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야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다. 시작이 궁금하다.
고향이 경남 진주다. 진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때 살던 집이 대신동 구덕운동장 바로 뒤쪽이었다. 운동장 부근에 살다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 축구는 한 게임도 빼놓지 않고 구경하러 다녔다. 당시 백인천 감독이 야구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부산에서 부산시장배야구대회가 열렸다. 부산의 모든 초등학교가 참가한 큰 대회였다. 그렇다보니 야구부 선수들만이 아닌 일반 학생들 중에서도 운동 능력이 빼어난 학생을 뽑아 야구팀에 합류시켰다. 그때 평소 내 운동 실력을 유심히 지켜봤던 담임선생님이 야구부에 가서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권유하더라. 쪼르르 달려가서 테스트를 받는데 야구부 감독님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일반 학생의 야구 실력이 야구부 선수를 능가한다면서.
Q 그래서 야구부에 들어간 건가.
처음에는 부산시장배대회만 참가하기로 했는데, 일반 학생이 4번 타자로 출전해 안타와 홈런을 쳐내며 우승까지 거머쥐자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집에선 야구를 하지 말라고 반대하고, 학교에선 교장선생님까지 나서서 부모님을 설득하며 나를 정식 야구부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결국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야구를 하기로 했는데 중학교 진학해서도 학교에서 나를 가만두질 않았다.
부모님은 야구를 계속하려면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부산중과 경남중 가운데 공부하는 야구부로 알려진 경남중을 선택한 것이다. 경남중은 야구부원들이 모든 수업을 다 마친 후 훈련했다. 경남중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때 좋은 활약을 펼쳤고, 공부도 전교 10등 안팎을 놓치지 않았다. 경남중 입학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때 공부하지 않는 야구부에 입단했더라면 고려대 법학과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Q 학력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석사 학위까지 받았더라. 대부분의 선수는 체육과를 희망하지 않나.
어머니는 내가 경기고, 서울 법대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그러나 야구를 하다보니 어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릴 수 없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한 후 야구를 하면서 사법고시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법학과 커트라인을 통과했을 때 고려대 법대가 발칵 뒤집혔다. 선수가 혹시 커닝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정도였다. 고시 합격 후 야구에 더 전념할 계획이었지만, 야구부 합숙이 잦았고, 대표팀에 뽑혀 국제대회에 출전하다보니 도저히 공부할 틈이 없었다. 야구와 공부를 병행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시험 때가 되면 훈련 마치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Q 대학 졸업 후 실업팀 한일은행과 계약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1976년 일본 올스타가 방한해 한국 올스타와 친선경기를 했다. 1차전, 2차전 연속 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후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고자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3차전은 대전에서 열렸고, 신체검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운동을 못한 상태에서 경기에 뛰려다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 한여름이었다. 타석에 서 있기조차 힘든 무더위 속에서 경기를 강행해야만 했다. 당시 한일은행은 김응용 감독님이 맡았는데, 내 몸 상태를 잘 아신 터라 올스타팀 감독을 찾아가 ‘허구연이 일주일 동안 훈련을 못했으니 가급적 많이 뛰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감독은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나를 쉽게 빼주지 못했다. 급기야 내가 중간에 교체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감독은 한 타석만 더 들어간 다음에 빠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수비에 나섰다가 그만 사고가 났다. 2루 커버 중 주자의 강한 슬라이딩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뻑’ 소리와 함께 정강이뼈가 두 동강이 났다. 다리가 덜렁덜렁했을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다. 곧장 서울로 이송돼 네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그 부상이 선수로서의 내 인생을 정리해준 계기가 됐다. 수술 후 힘든 재활을 거쳐 다시 야구장에 나섰지만, 얼마 안 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선수 허구연의 장점은 모두 사라졌고, 그저 그런 야구선수로 전락한 내 모습이 견딜 수 없었다. 김응용 감독이 만류했는데도 은퇴를 결심했다.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공부를 시작한 것이 고려대 법대 대학원 입학으로 이어졌다. 50명의 응시자 중 10명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석사를 딴 덕분에 졸업 후 경기대 강단에 서기도 했다.
MBC에 전속 계약 요구
Q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MBC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다. 그 과정에도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그전에도 가끔 아마야구 중계를 한 적이 있다. MBC에서 그 모습을 보고 프로야구 해설을 맡기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난 대학 강의를 나가야 했다. 야구 해설과 강의를 병행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내가 MBC에 제안한 것이 전속이었다. 즉 대학 강의를 포기하는 대신 MBC 전속 해설위원으로 계약을 맺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방송 출연료가 회당 3만5600원이었는데 내가 요구한 1년 연봉이 2200만 원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박철순 등 특A급 선수가 2400만 원, A급 선수가 2200만 원 받던 때다. 2200만 원이면 강남의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방송국이 난리가 났다. 내가 요구한 금액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아니면 나도 안 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오랜 대화 끝에 연봉 1400만 원에 계약을 맺었고, 부족한 부분은 해외출장과 자료 수집비 등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덕분에 외국에 자주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다. 서른한 살에 MBC와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Q 일본식 조어 투성이던 야구용어를 한국 실정에 맞게 정립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언어 순화에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고 들었다.
