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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기현 천주교 마산교구장

“사고뭉치 문제아 소년 주교가 되다”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배기현 천주교 마산교구장

  • 가톨릭 교회 주교(主敎)는 예수 그리스도 12사도의 후계자다. 사도전승(使徒傳承)에 따라 각 교구를 책임지는 사목자로서 예수가 사도들에게 전한 가르침을 지키고 전수하는 일을 한다. 2016년 제5대 천주교 마산교구장이 된 배기현(66) 주교는 방황과 시련의 세월을 겪은 끝에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됐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와, 한국 비(非)천주교 매체로는 처음으로 만났다.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신동아=최창근 객원기자] 2016년 6월 8일, 경남 창원시 마산체육관. 천주교 마산교구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됐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던 서품미사 현장은 배기현 신임 교구장의 답사가 시작되면서 금세 웃음바다로 변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야 말았습니다”라는 배 교구장의 말에 3000여 참석자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입을 연 배 교구장은 방황하던 지난날에 대한 고백을 이어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훌륭해 교구장으로 뽑힌 게 아니라 불쌍해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중략) 40여 년 전 제가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간다니까 동네 사람들이 저한테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저게 신부 되면 개도 신부 되고, 소도 신부 된다’고 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고 12년 만에 겨우 신부가 됐습니다.(후략)” 

배 교구장은 과연 어떠한 길을 걸어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됐을까?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

- 어린 시절 방황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어린 시절 유복했죠. 아버지는 대학교수, 어머니는 개원의였으니까요. 초등학교 때 공부도 잘했습니다.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죠. 그걸 보신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욕심을 부리셨어요. 마산중학교에 진학하면 톱클래스가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니, 좀 더 큰 도시인 부산 소재 중학교에 진학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산 소재 중학교 진학을 결정하고 입시를 치렀습니다. 2교시 수학시험을 치르는데, 눈앞이 하얘지면서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결국 25문제 전부를 못 풀고 백지 답안지를 냈어요. 결과는 낙방이었고요. 어린 마음에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 사건이 오랜 방황의 진원지가 된 셈이죠.” 

어린 시철 받은 상처로 그는 이른바 ‘문제아’가 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중3 때는 가출도 했다. 방황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졌다. 법정 출석 일수만 간신히 채울 만큼 학교를 빠졌다. 고교 시절 정학만 4번 당했다. 

- 담배 피우는 것을 아신 부모님 반응은 어떠셨나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가 흡연 사실을 아셨어요. 막내가 담배를 피운다니 충격이 크셨겠죠. 그런데 놀라운 반응을 보이셨어요. 가족회의를 열어서 담배 피우는 걸 허락해주신 거죠. 용돈에 별도로 ‘담뱃값’도 책정해주시고요. 한국 보통 가정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겁니다.” 

배 교구장 아버지 배덕환(2013년 작고) 씨는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영문학 교수였다.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출신으로 만주 대동학원 졸업 후 펑톈(奉天·오늘날 선양(瀋陽))에서 관료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고교 영어교사를 거쳐 해인대(경남대 전신) 교수로 부임했다. ‘지리산’ 등 대하소설로 이름을 얻은 작가 이병주가 동료 교수였다. 자유로운 성정의 배 교수는 자녀 교육법도 남달랐던 셈이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

-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머니가 일본 도쿄여자의과대 출신으로, 유학 시절 개신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산YWCA(기독교여성청년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으신 분이에요. 어머니를 따라 다른 형제자매들은 다 교회에 다녔는데 저는 그걸 싫어했습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도 않으셨고요. 

그러다 제 큰누나가 선배 부탁으로 성당에서 반주를 하게 됐습니다. 성당에 다녀온 누나가 ‘고요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 마음에서 그려온 신앙 세계다’라고 하더군요. 이를 계기로 4남매가 전부 성당에 가게 됐습니다. 어머니도 우리가 좋아하니 허락하셨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배 교구장이 성당에 출석한 뒤부터 어머니 전풍자(1998년 작고) 씨는 매일 새벽 성당에 나가 ‘사고뭉치’ 막내를 위해 남몰래 기도했다고 한다. 배 교구장은 훗날 신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성(聖) 암브로시오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방탕과 방황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어머니 성 모니카에게 이런 말을 했죠. ‘어머니가 많은 눈물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 덕분에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된 셈이죠.” 

