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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전 가톨릭농민회장 김상덕

무욕의 삶 실천하는 ‘도인 농사꾼’

무욕의 삶 실천하는 ‘도인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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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인데, 내 일생에 제일 나쁜 기억이 있다면 학교에 다녔던 기억입니다. 지금도 군대에 다시 가라면 가겠지만 학교는 못 가겠어요. 왜 그런지 싫어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자신이 없었고, 달리 얘기하자면 중학 때부터 서양철학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책들을 읽어서 겉멋이 들었던 거지요. 대학에 가면 무슨 거룩한 학문을 하는 줄 알았더니 뭐 중고등학교나 비슷하지 않으냐, 이런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그는 대학 졸업 안 한 걸 평생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나왔으면 어떻게든 취직하려고 용을 썼겠고, 공무원 취직을 했다면 지금쯤 현장에서 물러나 쓸모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을 것 아닌가. 따라서 지금도 농사를 지으면서 힘차게 사는 것은 순전히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대학을 때려치운 이 ‘문제 청년’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야전점퍼를 걸치고 머리를 제멋대로 기른 채 돌아다니는 방탕길에 오른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충주에서는 희귀한 히피였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충주 대성고등학교에 미인 여교사가 발령받아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무턱대고 학교에 찾아간 그는 미모의 여교사가 교실을 나오는 순간 투덜거렸다. “이쁘다더니만 별것도 아니네.” 프로포즈 치고는 너무 난폭했다.

그 여교사가 동생의 담임을 맡게 됐는데, 그는 동생 편에 연애편지를 보냈다. “방학이 지나고 등교해 보면 그 딱딱한 운동장에도 잡초가 자라 있다. 잡초의 생명력은 그처럼 끈질기고 위대한 것이다”라거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지에 씨를 뿌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다. 단풍이 들고 씨가 여물었을 때 북풍이 몰아쳐서 대지에 생명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따위의 ‘근사하고도 생명론적인’ 미사여구들을 날려보냈다. 답장은 1년 만에야 왔다. 연애 4년에 결혼. 그 여교사가 지금의 부인 홍가춘 여사(60)다.

‘대학을 다녔던 놈이…’라는 부친과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서른 살부터 농사를 짓겠다고 눌러앉았다.



“우리 농장에 있는 150여 평짜리 저수지는 내가 혼자서 한겨울에 곡괭이로 파고 둑을 쌓아서 만든 겁니다. 논갈고 밭갈고 써레질까지 일년만에 다 배웠어요. 그런데도 자식이 농사짓는 게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작심하신 듯이 물꼬 둑 하나 비뚤린 꼴을 못 보시는 겁니다. 호되게 일을 했지요.”

김씨가 귀농한 젊은이들에게 흙과 인연 맺을 시간으로 3년을 제시한 것이 바로 그런 체험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농민회 등의 활동을 하느라 한 동안 농사를 안 짓다가 다시 돌아와 농사에 덤벼들었어도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선친으로부터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농사 짓다 ‘세상 바꾸기’ 운동에 참여

―아령이나 평행봉으로 하는 운동말고, 세상 바꿔보자는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한 겁니까?

“73년경에 우연히 수원 크리스찬 아카데미 연수원에서 교육을 나오라는 통보가 왔어요. 프로그램이야 뭐 별다를 게 없었지만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하고 사귄다는 게 좋아서 달려갔지요. 그 이듬해 다시 20일 동안 장기교육을 하러 오라는 통지가 왔더라구요. 중간집단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었어요.”

그 인연으로 77년도에 청주 가톨릭농민회가 창립되자 그는 총무로 추대된다. 시퍼런 유신 시대인지라 정부하고 싸우는 단체의 직책을 맡아 은근히 겁부터 났다. 전국연합회 총무회의에 갔다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당시 전남지역 가농 총무 서경원씨 등 전국에서 몰려온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무실이 없던 시절, 그는 가방을 이동 사무실 삼아 충청북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5개로 시작한 분회가 5년 뒤에는 90개로 늘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전국본부의 조직부장을 맡게 된다. 81년 부당 농지세 거부 투쟁이 정부와 벌인 첫 싸움. 신군부 집권 이후 첫 대정부 투쟁이었다. 이후 서경원 전 가농회장의 북한 밀입북 사건으로 불고지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나 ‘큰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서경원 회장의 뒤를 이어 88년에 가농회장이 된 그는 2년 임기의 회장직을 연임했다.

