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어설픈 선진모델 모방, 그래도 길은 닦았다

  • 글: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

    입력2003-01-30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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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사회복지정책은 그 변화만큼이나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직장과 지역 의료보험통합에 이은 의약분업 등 개혁정책은 이해당사자들의 거센 반발과 건강보험 재정파탄을 초래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빚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은 그 어떤 정권보다 양적·질적 팽창을 이끌어냈다는 긍정적 평가가 우세하다.
    어설픈 선진모델 모방, 그래도 길은 닦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대한의사협회 소속 의사 2만여 명이 2002년 12월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DJ정부의 의약분업정책 즉각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의 정부 5년’이란 코너가 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5년의 업적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곳이다. 이 곳을 보면 ‘생산적 복지의 확충’이란 제목의 글이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길다. 그만큼 많은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20여 년을 끌어온 의료보험 통합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과감하게 통합방식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했고, 의사와 약사 등 이익집단의 반대로 수십년간 시행이 미뤄졌던 의약분업을 단행했다. 통합방식 의료보험과 의약분업, 이 두 가지 제도의 시행은 복지제도의 모델이었던 일본 학계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한국 사회복지제도에서 가장 상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는 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을 제외하면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전국민 연금시대를 열었다. 김대중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은 한 정권이 얼마나 많은 정책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몇 가지 외형적인 지표를 보면 그 변화는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인 1997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2조8510억원으로 국가예산의 4.2%를 차지했으나 2002년에는 7조7750억원으로 그 비중이 7.3%로 커졌다. 예산의 변화만 보더라도 대규모의 복지팽창이 발생한 것이다. 복지정책의 수혜자도 크게 늘었다. 기초생활보장 수혜자가 1997년 37만명에서 155만명으로 늘어났으며, 빈곤한 노인에게 지급되는 경로연금 대상자 또한 27만명에서 72만명으로 확대됐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경제활동인구의 36%에서 48%로 약 240만명이 증가했고, 1997년 전체 임금근로자의 62%에 불과하던 산재보험 대상자는 2002년 80%로 늘어났다. 공무원의 대규모 인원감축이 진행되던 상황에서도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은 3000명에서 5500명으로 무려 2500명이 늘어났다.



    김대중 정부가 사회복지정책에서 해방 이후 그 어떤 정권보다 양적·질적 팽창을 이끌었다는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이건 옹호하는 입장이건 상관없이.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복지정책의 혁신적 변화는 한국의 사회발전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서유럽에 존재하는 ‘복지국가체제로의 본격적인 이행’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외형만 화려한 내용 없는 ‘어설픈 복지국가 흉내내기’에 불과한 것인가.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사회보험제도의 변화다. 그 변화의 방향은 국가책임의 확대를 통한 사회연대성의 증진이었다. 국민연금제도는 가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회연대의 원리가 강하게 설계된 ‘진보적인’ 제도다. 이 제도는 국민연금 40년 가입시 중간 소득자 기준으로 평생소득의 60%라는 비교적 관대한 연금을 제공하며, 계층간 소득재분배와 세대간 재분배가 강하게 나타나도록 설계돼 있다. 1998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연금액이 70%에서 60%로 인하됐지만 여전히 소득재분배 효과는 유지되고 있다.

    또 국민연금제도는 생산직과 사무직 근로자, 농어민과 도시자영업자 등 모든 국민이 하나의 제도에 가입하는 지역통합형 모형이다. 이것은 직업별로 별도의 연금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독일, 프랑스 등 일명 ‘조합주의적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연금의 불평등 현상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국민연금제도를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내포된 제도로 변경하라는 집요한 압력을 받아왔다. 국민연금을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으로 이원화하는 개혁안이 정권 초기에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의 요구도 수용하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핵심원리인 공공기관에 의한 관리, 세대간·계층간 소득재분배, 비교적 관대한 급여수준, 그리고 전국민의 통합관리라는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도시 자영업자에게까지 확대 적용해 사회연대의 범위를 넓혀놓았다.

