속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확보했다.

    이러한 때에 대상(隊商)을 따라 남북으로 쉼 없이 오가는 아랍인 가운데서는 세태에 민감한 구도인(求道人)들이 끼어 있었다. 세칭 ‘하니프(Hanif, ‘진실한 자’라는 뜻)’라고 하는 이들은 일신교(一神敎)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 같은 낡은 종교이념에서 탈피하고 생매장 같은 폐습을 없애려는 일종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아라비아반도는 정치·경제·사회·종교 전반에 걸쳐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상태는 극에 달했는데, 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메카는 이 모든 양상의 축소판이었다. 씨족이나 부족을 단위로 우상숭배를 위주로 하는 낡은 종교관념으로는 변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에 적절한 신앙적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족연맹이나 범지역적 사회체제가 요청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은 역사의 필연으로 제기되었다. 이제 어떤 출중한 인물, ‘사건 창조적인’ 위인이 나타나 이 역사적인 과제를 앞장서 수행해 나가는가 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부름을 좇아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무함마드다. 흔히 그를 가리켜 이슬람교의 창시자니 교조니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이슬람적인 사고에 따르면 만민을 위한 보편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절대신 알라가 우주를 창조한 그 시각부터 이미 있어 왔는데, 그 동안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선지자(先知者)인 무함마드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무결하게 인간에게 계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창조자는 원초적으로 알라일 뿐, 그 외에는 아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함마드는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은 이슬람의 전달자이고 그 실현의 인도자일 따름이다. 이슬람은 7세기 무함마드가 ‘창시’하거나 ‘출현’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에 의해 ‘알려진 것’뿐이라는 게 정확한 이슬람적인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항용 이슬람의 ‘창조’니 ‘출현’이니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들의 창조나 출현에 대비한 관용어(慣用語)이다.

    무함마드는 고도 메카의 명망 있는 꾸라이쉬 부족의 하쉼 가문 출신이다. 550년경에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상모(喪母) 하고 고아로 자랐다. 낙타몰이꾼으로 대상에 참가해 북쪽 시리아지방을 자주 내왕하던 그는 거기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갔다. 25세에 15세 연상인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한 후 생활이 안정되자 메카 부근의 히라동굴에 들어가 명상과 사색에 잠겼다. 15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가 마침내 그의 나이 40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읽어라, 창조주인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라는 알라의 첫 계시를 받는다. 이로부터 각성하여 ‘라술라’(‘알라가 보낸 사람’이란 뜻)로 자처하면서 유일신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을 포교하는 데 나섰다.

    메카에서의 초기 포교는 온갖 탄압과 비방중상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하여 활로를 찾기 위해 그는 70여 명의 신자와 함께 620년 9월24일(음력 7월16일)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메디나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 역사적인 이동을 이슬람사에서는 ‘히즈라’, 즉 성천(聖遷)이라고 한다. 17년 후에 제2대 할리파 오마르가 이날을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선포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부족들간의 고질적인 유혈복수전을 종식시키고 교세를 확장하는 데 기초하여 첫 신정국가(神政國家)체제인 이른바 ‘움마’(al-Ummah, 이슬람공동체)를 건설했다. 그는 이를 위해 알라를 최종 주권자로 하고 자신을 알라의 대리자로 하여 혈연이나 지연이 아닌 종교신앙(이슬람)에 바탕한 새로운 인간집단, 즉 ‘움마’를 건설한다는 요지의 ‘메디나 헌장(憲章)’을 반포하고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메디나 주민들과 그 실행을 위한 서약을 맺었다. 이것은 부족적 단합정신을 아랍족 전체의 단합된 힘으로 승화함으로써 역사적 요청에 화답하는 새로운 아랍민족국가 건설의 바람직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외래자로서 메디나에 뿌리내리기도 어려웠지만, 기득권세력인 메카 부족과의 충돌도 피할 수 없었다. 624년부터 627년 사이에 세차례의 큰 전투를 거쳐 메카세력을 제압하고 드디어 630년 1월 메카에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 이해를 이슬람사에서는 ‘정복의 해’라고 한다. 이듬해에 메카의 여러 부족들은 메디나에 사절단을 보내 메카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그 다음해인 632년 무함마드는 노구를 이끌고 메카를 순례하고 부근의 아라파트산에서 마지막 고별연설을 하면서 이슬람의 승리(출현)를 세상에 공식 선포했다. 무함마드는 그해 6월 향년 62(?)세로 영면했다.

