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화류계의 주역 별감

  • 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3-01-30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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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한국의 유흥문화를 선도한 부류가 오렌지족이라면, 조선시대의 오렌지족은 별감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기생들을 지배하며 조선의 뒷마당 문화를 주도했던 별감들. 그들의 화려한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노동이 없으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노동하기보다 놀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노동은 신성한 것이지만, 인간은 그 신성한 일만으로 일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다. 노동만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비인간적일 것인가? 아니,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노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의 반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노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노는 인간과 노는 문화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퍽 궁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책에서도 인간 삶의 반을 이루는, 역사의 절반이 될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의 이 글은 우리나라 역사의 절반(?)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다.

    놀이문화 소개하는 노래

    ‘한양가’란 가사가 있다. 1848년경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이 가사는 국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9세기 중반 서울 시정의 활기찬 동태를 정확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한양가’는 당시 신분과 사회적 처지에 따른 한양의 각계각층이 즐기던 온갖 놀이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바,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자료다.

    화려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소냐/장안소년 유협객과 공자왕손 제상자제/부상대고 전시정과 다방골 제갈동지/ 별감 무감 포도군관 정원사령 나장이라/남북촌 한량들이 각색 놀음 장할시고/공물방 선유놀음 포교의 세찬놀음/ 각사 서리 수유놀음 각집 겸종 화류놀음/ 장안의 편사놀음 장안의 호걸놀음/재상의 분부놀음 백성의 중포놀음/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철다



    공자 왕손으로부터 돈 많은 시전상인을 거쳐 의금부 나장까지 온갖 계층이 모두 유흥을 벌인다. 놀이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나는 이 놀이의 내용을 알기 위해 10년 이상 무척 애썼지만, 아직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놀이를 소개한 뒤에 각별히 관심을 끄는 별감(別監)의 ‘승전(承傳)놀음’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다른 놀음은 모두 이름만 소개되어 있으나, 승전놀음은 ‘한양가’ 전체 서술량의 약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구체적인 놀이 과정을 길게 묘사하고 있다. 별감들이 기생과 가객(歌客), 금객(琴客)을 불러 기악(器樂)과 노래, 춤으로 벌이는 거창한 놀이판인 승전놀음이 조선후기 서울의 놀음판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승전놀음의 주최자인 별감이다. 별감에 대해서는 ‘검계(劍契)와 왈자(‘신동아’ 2002년 11월호 참조)를 다루면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대전별감은 왈자의 하나로 조선후기 유흥계의 주역이었다. 나는 그 동안 이런 글 저런 글에서 별감의 존재에 대해 주목해왔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것이란 말이 있듯, 조선의 사회적 승자는 양반계급이었기에 역사 서술의 주 대상도 늘 양반이었다. 민중사관은 양반의 대타적 존재인 민중을 역사서술의 주 대상으로 삼지만, 이도저도 아닌 중간부류들은 늘 잊혀지게 마련이다. 별감 같은 부류가 그 짝이다. 나는 이 글에서 별감을 서술 대상으로 불러내고자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별감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여럿이다. 유향소(留鄕所)의 좌수(座首) 다음가는 자리를 별감이라 부르고, 또 하인들끼리 서로를 별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 용례와는 다른 궁중의 액정서(掖庭署) 소속의 별감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딱딱하지만, 먼저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들추어보자.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잡직(雜職)조’에 액정서란 관청이 있다. 액정서의 임무는 이렇다.

    ‘왕명의 전달과 알현(謁見, 傳謁) 및 왕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공급, 궐문 자물쇠와 열쇠의 관리, 궁궐 내정(內庭)의 설비 등의 임무를 맡는다.’

    첫째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임금을 알현하는 일을 중간에서 대신 전하는 일, 그리고 임금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를 간수하고 대령하는 일로 주로 임금과 관계된 일이다. 그 다음이 대궐의 관리에 관계된 일이다. 즉 대궐 안에 있는 온갖 문의 열쇠, 자물쇠를 관리하고, 궁궐 마당에 무언가 설치하는 일을 도맡는다. 이런 일들은 문필(文筆)에 관계되는 양반들의 관직과는 달리 몸을 부려서 하는 육체노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일이기에 이들의 위세는 어지간한 양반 못지않다. 때문에 이들 역시 위세를 떨 수 있었던 것이다.

    별감은 액정서에 소속된다. 위의 ‘경국대전’에서 ‘왕명을 전달한다’ 해서 꼭 왕에게만 소속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별감은 왕비와 동궁에게도 소속돼 있다. ‘경국대전’의 ‘형전(刑典)’ ‘궐내(闕內) 각차비(各差備)’에 별감의 수가 나와 있는데, 대전(大殿, 王)의 별감은 46명, 왕비전 별감 16명, 세자궁 별감 18명, 문소전(文昭殿) 별감 6명으로 모두 86명이다. 이 중 문소전 별감은 곧 없어졌으니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별감의 수는 문소전 별감을 제외하면 80명이다. 연산군 때 120명이 된 적이 있고 인조 때 150명으로 증가한 적도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일로 생각된다.

    별감의 수는 영조대의 ‘속대전’에 와서 약간 바뀌는데, 다른 변화는 없고 세손궁 별감 10명이 추가된다. 이것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죽자, 손자인 정조가 세손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별감은 액정서의 지휘 아래에 있으니, 먼저 액정서의 조직을 간단히 살펴보자.