    의료보험은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제도이다. 개혁 이전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는 독일과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조합주의적 사회보험방식이었다. 직업과 지역에 따라 의료보험조합을 구성하고 재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조합주의 방식의 가장 큰 약점은 조합간 재정격차문제의 발생이다. 실제 통합 이전 한국의 의료보험은 지역의료보험 적자, 직장의료보험 흑자라는 등식이 유지됐고 농촌지역은 끊임없는 보험료 인상에 시달려야 했다.

    의료보험통합은 바로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정부분 성과가 나타났다. 의보통합으로 소득계층간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이 제고되었다는 실증적인 분석도 제시돼 있다. 또한 의보통합은 모든 국민을 하나의 의료보험제도에 포괄시킴으로써 직장별로 각기 다른 의료보험제도를 적용해 나타나는 지위의 차별화 현상을 완화시켰으며, 조합이라는 소규모 집단으로 제한되던 사회적 연대를 전국민적 차원으로 넓혀놓았다.

    의료보험의 개혁 과정에서 시장의 책임을 강조하는 민영화나 조합주의방식으로의 복귀 등이 대안으로 논의됐으나 김대중 정부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혁의 지향점을 본다면 의료보험에서도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로 사회보험의 기본원리인 사회연대성, 그리고 의료보장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을 의도했음이 명백한 것이다.

    산재·고용보험은 연금·의료보험과 마찬가지로 공공기관에 의한 관리, 소득비례 보험료와 급여 등 전통적인 사회보험제도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모든 임금근로자가 하나의 제도에 포괄돼 있는 단일제도이며, 직업에 따라 분리 적용되지 않는다. 산재·고용보험에서도 김대중 정부는 전통적인 사회보험제도의 골격을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적용 대상자를 대폭 확대했다. 개혁 내용에서도 민영화 등 국가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요소는 발견되지 않고, 보험급여의 수준도 관대한 방향으로 이동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종합하면 김대중 정부가 편 사회보험정책의 핵심은 사회연대성의 확대와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연대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구체적인 정책에 완벽하게 구현된 것은 아니다. 도시지역 연금확대 파동과 의보통합 파동, 그리고 건강보험 재정파탄에서 드러났듯 사회보험의 기반을 흔드는 행정관리의 실패가 심각하게 부각됐다.

    비정규직 80%가 사회보험 적용 제외

    김대중 정부의 사회보험정책 중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대규모의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보험에서 사회연대의 원리가 관철되려면 모든 국민이 사회보험제도 안으로 포괄돼야 한다. 적용에서 제외된 사회보험의 ‘외부자’들은 산업재해나 실업에 노출될 경우, 그리고 직장에서 은퇴할 경우 아무런 보험급여를 받을 수 없어 심각한 생계의 곤란을 겪게 된다.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폭넓고 심각한 수준이다. 국민연금은 경제활동인구의 48%를 제외시키고 있으며, 고용보험은 임금근로자의 48%, 산재보험은 20%를 제외시키고 있다. 특기할 것은 사회보험에서 배제돼 있는 인구의 대다수가 영세사업장 근로자,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 우리 사회의 서민계층인 반면 사회보험에 들어와 있는 계층은 비교적 안정된 직장과 소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례로 통계청 조사자료에 의하면 비정규직 근로자의 80% 정도가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문제는 국민연금제도의 존립기반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국민연금은 모든 가입자가 자기가 낸 보험료보다 더 많은 연금액을 가져가는 구조로 설계돼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 미가입자들은 소득재분배의 혜택에서 제외된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과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국민연금에 가입해 소득재분배의 혜택을 받는 반면, 연금에서 제외된 서민계층은 소득이전을 받지 못하는 모순이 현행 국민연금제도의 가장 큰 결함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민연금정책은 이런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점을 드러냈다.

