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니체 전집 12권을 다 읽고 요즘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고 있습니다. 니체는 인간의 행동양태를 권태·허영·권력의지·공포 등으로 분석했고, 중세 종교를 ‘가장 구체적인 것을 추상화하고 가장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더구먼요. 슈펭글러는 역사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혹은 행태학적으로 해석했는데 내용이 좀 어렵습디다.”
―해가 바뀌어서 회갑을 4년이나 넘기셨는데도 그렇게 끊임없이 읽으십니까?
“글쎄 말입니다. 나이가 60을 넘어서면 안착을 해야 하는데 아직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소, 허허허…”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번 달 우리가 만나볼 사람이 현역에서 물러나 소파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노년을 유유자적하는, 일반적 의미의 지식인이라고 지레 단정하기 십상일 것이다. 물론, 세계사와 수학, 자연과학, 조형미술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서양문화의 몰락을 예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을 ‘내용이 어렵습디다’라고 정직하고 토로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리가 ‘먹물’이라 조롱하는 그저 그런 지식인이 아니라는 단서는 드러난 셈이지만.
독자들은 다소 당황스럽겠지만, 그를 만나러 간 나는 본격적인 얘기를 나누기 위해 수첩을 펴자마자,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꺼내놓았다.
―작년 농사는 재미를 좀 보셨습니까?
철학자 니체를 들먹이는 농사꾼
무슨 얘긴가? 그는 농사꾼이다. 20세기의 철학과 심리학과 신학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던 독일 철학자 니체를 들먹이는 농사꾼?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첨단 과학영농으로, 농업도 머리로 하는 추세여서 과거처럼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사람들이나 어쩔 수 없어 남아 있는 곳이 농촌이 아니기도 하고, 최근 귀농 바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상당수 농촌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농사일이야 뒷전이고 귀뚜라미류나 하는 소위 ‘다방농사꾼’도 있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아니다. 우리 나이로 백발 성성한 예순 다섯의 나이지만 어지간한 젊은이들은 들판 이랑에서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저만치 뒤처져 헐떡거린다. 그는 그토록 힘든 농사일을 대단히 즐거워 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농사꾼이 아니다. 그는 그 어떤 집단에도 소속되고 무엇이라고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적지 않은 농토에 농사를 짓지만 자기 집 곳간을 채우려 욕심낸 적이 없고 소출을 돈 바꿔 생활 방편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철저한 무욕의 농군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지역 사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 노자(老子) 강의를 하러 다니기도 한다. 이만하면 (그가 자신을 농사꾼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한 번 더 허락해 준다면) 그를 ‘도인 농사꾼’이라 불러도 좋을 터이다.
충청북도 충주로 그를 만나러 떠난다. 충주시 여성회관 인근 마을에 자리한, 방문할 집의 호주는 김상덕(金相德)씨다.
“노자(老子), 그거 다 거짓말이야”
“먼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초면인데도 여성 회관 계단에 서서 기다리던 나를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백발인 그는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 집을 향해 앞장서 가는 그의 걸음걸이가 사십 줄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뿐거렸다.
―농한기인데, 요즘은 노자 강의 하러 다니지 않으십니까?
“요즘은 쉬고 있어요. 노자 그거 내용이야 좋은데, 다 거짓말이야.”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건너온 그의 역설에 섣불리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담한 단층집의 좁은 마당에 나무로 만든 평행봉이 자리잡았고, 한켠에 묵직한 아령이 놓여 있다. 가마솥과 장작더미도 그의 집 정원을 구성하는 소품이었다.
“농사일 하는 사람이 농한기에 할 일이 별 것 있겠어요. 들판에 나가 일하기 위한 대비로 그저 몸뚱어리를 튼튼하게 단련해놔야지. 나무 잘라다 만든 저 평행봉하고 아령이 내 건강 밑천이오. 이따가 내가 팔뚝 한 번 걷어보일 테니까 어디 작가 선생 팔뚝이랑 한 번 비교해봅시다.”
갈수록 겁나는 얘기다. 양해를 구하고 만져보았는데 그의 팔뚝 근육이 바윗돌 같다. 거실에 들어가서는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급히 볼 프로그램 있으면 얼른 끝내고 돌아가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집은 본시부터 살고 있던 김씨 가족의 생활터전이고, 농사철이면 충주 근교 이류면 농장에서 귀농한 젊은 농군들과 함께 기거한다. 논 2700여 평과 밭 1500여 평이 그의 농장 규모다. 얼마 전까지 염소를 80여 마리 사육하기도 했는데 생각 끝에 정리했다 한다.
“작년에 벼농사를 한 열마지기 했고, 밭은 1500평 했어요. 밭에는 고추도 심고 깨도 심고 여러 가지를 했는데, 화학비료나 농약을 일절 안 쓰니까 별재미를 못 봤어요. 벼는 그만하면 잘 된 것 같은데, 우리 동네에서는 물론 제일 안 됐어요.”
