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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발굴|현대·북한 막후채널 고바야시 게이지 증언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 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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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증권 고문인 박정두(朴正斗)씨로부터 ‘명예회장님이 꼭 금강산을 개발하고 싶다 하시니 중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받은 것은 1997년 초가을이었다.” 규슈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65) 교수는 이렇게 해서 현대로부터 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북한의 김용순 비서와 접촉을 시작했다. 이어 베이징에서 현대와 북한의 첫번째 회합을 성사시키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방문에 동승해 교섭 전과정을 지켜보는 등 현대와 북한의 접촉 채널로 활약했다.

기자 출신인 고바야시 교수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61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해 ‘세이부(西部)’ 본사 경제부와 ‘아사히저널’ 편집부를 거쳤다. 1976년 이집트 카이로 지국장을 마치고 귀국 후 아사히신문 외보부 차장(구주 담당)으로 일하던 중 81년 10월 갑자기 서울 지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김대중씨에 대한 보도문제로 서울지국을 일시 폐쇄당했다가 다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장급에서 후임자를 내기로 하고 한국어도 모르고 한반도 정세에도 밝지 못한 고바야시 차장을 “단기간, 반년이라도 좋으니”라며 서울지국장으로 보냈다.

부임 후 그가 처음 한 일은 동교동을 다니는 것이었다. 이희호 여사로부터 김대중씨의 옥중 상황을 들으며 동교동으로 온 옥중서한 복사본을 얻어냈다. 편지 복사본은 믿을 수 있는 친구를 통해 몰래 도쿄로 보냈다. 편지는 1982년 1월 김대중씨의 대법원 판결 1주년을 맞아 아사히신문에 게재됐다. 그날로 고바야시 지국장은 문화공보부로 소환됐다. “이미 정치생명이 끝난 3김에 대해 쓰는 것이 이상하다. 계속 쓰면 심한 일(국외추방을 시사)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의 첫 여행지로 광주와 목포를 선택했다. 현지에서 김대중씨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확인한 고바야시는 “전라도가 존재하는 한 김대중씨의 정치생명은 살아 있다. 정치생명이 있는 한 김대중씨에 대한 기사는 계속 쓰겠다”고 문공부에 통보했다.

김영삼씨와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초여름, 일본 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서였다. 김영삼씨는 며칠 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전두환 정권을 혹평했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었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김영삼씨는 자택연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김영삼씨에 관한 보도는 금지돼 있었고 일본 매스컴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고바야시는 될 수 있는 한 김영삼씨의 동정을 자세히 전하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사히신문 기사는 영어, 한국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으로 전해졌다.

고바야시 기자의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한 김영삼씨는 단식으로 연금이 해제된 직후 고바야시에게 기자회견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입원중이던 서울대학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한 단독회견은 보기에도 안쓰러운 사진과 함께 아사히신문 석간 1면 톱을 장식했다.

그 후 김영삼씨는 측근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바야시가 주최하는 일본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고, 때로는 함께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를 만큼 친해졌다. 이들 뒤에는 언제나 미행하는 수사기관 차량 2대가 뒤따랐다. 고바야시는 92년 여름 일본에서 ‘김영삼-한국현대사와 함께 걷다’라는 책을 출판해 김대통령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고 95년 고바야시가 아사히신문에서 퇴사해 규슈국제대학 교수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고바야시 교수가 보내는 팩스는 직접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회답은 없었지만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났을 때 직접 회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북한의 김용순 비서가 고바야시 교수와 연락을 끊지 않았던 것은 김대통령과 가까운 것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바야시는 정치부 기자도 아니었고, 그런 뜻도 없었지만 한국 특파원 생활을 통해 폭넓은 기자가 됐다며 한국과 한국의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대학에서 아시아개론과 지역특수강의(한반도)를 하고 있다. 또 대학부속 도서관장, 국제상학부 부장(학장), 대학홍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신한국지도’ ‘관광코스가 아닌 한국’과 ‘북조선’(편저) 등이 있다. 1935년 도쿄 출생,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6월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도 평양은 쾌청했다. 대동강 주변은 초여름의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고, 기분 좋은 미풍이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전날 북경을 경유해 평양에 온 우리-나와 현대그룹의 박세용(朴世勇) 종합기획실장 겸 현대종합상사 회장,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사장 등 현대그룹 간부들(이하 모든 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한다)-은 오전 7시, 숙소인 초대소를 출발해 판문점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한국 쪽에서 육로로 북한에 오는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판문점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93년 방북 때와 비교해 흔들림도 적고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터널의 조명은 꺼져 있어, 절전중임을 알 수 있다.