    이슬람의 지속적인 확산과정

    이와 같이 기원 7세기 전반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출현한 이슬람은 그 내재적(內在的) 고유성과 역사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광범위한 권역을 형성하면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확산됐다. 이슬람의 확산이란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와 그에 바탕한 복합적 이슬람문화의 지역적 전파를 의미한다.

    일찍이 범세계적인 문명권을 이룬 이슬람의 확산과정을 통관하면, 크게 세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제1단계는 초전기(初傳期)다. 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성천을 기점으로 하여 정통할리파시대까지 약 40년을 포함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함마드는 생전에 국가체제로서의 이슬람공동체를 건설했으며, 계시를 통해 이슬람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고 그 확산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함마드의 유업을 이은 4대 정통할리파시대의 29년(632~661)은 이슬람군의 동·서정(東·西征)에 편승하여 이슬람교가 처음으로 아라비아반도 밖 여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제2대 할리파 오마르(재위 634~644년)와 제3대 할리파 오스만(재위 644~656년)시대에 일어난 군사적 정복활동의 첫 파고기(波高期)에는 이슬람세력이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의 후라싼으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까지, 남으로는 아라비아반도로부터 북으로는 아르메니아에 이르기까지 호한(浩瀚)히 뻗어갔다. 비록 군사적 정복활동기간이 짧아 피정복지에 이슬람교가 착근하지는 못했지만, 이슬람법에 따른 각종 행정조치가 취해졌다. 무슬림군사들의 이슬람적 행적으로 인해 피정복지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접하게 되고 부분적이기는 하나 공전(公傳)과 사전(私傳)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슬람 확산의 제2단계는 정착기(定着期)다. 이 시기는 세습적인 전제주의적 권력구조를 가진 우마위야조(661~750, 13대 89년간) 아랍제국의 건립으로부터 압바스조(750~1258, 37대 508년간) 이슬람제국의 멸망까지의 약 600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세계적 종교로서의 이슬람교가 신학적으로 정립되고, 그에 바탕한 복합적인 이슬람문명이 정형화됐다. 또 초기의 군사적 정복활동과 힐라파제(계위제)의 확립에 따라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이 출현함으로써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광활한 지역에 하나의 세계적 문명권인 이슬람권(이슬람세계)이 확고히 정착하게 됐다.

    왈리드를 비롯한 우마위야조 할리파들은 8세기를 전후하여 일시 중단했던 군사적 정복활동을 재개했다. 이슬람의 서정군(西征軍)은 7세기 말엽에 북아프리카지역을 공략한 데 이어 8세기 초에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유럽 원정을 단행하여 피레네산맥을 돌파(719)하고 아비뇽을 점령(730)했다.

    한편 동정군(東征軍)은 8세기 전반에 중앙아시아 일원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여 730년대 말까지는 하외지역(河外地域, 즉 트랜스옥시아나)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서투르키스탄 전역을 장악하고 인도의 인더스강 동안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동정은 당시 그 지역을 경략(經略)하고 있던 중국 당(唐)조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으며, 마침내 751년에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지휘하는 당군과의 역사적인 탈라스전투가 발발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승리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이슬람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렇게 8세기 전반에 이르러 우마위야조 할리파의 지배영역은 중앙아시아의 시루강안과 인도의 인더스강으로부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전역까지 크게 확대됐다. 이 영역의 심장부인 시리아와 이라크 및 이집트는 두 차례에 걸친 이슬람군의 공략으로 인해 원주민들이 이슬람화했다. 외연지역인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 하외지역, 북아프리카, 안달루스(이베리아반도)의 주민들은 이른바 ‘짐마’(al-Jimmah, 피정복지의 비무슬림)의 신분을 버리고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하여 ‘마왈리’(al-Mawali,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인)가 되는 현상이 점차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는 샤리아(이슬람법)에 준한 제반 사회적 시책이 실시되고 통일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이 펼쳐졌다. 이것은 사실상 이 영역을 기반으로 하여 이슬람권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우마위야조 아랍제국시대에 형성된 이슬람권을 기본 판도로 하여 출범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시대는 이슬람교가 넓은 지역에 뿌리내리고 핵심적(혹은 협의적) 이슬람권, 즉 우마위야조와 압바스조 시대에 형성된 이슬람권이 완성된 시기다. 특히 8~9세기는 이슬람제국의 황금시대로서 이슬람 고전문화가 형성됐다. 비록 압바스조 후기에 이르러 이슬람세계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동방세력과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으로 양분됐지만, 이슬람권의 총체성은 여전히 유지됐으며 확산에 의한 이슬람의 정착기는 몽고의 침입으로 압바스조가 멸망할 때(1258)까지 줄곧 이어졌다.

