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 - 성(聖)과 속(俗)의 양면성 지닌 일본 감독
일본영화 개방 1호로 국내에 소개된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여러 모로 현대 일본의 얼굴을 대변한다. 97년 그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지만 이전까지 일본에서 그를 ‘기타노’라고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 그는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비트 다케시는 TV에서 1주일에 9개 코미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상급 코미디언.
가학적이고 선정적인 오락프로 사회자인 저속한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또 다른 얼굴은 83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이 영화에서 그는 잔인한 겐조 상사로 출연했는데 스크린에서 비트 다케시를 확인한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뜻밖이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인 심각한 연기를 보며 포복절도하는 관객들에게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89년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일본에서 야쿠자 영화의 대가로 통하는 후쿠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그 남자 흉포하다’에 출연하기로 했을 때 후쿠사쿠 긴지 감독이 일정문제로 연출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연배우로 캐스팅된 기타노는 갑작스레 연출까지 맡았다. 그는 여기서 ‘더티 하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못지않은 폭력형사로 등장, 경찰과 범죄의 공생관계를 드러냈다.
감독 기타노의 역량은 과연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와 쌍벽을 이룰 만한 것이었지만 진정한 평가는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뒤에야 이뤄졌다. 93년작 ‘소나티네’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고 96년작 ‘키즈 리턴’은 역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상영됐다.
기타노는 이들 영화에서 폭력과 순수, 격정과 체념, 집착과 달관의 대칭적 세계를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포착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 경우 자기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버린 채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침묵과 무표정은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존재를 잊으라는 주문인 동시에 허무의 극단으로 돌진하는 영화의 에너지, 그 자체였다.
기타노가 연기한 ‘하나비’의 주인공 니시 형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야쿠자의 빚독촉, 불치병에 걸린 아내, 동료의 죽음 등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니시 형사는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니시 형사에게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양’의 이미지를 본다.
기타노는 90년대 일본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인 동시에 일견 저속해보이는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聖)과 속(俗)을 한 몸에 안은 기타노의 세계는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워쇼스키 형제 - 만화적 상상력으로 ‘매트릭스’ 만든 SF 감독
‘매트릭스’를 21세기형 SF영화라고 부르는 게 과장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시각스타일, 홍콩 누아르를 닮은 총격전과 액션장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성경에서 따온 신화적 이야기 구조, 장자와 선불교의 세계관 등 ‘매트릭스’를 구성하고 있는 날줄과 씨줄은 그 정교한 이음새로 새로운 세기의 미학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에게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래리(34)와 앤디(31) 워쇼스키 형제는 타란티노처럼 어린 시절 대중문화의 세례를 잔뜩 받았다. 만화는 이들 형제의 영화적 상상력을 키워준 요람이었는데 실제로 그들은 대학을 중퇴한 뒤 마블 코믹스라는 만화출판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이 점이 또 다른 형제감독 코언 형제와 다른 대목이기도 한데 코언 형제는 수많은 장르영화에서 자기들의 어법을 발견했다.
만화출판사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클라이브 바커의 ‘헬레이저’ 대사를 손보는 작업을 했고 그 뒤 ‘어쌔신’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리쎌웨폰’ 시리즈로 잘 알려진 리처드 도너가 연출한 ‘어쌔신’은 실베스터 스탤론과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으로 영화화됐는데 워쇼스키 형제는 자신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제작방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자기 의도대로 영화를 만들려면 감독이 되는 길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고 95년 ‘바운드’라는 영화로 데뷔했다. 선댄스 영화제에 처음 소개된 뒤 ‘획기적인 발상으로 만든 필름누아르’라는 평을 얻은 ‘바운드’는 이른바 레즈비언 필름누아르였다. 두 여자가 갱조직의 내분을 이용해 조직의 돈을 가로챈다는 내용의 ‘바운드’는 이전까지 필름누아르에 등장하던 요부 이미지를 거꾸로 활용해 놀라운 반전을 만들어냈다.
저예산으로 작업한 ‘바운드’가 성공하자 그들에게 진짜 기회가 왔다. 키아누 리브스를 주연으로 첨단 특수효과가 들어간 SF영화 ‘매트릭스’를 만들게 된 것. 사실 그들은 ‘바운드’를 만들기 전부터 ‘매트릭스’ 시나리오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운 줄거리와 알 수 없는 시각효과로 가득한 이 영화에 제작비를 대줄 영화사가 없었기에 ‘바운드’를 데뷔작으로 찍었지만 ‘매트릭스’에는 워쇼스키 형제의 상상력이 아주 투명하게 들어있다.