정회장의 굳은 표정

도중 수비대로부터 판문점 입구에서 반 시간 정도 기다리라는 정차 명령을 받았다. 이유는 중앙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명예회장의 판문점 통과가 민간인으로는 처음이며, 남북한 관계에도 획기적인 일이기 때문에 연락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사고’로 우리가 판문점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정명예회장이 보낸 소 500마리가 벌써 판문점을 통과하고, 소를 태웠던 트럭은 길 주변에 쭉 늘어서 있었다. 트럭 45대에는 500마리의 소가, 나머지 5대에는 사료가 적재돼 있었다. 이 소들은 북한 각지의 공동농장에 암수 한 쌍씩 분배될 예정이었다.

오전 10시 몇 분 전 우리는 군사분계선 바로 옆에 세워진 판문각에 들어갔다. 2층에서 한국측을 내려다보니 정부와 매스컴 관계자들이 서있었다. 아는 얼굴도 있었다. 저쪽에서도 나를 알아본 사람이 있어, 후일 서울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북쪽에 계셨습니까?”라는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10시를 넘어서자 정주영 명예회장을 선두로 현대 방북단이 군사경계선을 넘었다. 선두에 선 검은 양복, 카키색 코트에 새하얀 모자를 쓴 정회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화려한 한복 차림의 북한 접대원이 꽃다발을 증정했을 때도 어색하게 웃어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정회장은 이미 89년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방북은 민간인으로는 최초의 판문점 경유이며, 또 염원인 금강산개발의 성공 여부도 달려 있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북한측은 총비서 취임 후, 한국을 포함한 외국의 주요인물들과는 일절 회견을 갖지 않았던 김정일 최고사령관과 정회장의 만남을 약속했다. 강의(剛毅)하기로 알려진 정회장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자위가 붉어졌다. 내가 중재했던 교섭이 이루어지려 한다는 기쁨 때문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그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은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통일로에 피는 코스모스는 판문점을 지나 평양까지 이어지는데, 왜 인간은 갈 수 없는가”라고 탄식했지만 지금 그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날 남북한 관계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금강산 개발 중개를 요청받고

현대증권 고문인 박정두(朴正斗)씨로부터 “명예회장님이 꼭 금강산을 개발하고 싶다 하시니 중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받은 것은 1997년 초가을이었다. 박씨는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경남중학 동기로, 오랫동안 김대통령과 민주화투쟁을 해왔다. 일어가 유창해 내가 김영삼씨와 회견을 할 때 통역을 겸해 동석하기도 했다. 또 내가 ‘김영삼, 한국현대사와 함께 걷다’라는 책을 집필할 때는 김영삼씨의 고향 거제도를 비롯한 각지를 안내해 주었다. 순박하고 요령 부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는 내가 북한 대남공작 책임자인 김용순(金容淳) 비서와 친한 것을 알고, 중재를 부탁한 것 같다.

며칠 생각한 끝에 나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째 이유는 정회장의 금강산에 대한 열정이었다. 81년 말부터 4년간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서울지국장을 지냈던 연고로, 정회장과 두 차례 비보도(非報道)회견을 할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회견 때라고 기억되는데 내가 산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자랑하는 설악산에 올라가본 뒤 “설악산은 웅장한 산입니다”라고 감상을 말하자, 정회장은 유창한 일본어로 의기양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 설악산 정도로는 금강산에 견줄 수도 없네. 내 고향이 금강산 바로 옆이어서 여러 번 올라가봤지만, 설악산은 그 경색과 분위기에 미치지 못하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명산일세. 아직 관광개발이 되어 있지 않으나 시설이 완비되면 전세계 관광객이 밀려올 걸세.”

