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사람중심! 경북세상! | essay

“정겨운 풍경, 소박하고 견실한 삶… 21세기 경북 이미지를 위하여”

우리에게 경북은 무엇인가

  • 정윤수 문화평론가|prague@naver.com

    입력2017-08-03 17: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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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을 가고 싶다”고 하셨다. 고향! 그것도 시공간적인 범위와 물리적인 지향점을 가리킬 때 쓰는 처소격 조사 ‘~에’가 아니라 ‘~을’이라는 조금은 더 단호한 목적격이 쓰였기 때문에, 형과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고향 경북 풍기로 이사를 했다. 며칠 전의 일이다. 

    1976년 3월 16일에 우리 온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탈향(脫鄕)의 시대’였다. 정확히 3월 16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고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맞아 책보를 둘러메고, 언제나 그랬듯 형을 따라서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서 순흥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짐을 싸게 됐고, 새벽에 트럭을 타고 서울로 왔다. 당시 행정 명칭으로는 아마 경북 영풍군 순흥면 태장3리. 영풍은 영주시와 풍기읍을 합한 이름이다. 아 그러고 보니 번지수도 생각난다.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번지 ‘625번지’.



    脫鄕의 시대, 서울로…

    그곳을 새벽에 떠났다. 떠날 때 고향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왔다. 내 여동생의 친구는 주머니에서 당시에는 귀하던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서 여동생에게 줬다. 100원! 풍기읍에서 기차를 탔고, 기차는 죽령터널을 관통했다. 기차는 언제나 시커먼 굴뚝과 명멸하는 안전 조명으로 인해 협곡 속의 기계도시처럼 보이던 단양 도담역 인근의 성신양회 공장을 스쳐 제천, 원주로 하여 청량리로 북상했다. 서울의 북부지역 변두리. 그곳으로 이사했는데 향우회 사람들이 ‘이사 기념’이라고 큰 거울을 선물했다. 그 거울에 쓰여 있었다.

    “축 발전, 1976년 3월 16일.”
    우리 가족의 탈향을 3월 16일로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거울, 형과 권투 시합을 하다가 박살 낸 그 거울에 적힌 글자 때문이다.
    그 후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생략하기로 한다. 1970년대 산업화 바람을 타고 경북의 산골마을은 물론 전북의 들판이나 전남의 해안이나 강원의 오지에서 자리 털고 일어나 서울로 올라온 수많은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윗대 어른들은 먹고살기 위해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고, 그 아랫대 아이들은 콩나물시루 같은 변두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매도 맞고, 공도 차고 하면서 대학에 가고 직장을 잡고 전세를 구하고 대출을 끼고 아파트를 얻어 서울의 위성도시로 산개해 그럭저럭 연명해온 30여 년의 한 세대다.



    그런 행렬을 주도하고, 그러나 그런 행렬의 느리고 슬픈 연명의 세월을 다한 사람들이 어쩌다 고향 얘기를 하는 정도는 인지상정이겠으나, 아버지께서 더 이상 서울에 있기 싫다고 한숨을 쉬기 시작한 지 이태 만에 탈(脫)서울을 결심했으니, 그 거처가 오래전에 떠나온 고향! 바로 그곳이라는 점은, 씁쓸하면서도 놀라웠다.



    고향이 경북이라는 것

    금의환향도 아니고 ‘재(財)테크’ ‘주(住)테크’도 아닌, 오로지 여생의 몇 해를 고향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망일 뿐이라 씁쓸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형제 또한 어렵지 않게 동의해, 지난 6월 말에 경북 풍기와 순흥 사이의 작은 집으로 낙향하는 아버지의 이삿짐을 건사하는 모습이 오히려 놀라웠다. 나도 고향을 그리워한 것일까. 얼마 되지 않은 짐을 다 옮겨 정리한 후에 풍기에서 순흥으로 또 부석까지 둘러보면서, 모처럼 고향 경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조선팔도라고 하지만, 분단으로 말미암아 절반이 뚝 잘리고, 그 아래로 몇 개의 도가 있어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데, 1970년대 탈향 흐름은 비단 경북만의 일이 아니라 한수(漢水) 이남의 모든 고을마다 진행된 거시적인 행렬이었다. 이 세대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 운집해 산다는 것은 크고 작은 찰과상을 입는 일이기도 했다.

