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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6·25 파병 혈맹에서 시기·질투의 관계로

  • 최창근|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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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애증 교차한 옛 친구… 교학상장(敎學相長)해야
  • ● 한국·대만 기업이 벌인 치킨게임
  • ● 독립의 길로 가는 서막 열어준 나라
  • ● 대만 사회 기저에 흐르는 反韓감정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1992년 8월 24일 주한 대만대사관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국기 하강식을 치렀다.[동아일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한국인의 눈에서, 마음에서 멀어진 나라가 있다. 대만(臺灣), 엄밀히 말해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수교 협정서에 서명했다. 한국은 냉전체제 속에서 지속된 적대관계를 공식 종료하고 ‘죽(竹)의 장막’을 넘어 중국의 손을 잡았다. 치러야 할 대가도 있었다. 한국은 ‘새로운 친구’를 맞는 대신 ‘옛 친구’ 대만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중국 얻으면서 대만 잃어

베이징에서 한중 양국 외무장관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날, 서울 명동의 주한중화민국대사관에서는 2000여 화교의 눈물 속에서 ‘청천백일기 하강식’이 열렸다. ‘마지막 주한국 대사’ 진수지(金樹基)는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로 참석자들을 위로했다. 그 말은 한국·대만 단교 25주년인 올해까지도 공허한 메아리로 울린다. 눈물 속에 내려진 청천백일기는 공식 석상에서 게양되지도, 돼서도 안 되는 존재다.

중국의 대외 원칙인 ‘하나의 중국 정책(一個中國政策)’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全) 중국 유일 합법 정부라는 게 골자다. 대만·홍콩·마카오에 관해서는 ‘나눌 수 없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조건도 붙는다. 베이징은 중국과 수교하는 모든 나라에 대만과 단교할 것을 요구했다. 원칙 적용에는 예외가 없었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인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일대 쾌거인 이 사건 배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가 있었다. 윤봉길의 거사 후 국민정부(國民政府·중화민국의 당시 공식 명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상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냉담하던 태도도 바꿨다. 1932년 8월 김구와 첫 만남을 가진 후 장제스는 임시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도움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역만리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은 장제스의 심복 후쭝난(胡宗南) 휘하에서 훈련받았다. 김구의 차남 김신(훗날 주대만 한국대사를 지냄)은 육군항공학교 졸업 후 전투기 조종사가 됐으며 훗날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밑거름 구실을 했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도 인정했다. 1943년 카이로에서 연합국 삼거두가 만났다.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설득해 ‘일본 패전 후 조선 독립’ 선언을 이끌어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의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약소국 임시정부의 앞날을 신경 써주는 나라는 없었다. 강대국들은 “한국을 신탁 통치해야 한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종전 후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유일무이한 국제법적 근거가 됐다. ‘독립의 길’로 가는 서막이었다.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독립했다. 1945년 11월 4일 장제스는 광복을 맞이해 조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해 환송연을 베풀었다. 귀국 편의를 위해 전용기도 내주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 7개국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힘을 보탰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제스에게 195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로 보답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기여했다.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해 6월 10일 샤오위린(邵毓麟)을 초대 한국대사로 임명했다. 훗날 ‘한국대사 회고록(使韓回憶錄)’을 집필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한국 정부는 국공내전의 승기가 공산당으로 기울어가던 1948년 11월 정환범을 주중화민국 초대 특사로 임명해 광저우(廣州)에 ‘대한민국특사관’을 개관했다. 대한민국의 첫 재외공관이다. 같은 해 8월 7일 장제스는 경남 진해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8월 26일 신석우가 초대 대한민국 대사로서 리쭝런(李宗仁) 부총통에게 신임장을 제청했다. 1949년 12월 중화민국의 대만 천도 후 대한민국 대사관은 타이베이에서 재개관했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우호관계는 이어졌다. 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무력간섭을 선언한 후 미국 해군 제7함대에 대만해협 진입을 명령했다. 제7함대 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태평양지구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차례로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장제스는 대만군의 중국 본토 파병, 제3전선 형성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3개 전투사단 병력 3만3000명 제공을 제의했다. 맥아더는 회의적이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 의견도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트루먼은 대만군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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