“나는 농사 짓는 일 빼놓고는 무슨 감투를 원했던 적이 없습니다. 87년말 대선정국에서 가농 주장은 ‘후보단일화’였는데 서경원 전회장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명했단 말이에요. 그 문제로 징계를 하느니 마느니 참 시끄러웠어요. 내가 나서서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는 절대로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요. 그런 상황이라 회장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허완이라는 친구가 내가 안 맡으면 분신하겠다고 휘발유통을 들고와서 엄포를 놓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맡게 됐지요.”

―험한 시절에 가농이라는 전국적인 농민운동단체의 대표직을 그야말로 무리없이 수행하신 셈인데, 조직 내에서 주로 어떤 견해를 견지하셨습니까?

“난 늘 중도적이고, 무슨 일이든 몸으로 하지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회장에 취임할 무렵 영호남이 갈려서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취임 일성으로 그랬어요. 나는 어떤 정치적인 견해도 배척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현장에서 여러분을 뜨겁게 만나겠다, 그 한 마디만 하고 그 자리에서 옷가지를 싸가지고 현장으로 내려갔어요. 지금도 전남에서는 내가 모 잘 심는다고 소문이 나 있다구요. 경상도, 강원도 할 것 없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낮에는 농사 현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지역 총무들과 만나 화해를 종용했다. 그렇게 두 달을 돌고나니 조직이 아주 잠잠해지더라는 것. 몸으로 먼저 말한다는 그의 지론을 보기 좋게 실천한 셈이다.

한 달에 보름 이상 나돌아다녔으니 농사 지을 시간이 없었다. 10여 년간의 사회운동을 마치고 다시 농토로 돌아오려니 적적하기도 해서 같이 농사 지을 사람들을 찾던 중에 치과의사 한 사람과 충북대를 나온 젊은 사람 한 명이 합류했다. 농장 근처에 블록 집을 짓고, 뒷산에 울타리를 쳐서 염소를 키웠다.

“일은 배우는 게 아니라 자체가 삶 ”

“젊은 사람들한테 잔소리를 해야 하는데 일절 잔소리를 안 하니까 일이 잘 안 돼요. 염소막을 지을 때도 내가 다했어요. 내가 나무 베고 있는데 그 옆에서 자더라구요. 그러다 중간에 한 사람은 못 견디고 나가고….”

그러던 중 연세대 졸업생 한 명과 고려대 졸업생 한 명이 같이 찾아왔다. 농사 지어서 먹고살 만하겠느냐고 오지 말라고 했으나 기를 쓰고 내려왔다. 또 한 젊은이는 한양대 공대를 나온 사람으로 그가 노자 강의 나갔을 때 열심히 참석했던 젊은이다.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덤벼든 젊은이가 셋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 귀농 희망자 하나는 얼마 안 가 희망을 접고 떠나버리고, 또 한 사람의 서울 사람과 충주의 한양대 졸업생 둘만 남았다.

양쪽 다 결혼해서 가족까지 딸린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땅세 안 받을 테니 열심히 농사 지어서 소출 나오거든 너희들 몫으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서울 젊은이가 먼저 보따리를 쌌고, 현기라는 그의 노자 강좌 제자만 남아 농사를 짓다가 컴퓨터를 배운다면서 그 역시 떠나갔다. 최근 그로부터 1월중에 다시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사람과 땅을 인연 맺어 주려던 그의 ‘귀농자 농사’는 잘 해야 하나를 건질까 말까 한 상황이니 알곡보다 쭉정이가 많았던 셈이다.

“나는 8년째 젊은애들 머슴만 살아준 셈이오.”

그들 몫으로 농사 지어서 난 소출은 고스란히 줬으니 그런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농사를 즐거워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일부 농촌에서 시도하고 있는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십니까. 사적 소유와 욕망을 탁 털어내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던데요?