내가 국어학자는 아니지만, 야구에서만큼은 국적 불명의 일본식 조어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야구 출범 때 용어를 올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잘못된 일본식 조어가 계속 쓰일 거라는 생각에 MBC의 PD, 아나운서, 해설가를 모아놓고 우리식 야구 용어를 정립해나갔다. 당시 야구계에는 포볼(볼넷), 데드볼(몸에 맞는 공), 언더베이스(태그업), 사이드스루(사이드 암), 라이너(라인드라이브) 등 일본식 용어가 만연했다. 야구의 본고장이 미국임을 감안할 때 일본식 조어를 바로잡고 되도록 한국에 맞는 용어로,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미국식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대회 나가서 일본식 조어를 쓰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언론의 반대가 거셌다. 무리한 시도를 한다면서 4차례나 사설을 통해 비판을 쏟아냈다. 그래도 난 흔들리지 않았다. 방송할 때마다 새로운 야구용어로 해설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시청자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사용하는 야구용어에 익숙해졌고, 반대만을 일삼던 언론도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용하는 야구용어로 기사를 썼다.
Q 오래전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KBS와 MBC에서 야구중계를 할 때 야구팀 명칭을 달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삼성 라이온즈를 KBS에선 대구 라이온즈로 불렀고, MBC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를 고집했다. 이유가 뭔가.
아무래도 프로야구가 시작되는 시점이다보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방송국마다 제각각 팀명을 불렀다. KBS는 지역명을 따 ‘대구 라이온즈’ ‘부산 자이언츠’로 불렀지만, MBC에선 기업에 초점을 맞춰 팀 이름에 기업을 앞세운 것이다. 기업이 팀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이름을 내걸지 않는다면 굳이 프로야구단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KBS는 지역 이름도 뺀 채 ‘라이온즈’ ‘청룡’ ‘타이거즈’ ‘베어스’라고 하다가 시청자들로부터 ‘프로야구가 무슨 동물농장이냐’는 항의를 받고서 어쩔 수 없이 기업 이름을 내세우게 됐다.
메이저리그를 접하다!
Q 1984년 처음으로 미국 메이저리그를 방문했다고 들었다. 박찬호의 양아버지로 알려진 LA 다저스 전 구단주 피터 오말리 씨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쇼크를 받은 시간이었다. 오말리 씨와는 원래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다저스 구단주이고 메이저리그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에 한국에서 편지를 써 미국으로 보낸 게 인연이 됐다. 오말리 씨는 이름도 모르는 한국 해설가에게 정말 아름다운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비행기표만 자비로 마련했고, 현지 숙소와 식사는 다저스에서 모두 배려했다. 당시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는 지금의 애리조나가 아닌 플로리다 베로비치 다저타운이었다.
현지에 가보니 어마어마한 야구장 시설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야구 시설에 비하면 한국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수들 훈련을 지켜보니 한국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투수들이 투구를 마치면 어깨에 얼음으로 아이싱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아이싱과는 반대로 따뜻한 물에 팔을 담가 피로를 푸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계 때마다 아이싱으로 어깨를 관리하는 방법을 역설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난 야구의 본고장인 메이저리그, 그것도 스포츠 의학이 가장 발달한 곳에서 하는 선수 관리법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 프로야구팀 중에선 처음으로 미국 베로비치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선진 야구를 보고 배우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해 삼성은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3월 19일 텍사스 레인저스 스프링캠프에서 추신수와 대화하는 허구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지난해 9월 8일 허구연 해설위원 초대로 목동야구장을 방문한 아트앤하트 유소년야구학교 선수들.
처음에는 MBC 청룡에서 감독직 제의를 받았다. 팀 성적이 좋지 않자, 당시 MBC 이웅희 사장이 감독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고사했다. 세 차례나 거듭 요청이 이어지자, 나로선 확실하게 거절할 명분을 찾아야 했다. 당시 청룡 감독이 경남고 은사이던 어우홍 씨였다. 그래서 MBC 측에 은사를 몰아내고 감독직에 앉을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고 나서 청보 핀토스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았다. 역시 거절했는데, 청보가 진짜 집요했다. 당시 난 매주 두 경기 이상의 생중계, 매일 밤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출연, 다수 신문사 칼럼 집필 등으로 체력 고갈 상태였다. 그때 우리 큰형이 이런 얘길 해줬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부상을 제외하곤 실패 없이 승승장구하며 살았다. 젊은 나이에 하는 도전은 충분히 해볼 만하다. 실패하더라도 젊어서 실패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다른 지인들도 감독직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기회를 잡았는데, 결국엔 성적 부진으로 한 시즌 만에 물러나야 했다. 해설위원으로 보는 야구와 현장에서 부딪치는 야구의 차이점이 엄청나다는 걸 실감했다.