그들은 만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온 다양한 표현법을 영상에 옮겼고 자신들이 바라본 미래를 관객 모두의 것으로 바꾸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와 ‘ET’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꿈의 공간을 N세대의 디지털 코드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도그마 - 영화예술의 순결을 맹세한 집단
“반드시 촬영은 로케이션으로 이루어질 것. 사운드는 촬영현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카메라는 정지된 상태여서는 안 된다. 필름은 컬러여야 하며 옵티컬 작업과 특수조명은 불가능하다. 피상적인 행위가 아닌 실제 행위를 담아야 한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지금 이곳에서 영화는 진행되어야 한다. 장르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필름규격은 35mm이고, 감독은 엔딩크레딧에 나와선 안 된다. ”
컴퓨터그래픽과 특수촬영이 타이타닉호가 두 동강 나는 장면을 실감나게 재현하는 요즘 시대에 가당치 않아 보이는 이 선언은 95년 칸영화제에서 ‘도그마95 순결의 맹세’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자본과 테크놀로지로 오염되고 있는 영화를 태초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이 야심 찬 기획은 흡사 수도사 프란체스코의 종교정화운동을 연상시킨다. 영화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이런 엉뚱한 제안을 내놓은 인물이 라스 폰 트리에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몽환적 세계에 탐닉하는 젊은 테크니션 라스 폰 트리에가 자기 작품을 부정하는 미학을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체가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결의 맹세에 서명한 감독들은 속속 자기 영화를 선보였고 그들의 영화는 상찬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셀레브레이션’, 소렌 크라그 야콥슨의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는 모두 굵직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그들은 정말 최소의 자본과 테크놀로지만으로 진실이 담긴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가운데 국내에 소개된 유일한 작품 ‘셀레브레이션’만 봐도 도그마의 성격은 한눈에 드러난다. 온 가족이 모인 생일파티에서 아버지의 근친상간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셀레브레이션’은 시종 흔들리는 카메라로 한 가족의 여러 가지 표정을 포착한다. 일가족이 짓고 있는 기쁘고 우울하고 슬프고 난처하고 얄미운 표정 하나하나는 생동감 넘치지만 그 내면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상처투성이 과거를 통해 아버지 세대를 단죄하는 ‘셀레브레이션’은 6mm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다음 35mm필름으로 재생해 거친 영화지만 굵고 성긴 입자에 놀라운 힘을 실어나른다. 아마 그것이 도그마의 에너지일 것이다.
도그마는 감독의 이름이 아니다. 도그마는 순결의 맹세에 서명하고 그들이 맹세한 미학을 실천하는 집단을 이르는 말이지만 21세기 영화의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물론 도그마의 실천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화 역사상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자식들은 늘 있어 왔고 도그마도 그들 중 하나. 도그마가 다른 점은 그들의 패기와 도발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왕가위 - 홍콩영화의 영광을 지켜가는 감독
본토 반환을 전후해 홍콩영화는 확실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우삼, 서극, 우인태, 진가신, 주윤발 등은 할리우드로 가버렸고 영화산업에 유입되는 돈은 급격히 줄었으며 동남아를 평정했던 스타들의 영향력도 급속히 줄었다. 홍콩영화 시대는 정말 끝난 것일까?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홍콩영화가 궁금하다면 그건 왕가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한때 유행처럼 다가왔지만 자신을 그럴 듯한 상품으로 포장하는 데 치중한 감독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정서에서 삶에 대한 지혜와 희망을 찾았다. 97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해피투게더’는 지구 반대편 남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발에 밟히는 유리조각 같은 아픔을 안고 헤어지는 연인들이 그 상처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 반대편이거나 동성간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같은 주제를 변주하며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스텝프린팅, 광각렌즈 등을 이용한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현란한 화면은 왕가위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로 젊은이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었다. 9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왕가위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정도. 그러나 그를 흉내낸 어떤 감독도 왕가위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데뷔 이전 그의 경력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별로 없다. 5살 때 홍콩에 이주한 그는 홍콩이공대학 설계과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사진도 공부했다. 80년 졸업 뒤 방송국 드라마제작 교육코스를 수료하면서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고, 82년 그만둔 뒤 87년까지 13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데뷔작은 88년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가 주연을 맡은 ‘열혈남아’. 당시 유행하던 홍콩 누아르의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면서 왕가위는 스치듯 지나지만 시간이 갈수록 깊어가는 사랑을 그렸다. 90년 ‘아비정전’은 당초 2부작으로 기획했다 1부만 찍고 끝낸 작품.
왕가위의 관심사는 여기서 분명해지는데 그는 순간의 만남에서 영원할 것 같은 감정을 발견한다. 이어지는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를 통해 그는 해외 평단의 주목을 얻었는데 특히 ‘동사서독’은 김용의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무협영화 중 가장 독특한 영화로 꼽힌다.
‘아비정전’부터 왕가위 영화는 크리스토퍼 도일이라는 촬영감독의 손을 거쳐 탄생했는데 둘의 파트너십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다. 왕가위는 2000년 장만옥, 양조위가 출연하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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