―정성이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닌가요?
“어이구, 힘은 엄청 들었어요. 92년도에 귀농한 젊은 친구를 둘 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만 남아 있어요. 그나마 농한기라 컴퓨터 배우러 간다고 서울 가버려서 농장이 비어 있습니다. 정성 얘기를 하셨는데, 내가 작년 가을에 논만 두 달 반을 맸어요. 뽑아도 뽑아도 풀이 계속 올라오더라구요.”
잡초와 의사 소통하는 도인
―저도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김매기를 해봐서 아는데, 벼농사 중에서 김매기가 제일 힘들지 않습니까?
“마음 먹기에 달렸어요. 끊임없이 자라나는 잡초가 하나도 밉지를 않아요. 만일 잡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없었다면 지금 그 땅은 벌거숭이 사막이 됐을 것 아니오. 잡초를 매면서 그 잡초와 대화를 합니다. 야, 이 놈아, 내가 먹고 살겠다고 너하고 씨름을 하고 있다만, 내 어찌 널 미워할 수 있겠느냐. 이 한 마디만 툭 던지고나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구요. 내 나이가 금년에 예순넷인데, 두 달 반 동안 논을 매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어요. 젊은 장정들도 논매기 그거 쉬지 않고 열흘만 하고나면 픽픽 쓰러지거든요.”
―잡초한테 야, 이놈아, 하고 말 걸기를 함으로써 힘든 노역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나쁜 의미로 말하면 자기 암시고, 좋은 의미로 하자면 소통이지요. 내 경우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소통이라고 봐야지요.”
―잡초와 대화해서 그 힘든 김매기가 신이 난다… 상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불가능한 얘기일 것 같은데요?
“아, 그거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그는 역시 도인이다. 퇴비와 깻묵으로 비료를 삼았다 했는데, 소출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이 없었다. 하기야 낟알 가마니 숫자에 연연했더라면 남보다 배는 힘들게 일하고도 턱없이 적은 소출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는 힘든 노력에 비해 적게 돌아온 대가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가짐의 일단을 이렇게 내보였다.
“나는 어디에도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왜 사이비인고 하니, 대상에 욕심을 가져야 소속이 되는데, 나는 그런 욕심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수확한 쌀을 형님네 딸, 아들에게까지 다 보냈어요. 또 친한 사람한테도 다 보내 주고. 내 먹을 양식만 남으면 되는 것 아니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전직 교사였던 부인의 연금으로 기본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일은 그냥 재미로 한다는 얘긴데….
―그렇게 힘든 일이 재밌기만 합니까?
“아이구 그럼 재밌지요. 재미 없으면 못하는 거라구요. 나는 여태껏 크게 욕심을 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내가 가톨릭농민회 회장도 하고,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도 하고 전국농민단체 부의장도 하고 그랬어도, 그 조직에서 내건 목표나 구호들이 꼭 성취된다는 욕심이나 확신도 없었고, 또 그런 운동들이 세상 모순을 다 바꿀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었어요. 다만, 옆에 좋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일하자 하니 한 번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했어요.”
목표를 지향해서 일로매진하는 것은 그의 체질이 아니라는 얘기다.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나는 밥을 굶으면 굶었지 그렇게 힘들게는 일하지 못하겠다’고 얘기한다.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 논리로만 말하자면 어리석은 사람일 텐데,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리켜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섣불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는 얘기하지 못한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물론 핏줄이니 애착이야 크지만, 내 자식이 다른 사람보다 잘 돼야 될텐데, 그런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말이라면 입술발림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의 얘기니 안 믿을 재간이 없다. 세 자녀를 유치원이나 학원 따위의 근처에도 보내본 적이 없다. 물론 아이들 앞에서 공부하라는 얘기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세 자녀 모두가 세칭 일류대학에 척척 붙어 주었다. 자식들이 저 알아서 그 정도 해주니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올 만하다. 그렇다고 자식농사를 아예 방치한 게 아니라, 자연농법 혹은 유기농법쯤으로 교육했다면 어울릴 듯하다.
자식농사도 ‘자연농법’으로
“창용이라는 큰놈이 고려대 다니다 2학년 때 입대해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둔 때인데, 만날 집을 나가서 열두시 넘어서 들어와요. 오전 내내 자다가 점심을 먹고 또 나가서는 당구장으로 어디로 돌아다닌단 말예요. 내가 그 때 농사일에다 농민회 일로 바빠서 모르고 있었는데 집사람이 큰일났다는 거요.” 그래서 그는 날을 잡아서 아들에게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도록 한 다음 앉혀 놓고 얘기 했다.