1987년 2월, 롯데 자이언츠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 팀이 어려우니까 도와달라면서 타격코치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해서 3년간 타격코치와 수석코치를 맡아 롯데에 머물렀다. 감독직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롯데를 떠나며 내가 구단에 한 말이 있다. ‘구단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리고 감독 코치를 우습게 보지 마라’는 내용이었다. 떠날 몸이었기 때문에 뒷일 생각지 않고 쓴소리를 날린 것이다.”
MLB에 선동열 추천했지만…
롯데 자이언츠 코치 시절.
다저스 피터 오말리 구단주로부터 다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왕이면 새로운 팀에서 야구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블루제이스 구단주는 현장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구단주의 도움 덕분에 싱글A부터 트리플A까지 마이너리그 전체를 다 돌았다. 2년간 마이너리그에서 유급 코치 생활을 하며 미국 야구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가르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며 특별한 감사를 전한 일도 잊히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동안 몇몇 구단 관계자로부터 한국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를 추천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그때 내가 거론한 선수가 최동원, 선동열, 김재박이었다. 특히 선동열은 LA 다저스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해태에서 선동열의 군 문제를 들어 미국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더라면 한국의 야구 역사가 모두 뒤바뀌었을 것이다.
Q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현대 유니콘스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인가.
돌아가신 정 회장은 야구단 창단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를 따로 만나 야구단 운영과 관련해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네곤 했다. 그런데 삼성 롯데 해태 등 기존 구단들이 현대가 프로야구단 세우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방법을 달리해 실업팀 현대피닉스를 인수했고, 그 팀이 현대 유니콘스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정 회장이 초대 감독을 맡아달라고 특별 부탁을 했다. 하지만 난 이미 감독으로 쓰라린 경험과 좌절을 맛본 상태였고, 감독이 아닌 다른 형태로 야구 발전에 헌신할 작정이었다.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김재박 감독을 추천했는데 현대가 워낙 스케일이 커 선수단 발전을 위해 통 큰 지원을 한 터라 김 감독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Q 현대그룹 회장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감독직 제안은 삼성, LG에서도 왔었다. 워낙 고집스럽게 거절하니 그 후론 내가 감독에 전혀 뜻이 없다는 걸 다 알게 됐다. 난 다른 방면에서 야구계를 위해 일하고 싶었다. 산적한 야구 현안에 대해 조언하고 9구단, 10구단 창단에 적극 나설 계획이었다. 팀을 맡아 우승한다 한들 한국 야구 전체를 레벨 업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해설하면서 오랫동안 야구 인프라를 강조한 까닭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별명이 ‘허프라’가 됐지만 말이다.
정치권 ‘러브콜’ 많았다
Q 정치권에서 손을 내민 적도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떠했나.
야구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큰일을 할 수 있다. 여당, 야당에 속하다보면 정작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정치권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정치적 이념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움츠러들고 제약을 받는다.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고, 야구계에 남았다. 유영구 전 KBO 총재가 야구계를 이끌 때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을 맡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연봉을 주겠다는 걸 내가 거절했다. 봉사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MBC 해설과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을 맡아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게 나에게 맞는 ‘옷’이었다.
Q NC 다이노스 창단 뒷얘기를 듣고 싶다.
당시 유영구 총재와 자주 독대했다. 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유 총재에게 KBO 총재라면 프로야구의 발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가장 중요한 건 구단을 만드는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렸다. 더욱이 당시에 히어로즈가 자금난으로 선수들을 파는 바람에 구단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히어로즈가 선수를 팔아 구단 자금을 모으는 것을 묵인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9구단 창단을 역설했다. 야구선수들의 취업과 한국 프로야구의 파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더니 유 총재가 ‘그렇다면 자네가 한번 나서보라’고 하시더라. 극비리에 9구단 창단 작업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 9구단 창단에 가장 적합한 도시가 마산·창원·진해가 합쳐진 창원이었다. 창원시장을 만나 설득에 나섰다. 이때 4군데 기업이 후보로 나섰는데, 최종적으로 NC소프트가 구단 운영을 맡았다.
