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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리포트|‘잃어버린 10년’ 현장체험기

일본열도를 울린 야마이치증권 사장의 통곡

  • 권순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일본열도를 울린 야마이치증권 사장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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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의 실패는 정치지도자의 인기가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96년 1월 총리에 취임한 하시모토는 취임 초기 지지도 60%를 넘는 인기를 누렸다. 오부치파 소속인 그는 일본 정치지도자로는 보기 드물게 논리적인 언어 구사 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96년 10월의 중의원 선거도 승리로 이끌어 장수총리가 될 것 같아 보였다. 중의원 선거때 필자는 3개월간의 단기 일본어연수를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자민당후보의 선거홍보물에는 예외없이 하시모토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후보 개인보다는 총리의 인기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7년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하시모토 내각의 경제대책은 ‘너무 늦고 너무 적다(Too late, too little)’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실패가 명백한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교묘한 논리로 호도하려던 하시모토는 국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컨설팅업체 대표인 호리 고이치는 “지도자의 덕목은 설득력 있는 꿈과 비전인데 하시모토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실망감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졌다”고 분석했다.

인기가 급락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하시모토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게 됐고, 그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민심의 변화는 잘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격랑으로 변해 커다란 배(권력)도 엎어버리는 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시모토의 중도 퇴진 후 초점은 다음 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였다. 자민당이 참의원선거에서 참패했지만 중의원에서는 여전히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민당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7월30일 실시된 자민당 총재선거는 바로 총리선거이기도 했다.

자민당 총재선거에는 오부치파 보스인 오부치 당시 외상(현 총리)을 비롯해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관방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생상 등 3명이 출마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거침없는 발언과 소신으로 자민당 내 이단아로 꼽히는 고이즈미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일본 정치, 특히 자민당 정치를 결정짓는 것은 파벌의 역학관계였다. 뚜렷한 특징이 없어 ‘평화시의 총리감’으로 평가받아온 오부치는 최대 결국 파벌인 오부치파 보스라는 점과 당직 및 각료인사에서 보은(報恩)을 기대한 다른 파벌의 지지에 힘입어 1차투표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날밤 오부치정권이 출범했다.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 필자는 팔자에 없는 일본 TV의 취재대상이 됐다. 한 민간방송이 이날밤 뉴스시간에 선거 특집방송을 하면서 세 후보 진영의 하루 표정과 함께 이 선거를 다루는 미국과 한국 언론사 특파원의 인터뷰 및 취재 장면을 담겠다는 전화신청에 별생각 없이 응한 것이 ‘화근’이었다.

필자가 취재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회사(동아일보) 때문이었다. 회사 자랑이어서 계면쩍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동아일보는 다른 한국신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 배운 사람 치고 동아일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권위지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취재신청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30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오후 2시쯤 사무실을 찾아온 방송제작팀은 무려 7시간 가량이나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개표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등의 질문을 하더니 결과가 판가름나자 필자가 생각하는 오부치정권의 과제를 인터뷰했다. 필자가 서울 본사와 통화하는 광경은 물론 저녁 7시경 서울시내에 배달되는 다음날 조간신문 초판이 나온 뒤 동아일보에 실린 관련기사를 팩시밀리로 받는 장면까지 방영됐다. 아마 필자가 그때만큼 오랫동안 텔레비전 방송을 타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 유창하지도 않은 일본어로 인터뷰에 응한 ‘만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IMF위기의 서곡

97년은 한국경제가 처절히 몰락한 한 해이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 경제에 영향력이 큰 나라인데다 일본에는 한국기업 주재원도 많아 필자는 일본에서 한국경제위기의 파장을 피부로 실감했고 ‘일거리’도 많았다. 특히 IMF 위기의 후유증이 극심했던 98년에는 알고 지내던 한국 기업 해외주재원들이 잇따라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에 온 지 3개월밖에 안 된 직원이 짐을 풀기가 무섭게 귀국명령을 받아 서울로 돌아간 사례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 경제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위기를 알리는 징조는 있었다. 다만 당시 한국사회 전체가 다가오는 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대통령선거라는 특수상황으로 정치논리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점도 상황인식을 안이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필자는 97년 3월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 관계자들로부터 “한보사태 등의 여파로 일본 금융기관들이 한국계 금융기관이나 기업에 신규대출을 기피하고 기존대출도 조기회수한다”는 푸념을 들었다. 몇 곳을 취재해보니 거의 모든 한국 금융기관이 갈수록 심각한 ‘돈가뭄’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었다. ‘코리언 프리미엄’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한국 은행지점장들의 일과는 일본 금융기관을 찾아다니며 ‘돈 구걸’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도쿄 금융계에서 한국 금융기관들이 직면한 자금난 비상을 97년 3월15일자에 도쿄발 스트레이트와 해설 박스기사로 보도했다. 이어 3월21일자에는 경제부 기자들과 해외특파원들이 진단한 국내외 금융위기 실태가 ‘위기의 한국금융-부실 총점검’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8개월 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 만큼 한국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인식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명색이 경제부기자 출신이었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의 고통을 현장에서 보면서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기의 서곡이었는데도….

