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고객의 눈으로 보아야 기업이 산다

  • 홍성태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경영학

    입력2006-12-27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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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케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대체 “우리 회사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느냐(What business are we in?)”를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해야 한다. 이는 곧 기업(Corporate)의 정체(Identity)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CI)으로, 이것을 잘못 규정하면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많은 기업이 자신이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사업을 한다. 마케팅의 기본은 사업의 성격을 고객 측면에서 정의하고, 그 성격을 고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우선은 기업의 정체성(Corporate Identity: 일명 CI)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제1부 - 사업의 성격을 파악하라 ]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다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 ‘스프링벅’이라는 산양이 살고 있다. 이 산양은 보통 20∼30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는 수천 마리가 떼를 이루기도 한다. 거대한 산양 떼가 천천히 이동하는 장면은 가위 장관이리라.

    그런데 앞서 가는 산양들이 풀을 먹고 지나가면, 뒤에 오는 양들은 먹을 풀이 없다. 그러니 뒤를 쫓는 산양들은 풀을 먹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하고, 앞에 가는 양들은 뒤지지 않으려고 차차 발걸음이 빨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큰 무리가 모두 다 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앞서려고 했지만, 그 다음엔 앞서기 위해 앞서려 한다. 그 다음엔 왜 뛰는지도 모르는 채 그대로 내달리다가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가격에서든 서비스에서든 무작정 경쟁만 의식하여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달리는 산양같이 어리석은 기업이 많다.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열심히 내달리기만 하는 기업은 곧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슨 사업을 하는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대체 “우리 회사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느냐(What business are we in?)”를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해야 한다. 이는 곧 기업(Corporate)의 정체(Identity)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CI)으로 이것을 잘못 규정하면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미국의 앰트랙(Amtrak)은 19세기 중반에 생겨난 철도회사로서 매우 번성하였다. 그 당시 서부를 개척해 나가는 데 철도운송에 대한 수요는 거의 무한하여 1세기 동안 철도산업은 화물과 승객 수송을 독점하여 왔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르러 경쟁자가 나타난다. 2차 세계대전 중 발달한 항공술 덕분에 항공 운송이 일반화하고 웬만한 소도시에까지 비행장이 들어선 것이다.

    앰트랙은 자신의 사업을 ‘철도사업(rail road business)’이라고 규정하여 왔다. 그래서 경쟁자인 항공사들과 차별화하느라 되도록이면 비행장을 멀리 피해 철로를 깔아 경쟁력을 가져보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객의 외면으로 오늘날 도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작년의 손실만도 10억 달러에 이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고객의 눈으로 보아라

    사람들은 왜 기차를 타는가 : 사업 내용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업의 제품 및 서비스’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고객의 욕구’ 측면이다. 앰트랙의 사업은 기업 측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철도사업이다. 그런데 고객 측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차를 타던 사람(고객)들이 왜 기차를 탈까?

    그렇다. 마차에 비해 기차가 빠르고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앰트랙은 자신의 사업을 ‘철도사업’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빠르고 편리한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사업’으로 생각했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비행기가 등장했을 때 전혀 다른 대응을 했을 것이다.

    기차와 비행기 중에 어떤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한 운송수단이 되는가? 비행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비행기와 경쟁하게 된 앰트랙이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은 둘 중 하나다. 첫째는, CI를 바꿔 비행기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분야를 개발하는 것이다. 예컨대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CI로 삼고 시간을 다투지 않는 제품의 운송 또는 관광을 포함한 여가 여행 등을 주 제품으로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빠르고 편리한 운송수단’에 집착하고 싶다면 항공사업에 진출할 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앰트랙 에어라인’이 날아다니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비행기와 철도를 조합하여 비행장에서 시내까지 직접 연결되는 철로를 깔아 다른 항공사가 제공할 수 없는 ‘더 빠르고, 더 편리한 운송 수단’을 제공했더라면 앰트랙이 오늘날처럼 도산 위기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업의 성격을 ‘제품’의 기능과 형태가 아니라 ‘고객’의 욕구를 중심으로 보아야 함을 말해 준다.