“나도 그런 점에서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탁 털어낸다, 이거 어려운 겁니다. 욕심을 비워낸다, 이런 식으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은 그 뿌리가 워낙 깊기 때문에 금방 싹이 나와버려요. 예를 들어서,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저 놈이 놀러간다고 할 때 적어도 ‘뭐 저 놈은 긴한 일이 있을 테지’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인데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저놈은 놀러가는구나’ 이래버리면 공동체 안 되는 겁니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야지 딱 휘어잡아 가지고 규칙 정해 놓고 이런 식은 어렵습니다. 나는 젊은애들 데리고 일할 때도 뭘 규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친구들은 나보고 자꾸 일을 시키라는데, 노예가 별겁니까? 남이 시켜서 일하면 그게 노예지요. 나 하는 것보고 마음이 내키면 따라하면 되는 겁니다. 일이라는 건 생리예요. 일은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에 하면 되는 거요. 난 그 정도만 얘기했어요.”

규정에 얽매여 일하다 깨지면 결국 기분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없으나, 김씨와 함께 일하다 나간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따르고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명강의로 소문난 노자 강의

―노자 강의가 명강의라고 소문났던데, 공부는 언제 하셨습니까?

“80년대 중반쯤 되니까 내 스스로가 권태롭고, 뚜렷하게 보이는 전망도 없고, 일은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 관계가 어렵기만 하고,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나 보자 하고 그때부터 불경을 무턱대고 베껴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불경은 너무 방만하고 해서 예전에 봤던 노자를 다시 꺼냈어요. 1년 동안 노자만 봤어요.”

―왜 이 시대에 하필 노자입니까?

“노자가 불경의 핵심을 해석하는 데 긴요하고, 역사의 허상에 병든 우리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는 참 좋은 것 같아요. 나는 노자를 보면서 인간들이 표상으로 삼고 우러러보는 그 ‘역사’에 대한 역설과 통쾌한 반역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 마음에 닿아서 노자 공부에 매달렸지요.”

―그 공부도 농사일처럼 재미있게 했습니까?

“물론 재밌게 했지요. 난 재미 없는 일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아마 1장서부터 80장까지 다 읽고 백 번은 넘게 써봤을 거요. 지금이야 많이 잊어버렸지만. 노자는 자수가 한 5000자밖에 안 되니까 한문 공부에는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웬만한 사람도 읽어낼 수 있어요.”

―강의에 나가시게 된 것은 어떤 계기였습니까?

“나는 농사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지역 사람들이 시민모임을 하자고 수차례 찾아왔어요. 그래서 시민모임에 관여했는데, 일상적인 시민상대 프로그램이 있어야겠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함께 참여하고 있던 이현주 목사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 노자 강의나 하라고 했더니, 이 목사가 형님이 해야 된다면서 한사코 미뤄서 내가 맡게 됐지요.”

그는 대단히 노회하고 대단히 기회주의적일 수도 있는 노자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순일한 생명의 힘을 담고 있는 고전으로 본다. 강좌를 4년 남짓 해오다가 그만두고 장자를 읽고 있는데, 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다시 하자는 청이 들어와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 구분해야

그의 노자 강의가 저명한 다른 학자들의 그것과 구별되는 게 있다면 노자의 사상을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체험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생명력이다.

“하루는 감자를 캐는데 큰 감자 하나를 캐올리는 순간 대단히 소중해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내다 팔아서 돈을 만든다고 할 때 돈은 뭡니까. 돈이란 필요한 것이지만 교환가치를 상실하면 아무 소용 없는 휴지조각 아닙니까. 그런데 감자는 그 자체로 참 소중한 존재라구요. 지금 사람은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을 못해요.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죽자사자 기를 쓰는데 소중한 걸 소중한 걸로 생각하지 못해요. 필요한 것 때문에 소중한 걸 잃어버린다구요. 또 한 번은 우리 부부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나서 농막에 장작불을 때고 자는데, 바닥이 따뜻하니까 집 사람이 ‘좋다’는 소리를 열 번도 더해요. 그래서 내가 강의 나가서 그랬지요. 대한민국 재벌 마나님 중에서 자다가 ‘좋다’ 소리 열 번 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그의 노자 강의를 기름지게 만드는 ‘거리’는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농사에서 건져올린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가만히 있는 것은 더위를 이기는 것이고 조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추위를 이기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靜勝熱 躁勝寒(정승렬 조승한)’을 강의할 때 그는 자신이 기르던 염소 얘기부터 꺼낸다.