    건강보험의 경우도 통합을 통한 사회적 연대의 증진이라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다른 사회보험과는 달리 의료보험은 의료공급자라는 제3의 세력이 존재한다. 의료보험 통합은 사회보험에서 보험료를 납부하는 가입자의 연대를 증진시키는 정책이지 의료공급자를 통제하는 정책은 아니다. 의료보험의 재정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수입부문인 보험료 문제뿐만 아니라 지출부문인 의료공급구조의 개편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공공의료기관의 확충, 수가구조의 개편 등 실효성 있는 의료비 억제대책을 시행하지 못했다. 여기에 의약분업과정에서 나타난 무리한 수가인상으로 결국 사회연대성의 증진이라는 정책의도마저 퇴색하고마는 결과로 이어졌다.

    생활보호제도를 대체한 기초생활보장법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정도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생활보호제도에서는 18세 미만 65세 이상 인구만이 수급자가 될 수 있었고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 원천적으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기초법에서는 인구학적 기준을 철폐하고 소득과 재산이 일정기준 이하이면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라도 모두 생계급여를 받도록 했다. 물론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는 자활사업 혹은 직업훈련에의 참여를 강제하고 있어 무조건적으로 급여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법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시장논리’를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기초법의 적용 대상자가 되면 의료·교육 등 모든 혜택을 받지만 탈락하면 그 혜택이 박탈되기 때문에 수급자들이 선정 기준에 맞춰 소득을 낮춰 신고하거나, 근로소득을 원천적으로 줄이려는 유인(誘因)이 된다고 지적한다. 반면 ‘복지’의 시각에서는 기초법이 상당수 빈곤층을 제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나라의 절대 빈곤율은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7% 정도에 이르는데 기초법에 의해 보호받는 대상은 전체 인구의 3%(139만명)로 나머지 약 190만명의 빈곤층이 제외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함이 있지만 기존의 생활보호제도와 비교해 기초법을 평가하면 빈곤에 대한 책임을 개인보다는 국가 쪽으로 이동시켰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의약분업은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언급되는 정책이다. 그러나 그 평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의약분업이 대규모의 의사파업과 장기간의 의료공백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실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의약분업 정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정책 실패’가 아니라 정교하게 추진하지 못한 ‘행정 실패’로 인식될 필요성이 있다. 정부가 좀더 정교한 시행 프로그램을 갖췄다면 혼란의 상당부분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의약분업의 효과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의약분업은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을 의료비의 추가부담과 보험료 인상이라는 비용을 유발했다. 하지만 편익을 제공한 측면도 공정하게 평가돼야 한다. 항생제 사용량과 주사제 사용이 부분적으로 감소되었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다. 또한 화폐가치로 계산되지 않은 편익도 있다. 예를 들어 의약분업의 시행으로 약국의 임의조제가 없어지고 모든 환자들이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됨으로써 보건의료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고 질병의 조기발견과 예방의 가능성이 커진 점도 의약분업 평가시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인, 아동, 장애인복지 등 복지서비스 분야는 사회보험이나 공공부조만큼 혁신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경로연금이 시행됐고, 치매노인을 위한 노인요양시설도 부분적으로 확대됐다. 농어촌 저소득층의 만5세 아동에 대해 무상보육이 시행됐고, 5세 미만의 저소득층 자녀 11만명에게 부분적인 보육료 지원도 실시됐다.