    이슬람 확산의 제3단계는 확전기(擴傳期), 즉 전파가 계속 확대된 시기다. 이 시기에는 주로 핵심적 이슬람권이 형성된 이후에 그 역외(域外)지역인 세계 각지로 확산됐다.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멸망은 전래의 통일적인 이슬람세계에 와해와 분열을 초래했으나, 역설적으로 이슬람의 세계적 확산을 낳았다. 비교적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추구한 몽고제국은 이슬람에 관대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 건설의 여러 분야에서 색목인(色目人)으로 대변되는 무슬림을 대거 중용했다. 그리하여 원(元)제국 치세시 중국에서는 회교(回敎)라는 이름으로 이슬람교가 완전히 정착되고 무슬림공동체가 여러 곳에 형성됐다. 또한 몽고제국 치하에서 킵착 칸국을 비롯한 동남유럽 일대가 상당한 정도로 이슬람화했으며, 몽골제국의 동정(東征)을 통해 이슬람이 고려에까지 전파됐다.

    멸망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재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티무르제국(1370~ 1507)은 비록 생존기간은 길지 않지만, 파미르고원에서 지중해까지, 볼가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광활한 판도를 차지하고 이슬람권의 개편과 이슬람문명의 부흥을 시도했다. 티무르제국을 이은 오스만제국은 700여 년간 범세계적 이슬람권의 중심세력으로서 이슬람의 세계적 확산을 주도했다. 특히 800여 년간 이슬람세계와 대치했던 비잔틴제국을 무력으로 침으로써 제국 치하에 있던 지중해와 동유럽 일원에 대한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슬람의 동전(東傳)에서 특기할 사항은 인도대륙(오늘의 인도와 파키스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8세기 초부터 이슬람 동정군은 인도대륙을 공략해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슬람왕조를 출범시켰다. 12세기 말 이미 이슬람화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델리지방에 진출한 터키족 노예 출신들이 첫 이슬람왕조인 노예왕조(1206~1290)를 창건했다. 뒤이어 이슬람의 인도화를 시도한 킬지왕조, 판도를 인도 남부까지 확장하고 인도의 이슬람화를 크게 촉진한 뚜그락조, 아프가니스탄계 출신이 세운 로디왕조, 차카타이 터키계 후예를 국조로 하여 인도의 대부분 지역을 아우르고 인도-이슬람문화의 융화정책을 추구한 무갈제국까지 약 650년간(1206~1857) 다섯개의 이슬람왕조가 인도에 출현했다. 이슬람의 동남아시아 확산은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시대에 무슬림상인들이 중국으로 내왕하면서 경유지인 이곳에 들러 이슬람을 전파하면서부터다. 15세기 초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라카왕국이 처음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였다. 또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 말엽까지 약 한 세기 동안 말레이반도로부터 필리핀에 이르는 동남아 국가들이 이슬람을 공허(公許)함으로써 동남아는 이슬람세계의 한 구성원이 됐다.

