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국대는 1990년대에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1993년 ‘단국대 입시서류 폐기사건’과 1998년의 학교법인 부도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단국대는 두 차례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분당에 제3캠퍼스 건립을 추진하는 등 재도약에 나서고 있다.
‘이제는 학교도 부도나는 시대’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학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일부에서는 다른 대학 10여 군데도 부도가 예상된다며 완전히 문을 닫는 대학도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도 이후 부실대학의 대명사격이 돼버린 단국대학교로서는 이런 불명예스러운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하루 빨리 잊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당장이라도 문을 닫게 될 듯 흉흉한 소문의 대상이던 단국대는 여전히 ‘건재해’ 있다.
“부도(不渡)요? 제가 입학할 때 그런 보도로 마음이 뒤숭숭하긴 했지만 지금껏 우리 학교가 ‘부도 위기에 놓인 대학’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경영학 전공 채민하(22)씨는 지난 4년간의 대학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단국대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면서 그동안 캠퍼스를 하나 더 늘렸다. 1999년 대학종합평가 10개 부문 우수 및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고 2000년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선정 되는 등 각종 대학평가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단국대의 교명(校名)은 단군의 ‘단(檀)’과 애국의 ‘국(國)’을 따 만든 이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단국대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자임하고 있다. 단국대의 역사는 해방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국대의 설립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박기홍 선생의 부인인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여사와 독립운동가 범정(梵亭) 장형(張炯) 선생이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한 범정 선생은 해방 이후 귀국해 ‘국민동지회’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극심한 정국혼란을 보고 자신의 여생을 인재양성에 두기로 결심한다. 백범 김구 선생 역시 범정 선생의 이같은 의지에 동조해 정계보다 교육계에서 애국의 길을 실천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민족사학 단국대학교
범정 선생은 나라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설립을 추진했고, 조희재 여사가 100만 평의 토지를 재단 설립에 필요한 기본자산으로 기부했다. 대학의 이름은 통일 이후 남북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동질성인 ‘단군의 자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 ‘단국(檀國)’이라고 했고 교육이념은 구국(救國) ·자주(自主)·자립(自立)을 내세웠다. 대학의 상징도 단군설화에 등장하는 ‘곰’으로 정했다.
이른바 ‘국대안(國大案) 파동(미군정청이 여러 국립전문학교들을 통폐합해 서울대학교를 발족시킨다는 구상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교육계가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선교사들의 지원 없이 순수한 민족 재원으로 설립하는 대학이 탄생했다는 소식은 전국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단국대학교는 올해로 개교 55주년을 맞는다. 1990년대 들어 단국대학교는 크게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하나는 1993년 이른바 ‘단국대 입시서류 폐기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98년의 학교법인 부도사태다. 1993년의 사건은 최소 4년간 보관하게 되어 있는 입시관련 서류 3년치를 임의로 폐기한 사건이다.
당시 교육부는 이 사건이 부정입학 비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감사 결과 부정입학 사례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학교법인이 1707억원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학교법인이 일정금액 이상의 돈을 끌어 쓰려면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차입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한 해에도 수백억 원의 재산을 운용하는데 어떻게 그때마다 번번이 교육부의 승인을 받습니까. 거기다 우리 대학재단의 경우 자산(資産)의 대부분이 부동산입니다. 교육법상 대학은 재산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대학이 학교를 운영하자면 어떻게든 방도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단국대 법인관계자의 말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20여 년간 총장을 맡아왔던 장충식(張忠植)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재단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도 모두 해임되면서 관선이사가 파견됐다. 현재 학교법인 단국대학의 장충식 이사장은 1993년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학병원 건립 등 무리한 확장경영도 한 이유였겠지만 정권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측에서 정치자금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고 대학의 재산을 정치자금으로 은밀히 내놓는다는 것은 교육자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결국 정권이 바뀌자마자 감사가 시작되더군요.
파견된 관선이사가 ‘학교를 망하게 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느낀 참담함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듭니다. 만약 그때 정치자금을 지원했더라면 그 덕택에 어느 정도 대학이 발전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제의를 거절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건으로 삼성그룹으로의 인계 계획이 무산돼 학교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관선이사가 파견되면서 빚은 계속 쌓여갔고 대학은 결국 부도사태로 치달았다는 것이 장이사장의 설명이다.