    장애인분야에서는 저소득장애인에 대한 장애수당 확대, 장애인 편의시설 확충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복지서비스 분야의 발전은 지난 5년간 정체돼 있었다. 복지서비스의 침체는 아동이나 병약한 노인, 그리고 장애인들의 보호를 전적으로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지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특징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김대중 정부의 혁신적인 복지정책은 복지국가의 진로에 대한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한국 복지국가 성격 논쟁’, 2002, 인간과 복지 참조). ‘퍼주기 복지’ 혹은 ‘사회주의적 복지’라는 천박한 진단을 논외로 한다면 논쟁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일군의 학자와 진보그룹에서는 김대중 정부 복지정책의 핵심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이나 영국 같은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체제’로의 이행이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들은 우선 김대중 정부가 내놓은 ‘생산적 복지’가 ‘복지’보다는 ‘생산’에 강조점이 있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된 신자유주의 복지정책인 근로연계복지(workfare)가 기초법의 자활사업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사회보험이 부분적으로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의 대폭적인 재정지원 없이 가입자의 돈으로 재원이 충당됐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복지 확대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사보험이 확대된 것도 자유주의적 복지국가 성립의 근거로 인용됐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앞에서 논의한 필자의 분석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지난 5년간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회보험에서 발생했는데 그 방향은 사회보험의 민영화가 아니라 사회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복지국가라면 복지에 대한 시장의 책임이 강화됐어야 한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서 사회보험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시장의 책임을 강화한 정책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특징인 공공부조의 강화가 기초법 제정에서 나타났으나 공공부조보다 사회보험의 비중이 더 크고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한국은 바야흐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국가로 진입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다.

    두 번째 입장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보수주의적 복지체제’와 유사해질 것이라는 시각이다. 보수주의적 복지국가의 핵심은 사회보험이 직업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조합주의 사회보험과 복지서비스의 가족 책임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의료보험 통합에서 보듯 조합주의 사회보험을 통합방식으로 전환했고, 국민연금도 통합모형을 고수했다. 보수주의적 복지국가의 특징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회보험에 나타난 대규모 사각지대의 존재는 유럽 복지국가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영미식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와 유럽식 보수주의적 복지국가로의 이행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과연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이 한국의 복지국가 형성에 끼칠 영향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지금까지 나온 복지국가 모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국의 복지 상황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물론 이론적 모형은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는 장점이 있으나 서구 복지국가 모형의 무리한 적용은 이론으로 현실을 재단함으로써 한국의 복지현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할 위험성이 높다.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김대중 정부에서 우리나라가 서구와 같은 형태의 복지국가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킨 매우 불안한 것임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복지국가의 연착륙 여부는 결국 노무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김대중 정부에서 시행된 국가복지 확대 노선의 기본 골격을 계승, 보완,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누차 확인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로의 불안한 출발’이라는 김대중 정부의 유산을 물려받은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 과제는 무엇인가? 지난 5년간 복지정책의 시행과정을 관찰해온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복지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정책을 집행 관리하는 외부적 여건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선적으로 구축해야 할 것이 유기적인 행정과 전문인력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다. 김대중 정부 초기 개혁정책들이 정책구상의 차원에 있을 때 누구도 집행에 요구되는 인프라를 어떻게 정비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교한 행정인프라의 구축 없이 추진된 정책의 결과는 참담했다.

    이익집단 눈치보면 개혁은 실패

    그 다음이 인사다. 김대중 정부 초기 강한 개혁의지를 지닌 정책위원장이 배치되면서 개혁정책의 집행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얼마 후 보수적 인사가 정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행정부의 개혁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연금파동’ ‘건강보험 파동’이 터졌고, 이는 정권과 복지정책의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보건복지부장관, 노동부장관, 청와대의 노동복지수석, 그리고 좀더 넓히면 국회 제3정조위원장을 하나의 ‘사회정책팀’ 개념으로 생각해 생각과 지향점이 맞는 인사를 배치할 필요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보건복지분야에서 더욱 중요한 이익집단과의 관계설정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노사정위원회, 의료발전위원회 등 새로운 이해관계 조정양식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익집단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화와 타협이 전제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자세다. 대통령이 정책의 원칙과 소신을 버리고 이익집단의 ‘정치적 눈치’를 보는 것이 외부에 포착되는 순간 그 정책의 운명은 정해진다. 개혁적 정책의도는 없어지고 불합리한 요구가 덧칠해지는 ‘누더기 개혁 정책’이 돼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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