    오늘날 그 어느 지역보다 이슬람이 부흥하고 있는 아프리카는 출현 초기부터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동아프리카에서는 9세기부터 예멘과 이집트를 비롯한 무슬림 상인들이 소말리아에서 모잠비크에 이르는 연해 일대에 무역거점을 마련하고 더불어 이슬람을 전파했다. 서아프리카에서도 11세기부터 북아프리카의 이슬람화한 베르베르 상인들이 사하라사막을 남하하여 세네갈강과 니제르강 유역의 여러 나라에 이슬람을 전했다. 위정자들을 비롯한 현지인들은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여 18세기 초에는 이슬람이 적도아프리카 일원까지 확산됐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같은 보편종교인 불교나 기독교의 확산과는 달리, 이슬람의 확산은 그 속도와 규모 및 결과 면에서 일련의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우선 확산의 신속성이다. 이슬람은 출현 후 약 100년 동안에 동쪽으로 중앙아시아의 트랜스옥시아나와 인더스강, 서쪽으로,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3대륙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이 확산됐다. 이는 발생 후 300년이 지난 아소카왕시대에 처음으로 영외(領外)에 포교단을 파견한 불교의 확산이나, 100년이 지나서야 에뎃사에 첫 동방기독교의 거점이 형성되고 그로부터 또 300년 후에 핍박에 의한 네스토리우스파의 동전(東傳)과 서방 로마제국으로의 서전(西傳)이 가까스로 시작된 기독교의 확산과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빠른 확산이 아닐 수 없다.

    이슬람 확산은 신속 보편 연속성 지녀

    이러한 종교적 확산을 뒷받침한 군사적 정복활동을 보면 실상은 더더욱 명백하다. 흔히 인류사상 최대의 군사적 정복활동으로 기원전 4세기에 있은 알렉산더의 동정과 기원후 7~8세기에 단행된 이슬람군의 동·서정, 그리고 13세기에 일어난 몽고군의 서정을 꼽는다. 그런데 이 삼대 정복활동 중에서도 신속성이나 활동범위, 여파 면에서 이슬람군의 동·서 정복활동이 단연 으뜸이다. 종교를 포함해 인류문명사에서 한 문명현상이 이토록 종횡무진 급속하게 확산되어 착근하고 지속된 선례는 극히 드물다.

    이슬람의 확산이 지닌 다음 특징은 그 보편성(普遍性)이다. 이슬람교는 포교와 수용과정에서 다른 보편종교와는 달리, 그 비중에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공전(公傳)과 사전(私傳)이 시종 병행함으로써 확산의 폭이 대단히 넓다. 기실 이슬람교에서는 불교의 승려나 기독교의 목사, 신부와 같이 포교나 전도를 전담하는 성직자가 따로 없이 포교는 무슬림의 당연한 의무로 간주된다. 사원에서 예배를 비롯한 각종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이맘’(‘인도자’란 뜻)은 문자 그대로 ‘인도자’일 뿐, 영적으로 숭앙되는 성직자는 아니다. 그리하여 이슬람교 전파사(史)에서 보면 평범한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에 의해 설교가 진행되고 사원이 건립되며 교단이 꾸려져서 현지인들이 이슬람에 귀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를테면 이슬람교는 모든 무슬림이 자진하여 포교와 전파를 수행하는 참여종교(參與宗敎)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슬람교는 확산에서 혈연이나 지연을 가리지 않고 위정자를 비롯해 국가나 민족, 부족 구성원 전체가 공시적(共時的)으로 집단 수용함으로써 교세의 신속한 확산과 정착을 기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이슬람교가 전파사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보편성으로서 여타 종교의 전파사에서는 유례가 드문 일이다.