    여러 지역 출신이 저마다의 특징과 자부심이 있지만 ‘경상도 출신’이라는 말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일종의 자부심이나 강한 남성성이 느껴진다. 40대 이상의 남성이 모여서 출신 지역을 얘기할 때 경북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들의 고향 말, 즉 상당히 억센 대구 근방의 사투리나 비교적 느리면서도 점잖은 영주 봉화 일대의 사투리를 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 말을 언제 어디서나 거침없이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경북 사람들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 현대사의 그늘도 느껴진다.

    1960년대 이후 이 나라의 권력은 경북을 중심으로 돌았다. ‘TK(대구·경북)’라는 단어는 거의 정치학 사전에 등재해도 좋을 정도로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긍정의 힘으로도 작동했지만, 권력지향적인 단어이기도 했다. 선거에서 ‘TK’는 경북 지역의 강건한 힘을 응축한 단어로 통용됐지만, 한편으론 그 폐쇄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 도회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고향이나 출신 지역은 어쩌면 가족기록부상의 몇 글자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20세기 중엽에 당시의 정치 지형과 권력관계에 의해 형성된 ‘TK’ 혹은 그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특정 지역의 표현을 이제 지울 때가 됐다. 아이들은 ‘고향’이란 말에서 더는 보름달이나 느티나무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경북은 좀 더 내실 있는 가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 역시 경북 안에 내재한다.  오래전에 작고하신 할아버지는 추석 차례를 위해 밤을 깎거나 제상을 진설하는 일로 시작해 차례를 지내는 전체 과정을 늘 헛기침 두어 번으로 차분하게 진행하셨다. 마을 안팎에 급한 일이 벌어져도 당장 억센 소리로 개입하기보다는 우선 가만히 지켜보시면서 저마다의 격렬한 감정이 스스로 정돈되기를 기다리셨듯이, 할아버지는 단정하고 신중한 자세로 제례를 드렸다.


    할아버지와 정감록(鄭鑑錄)

    나는 사실 ‘정감록(鄭鑑錄)’ 덕분에 세상을 보게 된 경우다. 할아버지는 막내로 태어나셨고, 위로 형님 두 분이 계셨는데 큰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크게 지었고 교회를 다니셨다. 둘째 할아버지는 농사는 거의 하지 않으시고 대처로 돌아다니시면서 한문 전적을 많이 읽으셨다. 세 형제는 일제 말에 강원도 홍천의 두촌면에 모여 살았다. 일본이 패망해 물러간 뒤, 강원도 홍천에서 논밭을 일구며 몇 해를 살았는데, 둘째 할아버지가 ‘정감록’을 읽으시다가 돌연 읽기를 멈추시고는 위아래 형제들을 다급히 재촉해 원래 고향인 소백산 자락 아래로 일제히 솔가(率家)했다. 세 형제는 각각 부석과 순흥 그리고 풍기에 새로 터를 잡으셨다.

    그렇게 황급히 이사한 뒤 미처 세간살이를 정돈하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반부터 강원도 홍천 일대는 무참한 폐허가 되었다. 둘째 할아버지가 탐독하신 ‘정감록’에는 변란이 일어나도 몸을 간수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은 속리산, 공주 마곡사, 부안의 변산 등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형제들의 고향인 소백산 아래 풍기 일원이었던 것이다.