    ‘정6품 사알 1명, 사약 1명/종6품 부사약 1명/정7품 사안 2명/종7품 부사안 3명/정8품 사포 2명/종8품 부사포 3명/정9품 사소 6명/종9품 부사소 9명’

    복잡한 설명을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정6품과 종6품의 사알, 사약, 부사약은 오로지 대전(왕) 소속이다. 정7품 사안 2명부터는 왕비전과 세자궁 소속이다. 그리고 정7품 사안까지는 완전히 독립된 위계지만, 종7품 부사안부터는 별감들이 돌아가면서 보직을 맡는다. 즉 종7품 봉무랑(奉務郞)이 별감으로서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다. 요컨대 액정서를 채우는 주 세력은 별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는 존재’로 주목받은 별감

    흥미로운 것은 관직 이름을 보면 이들이 하는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알(司謁)의 ‘사(司)’는 관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알은 ‘알현’을 관장한다, ‘사약(司쿫)’은 자물쇠를 관장한다, ‘사안(司案)’은 ‘서안(書案)을 관장한다, ‘사포(司圃)’는 채소밭, 혹은 꽃밭을 관장한다, ‘사소(司掃)’는 청소를 관장한다는 뜻이 된다. 이름만 들어도 이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별감은 그들의 직무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정에서의 행각이 별감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별감은 ‘노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앞서 왈자에 대해 언급했을 때 왈자의 한 부류로 별감을 들었다. 별감이 왈자의 한 부류가 된다는 것은 조선후기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시 한번 관련 자료를 보자. ‘관우희(觀優戱)’란 문헌이 있다. 송만재(宋晩載)란 사람의 아들 송지정(宋持鼎)이 1843년 과거에 합격을 하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는 법이고, 또 광대패를 앞세워 각종 놀음판을 벌이게 마련인데, 송만재는 집안이 가난하여 광대패를 부를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광대패의 연희(演戱)를 50수의 시로 읊어 아들의 과거 합격을 축하했던 것이다. ‘관우희’가 바로 그 작품이다.

    ‘관우희’는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등 당시 광대패가 공연했던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어 국문학과 민속학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글에서 필요한 부분은 판소리 열두마당을 소개한 부분이다. 그 열두마당을 시로 읊고 있는데, 그 중 ‘왈자타령’을 읊은 시에 “遊俠長安號曰者, ?衣草笠羽林兒”란 구절이 있다. “장안의 유협을 왈자라 하나니, 천의(?衣) 입고 초립(草笠)을 쓴 우림아(羽林兒)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천의와 초립이란 말이 비상하게 중요한데, 이는 다름아닌 별감의 복색을 형용한 것이다. 천의(?衣)의 ‘천(?)’은 꼭두서니를 말하는 바, 꼭두서니는 붉은색의 염료로 쓰인다. 즉 붉은 색 옷이란 뜻이다. 초립은 문자 그대로 초립인데, 붉은색 웃옷과 초립은 별감의 복색이다. 별감은 흰 옷을 입고 외출하지 못한다. 따라서 천의초립이라 하면 바로 별감을 가리킨다. 우림이란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액정서 별감을 지칭한다.

    유협이란 말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유협은 다름아닌 협객이다. 협객이란 무엇인가? 연암 박지원은,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俠)’이라 하고, 재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고(顧)’라고 한다. 고일 경우 명사(名士)가 되고, 협일 경우 전(傳)으로 남는다. 협과 고를 겸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힘으로 남을 돕는 것이 협객이며 협은 무력을 바탕으로 삼는 행위다. 사실 의협적 행동과 폭력은 남을 돕느냐, 아니면 남을 착취하느냐의 방향만 다를 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무력적 성격에 주목하여 유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왈자는 폭력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했는데, 별감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의 행동은 실로 윤리도덕과는 상관없이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임금의 친척 두들겨팬 별감

    ‘왕조실록’에는 이들 별감에 관한 자료가 적지 않은데, 대개는 술을 먹고 소란을 떨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관계된 것들이다. 다음은 숙종 35년 3월25일 사헌부가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별감 송정희(宋鼎熙) 등 6, 7명의 불량배들이 술과 고기를 차려놓고 창녀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왁자하게 놀고 있어, 사헌부의 금리(禁吏)가 체포하려고 하자 금리를 구타하고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창녀의 집이란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방으로 짐작된다. 이 자료는 별감들이 기방의 주 고객이었음을 증언한다. 아울러 그들이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가진 부류임을 증언한다.

    이들의 폭력적 행동의 사례는 종종 보고되는 바다. 영조 43년 7월29일 액예(掖庭署 下隷란 뜻, 곧 별감을 가리킴)가 야음을 타서 의녀(醫女)를 결박한 뒤 치마를 벗기고 추행한 사건이 보고되고 있다. 이것은 별감이 기생 노릇을 하는 의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숙종 38년 10월20일 형조판서 박권(朴權)이 보고한 별감 김세명(金世鳴) 사건은 별감이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별감 김세명은 능소(陵所)에서 적간(摘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종실인 원흥(元興) 수(守) 이후(李煦)는 김세명의 인사를 받고도 답배를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김세명이 욕을 하자, 이후는 김세명의 입에 오물을 집어넣고 난타하였다. 종실이라면 임금의 친척이니 별감과는 지체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종실이 별감의 입에 오물을 집어넣고 난타한 것은 인정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신분사회였으니 또 이해할 수가 없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세명은 동료 20여 명을 이끌고 이후의 집을 찾아가 이후를 끌어내 묶은 뒤 있는 힘을 다해 구타하여 분을 풀었다. 이후의 형 이경(李炅)이 입궐하여 이 사태를 알리려 했더니, 별감 등이 알아차리고 역시 빰을 치고 구타하였다. 별감의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결국 김세명은 절도에 전가사변(全家徙邊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함)되었다.

    유사한 사건이 있는데, 순조 16년 6월3일의 것이다. 포교들이 술 취한 무뢰배들을 잡았는데, 그 중 박몽현(朴夢賢)이란 자가 있었다. 궁중의 하인을 지냈다 하기에 석방했는데, 박몽현의 아비가 왕대비전의 별감 한 패를 거느리고 우포도대장 서영보(徐榮輔)의 집으로 들이닥쳐 포교와 포졸을 구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포교의 집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린 일로 처벌되었다.

    숙종 43년 2월6일에는 별감이 금령을 범하고 밤에 나다니다가 포도청에 잡히자 같은 별감들이 나졸을 구타하고 갇힌 동료를 구출하는 사건이 있었고, 영조 51년 2월25일에는 액예와 포교가 술집에서 싸우다가 액예가 포교를 결박하였는데, 액예들이 무리를 지어 포교를 구타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별감이 통행금지를 어기고 돌아다니거나(정조 4년 12월25일), 술을 먹고 술주정을 하는 것은 (순조 10년 4월30일) 다반사였고, 술에 만취하여 포교에게 잡히자 포교의 집에 들이닥쳐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선술집 : 주사거배(酒肆擧盃)’. 조선시대 술집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전하는 것으로 가운데 짙은색(빨간색) 옷을 입은 이가 별감이다.