천주교에서 ‘위대한 교부, 교회학자, 영성가’로 손꼽히는 아우구스티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철학에 심취하며 신앙과 멀어졌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는 마니교라는 다른 종교에 빠진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바로잡고자 암브로시오를 만나 눈물로 간청했고,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를 만나 감화받은 후 회심해 사제가 된다. 이후 주교 자리에 올라 북아프리카에서 일했다. 

- 교구장님도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 끝에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셨군요. 

“그런 셈입니다. 어머니는 수입을 늘 이웃과 나누셨어요. 출석하던 교회 재정의 절반 정도를 책임지셨고,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 거지, 구두닦이, 창녀들도 거두고 보살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맑은 것을 지향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신학교에 가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죠.” 

- 그러나 신학교 시절에도 방황은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어요.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했지만, 생활이 엉망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병이 나서 몸져누웠죠. 겨우 마산 집에 내려왔습니다. 어머니가 3일 밤낮으로 간호해주셔서 회복했죠. 열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가는 내내 어머니께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못난 아들 둬서 이렇게 고생하시는구나, 나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 애만 먹이고 살아왔구나’라고 자책했죠.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으로 이걸 참아주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열차 안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면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신부가 되면 어머니께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겠다 싶어 신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


12년 만의 신학교 졸업

배기현 천주교 마산교구장은 어머니의 사랑과 장병화 주교의 믿음, 정달용 신부의 교육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해윤 기자]

배기현 천주교 마산교구장은 어머니의 사랑과 장병화 주교의 믿음, 정달용 신부의 교육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해윤 기자]

방황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무한 헌신했던 어머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신학교 진학을 결심했지만, 광주 대건신학대(현 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한 후에도 ‘자유로운 영혼’은 엄격한 ‘군대식’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수업에 흥미를 못 느낀 것은 물론, 새벽 미사도 빠지기 일쑤였다.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2학년 1학기 때 휴학을 결정했다. 사감신부는 “1년 넘게 지켜봤는데 신앙심은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없는 듯하다”는 평가서를 당시 마산교구장이던 고 장병화 주교에게 보냈다. 

아들의 휴학 결정에 가장 상심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배 교구장이 훗날 보게 된 어머니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깜깜한 밤에 명주실 한 가닥 보는 것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비추신다면 혹시 부르실지도 모른다.” 

전풍자 씨는 아들의 신학교 부적응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아들이 신부가 되려 하는데 나는 개신교를 믿고 있으니 하느님과 ‘종이 한 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배 교구장의 휴학 후 전씨는 ‘종이 한 장’의 벽을 없애려 ‘모니카’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 신학교 졸업까지 고 장병화 주교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어머니가 마산YWCA 회장을 하신 것을 계기로 장병화 주교와 알게 되셨어요. 천주교 절차에 따라 신학교에 가려면 관할 교구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주교님께서 ‘사제가 될 자질이 있고, 신앙심이 깊은 집안이다. 입학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신학생들은 방학이면 관할교구 교구장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휴학생이던 저도 부르셔서 동기생들과 같이 인사드리러 갔죠. 주교님께서 ‘내 사무실 책상 정리나 해놓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정리를 하다 서랍을 열었더니 신학교에서 보낸 제 평가서가 있었어요.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게 당시 저의 적나라한 모습이었죠. 주교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비록 적응은 못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며 저를 감싸주신 분이에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주교님이 저 보라고 일부러 서랍 맨 위에 그 평가서를 넣어두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학교 휴학 후 배 교구장은 군 입대를 결정했다. 군 생활을 통해 스스로 거듭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저는 아버지의 자유로운 피를 물려받았어요. 학창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고요. 집안이 부유해 고생을 모르고 자라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안락하게 살아서는 신학교 생활을 견딜 수 없다. 혹독한 군 생활을 경험하면 내 또래 중간 정도 사람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병대와 더불어 가장 힘들다는 공수부대에 자원했고, 부사관이 됐죠.” 

그러나 군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강풍 속에 강행한 강하 훈련 중 채석장에 떨어져 무릎 관절이 파열됐다. 허리뼈에도 금이 갔다. 이후 부상 후유증으로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만 14차례 받았다. 지금도 그의 목과 허리에는 보철과 나사못이 박혀 있다. 