    전쟁 이전에도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소백산 아래의 풍기, 예천, 부석 등지에 터를 잡았다. 그 중 한 집안과 인연이 돼 내게는 이북이 고향인 착하고 어진 고모부가 한 분 계시다. 풍기에 ‘서부 냉면’이 있는데, 멀고먼 북녘의 냉면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글의 앞에 얘기한 대로 우리 가족은 70년대의 ‘탈향 레일’을 함께 탔지만 할아버지 서울살이는 편치 않으셨다. 탈향 가족들이 치러야 했던 지독한 가난은 우리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어수선하고 가난한 와중에도 할아버지는 정성껏 제사를 모셨다. 완고한 유림(儒林)의 그 무엇처럼 집안의 대소사 다 뒤로 물리고 오로지 봉제사(奉祭祀)만을 신성시한 것은 아니었다. 형편이 닿는 한에서 밤을 깎고 잔을 올렸을 뿐이다.



    도처에 서려 있는 정신

    경북의 많은 사람이 점촌이나 울진이나 영양이나 성주에서,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 내 고향 순흥의 소수소원이나 안강의 옥산서원, 그리고 고령의 점필재 등 경북 지역의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 곳곳에 은거해 있거니와, 몇몇 곳에서 조선시대의 소박하면서도 견실한 문화를 지나치게 국수주의화하는 경향이 있어 우려스럽지만, 정작 그 정신의 기준이 된 학자들은 과도한 힘의 분출을 경계하며 소박하면서도 견실함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퇴계 이황은 시 ‘한서암’에서 “띠 엮어 수풀집 지으니 아래는 차가운 샘솟아 오르네/ 깃들어 쉼 가히 즐길 만하니 아는 이 없음도 한하지 않노라”라고 했으니, 지금의 ‘퇴계종택’이 되는 한서암의 비좁은 곳에 앉아서 이황은 ‘아는 이 없음도 한하지’ 않는 마음으로 거친 시대를 견뎌낸 것이다.

    근대로 넘어오면 이 정신은 성주의 김창숙, 안동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단호한 생애로 이어진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이따금 기억의 골짜기에서 여러 일을 꺼내서 어루만져보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경북에서 보낸 유년기, 그리고 성장해 경북 혹은 ‘TK’로 요약되는 이 지역의 강한 인상에 대해 더러는 애틋하게 여기고, 더러는 아쉽게도 여기며 살아왔다.

    때로는 타 지역 사람들의 TK에 대한 평가가 부당하다며 조용히 항변한 일도 있다. ‘경북 산간에 마땅히 먹을 게 있느냐’는 비아냥에 안동 간고등어, 순흥 묵밥, 울진 광어미역국, 경주 수란채 등을 앞세우고, 그도 안 되면 언양불고기를 내세워 그 나름대로 체면을 살려보기도 했다.



    TK를 위한 제언

    그러나 경북은 이제 20세기 중엽에 형성된 이미지를 벗을 때가 되었다. 그 무렵의 강력했던 정치권력의 성격 및 그 작동 원리와 연관돼 형성된 경북의 이미지는 급변하는 디지털 세대에 대해, 전혀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21세기의 국제 문화에 대해, 문화와 스타일과 성과 언어에 있어 매우 다양해지는 활기찬 변화에 대해, 경북은 지나치게 보수적일 수 있다. 내가 오랫동안 겪어왔고, 또 이 글을 읽을 수많은 경북의 독자가 증언할 수 있듯이, 경북의 이미지는 일각의 모습이 강하게 확대된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특정 문화유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일그러진 정치적 기억에 대한 무리한 변명은 이제 20세기의 유산으로 갈무리하자.

    따사롭고 정겨운 풍경, 소박하고 견실한 삶, 투박한 듯 보이지만 속 깊은 인연이 경북의 도처에 안온하게 번져 있다.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고 혁신적인 정치 감각으로 시대의 전면에 몸을 던졌던 아름다운 기억 또한 역사의 갈피마다 꽂혀 있다. 이 기억들을 되살리고, 이를 기반으로 경북의 21세기를 모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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