    이처럼 별감의 존재는 그들의 직역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주로 유흥과 술주정과 폭력, 범법과 관련해 기록에 남아 있다. 이런 인간들을 역사학에서 다룰 리가 없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엇보다 별감이 조선후기 유흥문화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하다.

    그런가 하면 별감은 조선후기 복식의 유행을 주도한 축이었다. 한번 살펴볼 만하지 않은가? 먼저 별감의 복색부터 보자.

    별감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소비적이었던 바, 그런 생활의 특징적 국면이 잘 드러난 분야가 바로 복색이었다. 예컨대 한문 단편 ‘재회’는 그 첫머리를 “한 부잣집 아들이 외도에 빠져 가산이 많이 기울었지만, 별감이 된 까닭에 의복이 매우 화려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한양가’가 묘사하고 있는 별감의 패션을 보자.

    별감의 거동 보소, 난번별감 백여 명이/맵시도 있거니와 치장도 놀라울 사/편월상투 밀화동곳 대자동곳 섞어 꽂고/곱게 뜬 평양 망건, 외점박이 대모관자/상의원 자지팔사, 초립 밑에 팔괘 놓고/남융사 중두리의 오동입식 껴서 달고/손뼉 같은 수사갓끈 귀를 가려 숙여 쓰고

    난번별감이란 교대근무를 마치고 나온 별감이다. 이들의 복색을 머리부터 살펴보자. ‘편월상투’의 ‘편월’은 조각달이다. 상투를 그냥 뭉치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낱낱이 펴고 빗질을 해서 조각달처럼 보이게 모양을 낸 상투다. 동곳은 상투가 풀어지지 말라고 꽂는 것인데, 여기도 사치를 한다. ‘밀화동곳’의 밀화는 호박인데, 누런 호박은 마치 꿀이 엉긴 것 같다 하여 밀화라고 부른다. 여성들의 노리개, 단추, 비녀, 장도와 남자들의 갓끈을 만드는 데 쓰는데, 상당한 사치품이다(대자동곳은 大字동곳으로 보인다. 아마도 큼직한 동곳인 듯).

    상투를 짰으면 망건을 쓴다. 망건은 상투를 튼 머리에서 머리털이 흩어지지 말라고 동여매는 것이다. 곱게 짠 ‘평양망건’을 쓴다고 했는데, 망건은 원래 이마 쪽 부분을 외가닥으로 짜서 이마가 훤히 비치게 한 것이 고급품이다. 곱게 짰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일 터. 평양망건은 아마도 평양에서 만든 망건을 최고로 쳤기 때문에 든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은 정조 이후 가장 명예로운 벼슬이었던 규장각 각신이 쓰는 와룡관을 왕명을 받아 제작했던 곳이니, 머리에 쓰는 물건의 제작으로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사치스러운 초립 장식

    ‘외점박이 대모관자’란 무엇인가. 망건에는 망건을 죄는 당줄이란 줄이 있는데, 이 줄을 꿰어 거는 것이 관자다. 관자는 신분에 따라 재료가 다르다. 보통 관원은 옥관자를 달다가 정3품 당상관이 되면 금관자를 달고, 정2품이 되면 다시 옥관자를 다는데, 이때의 옥은 특별히 품질이 좋은 것으로 만들고 따로 도리옥이라 부른다.

    벼슬아치가 옥관자를 달면 나으리, 금관자를 달면 영감, 도리옥을 달면 대감이라 부른다(그 위는? 상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금관자도 옥관자도 아닌, 대모관자다. ‘대모’는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바닷거북의 등딱지다. 안경테, 담뱃갑, 갓끈, 장도, 풍잠 등 장신구나 생활용품의 재료로 쓰이는데 아주 고급품으로 친다. 외점박이 대모관자란 검은 점이 하나 강조되어 있는 대모로 만든 관자다. 특히 더 고급으로 치는 것이다. 별감은 옥관자 금관자를 달 일이 없는 사람이므로 대모로 만든 관자로 사치를 했던 것이다.

    상투를 짜서 동곳을 꽂고 망건을 둘렀으면, 이제 모자를 쓸 차례다. 별감이 특별하게 만든 초립을 쓴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상의원 자지팔사, 초립 밑에 팔괘 놓고”란 부분이 바로 초립의 치레를 말한 부분인데, ‘팔괘 놓고’란 부분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상의원 자지팔사’란 상의원에서 만든 8가닥(八條)의 실로 꼰 자줏빛 끈이란 뜻이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중의 보물을 맡아보던 곳인데, 여기서 직조(織造)를 하기도 한다. 상의원에서 짠 고급의 직조물로 초립의 안을 받쳤던 모양이다.

    ‘남융사 중두리’ 역시 초립에 관계된 것이다. ‘중두리’는 가장자리다. 방의 벽과 방바닥 사이를 방중두리, 또는 마루중두리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초립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남융사(藍絨絲)’에서, 융은 원래 감이 두툼하고 고운 모직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남빛이 나는 융실로 만든 초립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고급품이다.

    이렇게 만든 초립에 ‘오동입식(烏銅笠飾)’을 단다. 초립은 꼭 별감만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별감의 초립에는 구분되는 점이 있다. 별감의 초립은 대오리를 묶는 물건인 호수(虎鬚)를 좌우와 뒤에 꽂는다. 호수를 꽂으려면 장치가 필요한데, 이 장치가 오동입식으로 보인다. 오동은 적동(赤銅), 곧 검붉은 산화구리니, 오동입식은 산화구리로 만든 입식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초립의 사진을 보면 초립 옆에 대오리를 꽂을 수 있는 대롱 같이 생긴 물건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한다. 초립을 썼으면 끈으로 턱에 묶어서 고정시켜야 하는데, 그 끈이 수사갓끈이다. 수사(繡紗)는 수놓은 비단갓끈으로 역시 고급품이다.

    이제 옷치레를 보자.

    다홍생초 고운 홍의 숙초창의 받쳐 입고/보라누비 저고리에 외올뜨기 누비바지/양색단 누비배자 전배자 받쳐 입고/금향수주 누비토수 전토수 받쳐 끼고

    홍의(紅衣)는 별감만이 입을 수 있는 별감 특유의 옷이다. 이것은 다홍색의 생초로 만든다. 생초는 생사, 곧 삶지 않은 명주실로 짠 비단이다. 홍의 안에는 ‘숙초창의’를 받쳐 입는다 했는데, 창의는 공태와 무가 없는 통소매에 양옆을 튼 보통 사람의 간단한 나들이옷이다. 이때 창의는 숙초, 곧 삶은 명주실로 짠 비단으로 만든다.