한국 경제위기는 왜 왔을까.

“IMF 위기는 한국이 자초한 것”

일본의 한국경제 전문가인 후카가와 유키코 당시 일본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현 아오야마대학 경제학부 조교수)는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결정하기 직전인 97년 11월21일 필자와 전화인터뷰를 하며 “한국 경제위기는 외국투자가들이 핫머니를 빼 감으로써 통화위기가 발생한 동남아와 성격이 다르며 한국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는 성격이 짙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벌그룹의 무리한 신규사업 진출 등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이 초래한 연쇄적 악순환을 위기의 근본원인으로 지적했다. 또 경제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데도 정계 관료 금융계 노조 등이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해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강조한 바 있다(97년 11월22일 동아일보 보도).

97년 당시 여야 정치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국정 최고책임자인 YS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여야 대통령후보였던 이회창씨나 DJ가 기아자동차 문제 처리 등 경제현안에 대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한 검증과 평가가 필요하다. 또 노동법 개혁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노조가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시간을 낭비한 결과 누적된 문제는 DJ 정부에 들어와 노동자의 고통을 더욱 심화지켰다. 언론 역시 경제위기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문제점을 찾는 일본 전문가들도 있었다.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게이오대)는 한국이 국가적 위기에 빠진 주요 원인으로 허세와 오만을 지적하며 경제발전의 허구에 도취해 내실보다 외형에 치중하는 경향이 각 분야에서 나타나면서 해외에서 눈총을 받는 일이 많았다고 꼬집었다. 또 4년간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마쓰모토 다카시(마루베니상사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실장)는 98년 4월 동아일보 도쿄지사 주관으로 열렸던 한일 40대 경제전문가 특별대담(신동아 98년 5월호 보도)에서 “한국 금융기관 및 정부기관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다”며 “원칙에 따라 대출이 이뤄졌다면 은행들이 대량의 부실채권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98년 1월23일 일본 정부는 65년 체결된 한일 어업협정을 사실상 파기한다고 한국에 통고했다. 일본의 어업협정 파기통고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자민당내 수산족(水産族) 의원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대결에서 강경파가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특히 일본측은 한일 양국 정부가 잠정적으로 합의한 협상안을 정치권의 요구에 밀려 무시하고 이를 일방 파기하는 결정으로 몰아가는 강수를 보였다.

일본의 협정 파기 통보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시기적으로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98년 1월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DJ가 취임하기 전인 권력 공백기였다.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기 전에 힘이 떨어진 YS 정부가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동안에 골치아픈 문제를 털어버리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이 IMF 위기를 겪는 상황을 악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했다.

일본 외무성은 파기 통보 직후 이례적으로 한국 언론사 도쿄특파원들을 외무성으로 초청해 일본의 상황을 설명한 뒤 “이번 결정이 협상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한국의 금융위기를 이용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 역시 한국내에서 그런 반발이 나올 것을 우려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일본이 어업협정 발효문제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결국 어업협정 파기라는 최종카드를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한 파기 통보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DJ 정부 출범후 본격화한 신어업협정 체결교섭은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중간수역의 동쪽 한계를 어디로 할 것인지와 양국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 주변 해역의 처리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쉽게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98년 10월로 예정됐던 DJ의 일본 공식방문을 앞두고 어업협정 문제는 양국간 최우선 현안이 됐다. 기존 어업협정 만료가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데다 DJ 정부 출범 후 본격화한 한일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도 더 이상 어업협정 문제를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공은 양국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피 말리던 신어업협정 체결협상 취재

