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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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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황금정 입구 거리.

9월12일부터 10월 말까지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경성의 교통량은 크게 증가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 20년을 기념해 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벌인 초대형 공산품 전시회였다. 일본은 물론 대만과 만주에서 온 최첨단 공산품들을 보러 전국에서 모여든 관람객으로 경성은 들썩였다.

그런 큰 행사가 아니라도 서울은 이미 붐비던 중이었다. 경성부는 면적 33㎢에 인구 34만명가량이다. 사대문 안과 밖이 면적의 절반씩을 차지한다. 인구의 27%가 일본인이고 조선인은 24만명 남짓이다. 상주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유동인구가 매년 서울을 들고 난다. 교통사고는 이미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앞서 4월에는 전차 운행 사상 초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운전수는 운전면허를 딴 지 일주일 만이었다.

22일 오전 9시 반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3, 4학년생 100여 명을 태우고 급한 속도로 적선동(積善洞) 전차정류장을 떠나 서십자각(西十字閣)의 커브를 돌아가던 효자동-남대문 노선 162호 전차가 돌연 탈선 전복하여 10여 명의 중상자와 60여 명의 경상자를 내어 조선에서 일어난 전차 사고로는 처음 보는 일대 참극을 연출하였다. 중상을 당하여 선혈에 젖은 부상자 중 세 사람은 생명이 위독하다. 학생들은 학교 창립기념일을 기념해 다음날 아침 등교 즉시 전차 3대를 대절(貸切)해 나누어 타고 순종비(純宗妃) 묘소 참배를 위해 청량리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초대형 전차 사고

과도한 속력을 낸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조사되었다. 진명(進明)여고보는 1906년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첫 여학교다. 고종의 비인 엄귀비(嚴貴妃)가 내어놓은 땅과 자금으로 경복궁 서쪽 창성동(昌成洞)에 세워졌다. 숙명여고의 전신인 명신(明信)여학교가 역시 엄비의 후원으로 설립되기 한 달 전이었다. 남자학교로는 휘문, 중동, 보성, 및 대구의 계성고가 황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줄줄이 세워졌다. 무너지는 대한제국에 학교 설립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한꺼번에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한 해 전에 양정의숙이 엄비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1905년 이전까지 약 10년간 외국선교사가 기독교계 학교들을 세워 현대식 교육의 막을 연 이래 한국계 학교가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이제 부모들은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여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되는 이화학당이 처음 초가집을 개조해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이 낯선 집을 외면했다. 길에서도 여자 아이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조선 땅이었다. 8개월이 지나 1886년 5월에서야 가까스로 학생 한 명을 받으면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에게 서약서를 써야 했다.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조선인 박(朴)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을 것을 서약함.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이화학당의 수업 풍경.

이화학당 학생들의 꽃놀이에 발칵 뒤집혀

부모들은 어린 딸을 집 밖의 낯선 곳에 보내기가 두려웠다. 서양오랑캐를 바닷가에 얼씬도 못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대원군의 엄명을 담은 척화비가 전국에 세워진 것이 불과 15년 전이었다. 1887년 이화학당 학생은 7명이 되었지만 기대와 달리 양반집 자녀는 오지를 않아 가난한 집 아이와 고아로 채웠다. 민비가 교명을 지어주고 편액을 보내오고 1888년 학생이 18명으로 늘어났다. 교사는 모두 여자로 한정되었다. 여자도 한문을 배울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일어 새로 초빙한 한문 담당 남자 교사는 여학생을 마주 보지 않고 뒤돌아서 수업을 진행했다. 체조 시간에 발을 벌리고 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문이 일었다. 딸을 끌어내오는 집, 가족회의를 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이 학교 여학생을 며느리로 삼아서야 되겠느냐는 논란도 있었다. 한성부(漢城府)는 체조 중단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여인의 걸음은 모름지기 발바닥 길이 이상을 떼어서는 상스럽다는 것이 법도 있는 집안의 규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화학당 학생들은 1899년 5월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꽃놀이를 나갔다. 학교 담장 안에서 체조하는 것보다 한성의 성곽 바깥으로 떼 지어 나간 일은 더욱 파장이 컸다. 개교 13년째였다. 성곽 안쪽에서는 도성을 가로지르는 전차가 개통되던 19세기의 마지막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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