    창의 속에 입는 저고리는 보라색의 누비저고리이고, 바지도 외올뜨기 누비바지다. 누비는 손이 많이 가는 것이라 사치품이다. 외올뜨기는 외올, 즉 단 한 가닥으로 뜬 망건이나 탕건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다만 ‘외올뜨기 누비바지’가 어떤 것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고리 위에는 배자를 덧입는다. 배자는 조끼와 비슷한데, 단추가 없고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내리 터놓은 옷이다. ‘양색단 누비배자’란 것은 양색단을 감으로 쓴 누비배자란 뜻이다. 양색단(兩色緞)은 씨와 날의 빛이 다른 실로 짠 비단이다. 이것을 감으로 삼아 만든 배자에 솜을 넣어 누빈 것이니, 아주 호사스런 옷이다. ‘전배자’는 짐승의 털가죽(氈)을 안에 댄 배자를 말한다. 이 역시 호사치레다.

    토시는 아는 바와 같이 저고리 소매처럼 생긴 방한구로 팔에 끼는 것이다. ‘전토시’는 전배자처럼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금향수주 누비토수’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금향(錦香)은 붉은빛을 띤 검누른 빛깔이고, 수주(水紬)는 아주 품질이 좋은 비단이다. 즉 검붉은빛의 고급 비단으로 만든 토시다.

    옷만 좋게 차려 입으면 멋내기는 끝인가? 아니, 장신구가 남아 있다. 지금 세상은 남자들도 시계나 반지, 안경, 목걸이 등으로 몸을 치장하지 않는가? 예나 지금이나 멋내기의 본질은 같은 법이다. 별감은 장신구 치레도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중동치레 불작시면 우단 대단 도리불수/각색 줌치 묘히 접어 나비매듭 벌매듭에/파리매듭 도래매듭 색색이로 꿰어차고/오색비단 괴불줌치 약낭 향낭 섞어차고/이궁전 대방전과 금사향 자개향을/고름마다 걸어 차고 대모장도 서장도며/밀화장도 백옥장도 안팎으로 빗기 차고/삼승보선 순혹파서 맵시있게 하여 신고/제제창창 앉은 모양 절차도 거룩하다

    ‘중동치레’의 ‘중동’은 요즈음 말로 ‘중간’ ‘허리’다. 중동치레는 허리 부분의 치장이다. 대체로 허리띠, 쌈지, 주머니, 면경집 따위를 허리춤에 차는데, 이것들을 호사스럽게 하여 사치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패션 선도한 별감

    ‘우단 대단 도리불수’에서 ‘대단’은 중국제 비단이고 ‘우단’은 거죽에 고운 털이 돋게 짠 비단이다. ‘도리불수’란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해볼 수는 있다. 도리(桃李)는 복숭아꽃 오얏꽃이다. 불수는 국어사전에는 없으나 이훈종 선생에 의하면(‘민족생활어사전’, 한길사, 1992, 124면) 양손을 모아 합장하는 것처럼 생긴 밀감을 부처님 손 같다 하여 불수감이라고 하는 바, 인자하고 복을 베푸는 것을 뜻하는 무늬라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우단 대단 도리불수’는 도리나 불수 무늬를 놓은 대단 우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갖가지 줌치, 곧 주머니를 접어 나비·벌·파리 모양의 매듭이나 도래매듭(두 줄을 엇매겨 두 층으로 엮은 매듭)을 엮어 찬다는 것이다.

    괴불은 괴불주머니인데, 색이 있는 네모난 헝겊을 마름 모양으로 접고 안에 솜을 통통하게 넣어 수를 놓고 색실을 단 것이다. 주머니 끝에 다는 장식용 노리개다. 괴불주머니 외에 또 약냥(藥囊)·향낭(香囊), 곧 약주머니와 향주머니를 다는데, 이궁전 대방전 금사향 자개향이 바로 약낭 향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궁전 대방전은 중국에서 수입한 향의 이름이다. 금사향 역시 중국제 향이기도 하고, 또 향을 넣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후자의 뜻으로는 은으로 만든 네모꼴의 갑에 도금을 한 뒤 한충향(漢沖香)을 넣은 것이란 뜻이다. 한충향은 보통 여자들이 노리개로 차는 향이다. 향기를 취하기도 하고 곽란 같은 급한 증세에 약으로도 쓴다. 자개향은 아마 자개로 꾸민 향을 넣은 작은 상자일 것이다.

    주머니, 괴불줌치, 약낭, 향낭을 단 뒤에 장도를 단다. 장도는 은장도를 연상하면 된다.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인데, 이것 역시 사치용으로 남이 보도록 찬다. 대모장도 서장도 밀화장도 백옥장도는 모두 장도의 집을 꾸미는 재료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다른 것은 설명할 것이 없고, 서장도는 물소뿔로 만든 장도다.

    별감의 복색은 사치스럽다. 비단과 전(氈)과 누비와 각종 장신구로 몸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과연 사치의 극을 달린다 할 만하다. 옷과 장신구의 사치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다. 별감의 복색에서 나는 조선후기 남성들의 복색에 대한 염원을 본다. 아마도 별감의 복색이야말로 조선후기 남성들이 가장 바라는 패션이 아니었을까.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신윤복의 ‘기방난투 : 유곽쟁웅(游廓爭雄)’. 기방 앞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는 장면을 그렸는데 가운데에서 싸움을 말리는 이가 기방의 운영자인 별감이다.

    ‘한양가’ 본문을 읽어보면 서울 시정의 놀이 중에서 승전놀음을 으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유흥계의 총아 별감이 주최하는 승전놀음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승전놀음에 대해 ‘한양가’ 말고는 다른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이병기 선생의 ‘가람일기’에서 어떤 노인에게서 승전놀음에 대해 들었다는 간단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한 줄도 써놓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한양가’가 승전놀음에 관한 유일한 기록일 것이다.

    ‘승전(承傳)’이란 왕명을 전달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별감의 고유한 업무다. 그러나 ‘승전’이 ‘놀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승전이란 게 별감이 하는 일이니, 별감을 대신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승전놀음을 별감놀음이라고도 부르니 말이다.