98년 9월24일 DJ의 신임이 두터운 김봉호 국회부의장(국민회의)과 김선길 해양수산부장관(자민련)이 마지막 담판을 위해 도쿄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자민당 수산족의 대부격인 사토 고코 국제어업문제특별위원장 및 나카가와 쇼이치 농림수산상과 개별 및 합동회담을 가졌다. 김부의장과 사토 의원 사이에 사실상 정지작업이 끝났다는 관측도 나왔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쿄특파원들은 외곽취재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근거로 오후 4시반경 마감되는 조간신문 초판에 ‘한일 어업협정 사실상 타결’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냈다. 일부 한국 신문은 아예 ‘한일 어업협정 타결’이라는 단정적 보도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협상이 시작되자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 오후 6시에 도쿄시내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던 4자 회담은 한국측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나카가와 농수산상의 고집으로 1시간 반이나 늦게 시작됐다. 그나마 회담에 들어가서도 양측의 주장이 대립해 언제 타결이 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회담이 난항을 겪자 사토 위원장이 오부치를 만나기 위해 총리관저로 떠났다. 밤 10시반경에는 김부의장도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온 사토와 함께 총리관저로 갔다. 협상에 오부치가 직접 개입한 셈이 됐다.

난감한 것은 회담장 밖에서 기다리던 한국 기자들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하면 이날 밤에 어떤 형태로든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높았다. 김부의장 일행은 9월25일 서울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고 시기적으로 DJ 방일 전에 추가협상이 다시 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 상황은 오히려 결렬을 향해 치닫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신문제작 마감시간과 독자들이 막상 신문을 읽는 시간 사이의 시차라는, 신문기자의 숙명적인 딜레마까지 겹쳐 있었다.

일본 신문의 경우 진행중인 협상에 대해서는 각 판 마감시간까지의 상황만 충실히 전달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졌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한국 신문은 독자가 신문을 읽는 시점을 감안해 기사를 쓴다. 일본 기자 흉내를 내다 결과적으로 낙종을 할 경우 무능한 기자 소리를 듣기가 십상인 것이 한국 언론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9월25일 아침까지 협상이 타결될 것으로 전망하고 섣불리 추측기사를 썼다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엄청난 오보가 되는 셈이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은 이날밤 몇차례에 걸쳐 판갈이(여러차례 있는 제작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수정하는 일)를 했다. 가장 큰 고민은 조간신문의 인쇄부수가 가장 많은 서울시내판(동아일보의 경우 45판)이었다. 마감시간(밤 12시경)은 다가오는데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일본 총리관저로 떠났던 김부의장은 호텔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필자는 어업협상 문제 때문에 일부러 회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당시 최맹호 국제부장(현 경영지원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상의한 뒤 ‘사실상 타결’의 기조는 지키되 “협상은 마지막까지 진통을 겪었다”라는 표현을 넣었다.

국가간 협상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최종판 마감을 끝냈다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줄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호텔 현관으로 김부의장을 태운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온 것은 9월25일 새벽1시를 이미 넘긴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한일 양국이 새 어업협정 체결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며 오늘중 결과를 공식발표하겠다”고 짤막하게 말한 뒤 묵고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휴대전화로 국제부 야근기자를 찾은 뒤 “야간국장(신문사에서 편집국장 퇴근후 야간상황을 책임지는 부국장 또는 부장)께 빨리 말씀드려 ‘돌판(정상제작 최종마감후 긴급상황 발생시 만드는 신문)’ 준비해”라고 악을 쓴뒤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이날 씁쓸한 에피소드 하나. 저녁 내내 협상장을 지키며 취재하던 A신문 기자는 협상상황이 진통을 겪자 고민 끝에 서울시내판에 ‘협상결렬’로 기사를 바꿨다. 당시 협상장 주변 분위기로는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특파원이 협상장 주변에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B신문은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시종일관 ‘협상타결’로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새벽까지 기자가 현장을 지킨 A신문은 독자들이 신문을 읽는 시점에는 오보를 한 반면에 취재를 소홀히 했던 B신문은 고민을 하지 않고도 정확한 기사를 쓴 셈이 됐다. 성실한 취재로 정평이 있던 A신문 기자는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야간에 현장취재를 하지 않겠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뒤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야간취재에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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