    대부분의 기업이 ‘자신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what a company is best at)’를 잘 모른다. 고객의 눈으로 바라보라. 해답이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보는가 :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가진 영화사 MCA나 ‘콜롬비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업은 제품 면에서만 보면 영화사업이다. 그들은 영화사업을 통하여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풍미하였다. 불경기에도 오로지 번성한 것은 영화사업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은 물론 전쟁 후에도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사업은 계속 번창하여 왔다.

    이러한 영화사업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70년대에 출현한 VCR 때문이다. VCR가 출현하자 사람들은 극장에 가는 대신에 집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다. 제품의 형태만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영화사업을 한다고 생각한 콜롬비아, MCA 등은 VCR의 출현을 안타까워하며, 고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다. 그들 나름대로 고객의 욕구도 조사해 보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영화 선택의 여지를 주기 위해 대형 극장을 4∼5개의 소극장으로 나누어 개조하였다. 표를 구입해 극장에 들어선 고객이 자기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집에서 비디오를 볼 때처럼 편안한 자세로 관람하도록 극장 의자를 더욱 편하게 만들고 앞뒤 간격을 넓혔을 뿐 아니라, 바닥에 고급 카펫도 깔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들은 극장을 찾지 않았다.

    이번에는 극장만이 가질 수 있는 차별점을 찾아보았다. 미국 사람들은 극장에 가면 십중팔구 팝콘을 즐긴다. 그런데 집에서 튀긴 팝콘은 아무리 맛있게 만들려 해도 극장 팝콘에 미치지 못하였다. 낭만적 요소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는 즐길 수 없는 극장만의 낭만을 살리기 위해 더욱 좋은 팝콘과 스낵 등도 개발하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은 날로 줄었다.

    이와 같이 극장을 어떻게 개조하여 손님을 끌 것인가에만 신경을 쓰던 MCA나 콜롬비아는 90년대 초, 주인이 바뀌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영화사들이 자신의 사업을 고객의 눈으로 파악했다면 그러한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일까? 재미있기 때문이다. 영화사들이 만약 자신이 ‘즐거움을 주는 사업(entertain·ment business)’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VCR는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주 잘 된 영화라도 개봉관에서 3~6개월 후면 ‘중고품’이 되고 마는데, 비디오의 보급으로 이러한 중고품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업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했더라면 갓 개봉관을 떠난 영화들은 물론, 다시는 극장에서 상영 못할 30∼40년대의 흑백영화들을 녹화하여 적극적으로 판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즐거움을 주는 사업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먼저 눈을 뜬 기업은 의외로 ‘디즈니’다. 현재 전세계 비디오 판매량 1위에서 10위까지 중 9개가 ‘디즈니’의 작품이다. 반면에 거대한 시장이 생겼는데도 새로운 기회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VCR를 경쟁자로만 인식한 MCA나 콜롬비아 같은 영화사들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왜 TV를 보는가 : 일본의 ‘마쓰시타’나 ‘소니’ 같은 회사들은 이런 점을 깨닫고, 기능과 형태를 중심으로 사업성격을 규정하던 구태를 탈피했다. 즉 자신들이 제품 면에서는 전자사업을 하지만, 고객의 측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왜 TV 드라마를 보는가? 재미있으니까. TV를 보거나 워크맨을 듣는 사람들이 결국은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사업을 ‘즐거움을 주는 사업’이라고 규정한 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다.

    마쓰시타와 소니가 자기 사업의 정체를 인식한 후 미국의 MCA와 콜롬비아사를 각각 61억 달러, 46억 달러나 지불하고 매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품 형태 면에서는 전혀 다른 사업 같지만, 고객 욕구 면에서는 동일한 사업이라고 본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본에서 생산한 전자제품들을 통해 가장 좋은 하드웨어를 제공하고, 미국의 영화사를 통해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를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즐거움을 전하겠다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쓰시타의 타니이 데루오(谷井照雄) 사장은 이를 “하드와 소프트의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일컬었다.