    끝으로, 이슬람 확산의 특징은 연속성이다. 같은 보편종교에 속하는 불교나 기독교의 확산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단절적으로, 그리고 영성적(零星的)으로 진행되어 그 권역(圈域)이 불투명하고 교세가 유동적이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의 확산은 시·공간적으로 중단 없이 연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그 결과 이슬람교는 초전기와 정착기를 거쳐 부동(不動)의 핵심적 이슬람권을 형성하고 유지하면서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계속 확대됨으로써 범세계적 이슬람권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이슬람권은 발상지 사우디아라비아를 원심(圓心)으로 한 활 모양의 범세계적 문명권으로서 구조적인 연쇄성과 집중성, 그리고 명확성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확산의 보편성과 더불어 연속성을 겸유했기 때문에 이슬람교의 확산은 시종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바야흐로 세계화시대에 진입한 오늘날에도 시대지향적인 ‘문화의 동질화’에 대응하여 나름의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은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인 보편종교와 문명으로서 기능을 다해왔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결과를 보면 여타 보편종교나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련의 특징을 지니고 출현 당초부터 신속하고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면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 이 문제를 놓고 오늘날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그중에는 편견이나 오해도 상당하다. 권위를 인정받는 우리 나라 한 서양사의 근저(近著)에는 ‘마호메트의 종교(이슬람교의 오칭-필자) 전쟁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첫째 이유를 “선교사업을 무력에 의해 강행한 전투적 종교의 성격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맥락에서 ‘한 손에는 꾸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것이 마치 이슬람경전 ‘꾸란’ 속의 한 구절로서 이슬람의 징표이고 이슬람의 확산을 가져온 요인인 양 오도하기도 한다. 정말 이런 식으로 그 비결이 풀릴 것인가?

    원래 이슬람은 그 어의가 말해주듯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신앙을 ‘검’으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신앙의 자유를 설교하고 있다. 경전 ‘꾸란’은 “종교에는 강제가 있을 수 없다”(2:256), “사람들을 강요해서는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다”(10:99)고 신앙의 자유원리를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아의식의 바탕에서 자유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신앙만이 진실하고 확고하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종교란 일종의 잠재적 의식형태로서 결코 강요에 의해 성취될 수 없다. 설혹 일시적 강요에 굴복해서 따른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지속될 수 없다. ‘꾸란’과 ‘검,’ 종교와 폭력은 본질적으로 불가상용적(不可相容的)으로써 양립할 수 없다. 이러할진대 이슬람의 출현과 확산을 가능케 한 진정한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요인을 알아내려면 객관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우선, 초기 이슬람이 비교적 순조롭게 걸음마를 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형성된 유리한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다. 7세기 전후에 아라비아반도의 동서에는 숙적관계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이 대치하여 장기간 소모전을 벌임으로써 양쪽이 피폐상태에 빠졌다. 두 제국은 장기전(602~628)을 벌이면서 엎치락뒤치락 일승일패의 이전투구(泥戰鬪狗) 속에서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그 과정에 서민들에게는 과중한 부담을 전가해 당국에 대한 불만과 이탈심리가 심화됐다. 이러한 약화와 이반(離反)현상은 두 제국의 치하에 있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됐다. 한편 암흑기라 일컫는 중세에 들어선 유럽은 과도기적 혼란과 공백을 겪으면서 아직은 대외방어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 모든 국제적 환경은 이슬람의 대외진출과 확산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이러한 객관적이고 대외적인 여건이 초기 이슬람의 확산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변적이고 보조적인 요인이었다. 이에 비해 이슬람이 구비하고 있는 주관적이고 내재적인 여건은 항시적이고 절대적인 요인으로서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주관적 요인의 첫째는 이슬람 고유의 정교합일(政敎合一) 체제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인간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조화스러운 전체’, ‘신앙과 실천의 체제’다. 불교나 기독교를 비롯한 대다수 종교들이 세속의 삶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 면보다 정신적 면을 중시하는 데 비해, 이슬람은 내세와 똑같이 현세의 삶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를 갈라놓지 않고 하나의 합일체로 보면서 정교일치를 국가와 사회의 기본체제로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이슬람은 군사활동을 포함한 국가의 적극적인 간여와 뒷받침 속에서 확산된다.

    이슬람의 전통적 국가체제는 이른바 힐라파(al-Khilafah, 계위제)인데, 최고실권자는 종교와 정치의 권능을 함께 장악하고 있는 할리파(계위자)로서 이슬람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항시 보장된다. 이슬람에서 이것은 종교와 정치의 유착관계가 아니라 합일체로서 상보상조적 관계다. 다분히 정교분리의 기독교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할 때만이 이슬람의 확산과 오늘의 부흥을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사를 제외하고도 종교사 일반을 돌이켜보면 비록 이러저러한 폐단으로 인해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기는 하지만, 합일해 상보상조할 때 공히 흥성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에서 위정자들에 의한 새로운 종교의 공허(公許)를 그 시전(始傳)으로 간주하고, 국교(國敎)나 호국종교의 의미를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보편성과 세계성