제대 후 배 교구장은 1978년 신학교에 복학했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천국 같았다. 문제는 몸이었다. 무릎, 허리, 목 수술이 이어졌다. 입학 12년 만인 198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서품미사에서 배 교구장 어머니 전풍자 씨는 “죄 많은 집안에 신부를 주셨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신앙의 부모

- 어머니가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신 데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머니는 1976년, 61세 때 가산(家産)과 병원을 다 정리해 소록도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미 의대 시절 개신교 목사이자 사회사업가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를 만나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19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베 빈민촌에서 봉사하며 빈민과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사람입니다. 그 영향을 받은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도 3번이나 소록도에 편지를 보내 ‘의사로서 봉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뜻을 이루신 거죠. 

저도 신학교 복학 후 만 5년 동안 방학이면 소록도에서 어머니와 같이 지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이제야 하느님 뜻을 알겠다. 간절히 원할 때는 안 보내주시더니, 이제야 허락하신 이유를. 젊은 시절 내가 여기 왔다면 의사로서 내 실력만 믿고 지시하는 사람으로 한센병 환자들 앞에 섰을 거다. 하느님은 내 몸도 마음도 문드러진 지금에야 한센병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게 해주셨다.’” 

전풍자 씨는 국립소록도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1981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제8회 용신봉사상을 받았다. 

- 정달용 신부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어머니가 제 신앙의 어머니라면, 정달용 신부님은 제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신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어머니를 통해 생겼고, 사유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은 이분을 통해 갖게 됐죠. 제가 신학교에 복학한 뒤 철학 교수로 부임해 오셨는데, 첫 수업 때부터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후 학문을 가까이하게 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독일 뮌헨대로 유학을 갔습니다.” 

2004년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정달용 신부 퇴임 기념 논총(論叢) 간행 위원장을 맡은 배 교구장은 헌사에 “우리 선생님은 우선 철저한 장인정신의 화신이시다. 가르치는 일에 그처럼 신명을 바치시는 분을 우리는 또 뵙지 못했다. 때로, 그분의 몸과 정신에서 발하는 이상한 신기(神氣)의 아우라가 강의실을 채우곤 했다”고 썼다. 배 교구장이 주교 서품을 받고 주한 교황청대사관에서 순명(順命) 서약을 한 뒤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도 정달용 신부다.


함께 비를 맞는 것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 요즘 젊은 세대는 이른바 N포세대라 불릴 만큼 여러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사목자이자 원로로서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 젊은 시절에는 다들 어려웠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정치·경제·사회 구조적 문제다 보니 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많죠. 암담한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 신영복 선생이 자신의 책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죠. 저는 교회, 사제, 수녀가 할 일은 어려운 사람과 같이 괴로움을 겪어주는 것이라 봅니다.” 

배 교구장은 “같이 아픈 척하면 안 된다”며 ‘진정성’을 강조했다. 그는 65세에 사제직에서 은퇴하면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했던 ‘소록도의 천사’ 마리안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 수녀가 있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가서 봉사하는 꿈을 꿨다. 유럽은 최근 탈기독교화 현상으로 사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75세쯤에는 ‘거리의 악사’가 돼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는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나 교구장이 되면서 그 꿈은 이룰 수 없게 됐다. 대신 미사나 성사(聖事)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봄이 오면’ ‘이별의 노래’ ‘바위고개’ ‘모닥불 피워놓고’ 등 가곡이나 가요를 부르면 다들 너무 좋아해요.(웃음)” 

배 교구장은 인터뷰를 하며 연거푸 “기가 막히다”는 표현을 썼다. 

“저처럼 기가 막힌 인간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지금은 천당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고 이끌어주셔서일 것입니다.” 

덧붙여 ‘문제아’를 둔 부모에게 당부도 남겼다. 

“제 어머니는 사람들 눈에 문제아로만 보였던 저를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일깨워주셨고요. 결국 방황에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사랑과 인내로 기다리면 사람은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배 교구장의 사목 표어는 코린토 전서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이다. 이는 배 교구장 어머니가 선종 전 남긴 말씀이라고 한다.




신동아 2019년 4월호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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