“자네들이 술 좋아하고 당구 좋아하고 어울려다니기 좋아하는 모양인데, 남자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야지. 술도 마시고 시간 내서 산에 올라가서 호연지기도 키우고, 데모하다가 귀뺨도 얻어맞아보고, 그러고 남은 시간 있으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해야지, 겨우 남자가 술마시고 당구장 다니고 그거밖에 할 일이 없냐.” 그런 다음 그는 덩지가 가장 커보이는 아들 친구에게 팔씨름 한 번 하자며 소매를 걷어부쳤다. 20대 청년을 가볍게 눌러버린 그는 “내가 낼모레 나이 육십인데…”로 시작하는 일장 훈시를 한 다음, 마지막에 들려준 말은 ‘공부해’가 아니라 ‘운동 좀 해’였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아들의 방탕은 마침표를 찍었다. ‘신선한 충격으로 막힌 부분을 풀어줘야지 잔소리를 하면 한이 된다’는 게 그의 자식 농사법이다.
“아들놈 고3 때 나는 집에 돌아오면 공부하지 말라고 했어요. 학교에서 열 시간씩 하고 돌아온 놈한테 집에서까지 공부하라고 닦달할 수 있나요. 오히려 공부하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호통쳤어요. 그러면서 당시 나는 17시간 동안 꼼짝 않고 불경을 한자 한자 베껴 썼어요. 자식 공부 시키고 싶으면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다시 농사 얘기 좀 더 해보지요. 귀농한 젊은 사람들에게 농사를 시켜보시니까 어떻던가요?
“내 생각은,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농사는 처음 2∼3년 동안은 자기 온 힘을 바쳐서 열심히 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고비를 넘겼을 때 참농사꾼이 됐다는 긍지가 생기고 다른 영농기술은 그 다음 문제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처음부터 어디서는 무슨 농법으로 어떻게 농사 짓고, 어디서는 어떻게 한다더라, 여기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면 안 되지요.”
김씨는 그들에게 3년이라는 시한을 주고 그 기간은 땅과 인연 맺는 기간이라고 일러 주었다. 아울러 서울에서 맺은 인연을 시골 들판까지 가져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인연을 잇고 있으면 ‘이 곳이 바로 서울’이 돼 농사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땅하고의 인연 맺어 주기에 성공했습니까?
“그게 안 돼요. 친구 결혼한다고 부르르 올라가고…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계속 농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요. 작년 7월 한 달 동안 270여 명이 왔다 갔어요. 그들을 겪어내면서 했던 생각이 처음 3년 정도는 흙하고 일체감까지는 아닐지라도 구도하는 자세로 인연 맺기에 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힘들고 소출도 적은 농사법을 고수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원래 농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하고 있는 게 원형이란 말예요. 농사라는 게 사람 힘은 조금 들어가는 것이고 자연의 거대한 작용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작물을 살찌우는 것은 햇볕과 비와 바람과 미생물들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 거룩한 땅에다 어떻게 함부로 농약을 치고 제초제를 치고 할 수 있나요. 우선 내 자신이 마음으로 용서가 안 돼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무위라는 게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안 하는 것 아닌가요?
“노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함부로 땅을 못쓰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농업도 국제경쟁 시대가 됐고, 도시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생산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다른 농민들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농사짓기를 권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그렇게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다 변하더라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원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을 때 사회변화를 위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끈들이 전부 끊어져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난 어디에도 소속된 사람이 아닙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꾼이 아니에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는 자유인
소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의 얘기는 일반적인 농사꾼의 생각이나 생활양태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비단 농사일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이자 그 유명한 농민운동단체였던 가톨릭농민회 회장 출신이면서도 교회는 몇 차례 나가본 적이 없다. 가톨릭 신자로 있으면서도 불경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러다 다시 노자의 도덕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남의 것을 아는 것이 자기 것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란 고집으로 똘똘뭉친 귀신이에요. 그 귀신이 자기라고 자꾸 고집하니까 자기라고 느껴버리는 겁니다. 그 귀신이 나갈 수 있도록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버리느냐에 따라서 꼭 그만큼 자기를 아는 거라구요. 벌어지는 자리가 숨통이 트는 자리고, 숨통이 트는 자리가 생명의 자리이며, 오므라지는 자리가 생존의 자립니다.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하는 작용이 자유로울 적에 활력을 타는 건데, 지금은 다 오므리고 있다구요. 그런 의미에서 새천년이라고 좋아하는 21세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질곡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는 생명이 자리할 벌어지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했다. 그는 소속이 없는 게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디 심성을 지켜 나가려고 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속에 ‘소속돼’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지금은 충주로 편입된 중원군 이류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농촌 치고는 먹고 살 만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을 겪고… 초중고등학교를 충주에서 마쳤다. 중고등학교 때 보통 청소년이었느냐는 질문에 ‘아, 지금은 더 보통이지’하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입시 공부는 뒷전이고 ‘엉뚱한’ 책들만 읽었다. 그러다 성균관대 정치학과 2학년 때 입대했다. 군대에서 4·19를 겪었는데 ‘나가서 데모하고 싶어 환장하겠더라’고 했다. 제대 이듬해 5·16이 터졌다. 복학은 했는데, 그는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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