당시 남북 관계가 긴장 속에 있었던 것을 고려해서인지 개발을 하고 싶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그 의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둘째 이유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과의 교섭은 정회장처럼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교섭은 하나씩 쌓아올라가는 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당 정부 기관 등 각각의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주장해,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더라도 조직을 대표하고 있는 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조직의 주장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교섭이 가능할 리도 없다.

그러니 우선 큰 틀을 결정하고, 다음에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하는 상의하달(上意下達)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큰 틀을 결정할 수 있는 조직 혹은 기업이 아니면 북한은 불신한다. 일본식으로 “중역회의에서 검토한 다음 대답하겠다”고 하면 현재의 상황에서 북한과의 교섭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번 교섭 과정에도 정회장의 즉단(卽斷)과 아이디어가 거듭되는 교착 상태를 타개했다. 예를 들면 “땅을 밟고 북한에 가고 싶다”는 정회장의 강한 희망, 즉 판문점을 통한 방북 요구는 북한 군부의 반대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지만 “소를 데리고 간다. 소는 비행기나 배로는 운반할 수 없다”는 정회장의 제안으로 간단히 해결됐다. 그것도 단지 “한다”는 태도 정도가 아니다. “나는 옛날 부친의 소를 훔쳐 그것을 판돈 80원을 가지고 서울로 나왔다. 지금의 사업도 그 돈을 밑천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훔친 한 마리는 돌려주고, 그 은혜를 1000배로 갚기 위해, 모두 1001마리의 소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북한도 받아들인 것이다.

셋째 이유로 정회장의 마음속에는 금강산을 개발해 이익을 내고 싶다는 것보다 고향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정회장의 고향은 금강산 기슭의 한촌이다.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대인 정회장이, 스스로 일으킨 막대한 부를 고향 개발에 사용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하고 싶어한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한국의 재벌, 아니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에서도 지금처럼 불확실한 시기에 이해득실을 무시하고 금강산을 개발하겠다는 기업가나 회사는 현대 외에는 없을 것이다.

넷째, 내가 중재를 수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현대측의 기획의도였다. 한국에는 1000만 명 정도의 이산가족이 있는데, 6·25전쟁을 전후로 남으로 내려온 1세대들은 이미 고령이다. 현대 관광개발의 주축은 1세대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고향땅을 밟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런 인도적 측면뿐만이 아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지금까지 정부관계자, 경제계 유력인사 등 특수계층에 허락된 북조선 방문을 일반인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남북간에 일방적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교류’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나를 움직인 것은 정회장의 인품이다. 아사히신문의 히도스야나기(一柳) 사장이 동아일보 초대로 방한하고, 나도 전 서울지국장 자격으로 동행했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열린 아사히신문 주최 파티에는 초대장을 보냈음에도 한국 재계 거물들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정치사건 취재로 바빠 재계와 거의 교류를 하지 못했던 사정도 있었다.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회장이 비서도 동반하지 않은 채 가볍게 들어왔다. 그 장소에 있던 아사히신문 관계자도 눈치 채지 못한 등장이었다. 회장은 히도스야나기 사장의 인사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나의 관찰에 의하면 사장의 인사말을 누구보다 열심히 경청한 사람은 가수 조용필씨와 정회장이었다. 그때 이후 나는 회장에게, 무언가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장 서울에 연락해 내게 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한다고 명기한 현대측의 위임장과 개발계획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도착한 위임장에는 내가 요구했던 정명예회장의 서명 대신,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교섭이 실패해 외부에 누설됐을 경우, 명예회장에게 누가 되기 때문에 이해해 주기 바란다”는 현대측 설명도 있었다.