“염소를 키우는데 아침 열시쯤 되면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요. 그러다 1시나 2시 쯤 돼서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로 돌아옵니다. 들어올 때 보면 느려터진 걸음으로 아주 살살 들어와요. 움직임을 최소로 함으로써 더위에 대비하는 거지요. ‘댑싸리 밑에 개팔자’라는 말 못들어보셨어요? 한 여름에 개란 놈이 마당 쓰는 큰 싸리비 밑에 혀 빼물고 납작 엎드려 있는 걸 두고 한 말 아닙니까. 엎드릴 복(伏)이 사람 인(人) 변에 개 견(犬)인 것도 바로 그 모습을 두고 한 말이에요. 그것이 개가 더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덥기만 하면 동해안이다 남해안이다 몰려가는데, 다섯 시간 열 시간 차에 시달리고 가서 무슨 피서를 합니까. 우리의 습관이지 피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는 염소라는 놈을 보고 아, 사람보다 낫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염소만 못하다 해서 기분 나빠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염소 우리에서 똥 치울 때 보면, 염소란 놈이 땀 뻘뻘 흘리면서 제 똥 치우는 내 모습을 눈 빤히 뜨고 지켜본단 말이에요. 그때는 내가 염소의 종입니다. 뭐 우리가 염소보다 낫다고 큰소리 칠 것 있어요.”

여름에 숲길을 갈 때면 뱀에 물릴까봐 겁이 난다. 그러나 뱀에 물려 죽을 확률은 4000만명 중 몇 명도 안 된다. 교통 사고로 죽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인데 자동차를 타면 편안해지는 것, 김씨는 그런 현상을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능이 발달하면 할수록 원래 생명체로서 가지고 있던 좋은 기운이 그만큼 허약해진 탓’으로 풀이한다.

“농사는 힘 아닌 신바람으로 해야”

김씨가 여느 농사꾼들과 농사짓는 자세 자체가 다른 것이 바로, 사물을 보고 그러한 이치를 깨닫는 순간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신명이 그를 살맛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느낀다는 신바람이나 신명을 발견하기도 어렵지만 그걸 신바람으로 여기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자신도 ‘옛날에는 힘으로 일을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바로 그런 신바람 때문에 들일이 즐겁다’고 실토하는 데야.

그는 농사일을 춤바람이라고 여긴다. 낫으로 벼를 벨 때 낫으로 벼포기를 그러모아 쥐었다가 싹둑 베어내는 동작을 계속하면 그 자체가 리듬이고 몸짓이다. 그걸 춤으로 즐기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대상(작물)에 대해 허심한 마음을 갖는 것이 그것이다. 농사가 잘 돼서 소득을 많이 안겨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대상을 올바로 못보는 것이고, 그때부터 그 일은 춤이 아닌 노역이 된다. ‘너 조금 왔어? 그럼 조금 먹어주지’, 이런 여유로운 마음이 낫질을 노랫가락으로도 춤바람으로도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농업을 산업으로 보아야 하는 사회에서 그의 농사법은 모두에게 권장할 사항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 가위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산업화의 바닥 어디쯤에서건 약간의 손해를 무릅쓰고 ‘본래 상태’ ‘본래 방법’을 제대로 실험하는 사람이 많아야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산업화를 제어할 바탕이 마련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비단 농사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일을 김상덕씨 같은 ‘도인’이나 할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는 건강 비결을 묻는 내게 ‘남이 좋다고 좇아 다니는 걸 안 먹는 게 비결’이라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맞이하는 독자들에게 덕담이 될 만한 한 구절을 부탁했다. 그가 생각에 잠기더니 논어의 한 구절을 말했다.

“治人事天(치인사천)에 莫若嗇(막약색)이라.”(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낌보다 더 한 게 없다)

신동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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