흔히들 개혁은 리스크(risk)를 동반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개혁작업은 위험이 적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방안을 찾아 이뤄진다. 그런데 단국대의 역사를 훑어보면 발견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다른 이들이 꺼려하는 일과 리스크가 많은 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천안캠퍼스의 건립을 들 수 있다. 천안에 대학을 세우게 된 배경도 흥미롭다. 단국대는 정부에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앞장서 농촌봉사활동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단국대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곳은 충남 청양군 장곡마을.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하나였다. 당시 총장이던 장이사장은 학생들과 함께 서울과 청양 사이를 오가며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시설이 서울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상한 게 대학의 분교(分校)를 지역에 설립하는 것이었다.
천안캠퍼스에 대한 장이사장의 설명이다.
“천안지역 인사들을 만나 ‘천안에 대학을 세우겠다’고 하니까 모두 웃더군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馬)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옛말도 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었죠. 오히려 지역에 반듯한 대학이 있어야 인재가 양성되고, 그래야 지역이 발전할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요즘에는 지역에 대학을 세운다고 하면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겠지만 당시에는 주민을 이해 시키고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단국대 천안캠퍼스가 세워진 것은 1978년. 우리나라 대학으로서는 최초의 지방캠퍼스 건립이었다. 단국대 천안캠퍼스를 시작으로, 지금 천안에는 10여 개의 대학이 들어서 대학촌(大學村)을 형성하고 있다. 천안캠퍼스의 건립은 천안지역의 경기활성화에도 도움을 주었고, 단국대가 재학생 2만여 명의 거대 종합대학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현재 단국대는 교수·학생 수, 각종 시설 등 학교 규모면에서 전국 10위권 안에 들어 있다.
천안 단국대병원의 건립도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된 것이다. 1989년 착공해 1994년 개원한 단국대병원은 2만7100평의 부지에 연건평 1만9674평의 규모로 600병상을 갖춘 충남 최대의 의료기관이다. 이 병원을 건립할 당시에는 재단 내부의 반대의견이 거셌다고 한다.
수도권에 병원을 세우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지방에 세우려 하냐는 것이었다. 병원을 건립하는 데 소요된 1800억원의 예산이 1990년대 들어 대학재정을 위태롭게 한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장이사장은 병원에 대해서도 “대학이 돈을 벌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단국대학의 설립이념은 민족교육과 국가부흥에 있지 재산증식에 있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
손익을 따지지 않는 이러한 우직한 모습은 ‘동양학(東洋學)연구소’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70년 설립된 동양학 연구소는 한국문화를 중심으로 동양문화 전반을 연구하는 곳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활동 중 특기할 만한 것이 ‘한한(漢韓)대사전’ 편찬사업이다. 1977년부터 시작된 한한대사전 편찬 작업은 2006년 완간을 목표로 현재도 진행중이다.
총 15권으로 완성될 대사전 중 2001년 12월 현재 세상에 빛을 본 것은 4권. 아직도 17명의 전문요원과 외부 인력이 배치돼 원고의 주석·교열·윤문·교정 작업에 여념이 없다. 15권이 모두 출판될 때까지 소요되는 예산은 120억원 정도.
이 사전이 완성되면 6만여 개의 한자와 50만여 개의 어휘를 수록한 세계 최대의 한자사전이 탄생하게 된다. 한두 달 만에 논문 한 편,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내는 세상에 책 하나를 내놓는 데 100억이 넘는 예산을 투자하고 연인원 수만 명을 동원했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한대사전 역시 경제성만을 따지는 사람은 ‘부질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한대사전엔 손익계산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태반이 한자로 기록돼 있음에도 이를 해독하는 전문인력이 크게 부족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학자들이 타계하면 이를 계승, 발전시킬 길이 없어집니다.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 어떻게든 자료를 종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박사를 비롯한 대학자들을 모셔왔습니다. 막대한 예산과 인원이 투입되더라도 민족을 위해 언젠가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승국(金承國) 총장의 설명이다.
남들이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개척하려는 정신은 대학 운동부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국대는 다른 대학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비인기 종목의 팀을 꽤 많이 만들었다. 현재 대학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럭비부가 1955년에 창단됐고, 테니스 복싱 체조 조정 스키 빙상 씨름 등이 단국대가 지난 50년 동안 육성해온 종목이다.
학교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인기종목을 육성하면서 무리한 스카우트로 구설수에 오르는 이른바 명문 사립대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특히 동계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던 1970년대 중반 탄생한 빙상부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배기태를 비롯해 나윤수, 김기훈, 이준호 등이 단국대 출신이다.