    둘째 요인은 이슬람의 보편성과 세계성이다. 이슬람의 보편성은 확산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주관적 요인이기도 하다. 차제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슬람의 공동참여성이다. 이슬람에서는 인간과 신(알라) 사이에 어떤 영적 매체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직자가 따로 없고 모든 신자는 설교자가 될 수 있다. 믿는 자는 모두 신 앞에서 평등하며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누구나 똑같다. 그리하여 믿음에 충직하기만 하면 특별한 영적 자질이나 권위를 갖춘 사제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무식자나 걸인이라도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인도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는 집단예배소로 사원(마시지드)이 있지만,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아무 곳에서나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근행할 수 있으며,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일렬로 예배에 동참하는 것이 관행이다.

    보편성과 더불어 세계성은 이슬람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이슬람은 애당초 민족이나 국가,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한 세계종교다. 이슬람에서 ‘이크워’, 즉 형제애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는 자비를, 기독교는 박애를 상징적인 이념으로 한다면 이슬람은 형제애를 그것으로 한다. 아무를 막론하고 무슬림들은 서로 ‘아크’(형제)나 ‘우크트’(자매)라고 부른다. 평등이나 소박성으로도 설명되는 이슬람의 보편성과 세계성은 이슬람의 범세계적 확산을 가져온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끝으로, 이슬람의 신속한 확산과 정착에 기여한 주관적 요인은 관용성(寬容性)이다. 여기에는 이슬람 특유의 수용성과 베풂의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삭막한 아라비아반도에서 무지와 몽매의 구각(舊殼)을 깨고 출현한 이슬람에 성장과 확산의 자양분을 공급한 것은 주변의 선진 문명이었다.

    고대오리엔트문명과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 등 여러 문명요소를 이슬람이란 한 용광로에 집어넣어 용해 응고시킨 것이 바로 이슬람문명이다. 이슬람은 출현 초기부터 종교를 비롯한 제반 분야에서 주변의 선진문명을 적극 수용했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서 보다시피 신관(神觀)이나 성관(聖觀) 등 교리 면에서 그야말로 친연성(親緣性)을 실감하도록 유대교나 기독교의 것을 다량 받아들였다.

    8세기부터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있는 대로 아랍어로 번역하여 이슬람신학의 정립과 학문의 발달에 적극 활용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로부터는 수의 영(零) 개념을 받아들여 수학혁명을 일으켰고, 중국의 4대 발명품을 죄다 받아들인 후 다시 유럽으로 전했다. 이러한 수용성과 더불어 남에 대한 너그러운 베풂은 이슬람을 폭력종교로 매도하는 사람들까지 인정할 정도로 정평이 나있다. 이러한 베풂은 유목민 고유의 품성이 이슬람의 종교적 선행으로 승화한 결과 초기 군사정복시에도 피정복지에 대하여 종전보다 적은 인두세를 부과함으로써 피정복지 주민들로부터 호감을 산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슬람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관용성은 쉬이 찾아볼 수 있다. 무슬림의 5대 종교의무의 하나인 금식(매해 한 달씩)도 환자나 임신부, 여행자들에게는 불이행이나 순연(順延)이 허용되며, 금기시(하람)되는 돼지고기도 그것밖에 식료품이 달리 없을 때에는 먹어도 된다. 아무튼 계율종교 치고는 관용성과 융통성이 확연한 종교임에는 틀림 없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에 비해 느슨하거나 문란한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바로 이러한 관용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성직자가 없어도 종단이 제대로 굴러가고 사원이 제구실을 하며, 어떠한 물리적 강요가 없어도 이슬람은 확산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초승달은 이슬람의 징표다. 여러 이슬람 나라들의 국기에 초승달이 새겨져 있고 국제적십자사연맹은 이슬람 나라에 초승달기장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사막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해 밤길을 걸어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그믐밤의 어둠을 깨고 방긋이 모습을 드러내는 초승달이야말로 희망의 등대이고 동경의 피안(彼岸)이 아닐 수 없다. 무슬림들은 사막의 신기루로 나타난 이슬람이 사막의 초승달로 그들의 앞길을 영원히 비춰준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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