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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③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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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오셀로’의 한 장면.`

베르디의 부모는 너무 아까운 음악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10살짜리 아들을 생각해 나름 최선책으로 30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부세토로 유학 보냈다. 베르디는 이런 부모의 선견지명 덕분에 그곳에서 마을 유지 안토니오 바레치(1787~1867)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지원으로 밀라노로 유학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밀라노국립음악원에서는 그의 작품이 우수하기는 하지만, 입학연령을 넘긴 18세의 학생을 합격시켜줄 정도로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평가와 함께 입학을 불허했다. 입시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거니와, ‘읍(邑)’ 단위 마을의 성당 오르간 주자를 사사한 베르디의 시험 준비는 도시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 허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후일 밀라노국립음악원의 명칭이 국민영웅이 된 그를 기념해 ‘베르디 국립음악원’으로 변경된 것을 상기할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비록 정식 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체계적인 음악레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숨어있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오페라인 ‘오베르토’가 스칼라 극장의 매니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의 눈에 띄어 스칼라 극장과 3개의 작품을 계약하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렇게 앞길이 열린 베르디는 1836년 고향에 돌아와 자신을 발탁하고 지원해준 바레치의 첫째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한다. 어려서부터 베르디는 장학금에 대한 보답으로 바레치의 네 딸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쳤는데, 그중 첫째 딸과 결혼함으로써 존경하던 바레치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리고 1837년에는 딸을, 이듬해에는 아들을 낳으면서 주세페 베르디의 인생은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삶,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르디의 이 같은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838년부터 차례로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1839년에 초연한 그의 두 번째 작품 ‘하루 만의 임금님’마저 혹평과 함께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리는 일을 당했다. 당시 그의 심정은 고스란히 회고록에 담겼다.

“살아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어둠뿐이었다. 혹자는 나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맞닥뜨린 극한 상황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그때의 경험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잔인하게 논한다. 물론 부정할 수야 없겠지만 내 가족의 삶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최고의 명예와 화려한 영광을 준 나의 모든 작품을 다 바친다 할지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베르디가 이런 심적 혼란기를 겪고 있을 무렵 스칼라 극장 지배인인 메렐리가 그를 찾았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나부코도노소르(Nabucodonosor) 이야기를 오페라로 올리고 싶다며 찾은 것이다. 원래는 경험이 부족한 베르디보다는 빈에서 활약하는 오토 니콜라이(1810~1849)에게 의뢰할 예정이었지만, 촉박한 스케줄 때문에 베르디에게 작곡을 맡긴 것이다. 베르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베르디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선이 굵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표현을 오케스트라에 부여했다. 인물의 표현기법 또한 극적인 상황에 맞게 드라마틱하면서 열정적 방식으로 변모시켰다. 오케스트라는 성악가를 보조하는 반주 수준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고 또 다른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842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나부코’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달고’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프랑스 오랑주의 로마 극장에서 공연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1막의 한 장면. 로마 극장은 2세기에 건립됐다.

당시 이탈리아반도는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베르디가 태어난 파르마는 프랑스의 지배를, 80㎞가량 떨어진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특히 ‘나부코’의 3막에서 유대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창하는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달고’(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극중 상황과 동일시하게 만들면서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동시에 베르디를 일약 애국전선의 선두에 서게 했다.

베르디의 영향력은 후일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한 영화 ‘시씨(Sissi)’에도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셉 황제의 황후이자 ‘시씨’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비운의 엘리자베스 황후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 들어서자, 객석의 밀라노 시민들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며 주권회복을 위한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베르디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당시 통일운동의 구호였던, 사보이아 왕가의 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을 이탈리아의 왕으로’라는 말의 약자를 조합하면(Vittorio Emanuelle Re Di Italia) 바로 ‘베르디’가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정치적 목적으로 ‘베르디 만세’를 더욱 부르짖었다.

베르디는 ‘나부코’ 이후 제1차 십자군원정 때 이탈리아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에서 다시 종교적인 색채로 민족주의에 호소했고, ‘아틸라’ ‘잔다르크’ ‘레냐노의 전투’ 등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에서도 애국심에 호소했다. 그러면서 그의 초창기 작품은 자연스럽게 극적이고 남성적인 색채를 가진, 영웅적 스토리 전개를 바탕으로 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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