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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동창회

2001년 1월 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의 자화상

  • 김지석 jk@hani.co.kr

2001년 1월 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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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말의 암울한 시대에 ‘철학과’라는 한 배를 타고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은 이제 40대가 되어 대학교수, 의사, 회계사, 변리사, 기자, 사업가, 영화감독 등으로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다. 직업은 달라도 만나기만 하면 ‘돈’과는 관계없는 논쟁을 벌이기 좋아하는 ‘철학적 40대들’의 이야기.
요즘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이 한창이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니 만큼 기념관을 지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한 독재자’를 위해 국고를 지원해 기념관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중한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공과가 있는만큼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국고 지원보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념하기를 원하는 민간인들이 성금을 내 기념관을 지으면 될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느라 시위와 최루탄으로 얼룩진 학창 시절을 보낸 70년대 학번들이 대부분 그렇듯 서울대 철학과 77학번들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좋지 않은 편이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친구도 있었고 학내외 시위로 구속되거나 강제 징집되거나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친구도 있었다.

3년 동안 같은 강의실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이 시국 상황과 관련돼 이리저리 흩어져버리자 10여 명의 철학과 77학번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마지막 정’이라도 나눌 요량으로 강촌으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졸업은 아직 1년여 남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한만큼 여러 사람이 아직 학교에 남아 있을 때 졸업여행을 하자는 뜻도 있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쓰러지기 1주일 전인 79년 10월19일이었다. 시국은 몹시 어두웠지만 맑은 가을 하늘과 눈부신 햇살, 북한강의 푸른 물줄기가 뿜어내는 공기는 신선하기만 했다.

전투경찰의 군화 소리를 듣고 형사의 매서운 눈길을 늘 의식하며 칙칙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암울한 시대를 탄식하게 하던 캠퍼스를 벗어나 ‘자연의 해방구’에서 토론하고 결의를 다지며 밤새 석별의 잔을 기울인 것은 마치 먹구름 속에 언뜻 스쳐 지나가는 한 조각 푸른 하늘과 같았다.

먼저 강촌의 민박집에서, 한 친구가 미리 준비해온 잘생긴 돼지머리를 허름한 상 위에 올려놓고 ‘기원문’을 올렸다. 졸업여행에 돼지머리가 등장하니 엉뚱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문은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정확하게 1주일 뒤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우리는 ‘기원’이 ‘현실’이 되는 그 빠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그 당시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같은 바람을 기원하던 집단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밤새 시국토론과 철학적 담론을 넘나들던 우리는 아침에 강변을 산책하다가 매운탕 집 옆을 지나면서 기어이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 친구가 매운탕 집의 수족관에서 잘 놀고 있는 쏘가리를 꺼내 장난삼아 툭 쳤는데 그 불쌍한 쏘가리는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그 친구 덕분에 아주 맛있는 쏘가리 매운탕을 먹을 수 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들은 주머니를 털어 주인이 요구하는 ‘엄청난’ 음식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매운탕과 곁들여 먹은 해장술로 취기가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10월 하순의 차가운 강물로 뛰어들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물장난을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이 물세례를 받았던 이 시절의 추억은 모두 잊지 않고 갈무리하고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우리 친구들은 각자 다른 세월의 물줄기를 따라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현재 직업을 보면 교수·학자가 가장 많아 전체의 3분의 1 가량 된다. 언론인이나 사업가·회사원·공무원이 두세 명씩 있는 건 어느 학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과는 정말 거리가 먼 회계사와 변리사도 있고 영화감독과 의사도 한 명씩 있다. 사업을 하다가 농촌에서 공동체생활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 비록 직업은 다양하지만 속을 파헤쳐보면 ‘철학과 냄새’가 아직도 물씬 풍긴다.

몇 년 전에 필자 집에서 철학과 77학번 동기들이 모인 적이 있는데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열띤 ‘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따끈따끈한’ 철학박사 학위를 막 취득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었는데 눈이 동그래지면서 ‘어떻게 독일 대학에서 박사들이나 할 법한 수준 높은 논쟁을 벌이느냐’고 말해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직업은 달라도 ‘철학과 냄새’ 물씬

철학과 77학번의 학창시절과 그 이후 20여 년은 격동의 시절을 보낸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과 77학번은 모두 20여 명이지만 사람에 따라 공부한 시기가 다르다. 이 때문에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77학번의 숫자가 달라진다.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한 뒤 ‘상당한 경쟁’을 거쳐 78년 철학과에 진입한 인원은 17명이었다. 이들이 구태여 우긴다면 ‘주류’라고 쳐줄 수 있다. 이 ‘행복한’ 주류들은 77년도 1학년을 무사히 넘긴 부류다.