    ‘한양가’에 묘사된 승전놀음은 기본적으로 연예를 관람하는 놀이다. 여기서 연예를 제공하는 부류는 가객(歌客), 금객(琴客)과 기생이다. 물론 기생이 가장 수가 많고 또 중요하다. 별감들은 기생을 대거 동원하여 거창한 놀음판을 벌였던 것이다. 대개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기생을 불러 놀음판을 벌일 수 있으나, 별감의 경우는 좀 유별났던 것 같다. 기생과 별감의 관계에 대해 먼저 간단히 알아보고 승전놀음에 대해 살펴보자.

    ‘사처소(四處所) 오입쟁이’란 말이 있다. 네 곳의 오입쟁이란 뜻인데, 조선후기 서울의 기생이 소속되어 있는 관청 넷을 말하는 바, 내의원(內醫院) 혜민서(惠民署) 상의원(尙衣院) 공조(工曹)가 그것이다. 내의원의 기생이란 원래 의녀(醫女)다. 의녀의 소임을 맡으면서 동시에 기생 노릇을 했던 것이다. 혜민서 역시 마찬가지다. 상의원은 원래 임금의 의복과 대궐 안의 보물을 관리하는 곳이다. 상의원의 침선비(針線婢)는 원래 임금의 의복을 짓는 구실을 맡아 하는데, 동시에 기생을 겸업한다. 공조에도 군사들의 의복을 짓는 침선비가 있어 이들 역시 기생의 역할을 하였다. 이 중 내의원의 기생을 특별히 약방기생(藥房妓生), 상의원의 기생을 상방기생(尙房妓生)이라 한다.

    원래 이들은 기생이 아니었다. 조선전기에는 따로 기생이 있었으며, 기생은 모두 장악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을 기생처럼 부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이 기생을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장악원이 붕괴되자, 이들이 기생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사처소 기생의 성분은 다양하다. 왕실의 잔치에 지방의 기생이 올라온다. 이들은 잔치를 치르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서울에 머물기도 한다. 물론 서울 자체에서 충당되는 기생도 있다. 어쨌거나 서울의 기생은 출신은 다양하지만, 일단 이 네 곳에 소속된다. 이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생의 영업권을 갖는 자가 기부인데, 기부는 별감, 포도군관(捕校), 승정원 사령(使令), 의금부 나장(羅將), 궁가(宮家)나 외척가의 겸인(탙人,청지기), 무사(武士)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 때 대원군이 집정하자, 의금부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만 허락하고 관기(官妓)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처소 기부의 내력이다.

    별감과 기생의 특수 관계

    사처소 기부 중에서도 가장 끗발이 있는 것이 바로 별감이며, 별감 중에서도 대전별감이 으뜸이었다. 기생은 ‘조(操)’라는 것이 있어 양반이나 부호의 명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대전별감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승지나 참판 등 고위관료 외에는 기생에게 ‘해라’를 못하고 모두 ‘하게’를 하였는데, 유일하게 액정서의 사알이나 사약은 ‘해라’를 할 수 있었다. 별감과 기생은 이처럼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 승전놀음에서 별감이 수많은 기생을 불러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이제 승전놀음 이야기를 해보자. 승전놀음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유득공이 쓴 ‘유우춘전(柳遇春傳)’에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유우춘전’의 주인공 유우춘은 해금의 명수다. 이 작품은 높은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는 유우춘과 값싼 음악을 요구하는 몰예술적 취향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 수작이다. 몰예술적 취향의 대표적인 경우로 별감이 나온다. 임형택 교수의 번역을 보자.

    또 가령 춘풍이 태탕하고 복사꽃 버들개지가 난만한 날 ‘시종별감’들과 오입쟁이 한량들이 무계의 물가에 노닐 적에 침기(針妓, 침선비) 의녀(醫女)들이 높이 쪽찐 머리에 기름을 자르르 바르고 날씬한 말에 홍담요를 깔고 앉아 줄을 지어 나타납니다. 놀음놀이와 풍악이 벌어지는 한편에 익살꾼이 섞여 앉아서 신소리를 늘어놓지요. 처음에는 요취곡(군악 계통의 곡조)을 타다가 가락이 바뀌어 영산회상이 울립니다. 이때에 손을 재게 놀려 새로운 곡조를 켜면 엉켰다가 다시 사르르 녹고, 목이 메었다가 다시 트이지요. 쑥대머리 밤송이 수염에 갓이 쭈그러지고 옷이 찢어진 꼬락서니들이 머리를 끄덕끄덕, 눈깔을 까막까막하다가 부채로 땅을 치며 ‘좋아, 좋다!’ 하며, 그 곡이 가장 호탕한 양 여기고 오히려 하잘것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유우춘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과연 예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가까운지는 의문이나 여기서 시종별감 오입쟁이들이 침기 의녀 등 기생을 불러 풍악을 잡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것은 다음에 언급할 승전놀음의 원형으로 보이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뒤의 ‘승전놀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더 이상 상고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이제 본문을 보도록 하자.

    구경 가자 구경 가자 승전놀음 구경 가자/북일영 군자정에 좋은 놀음 벌였구나/눈빛 같은 흰 휘장과 구름 같은 높은 차일/차일 아래 유둔 치고 마루 끝에 보계판과 아로새긴 서까래에/각 영문 사촉롱을 빈틈없이 달아놓고/좁쌀구슬 화초등과 보기 좋은 양각등을 차례 있게 걸어놓고/난간 밖에 춘화 가화 붉은 비단 허리 매어/빙문 진 유리병에 가득이 꽂아 놓고/각색 총전 몽고전과 만화등매 담방석에/백통 타구 옥타구며 백통 요강 은재떨이/왜찬합 당찬합과 아로새긴 교자상과/모란병풍 영모병풍 산수병풍 글씨병풍/홍융사 구멍 뚫어 이리저리 얽어매고

    북일영은 경희궁 북쪽에 있던 훈련도감의 분영이다(군자정은 미상). 먼저 이 놀이판의 차림새를 보자. 원래 사치스러운 별감의 놀이인 만큼 놀이판의 차림도 호사스럽다. 먼저 휘장을 치고 햇볕을 가리느라 차일을 높이 쳤다. 그 아래에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자리인 유둔(油芚)을 깔고, 마루 끝에 보계판(補階板)을 깔았다. 보계판은 좌석을 넓히기 위해 마루에 덧댄 판목을 이르는 말이다.