현대가 작성한 서류에 ‘금강산개발은 현대가 가장 적합하다’라는 취지의 내 편지(참고 1)를 동봉해 김용순 비서 앞으로 보내기로 했다. 우편과 팩스로는 비밀이 누설될 수 있어서 평양으로 가는 친구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했다. 이 친구는 나중에 또다시 등장하지만, 내가 김비서와 단독으로 만났을 때 통역을 해주었던 인물로 조총련 간부였다. 그는 북한에서 돌아온 뒤, 내게 곧 연락을 해 “확실히 김비서의 사무실에 전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도록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일·북 국교정상화 위해 나서다

여기서 어떻게 내가 김용순 비서와 직접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경위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일본으로 귀국한 직후인 86년 봄, 대학 때 서클 동료였던 시부야 하루히코(涉谷治彦) 외무성 아시아국 참사관(전 주독일대사)이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북한과 접촉할 수는 없으나, 비공식적으로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줄 수 없는가”라는 상담을 해왔고, 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외무성 관료와 조총련 친구, 나 이렇게 세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부담 없이 만나는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시부야 참사관이 시카고 총영사로 전임하자, 아시아국의 스즈키 가츠야(鈴木勝也) 심의관(현 브라질대사)과 오래 전부터 북한과 무역을 해온 신일본(新日本)산업의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사장으로 멤버가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스즈키 심의관에게 북한과 접촉할 것을 제안했다. 다케시타(竹下) 총리가 국회에서 북한에 대해 사죄와 대화 의사를 표명한 뒤 몇 개월 지나 89년 여름 스즈키 심의관이 “외무성 수뇌의 OK를 받았으니 비밀접촉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외무성의 의도는 곧바로 요시다씨를 통해 북한에 전달됐다.

90년 2월 드디어 평양에서 돌아온 요시다 사장이 “북한이 일본 외무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전언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전제 조건 없음, 원만히 진행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조건이 딸려 있었다.

90년 3월28일, 일본과 북한의 최초 접촉은 파리의 개선문 가까이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파리에서 3일간 북한과 접촉한 후 도쿄, 오사카로 무대를 옮겨 3회에 걸쳐 진행됐다. 그 결과 90년 가네마루(金丸)의 방북과 후지산마루호의 선장과 기관장 (83년 11월, 일본의 화물선 후지산마루호에 북한군 병사 민홍구가 망명을 하기 위해서 타고 있었다. 북한은 후지산마루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민홍구를 밀항시켰다고 하여 스파이혐의로 감금시켰다)이 석방됐다.

가네마루씨의 방북 후인 10월 오자와(小澤) 자민당 간사장의 북한 방문 때 후지산마루호의 베니코(紅花)선장을 비롯한 2명이 석방됐다. 나는 북한에 사건 경과를 기사화하겠다고 통보했다. 비밀접촉에서 어떠한 성과가 발생하면 그 시점에 기사화한다는 것이 내가 중재를 받아들일 때의 약속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갑자기 “평양에서 개최되는 남북한 총리회담 취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 총리회담 취재는 이미 일본 매스컴 관계자 35명이 가기로 결정돼 있었고, 조총련을 통해 등록이 끝난 상태였다. 그것을 갑자기 취소하고 신청도 하지 않았던 나를 포함한 5명의 베테랑 기자를 초대하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기사 게재와 관련해 나와 의논하고 싶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 방문 때 김용순 비서, 후일 서울에 망명한 황장엽 비서 등과 회견했지만 공동회견이어서 김비서와 단독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북 국교정상화 교섭은 시작됐지만 곧 일본인 납치문제 등으로 의견이 충돌, 무대 뒤의 조정자인 내가 나설 기회는 없었다. 92년 12월, 나는 서울에서 한국 대통령선거를 취재하고 있었다.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 결정된 다음날 아침 서울의 어느 호텔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동경에서 걸려온 전화에 눈을 떴다. 조총련 친구로부터 “김용순 비서가 곧 평양으로 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초대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북한은 내가 김영삼 후보와 돈독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신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도 김영삼 대통령과 평양을 연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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