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음식이란 먹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

  • 이강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2-21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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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이란 먹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
    정확한 예측과 감칠맛 나는 설명으로 관전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는 ‘국보급 야구해설가’ 하일성씨(51)는 프로야구 경기가 없는 요즘이 더 바쁘다.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에다 빼어난 말솜씨를 지닌 그를 세상은 한시도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명색이 자유업 종사자이면서도 방송 출연과 기업체 강연이 거의 매일 이어지는 통에 여전히 자유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은 지경. 결국 그는 새 밀레니엄 개시 10여일 만에 애초의 신년 목표를 수정하고 말았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자’에서 ‘같이 있을 때만이라도 잘해주자’로. 오늘 그가 팔을 걷어붙인 이유 중 하나다.

    마침 그의 집은 모처럼 사람 훈기가 가득하다. 호주로 유학을 떠났던 두 딸 중 큰딸 승희(24)가 재작년 귀국한 데 이어 작년 말에는 호텔경영학을 공부한 둘째 태경(23)이가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기는 실로 8년 만이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어 이런 오붓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안다. 더욱이 이 아이들은 나이가 꽉 차지 않았는가.

    하씨는 최근 들어 부엌 출입이 ‘빈번’해졌다. 물론 그 횟수가 한 달에 한두 번을 넘지 않는 정도니, 무시로 부엌일을 같이 하는 요즘의 젊은 부부에 비하면 ‘낯간지러운’ 수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껏해야 물 한잔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부엌에는 얼씬도 안 했던 예전과 비교하면 그로서는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상황의 ‘반강요’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주부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아침 프로나 오락 프로그램 등 방송 출연이 늘어나면서 그의 가정적 면모를 들은 여러 매체에서 “요리 한번 하자”는 요청이 잇따랐던 것. 청탁을 뿌리치지 못해 한두 번 앞치마를 두르다보니 요즘은 “요리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동할 만큼 이력이 붙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음식을 두고 요러쿵조러쿵 입방아를 찧는 사이 가족의 정이 더 깊어감을 체험하는 것은 예전엔 미처 몰랐던 즐거움이기도 하다.



    오늘 그가 해보기로 작정한 요리는 닭볶음. 그간의 ‘실험’을 통해 채소 요리보다는 육류 요리가 상대적으로 만만하다는 것을 터득한 끝에 그는 이 요리를 집중적으로 ‘밀고’ 있다. 기본적으로 채소 요리는 소스가 받쳐줘야 하는데 그 맛을 내기가 쉽지 않은 반면, 육류는 적당히 간을 맞추는 것으로도 ‘중간’은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

    “본인은 어떤지 몰라도,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니까 영 제가 불편해요. 그렇다고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혼자 알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요. 조수노릇을 하며 옆에서 보노라면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요리 한다고 나서면 제가 오히려 말리는 편이지요.”

    한참 신이나 감자와 당근을 다듬는 그를 향해 핀잔을 주는 아내 강인숙씨(44)는 아직은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다는 의견이다. 이에 대한 하씨의 반격.

    “자고로 음식이란 만드는 사람의 정성도 정성이지만, 먹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나처럼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도 요리 잘하는 사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겠다고 나서면 그땐 용기를 주고, 또 잘하든 못하든 맛있게 먹어주는 게 도리예요.”

    “음식이란 먹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
    부인과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는 사이 하씨는 어느새 채소를 걱둑걱둑 잘라놓았다. 그런데 그 모양이 좀 색달라 보인다. 보통 닭볶음에는 채소를 크게 썰어 넣긴 하지만, 특히 당근은 세 토막을 내놓은 게 아무리 봐도 한 입에 들어가기엔 너무 크다. 평소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아 아내에게 ‘몸에 안 좋은 것만 골라 먹는다’는 걱정을 들어온 그는 자신이 요리를 할 때면 보상심리가 발동해 일부러라도 채소를 크게 넣는다는 것이다.

    채소와 고기 위에 고춧가루와 후추, 약간의 설탕과 참기름을 뿌리고 간장을 넣어 뒤적이는 그의 손을 보니 여간 두툼한 게 아니다. 음식맛은 손맛이라던데, 혹시 그 맛이 손의 두께에서 나온다면 그는 최고의 요리사가 될 조건을 타고 났는지도 모르는 일.

    “몇 번 안 해본 사람이 이런 얘기하는 게 좀 우습긴 한데, 요리란 게 참 재미있는 작업이에요. 지난달 ‘신동아’를 보니까 한완상 상지대 총장님이 요리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셨더군요. 그 말씀을 하일성식으로 응용한다면, 요리란 야구예요. 좋은 선수들은 재료가 되는 것이고, 감독의 작전과 용병술은 조리법에 비유될 수 있어요. 이런 요소들이 조화를 이룰 때 맛있는 요리가 되고, 재미있는 경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비슷한 연배의 평균적인 한국남자임을 자처하는 하씨는 앞으로도 요리를 취미로 삼을 마음은 없다고 했다. 실험용 요리로 가족을 괴롭히기보다는 잘하는 ‘선수’들의 솜씨를 감상하는 것이 모두에게 훨씬 생산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자신처럼 짜고 매운 음식과 술에 익숙해진 입으로는 좋은 음식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그는 음식보다는 술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추종불허의 술고래다. 그의 술실력을 상징하는 용어 가운데 ‘20-20 클럽’이란 게 있다. 원래 20-20클럽은 한 시즌에 홈런과 도루를 각각 20개 이상 기록한 타자에게 붙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이지만, 그는 소주 20잔과 폭탄주 20잔을 한 자리에서 해치우는 주당을 이르는 용어로 사용한다. 아직까지 이 클럽에 가입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서너 명에 불과하다.

    “음식이란 먹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
    그럼에도 그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타고난 건강과 함께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밥을, 그것도 평소보다 많은 양을 챙겨먹기 때문. 음식보다 술에 더 관심을 가진 남편을 두는 바람에 그의 아내는 해장국과 찌개의 ‘달인’이 됐다. 특히 김치, 콩나물, 쇠고기를 넣고 끓여내는 시원한 해장국은 하씨가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종목.

    원래 체질적으로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술을 자주 마시게 된 또 다른 이유로 아내와의 결혼을 이야기한다. 작년 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MBC 주말 드라마 ‘사랑해 당신을’처럼, 이 부부는 74년 하씨가 대학 졸업 직후 체육교사로 부임한 김포의 한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3학년 제자로 만나 강씨가 졸업한 지 8개월 만인 75년 10월 결혼에 골인했다. 맨정신으로 서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가 어색하던 신혼 초, 둘은 이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알딸딸해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덕분에 아내 강씨의 술실력도 상당한 편.

    “학교에서 퇴근해 집에 갈 때면 꼭 돼지고기 한 덩어리와 소주 두어 병을 가지고 갔지요. 이 사람은 저녁에 벌어질 돼지고기 파티를 위해 하루 종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탓에 양념이 아주 꿀맛이었어요. 요즘도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돼지고기를 사다 먹는데,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져와서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굽던 그때의 맛이 안 나더군요.”

    닭볶음이 익으며 풍겨낸 고소함이 어느 새 집 안 전체에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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