    화려한 잔치 마당

    아로새긴 서까래는 아마도 단청을 올린 서까래일 것이고, 거기에 각 영문(營門)에서 가져온 사촉롱(紗燭籠)과 양각등(羊角燈)을 곳곳에 달아매었다. 사촉롱은 여러 빛깔의 비단을 겉에 씌운 등롱이다. 등롱이란 대나무나 철사로 틀을 만들고 거기에 종이나 비단으로 겉을 바른, 들고 다닐 수 있는 등이다. 양각등은 양의 뿔을 불에 쬐어 투명할 정도로 얇게 편 뒤에 그것을 등롱에 씌운 등이다. 화초등은 아마도 꽃모양으로 만들거나 꽃모양을 그린 등인 듯하다. 다만 이 앞에 붙어 있는 좁쌀구슬과 화초등의 관계가 어떤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온갖 등을 단 뒤에 꽃으로 장식을 더한다. 춘화 봄꽃과 가화, 즉 조화를 붉은 비단으로 묶어 빙문(氷紋)이 진 유리병에 꽂아둔다. 유리병의 무늬가 얼음무늬와 같다는 것으로 곧 유리병에 꽃을 꽂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 앉을 자리도 호사스럽기 짝이 없다. ‘각색 총전 몽고전과 만화(滿花)등매 담방석’은 관람하는 사람들이 앉을 방석 종류를 늘어놓은 것이다. 총전과 몽고전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전(氈, 짐승의 털로 짠 피륙)으로 만든 따뜻한 고급 방석이다. 만화는 만화석(滿花席), 곧 꽃무늬를 넣어서 짠 왕골 방석이고, 등매는 가장자리를 검은 헝겊으로 두른 돗자리를 말한다. 담방석은 짐승털로 짠 방석이다. 이렇게 호사스런 자리를 깐 다음, 백동(白銅)과 옥으로 만든 타구와 요강과 은재떨이를 갖추었다.

    이런 잔치에 먹는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 교외에 나왔으니 당연히 먹을 것은 찬합에 담아 온다. 일본에서 수입한 왜찬합(倭饌盒)과 중국제 당찬합(唐饌盒)을 쓰고, 번듯한 교자상에 올린다. 잔치상 뒤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병풍, 새를 그린 영모병풍, 산수화를 그린 산수병풍과 붓글씨로 된 글씨병풍을 두르되, 혹 넘어질까 보아 구멍을 뚫어 홍융사로 묶어둔다.

    이제 놀이판에서 음악을 제공하는 연예인을 볼 차례다.

    금객 가객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노래의 양사길이, 계면의 공득이며

    조선후기 도시민의 유흥적 욕구가 팽창하면서 음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바, 이 요구에 의해 노래와 거문고 연주를 전문적으로 하는 민간의 직업 음악인이 출현했는데, 이들을 각각 가객(歌客), 금객(琴客)이라고 불렀다. 거문고의 명인 임종철, 노래의 명인 양사길, 그리고 계면조의 명인 공득이는 아마도 이 시기의 실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악기의 준비가 끝났으면, 이 놀이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인공, 곧 기생이 온갖 치장을 하고 차례로 들어온다.

    각색 기생 들어온다. 예사로운 놀음에도/치장이 놀랍거든 하물며 승전놀음/별감의 놀음인데 범연히 치장하랴

    조선후기에도 오렌지족 있었다

    신윤복의 ‘밤길 안내 : 야금모행(夜禁冒行)’. 별감이 관리하는 기생을 동침을 원하는 양반에게 딸려보내는 장면. 별감과 기생의 ‘특수관계’를 엿보게 하는 그림이다.

    별감은 기생을 지배하는 기부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재다. 별감의 놀음, 승전놀음이기에 기생의 치장은 범연하지가 않다. 이제 머리 부분의 꾸밈부터 보자.

    어름 같은 누런 전모, 자지갑사 끈을 달고/구름 같은 허튼머리 반달 같은 쌍얼레로/솰솰 빗겨 고이 빗겨 편월(片月) 좋게 땋아 얹고/모단 삼승 가리마를 앞을 덮어 숙여 쓰고/산호잠(珊瑚簪) 밀화(蜜花)비녀 은비녀 금봉차(金鳳釵)를/이리 꽂고 저리 꽂고/당가화 상가화를 눈을 가려 자주 꽂고

    기생의 머리 위에 쓴 것이 전모(氈帽)다. 전모는 신윤복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기생 그림에 자주 나오는 것이다. 대나무로 우산처럼 살을 만들고 기름을 먹인 종이로 위를 바른다. ‘어름 같은 누런 전모’는 기름을 먹인 누런 유지가 얼음처럼 투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전모를 자지갑사(紫地甲紗) 끈으로 턱 밑에서 맨다. 자지갑사는 자줏빛의 갑사인데, 갑사는 품질이 좋은 비단을 말한다. 전모 밑에는 당연히 머리가 있다. 구름같이 흩어진 머리를 얼레빗으로 빗는다. 얼레빗은 머릿결을 고르기 위한 발이 굵은 빗이다. 그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편월(片月) 좋게’란 말은 미상이지만, 어쨌든 머리를 잘 빗어 땋아 올린 모양의 묘사다.

    백만교태 피우며 들어서는 기생들

    ‘모단(毛緞) 삼승(三升) 가리마’에서 ‘가리마’는 기생들이 쓰는 일종의 모자다.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내의원의 약방기생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가리마를 쓰고, 나머지 기생은 검은 베로 만든 가리마를 쓴다고 하였다. ‘모단 삼승’에서 ‘삼승’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모단’은 두툼한 비단을 말한다. 여기에 동원된 기생은 주로 약방기생들이다.

    그리고 산호로 만든 잠과 밀화, 즉 호박으로 만든 비녀, 은비녀, 금봉차를 꽂았다. 금봉차는 금으로 만들되 봉황을 새긴 호사스런 비녀다. 그러고 나서 중국제 조화(唐假花)와 상가화(?)를 머리에 몸에 꽂는다(宋申用은 상가화를 ‘常假花’로 표기하고 있으나, 뜻은 밝히지 않고 있다).