국내 유일의 몽골어학과
단국대에 설치된 전공학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특수교육학과와 몽골어학과다. 단국대는 1971년부터 특수교육학과를 설치, 장애아동의 교육을 담당하는 특수교사를 양성해왔다. 현재까지 1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졸업생들은 장애인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1997년에는 특수교육대학원을 한국 최초로 신설해 한국의 특수교육을 선도할 특수교사와 전문가를 다각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양성하고 있다. 몽골어학과는 역사적·인종적으로 우리민족과 같은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몽골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을 염려한 장이사장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학과다. 현재 국내에서 몽골어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단국대뿐이다.
스포츠과학 분야도 단국대가 의욕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학문 분야다. 단국대가 스포츠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한 국가는 ‘스포츠 과학 세미나’를 열게 돼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이를 담당할 연구센터나 대학이 없었다.
각종 대회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었지 선수와 지도자를 양성하고 관리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던 때였다. 더구나 스포츠마케팅이나 생활체육, 스포츠의학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장이사장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을 맡고 있어 이러한 역할을 할 학교로 단국대가 선정됐고 이때부터 스포츠과학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현재 천안캠퍼스에 있는 스포츠과학부는 생활체육학 전공, 운동처방학 전공, 스포츠경영학 전공으로 세분되어 있으며, 2000년 3월에는 스포츠마케팅, 스포츠의학, 레저지도 등을 다루는 스포츠과학대학원이 문을 열었다.
대학들이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면서 세계의 유수대학들과 자매결연 맺기에 바쁜 때에 단국대학은 다른 대학들이 소홀하기 쉬운 중남미 국가들과의 결연에 큰 힘을 쏟고 있는 것도 특색 있는 부분 중 하나다. 한국과 중남미 15개국을 잇는 다리가 되자는 취지로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은 중남미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
2000년에는 ‘문학을 통해 본 중남미’라는 주제로 매월 1∼2개국을 선정해 연중 중남미문학에 대한 발표·토론회를 개최했고 지난해에는 ‘음악과 춤을 통해 본 중남미’라는 주제로 15개국 대사(大使)를 매월 한 명씩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1993년과 1998년 두 차례 위기에 처했을 당시 단국대에 대한 여러가지 음해성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캠퍼스를 모두 처분할 것이다’ ‘단국대병원을 외국기업에 매각할 계획이다’ ‘신(新)캠퍼스도 백지화될 것이다’라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단지 소문이었을 뿐이었고 단국대는 구성원들이 한데 뭉쳐 위기를 극복했다. 교수, 학생, 교직원이 자발적으로 구교(救校)협의회를 구성해 성금을 모으는가 하면 총학생회 간부들이 봉사장학금을 반납했다. 전직원이 받은 월급을 학교에 되돌려주기도 했다.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교수들이 성금을 보내왔고 심지어는 학교 앞에서 어학용 테이프를 판매하는 가게 주인이 구교자금을 갖고 학교를 찾기도 했다. 학군단 출신으로 군복무중 숨진 한 졸업생의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은 아들도 단국대의 정상화를 바랄 것”이라며 성금을 내놓기도 했다.
단국대 구성원들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학교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더욱 커졌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현재 단국대는 경기도 용인에 새 캠퍼스를 조성중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용인시에 위치해 있지만 분당 신도시와 인접해 단국대에선 새캠퍼스를 ‘분당캠퍼스’라고 부른다. 서울에서 30분 거리, 총 33만 평의 부지에 들어서는 이 초대형 캠퍼스는 단국대의 숙원사업이다.
분당캠퍼스가 완공되면 국내 최초로 서울, 분당, 천안 3개의 캠퍼스를 거느린 이른바 ‘멀티캠퍼스’로 거듭나는 것이다. 분당캠퍼스에는 동양학, 첨단공학, 언론문화, 외국어계열, 특수교육학과를 이전해 특성화할 계획이고 천안캠퍼스를 의·치대, 생명공학계열, 창업보육센터를 중심으로 한 생명공학의 메카로 조성할 계획이다. 한편 서울캠퍼스는 대학원 중심으로 전환해 특수대학원과 사회교육원을 입주시킬 예정이다.
김총장은 대학의 미래에 대한 강한 자심감을 내비쳤다.
“우리 대학은 건학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각자들이 민족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논밭을 팔아 만든 대학입니다. 세상이 워낙 각박해 정직하고 순수하게 말하면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 대학은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가장 크고 유일한 목표입니다. 분당캠퍼스 건립도 대학의 몸집 부풀리기가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후학들에게 꼭 필요한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입니다. 온갖 위기에도 단국대는 그 설립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지가 앞으로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