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전윤수의 ‘그 영화’ ④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2/2
병원에 다녀온 후로 정원은 삶을 정리한다. 물론 병원에서 의사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원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신다. 아마도 그가 먼저 친구를 불러냈을 것이고 친구도 정원의 시한부 인생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정원은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소동을 피운다. ‘조용히 하라’는 말에 발끈해 “내가 왜 조용해!”라고 소리치며 응축된 감정을 폭발한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남자는 아버지에게 비디오 조작법을 가르쳐주다가 또 한 번 폭발한다. 자신이 죽고 나면 리모컨 조작이 미숙한 아버지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정원은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위해 리모컨 조작법과 사진관 현상기 조작법을 기록한다. 마치 유서처럼 비장하고 담담한 감정으로 써 내려가는 정원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그의 고독을 공감한다.

유서보다 비장한 비디오 조작법

정원은 그 고독을 가슴속에 숨기고 다림과의 만남을 이어간다. 귤 두 개를 뒤춤에 숨긴 정원이 한 개를 다림에게 주자, 다림은 “겨우 두 개?”라며 핀잔을 준다. 미래가 없는 정원에게 여러 개의 귤은 가치가 없다. 그것을 모르는 다림은 그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전혀 모른다.

둘의 은근하지만 따뜻한 사랑은 정원의 병세가 악화되자 위기를 맞는다. 더 이상 사진관을 운영할 수 없게 된 정원이 사진관을 비우지만, 다림은 문 잠긴 사진관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사진관 문틈에 끼워놓는다. 감독은 편지를 보여주지 않지만, 관객은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그녀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심산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다림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창피하고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나? 다림은 사진관의 미닫이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가 그것을 빼려고 애쓴다. 하지만 쉽지 않다. 편지봉투는 손톱 끝에 안타깝게 밀리다가 결국에 사진관 안쪽으로 툭 떨어진다. 그때 낭패한 듯한 혹은 체념한 듯한 다림의 표정이란! 이 장면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림의 마음을 ‘눈에 보이도록’ 표현한 탁월한 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휙 집어넣는 것보다 얼마나 세심하고 따스한가?”

결국 정원은 그녀를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결심한다. 물론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멀찌감치 앉아 카페의 유리 너머로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미안해. 널 사랑하지만 난 곧 죽어.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감독은 이렇게 유치하고 뻔한 대사로 감정을 옮겨 쓰지 않는다. 감독은 정원이 손을 뻗어 유리창 너머 멀리 보이는 그녀를 만지도록 한다. 그것으로도 정원의 안타까운 내면이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田允秀

1971년 서울생

중앙대 영화학과 졸, 동 대학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석사

2001년 영화 ‘베사메무쵸’ 각본·감독으로 데뷔

영화 ‘파랑주의보’(2005), ‘식객’(2007), ‘미인도’(2008) 각본·감독


정원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직접 찍는다. 셔터가 닫히는 순간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며 화면은 정지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영정 속 사진이 된다. 정원은 죽고 계절은 바뀐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눈이 쌓이고 이제는 주인이 바뀐 사진관 앞에도 눈이 쌓인다. 다림은 예전에 정원이 찍어준 자신의 사진이,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는다.

소멸과 추억을 사랑 이야기로 엮어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죽음과 사랑이라는 일상의 모습을 아름답고 분명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내면의 감정을 은근한 방식으로 외면화한 허 감독의 연출은 강력한 감정의 울림을 준다.

신동아 2011년 11월호

2/2
목록 닫기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

댓글 창 닫기

2019/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