    이제 기생들의 옷차림을 볼 차례다.

    도리불수 모초단을 웃저고리 지어 입고/양색단 속저고리 갖은 패물 꿰어 차고/남갑사 은조사며 화갑사 긴치마를/허리 졸라 동여 입고/백방수주 속속것과 수갑사 단속것과/장원주 너른바지 몽고삼승 것버선과/안동상전 수운혜를 맵시있게 신어두고/백만 교태 다 피이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

    옷치레다. 웃저고리, 속저고리, 긴치마, 속속것, 단속것, 바지, 버선, 신발의 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웃저고리는 도리불수 모초단으로 지었다. 도리불수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모초단(毛?緞)은 질이 좋고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이다. 이것으로 웃저고리를 지어 입었다. 속저고리를 지은 양색단은 앞에서 말한 대로 씨줄과 날줄의 색을 달리해 짠 비단이다. 이 양색단으로 지은 속저고리에 갖은 패물을 찬다.

    긴치마는 남갑사(藍甲紗) 은조사(銀條紗) 화갑사(花甲紗)로 지은 것이다. 남갑사는 남색의 갑사일 터이고, 은조사(銀條紗)는 중국에서 수입한 여름 옷감용 비단이다. 화갑사는 꽃무늬가 있는 비단일 터이다. 긴치마 안에 속속곳과 단속곳을 입는다. 속속곳은 여자의 맨 속에 입는 속옷이다. 다리통이 넓고 밑이 막힌 것이다. 이것을 백방수주(白紡繡紬)로 지어 입는다 했는데, 아마도 ‘백방사주(白紡絲紬)가 아닌가 한다. 백방사주는 흰 고치에서 켠 실로 짠 비단이다. 단속것은 속속것 위에 덧입는 속곳이다. 수갑사(繡甲紗)로 지어 입는다 했으니, 수놓은 갑사로 지은 것인가 한다. ‘장원주 너른바지’의 너른바지는 단속것과 같되, 밑이 막힌 여자 바지라고 한다. 이것을 단속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보통 명주붙이로 만드는데, 장원주(壯元紬) 역시 명주붙이의 한 종류일 것이다.

    승전놀음의 흥을 돋우는 음악

    ‘몽고삼승(蒙古三升) 것버선’이란 몽고삼승으로 만든 것버선인 바, 것버선은 솜버선 겉에 신는 버선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발이다. 수운혜(繡雲鞋)는 수를 놓은 운혜, 곧 여자의 가죽신인데, 앞의 코 부분과 뒤축에 구름 무늬가 있기 때문에 운혜라고 한다. 안동상전(安東商廛)은 ‘안국동의 상전(商廛)’으로 안국동에 자리잡고 있던 시전(市廛)으로 여겨진다. 기생을 지배하는 별감의 놀음이니 화려무비한 차림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기생들이 입장한다.

    내의원 침선비며 공조(工曹)라 혜민서며/늙은 기생 젊은 기생 명기(名妓) 동기(童妓) 들어온다

    사처소의 기생들이다. 늙은 기생, 젊은 기생, 이름난 기생, 아직 머리를 올리지 않은 어린 기생이 들어온다. 이어 들어오는 기생의 이름이 나열되는데, 추월(秋月) 벽도(碧桃) 홍도(紅桃) 일점홍(一點紅) 관산월(關山月) 연앵(燕鶯) 부용(芙蓉) 영산홍(暎山紅) 채봉(彩鳳) 금옥(金玉) 초선(貂蟬) 만점홍(滿點紅) 매향(梅香) 죽엽(竹葉) 백릉파(白凌波) 모두 15명이다. 기생을 부르는 방식도 흥미롭다. “오동양월(梧桐良月) 밝은 달의 밝고 밝은 추월(秋月)이” 이런 식으로 호명하는 것이다.

    자리를 호사스럽게 꾸미고, 음식을 준비하고, 악기를 대령해놓고, 어여쁜 기생들까지 불렀으니 이제 승전놀음이 시작된다.

    차례로 늘어 앉아 놀음을 재촉한다/화려한 거문고는 안족을 옮겨 놓고/문·무현 다스리니 농현소리 더욱 좋다/한만(汗漫)한 저 다스림 길고 길고 구슬프다/피리는 침을 뱉고 해금은 송진 긁고/장고는 굴레 죄어 더덕을 크게 치니/관현의 좋은 소리 심신이 황홀하다

    악기를 연주하기 전에 조율을 한다. 먼저 거문고 안족(雁足) 위에 줄을 옮겨서 얹는다. 그 다음 문현과 무현을 만져 농현을 한다. 농현은 일반적으로 거문고 해금 등 현악기에서 왼손으로 줄을 짚고 본래 음 외의 여러 장식음을 내는 연주방법인데, 여기서는 아마도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시험삼아 해보는 절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어 한만한 ‘다스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스림’은 음악의 합주에서 악기간의 속도 호흡 음률을 맞추어보는 것, 또는 그것을 위해 만든 곡이다.

    이어서 “피리는 침을 뱉고”라 하고 있는데, 이것은 피리 혀에 침칠을 하고 불어야 소리가 잘 나기 때문에 침을 뱉는 것이다. “송진 긁고”도 마찬가지다. 해금 줄에 송진을 칠해야 소리가 잘 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장고에 굴레를 죄어 팽팽하게 한 뒤 장고를 더덕쿵 친다. 이것을 “더덕을 크게 친다”고 말한 것이다.

    조율이 끝나면 노래가 시작된다.

    거상조 나린 후에 소리하는 어린 기생/한 손으로 머리 받고 아미를 반쯤 숙여/우조라 계면이며 소용이 편락이며/춘면곡 처사가며 어부사 상사별곡/황계타령 매화타령 잡가(雜歌) 시조(時調) 듣기 좋다

    오입쟁이들의 애창곡 ‘십이가사’

    거상(擧床)은 연회 때 큰 상을 받기 전에 먼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말하고, 거상조(擧床調)란 바로 그 음악이다. 대개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를 부른다. 우조(羽調), 계면(界面), 소용, 편락은 모두 가곡창의 곡목들이다. 가곡창은 시조를 노래 가사로 삼아 부르되, 3장 6구 중에서 6구는 부르지 않는다. 시조창이라면 다 부른다.