여기에다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으나 학내외 시위 등과 관련해 제적된 뒤 ‘민주화의 봄’ 시절이었던 80년에 복학한 사람이 3명 있다. 아울러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과 관련해 제적 또는 정학됐거나 군 입대 등으로 나중에 각자 다른 시기에 철학과에 진입한 친구도 몇 명이 더 있다. 또 특이하게 74학번으로 서울대 사대에 입학해 78년 졸업한 뒤 철학과에 학사편입해 ‘형’이기보다는 ‘친구’처럼 지내기를 더 좋아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철학과 77학번의 인원은 보기에 따라 17명에서 27명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이들이 모두 함께 학교에 다닌 학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른바 주류 중에는 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수가 된 친구가 많지만 비주류 중에는 다양한 ‘삶의 체험 현장’을 겪은 친구도 상당수다. 철학과 77학번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감방(감옥생활) 경험’이 있다. 주로 민주화 운동과 관련돼 있지만, 노동운동 및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경우도 있다. 이들의 투옥 햇수를 다 합치면 수십 년은 된다. 강제징집을 당했던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러다 보니 졸업연도도 각각 달라 81년이 반 이상이긴 하지만, 85년을 넘어선 사람도 여럿 있고 입학한 지 14년 만인 91년에야 졸업한 사람도 있다. 학생운동과 관련해 잘렸다가 복학하지 않은 ‘고집스런’ 친구도 몇 명 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대체로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뉘었다. 유럽 계통의 ‘사회철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은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했고 영미 계통의 ‘분석철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은 학구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처럼 철학적 취향은 달랐어도 우리 동기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언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술’이었다. 요즘처럼 양주나 맥주로 흥청거리는 술자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시절에 막걸리와 소주는 진지한 대화와 활발한 토론의 안주로 적격이었다.

술을 안주 삼아 대화와 토론 즐겨

당시 시국상황은 어두웠지만 철학과에는 나름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봉천동 고개를 넘으면 ‘일미집’과 ‘부산집’ 등의 허름한 술집들이 있었다. 막걸리나 소주에 김치나 빈대떡으로 허기를 때우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술이 깨고 나면 무슨 내용을 토론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었지만 ‘대화’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학내에서도 가끔 술자리를 마련했다. 잔디밭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몰래 사들고 온 소주나 막걸리를 돌리면서 야외 토론을 즐기기도 했다. 이것은 낭만적이기보다는 모험적이었다. 당시 긴급조치법에 따르면 학내에서 3명 이상이 모여 뭔가 숙의만 해도 회합죄로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캠퍼스 잔디밭에서 술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몇 명은 아예 일미집 위층에서 하숙을 했다. 어두워져서 술청으로 내려가 보면 대개 동기 한두 명은 만날 수 있었다. 일미집 아줌마의 귀엽던 딸은 지금 뭐하는지 궁금하다. 따뜻한 봄날이면 강의실에서 나와 소주병을 옆에 차고 관악산에 올라가 대자연 속에서 대화와 토론을 즐겼다.

때로는 명분도 그럴 듯하게 붙였다. 당시 음대에 다니던 여학생이 실연한 충격으로 캠퍼스 뒤편 연못에 투신 자살을 했는데 그 여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누군가 술을 사들고 오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돼지고기를 볶아오기도 했다. 철학과 77학번이 음대생과 무슨 인연이 있다고 추모까지 했는지….

철학과 봄 야유회에서 빠지지 않는 의식이 있었다. 교수님 한 분이 그 의식을 집행했는데 일종의 ‘바쿠스제’였다. 바쿠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이다. 니체는 인류의 문명을 아폴론적인 것과 바쿠스적인 것으로 나눈 적이 있는데 전자가 질서, 이성, 합리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혼돈, 감성, 비합리적인 것을 뜻한다.

음식과 술을 들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면 교수님은 ‘바쿠스제’를 선언했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순서에 따라 무릎을 꿇고 은박지 접시를 막걸리통에 갖다대고 입을 그곳에 대면 4학년 선배가 막걸리를 줄줄줄 따랐다. 쉬지 않고 누가 가장 오래 마시는지에 따라 급수가 정해졌다. 1분도 안 돼 탈락하면 주졸(酒卒), 그 위로 주사(酒士), 주장(酒將), 주왕(酒王), 주선(酒仙)이 있고 가장 오래 견딘 사람을 그해의 주신(酒神) ‘바쿠스’로 뽑았다.

철학과 77학번들은 전체적으로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학창시절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이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자나 제적자, 강제징집자가 다른 과에 비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노력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됐고 대체로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문화운동, 사회운동 등 각종 ‘운동’으로, 다른 쪽으로는 현실의 모순을 구명하고 극복하기 위한 학술·언론·문화 등 분야에서의 활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쓴 것이다. 이는 ‘현실을 이상화’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앞둔 지금은 ‘현실의 이상화’보다는 ‘이상의 현실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자기 영역을 찾아 자신만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쪽이 비슷한 듯하나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불만스러운 현실을 바꾸는 데 초점을 뒀다면 후자는 오랫동안 꿈꿔오던 것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나가는 데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만큼 정신적·물질적 역량을 축적했다고도 할 수 있고 꿈을 펼칠 수 있는 현실적인 분위기와 기반이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사회주의권의 붕괴 및 국내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70~80년대식 ‘큰 그림 그리기’가 퇴조하고 이상을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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