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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論座 공동기획|한일 언론인 대담 (상)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 대담: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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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러일전쟁(1904) 100주년이며 내년이면 을사조약(1905) 100주년, 한일국교정상화(1965) 40주년을 맞는다. 이런 시점에서 ‘신동아’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 ‘논좌(論座)’는 한일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대표적 언론인의 대담을 공동기획했다. 20세기를 악연으로 시작한 한국과 일본은 과연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었는가.
  • 갈등의 본질, 진전을 위한 해법 등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두 언론인의 대담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와카미야 언론계 대선배이자 오랫동안 한일관계를 지켜본 권오기 선생으로부터 이제까지 많은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이렇게 대담 기회를 갖게 돼 기쁩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와카미야 2002년 9월, 평양 북일 정상회담에서 본격적인 국교정상화 교섭을 시작하기로 합의했습니다만 납치문제, 핵문제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등 과거 한일교섭때 문제가 됐던 것이 북일교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초기 한일교섭은 전후 처리의 일환이기도 했고 냉전체제의 전개 시기와도 맞물렸습니다. 국교정상화 등을 의제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때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것은 1953년 7월이고요. 그런 시기에 교섭을 진행한 것이지요. 따라서 초기 한일교섭은 식민지지배를 정리하기보다는 미국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냉전체제를 만들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당초엔 한국이 대표가 되어 북한 몫까지 보상을 받자는 측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햇수로 15년 걸려 마침내 다다를 곳에 다다른 해가 1965년입니다.

와카미야 북한은 김일성이 빨치산으로 항일투쟁을 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한일조약처럼 경제협력 방식의 타협은 못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 되서야 평양선언을 발표했지요.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 방식이라도 상관없다고.

그렇습니다.

와카미야 일본으로서는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관해 한국과 타협한 정도 이상은 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 미안해서라기보다도 그럴 경우 한국으로부터 또 뭔가 요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요. 북한도 그런 부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일조약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문구는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북일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사죄를 표명하고 평양선언에 써넣은 것은 한일조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한일조약 뒤 한일간에 갖가지 대화가 오갔고, 1998년 한일공동선언에서 사죄했으므로 거기에 맞추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한편 김정일 위원장 쪽에서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해 마무리지으려 했지요. 그러나 ‘8명 사망’에 대한 회답을 비롯해 귀국한 5명의 가족이 북한에서 받은 대우 등이 일본 국민감정에 큰 상처를 주어, 지금 북일관계는 최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유일 합법정부 인정 요구한 한국

와카미야 한일교섭 때도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침범했다 해서 한국에 나포된 일본 어민의 석방이 의제가 됐었으니, 닮은 꼴이지요. 일본 국민은 ‘부당한 나포는 용서할 수 없다’며 오랫동안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전원석방될 거라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교섭을 촉진시키는 재료가 됐습니다. 이 점이 납치문제와 결정적으로 다르지요. 한일회담에서 당시 한국 정부는 북일국교정상화는커녕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부당하다며 ‘우리를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라’고 일본을 압박했지요.

그점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와카미야 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북한 정부를 당장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 여지를 남겨두려 했지요.

일본의 사회당도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로 ‘한일회담 분쇄’를 주장했습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저는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씨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인터뷰 했습니다. 단독회견이었지요.

와카미야 오히라씨가 외상 때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라 외상은 내가 기자를 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매우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라 외상은 일본 사회당이 머리띠를 두르고 ‘한일회담 분쇄’를 외칠 때 ‘저 사람들이 진정으로 저런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더군요. ‘그럼 거짓말이라고 봅니까’ 하자 ‘나한테 한일회담을 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사회당 인사들이 많다. 한일국교가 성립되지 않으면 북일수교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당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를 원하는 나머지 한일수교를 빨리 하라고 재촉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한반도는 4000년 역사상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일본 조정은 조선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늘 일차적 관심사였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이것이 오히라 외상의 전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쪽은 미국권, 북은 공산권이다. 미국은 북한에 0%, 소련은 남한에 0%의 관계다. 따라서 일본은 남에 70%, 북에 30% 정도의 관계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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