    춘면곡(春眠曲) 처사가(處士歌) 어부사(漁父詞) 상사별곡(相思別曲) 황계(黃鷄)타령 매화타령은 십이가사의 곡목이다. 여기에 백구사 죽지사 행군악 권주가 양양가 수양산가가 추가되면 십이가사가 된다. 십이가사는 조선후기 기방에서 오입쟁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레퍼토리였다.

    그 다음 레퍼토리는 잡가와 시조다. 잡가는 십이가사와 곡목수가 동일한 십이잡가(十二雜歌)가 있는데,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집장가, 소춘향가, 선유가, 형장가, 평양가,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가 그것이다. 시조는 시조창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오입쟁이들은 십이잡가는 십이가사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하여 부르지 않았고, 기생들은 가곡창에 비해 시조창의 격을 낮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위의 잡가 시조가 꼭 십이잡가와 시조창을 가리키는지는 여전히 고찰의 대상이다.

    노래가 있으면 춤이 있다.

    춤추는 기생들은 머리에 수건 매고/웃영산 늦은 춤에 중영산 춤을 몰아/잔영산 입춤 추니 무산(巫山) 선녀 나려온다/배떠나기 북춤이며 대무 남무 다 춘 후에/안 올린 벙거지의 성성전(猩猩氈) 중두리에/주먹 같은 밀화(蜜花)증자 매암이 새겨 달고/갑사 군복 홍수 달아 남수화주 긴 전대를/허리를 잔뜩 매고 상모단 노는 칼을/두 손에 빗겨 쥐고 잔영산 모든 새면/항장의 춤일런가 가슴이 서늘하다

    웃영산은 상영산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상영산(웃영산) 중영산 잔영산으로 짝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세 곡은 모두 영산회상곡의 변주곡이다. 원래 영산회상곡은 ‘영산회상불보살’이란 일곱 자를 노래하던 불교의 성악곡이었다. 이것이 뒤에 상영산, 중영산, 잔영산으로 변주되었던 바 대개 박자의 지속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즉 잔영산으로 갈수록 곡이 빨라지는 것이다. 영산회상곡은 다시 관악곡, 기악곡 등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위의 춤들은 아마도 기악곡이나 관악곡의 상영산, 중영산, 잔영산에 맞추어 추는 춤일 것이다.

    이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그 종목은 웃영산 늦은 춤, 중영산 춤, 잔영산 입춤, 배떠나기 북춤, 대무, 남무, 검무의 순서다. 이 중 웃영산 늦은 춤, 중영산 춤, 잔영산 입춤은 도무지 알아볼 곳이 없다. 다만 입춤에 대해서만 간단히 해설을 달 정도다. 입춤은 즉흥적인 춤, 곧 허튼춤의 한 유형으로 팔만 벌리거나 관절만 움직이거나 또는 아래위로만 움직이며 제 나름대로 멋을 부리며 추는 춤이라고 한다.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나마 아는 것이 다행이다.

    배떠나기 북춤은 아마도 서도 민요인 배따라기곡을 부르면서 북을 치고 추는 춤으로 보인다. 대무는 남녀가 함께 추는 춤, 남무는 남자가 추는 춤이 아니라 기생이 쪽빛 창의를 입고 추는 춤이다.

    이어서 약간 길게 묘사되는 것은 검무다. 검무의 복색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건 군복차림이다. 머리에 쓰는 것은 산수털벙거지다. ‘안 올린’이란 말은 벙거지 안에 천을 대었다는 말이고, 성성전(猩猩氈)은 성성이의 핏빛같이 진홍으로 염색한 빛으로 된 모전(毛氈)인데, 성성전 중두리는 성성전으로 만든 중두리란 말이다. 이 위에 밀화, 곧 호박으로 만든 증자(?子)를 붙인다. 증자는 군모 위에 붙이는 장식으로, 품계에 따라 금, 은, 옥, 돌 등 재료의 차별이 있다.

    군복은 갑사, 곧 비단으로 지은 것이고, 거기에 붉은 소매(紅袖)를 단다. 그리고 전대를 차는데, 이것은 남색의 수를 놓은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다. 즉 남수화주(藍繡花紬)다. 전대(戰帶)는 자루인데, 양쪽이 다 터진 것이다. 필요할 경우 여기에 물건을 넣고, 어깨에 맨다. 원래 장교는 비단으로, 졸병은 무명으로 짓는다. 이것을 남색으로 짓기 때문에 남전대라고 한다.

    ‘상모단 노는 칼’의 ‘상모단’은 미상이다. ‘노는 칼’은 칼날이 칼자루와 분리되어 움직이게 만든 칼이다. 요즈음 검무에서 칼날이 움직이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잔영산 모든 새면’은 잔영산 곡과 삼현육각의 삼현이니, 곧 삼현육각의 준말이다. 잔영산과 삼현육각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뜻이 된다. 삼현육각은 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구 1, 북 1로 편성된다.

    사치와 유행을 주도한 부류

    이런 검무의 춤이 항장(項莊)의 춤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항우가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을 때 항우의 신하 항장이 유방을 죽이고자 칼춤을 추었던 것을 말한 것이다. 뒤에 따로 고종 연간에 궁중 정재로 항장무가 만들어지지만 이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승전놀음은 먼저 관현악이 한참 연주되고 난 뒤에 기생들이 들어와서 가곡, 십이가사, 십이잡가, 시조 등 성악곡을 부른 뒤, 여러 춤을 추고 마지막에 검무로 대미를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모두 공연하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만하면 별감들의 생리가 상상이 되는가? 별감은 복색의 사치와 유행을 주도하고, 시정의 유흥공간을 장악한 그런 부류였다. 이들이 역사 발전에 무슨 긍정적 기능을 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존재 때문에 조선후기 사회를 상상할 때면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정치와 경제가 소외시킨 인간의 구체적 삶의 모습 말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한양가’는 서울 시정의 온갖 부류들의 온갖 놀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오만가지 유흥과 다를 것이 없다. 별감의 사치스런 복색과 화류계의 지배는 오늘날 어떻게 변화했는가? 나는 별감의 행태에서 오렌지족이나 혹은 상류계층 자제분들의 행태를 연상한다. 무엇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고 무엇이 변화한 것인가? 나는 노는 것을 화두 삼아 우리나라 역사를 재구성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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