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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팜파탈 미실

150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살인미소

  • 이영철│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희대의 팜파탈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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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팜파탈 미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일부.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봤을 때 화랑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꽃 같은 여자인 화랑(花娘)보다는 오늘날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F4’와 같은 귀공자였던 것 같다.

김대문의 저술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나 그 후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왔다. 그런데 1989년 2월 1300여 년 만에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발췌본)이 발견되고, 이어 1995년 4월에 또 다른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됐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세기(花郞世記)’라고 나오나 1989년 발췌본은 ‘화랑세기(花郞世紀)’로 표기되었고 1995년 필사본은 앞부분이 없어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면 ‘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화랑세기’의 원 소장자는 일제강점기 궁내부 왕실도서관에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朴昌和·1889~1962)인데, 그가 일본 황실 문서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일제가 약탈해 간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필사를 했다는 것이다. 박창화는 한국 역사학계의 전설적인 기인으로 6·25전쟁 이후에는 충북 괴산중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고도 한다.

1995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서강대 이종욱 교수(현 서강대 총장)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화랑세기’의 실체가 밝혀지고 그 신빙성을 놓고 진위논쟁이 학계에서 뜨겁게 진행됐다. 진본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잃어버린 신라사를 복원하게 됐다고 고무되었으나,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성애소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여하튼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태, 가무, 방사 갖춘 요부



‘화랑세기’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부터 신문왕 원년인 681년까지 140년에 걸쳐 왕이 아닌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인데, 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 32세 풍월주 신공(信功)까지의 세보(世譜)를 밝히면서 진골정통(眞骨正統), 대원신통 또는 가야왕실 계보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화랑세기’에 20세 풍월주인 예원공(禮元公)의 아들인 오기공(吳起公)이 김대문을 낳았다고 기술한 점이다.

‘화랑세기’를 토대로 김대문의 가계를 정리하면 내물왕-미해-백흔공-섬신공-위화랑-이화랑-보리공-예원공-오기공-김대문으로 이어진다. 그중 위화랑이 1세 풍월주, 이화랑이 4세 풍월주, 보리공이 12세 풍월주, 예원공이 20세 풍월주, 오기공이 28세 풍월주였다. 그야말로 김대문은 풍월주 가문으로 ‘화랑세기’를 저술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은 단연 미실인데, 미실은 진흥왕 8년(547)에 옥진(玉珍·미실의 외할머니)의 딸인 묘도(妙道)와 법흥왕의 외손자인 미진부(未珍夫)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면 옥진의 꿈에 칠색조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본 후 묘도가 임신해 미실을 낳았다고 한다.

‘화랑세기’는 미실의 아름다움에 대해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소지왕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험함으로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을 모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옥진이 ‘이 아이는 오도를 부흥시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미도와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제(帝)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미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라고 했다. 교태와 가무, 방사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미실은 왕과 왕비, 풍월주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나갔다.

신통력도 발휘

더구나 드라마 ‘선덕여왕’ 13회분에 나오는 기우제 장면은 미실의 신통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진평왕이 기우제를 올려도 내리지 않던 비가 미실이 기우제를 올리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실이 무슨 재주로 천기를 읽었을까. 바로 ‘사다함의 매화’라는 책력(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대국가에서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따라 천문(天文)은 하늘의 뜻을 묻는다는 의미로 정치적 안정과 천재지변의 상관관계가 매우 중요한 만큼 미실은 책력을 이용해 왕을 능가하는 신성불가침의 신통력을 보여줬다. 사실 삼국시대에는 천문학이 발달했는데 백제는 중국 남조 송(宋)의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을 수입해 활용했음이 무령왕릉 매지권(買地券·토지거래증서)에서 확인되고 있고, 미실이 백제를 통해 책력을 구입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미실이 살던 당시 신라는 유교적 금욕주의가 안착되기 전으로 성(性)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라, 마복자(摩腹子·임신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은 후 낳은 아들), 근친혼, 형사취수제, 자매혼 등이 성행했다. 미실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 결혼했으나 일찍이 터득한 방중술로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 5세 풍월주인 사다함,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 관계를 맺었다. 또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진흥왕을 유혹하고, 진지왕을 폐위시켰으며, 열세 살 소년 진평왕의 동정을 빼앗으며 색공으로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서 주무른 ‘팜파탈’이었다.

또한 미실은 여러 왕실과 풍월주와 관계를 맺어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수종과 난야 반야공주, 동륜태자와의 사이에서 애송공주, 세종과의 사이에서 목종과 하종,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보종, 그리고 아버지를 모르는 딸 애함 등을 낳았다. 미실의 출산은 권력을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는 방편으로 작용해 색공으로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이 자라 왕실의 패밀리가 되거나 풍월주가 되었다.

신라를 치마폭에서 주무르다

당시 미실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미실의 종자매인 윤궁(允宮)이 골품이 낮은 문노(文弩)를 마음에 두자 진지왕을 폐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한 문노를 아찬 이상의 진골로 승격시켰다. 이후 문노는 8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미실의 아들 11세 풍월주 하종과 동생 보종의 불화로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에게 밀리면서 미실의 힘도 약화되었고 역사의 중심이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와 가야계의 거두인 김유신으로 옮겨가는 추세였다. 그러던 중 김유신이 15세 풍월주로 있던 612년부터 미실의 막내아들인 보종공이 16세 풍월주를 마치던 621년 사이에 미실은 70세를 전후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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