Q 9구단 창단으로 프로구단이 홀수팀이 되면서 경기 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됐고, 기존 구단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건 충분히 예상했던 문제다. 나와 유영구 총재는 10구단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9구단 설립을 강행한 것이다. 히어로즈가 9구단 창단과 함께 운영 방침이 달라진 걸 기억하나. 더 이상 선수를 팔지 않고, LG에서 이택근을 FA로 영입하고, 메이저리그의 김병현도 데려오며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9구단 창단은 다른 팀보다 히어로즈에 큰 자극을 줬다. 삼성이 앞장서 반대한 탓에 9구단 창단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성사됐다. 난 아홉 번째 구단이 만들어지면 10구단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창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홀수팀으로는 프로야구 운영이 어렵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KBO 이사회도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9구단 체제를 고집할 수만은 없다고 봤다.
꿈만 같은 9·10구단 창단
Q 그래서 10구단 KT 위즈가 탄생한 것인가.
처음 접촉한 도시가 전주였다. 2009년 송하진 전주시장(현 전북도지사)을 만났는데 송 시장은 나랑 친구 사이라 대화가 쉽게 풀렸다. 그 후 KT 이석채 전 회장을 만나 야구단 창단 의사를 물었다. 예전에 KT가 야구단에 뛰어들려고 하다가 정보가 새는 바람에 접은 적이 있기에 이 회장을 설득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회장은 연고지로 전주보다는 수원이 좋다고 했고, KT는 수원을 등에 업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부영건설이 전주시장과 손을 잡았다. 결국엔 KT가 10구단으로 선정됐지만, 수원과 전주가 지역의 자존심을 걸고 대결을 벌인 터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당히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지금도 9구단, 10구단 창단 과정을 돌이켜보면 정말 꿈만 같다. 지금 다시 그 작업을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할 것 같다. 힘들었던 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 있었다. 유영구 전 총재가 불미스러운 일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유 전 총재는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떠났다.
Q 그즈음 허 위원에 대한 소문도 무성했다. NC 혹은 KT 야구단 사장으로 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KBO 총재 자리를 노린다는 얘기도 들렸다.
내가 야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인사, 돈 문제와 관련해선 거리를 뒀다.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을 맡아 무보수로 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구계라 행여 좋지 않은 소문이 나올라치면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맞았다. 그래서 창단팀이 만들어진 후 코칭스태프 인선과 관련해서 일절 내 의견을 내지 않았다. 다른 문제에 조언은 해줬지만, 인사와 관련해선 발을 뺐다. 나에 대한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만약 내가 그런 ‘자리’에 욕심을 냈더라면 굳이 신생팀이 아니고도 다른 팀에 갈 수도 있다. 야구 발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특정 구단의 감독이나 사장으로 가지 않은 건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Q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점인데, 야구단 사장이나 KBO 총재보다 해설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봤다. 해설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예전에 또다시 감독을 맡았을 것이다. 해설은 내 천직이다. 그 천직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Q 야구계에선 허 위원이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비난의 소리가 있다. 해설에 대한 강한 욕심으로 인해 후배들이 제대로 존립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도 내 후계자를 키우고 싶다. 여러 해설위원을 지켜보고 있는데, 후계자를 찾는 게 쉽진 않더라. 해설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단순히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해서 마이크 앞에 앉았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준비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 운동선수 출신은 공부를 많이 못했다. 그런 부분이 해설에 드러나면 안 된다. 노력하는 후배가 많으면 좋겠다.”
Q 후배 중 허 위원과 가장 닮은꼴을 찾는다면 누굴까.
이용철, 이효봉 해설위원이 근접한다고 본다. 이효봉은 논리적인 해설이 인상적이고, 이용철은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이순철은 톡톡 쏘는 맛이 있고.”
Q 사투리 발음 때문에 지적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는데.
“현대를 핸대로, 김현수를 기멘수로 발음하는데, 발음에 신경 쓰면 중계가 안 되더라. 자꾸 맥을 놓치고 어버버 하다가 경기가 흘러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한번은 PD한테 내 발음이 문제가 되면 그냥 나를 자르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국민이 내가 하는 발음을 다 알아들으니까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더라. 처음에 해설을 시작할 때 교정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서 하려니까 불가능했다
허 위원은 30년 넘게 야구 해설을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한다. 친척 및 지인 경조사에 참석하는 건 시즌 중에는 불가능하다. 골프도 그의 관심 리스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야구만 생각한다. 중계가 없는 날에도 사무실에서 4개의 화면을 번갈아 보며 경기를 꼼꼼히 챙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휴대전화를 통해 경기 내용과 결과를 확인한다. 현장에서 감독, 선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이도 허 위원이다. 허 위원 정도면 굳이 선수까지 챙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는 모든 걸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걸 게을리하는 순간 해설자로서의 생명도 끝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구 해설가로서 허구연은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레전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