    기업 정체의 규명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업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기능이나 형태보다 고객의 시각을 중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사업을 시장욕구 충족의 과정으로 보아야지 제품생산의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품과 기술은 진부해지지만 기본적인 고객의 욕구는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화장품을 만드는 ‘레블론(Revlon)’ 회사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WE SELL HOPE(우리는 기대감을 판다)”

    그렇다. 레블론 회사가 파는 것은 화학제품이 아니다. 아름다움 자체도 아니다. 그들은 “이 화장품을 바르면 예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파는 것이다.

    이제, 귀사에서도 과연 무엇을 판매하고 있는지, 고객 위치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CI를 규명하려는 기업의 노력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대를 중심으로 강조점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의 CI 작업은 기업 내부의 조직풍토를 잘 파악하고, 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90년대 이후의 CI는 외부의 고객 및 일반 대중에 비치는 기업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즉 예전에는 인사·조직 면이 강조된 데 반해, 오늘날에는 마케팅이 CI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기업의 정체성(CI)은 에서 보듯이 기업 내부의 CI와 기업 외부의 CI로 분류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기업의 사풍이나 철학 등 개성을 명확히 하는 기업문화 정립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고객을 의식한 기업의 이미지 표현을 위해 부심하게 된다. 즉 규명된 CI를 고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바로 창의성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여기서는 기업 내부의 CI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후, 설정된 CI의 내용을 고객들에게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들을 알아보겠다.

    기업 내부의 CI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기업 내부의 인사·조직 측면에서 기업의 철학이나 풍토(또는 社風)라 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뚜렷한 조직문화가 없는 기업은 성공을 지속하기 힘들다. 현대그룹의 우직한 추진력, 삼성그룹의 깔끔한 관리력 등은 변화하지 않는 기업 풍토로 자리잡았다.

    제품은 진부해지고 시장은 변화하며 신기술이 출현하고 새로운 경영기법과 용어가 난무할지라도 기업의 문화는 이어져 간다. 그리하여 기업이 성장하고 다각화해 전세계로 확산되더라도 그 조직을 묶어 놓는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마치 유태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더라도 유태인 정신이 그들을 붙잡아 놓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 기업은 자신의 조직문화가 어떤 것인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자연발생적으로 드러나는 조직문화가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직문화가 뚜렷이 규명되지 않은 경우에는 이를 설정하여 구성원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적 정체성(MI: Mind Identity)을 설정하여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게 한다. 즉 전사적(全社的)으로 동일한 마음가짐을 가지려는 시도로 사훈이나 경영이념, 사원정신 등을 정하게 된다. 다만, 예전에는 기업주의 개인적인 철학 내지 가치관 또는 가훈을 상의하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과정을 거쳐 MI를 설정하게 된다. 설정된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MI 설정 과정에 참여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정된 MI는 사훈 등의 제목하에 액자로 만들어 걸기도 하고 구성원에게 교육도 하지만, 마음 다짐만 가지고는 행동의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MI와 일관된 행동의 지침들, 즉 행동적 정체성(BI: Behavior Identity)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는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 구성원의 행동에 일체감을 형성하고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다. 좁게는 전화 받는 요령에서부터 넓게는 의사결정 과정의 세부지침까지 행동강령들을 교육하게 된다.

    어떤 여성이 아름다워 보이려면 우선은 마음이 건강해야 할 것이다.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화장만 진하게 해서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밝히고 바람직한 처방을 하는 것이 바로 MI와 BI를 설정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이제 건강해진 여성이 적절한 메이크업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이러한 메이크업 활동이 바로 기업 외부의 고객을 의식한 CI 전파작업이며, 마케팅이 해주어야 할 일이다. 여기에는 다시 시각 및 언어적 정체성을 설정하는 두 가지 CI가 있는데, 마케팅 역할과 관련되므로 좀더 상세히 설명한다.

    시각적인 정체성 표현

    기업의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시각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심벌 마크, 로고에서부터 유니폼 또는 회사 차량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인 통합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시각적 정체성(VI: visual identity)을 도모하는 것인데, 기업이 이러한 시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손다이크(E.L. Thorndike)라는 심리학자는 학창 시절에 미국의 정부기관에서 실업자들의 직업을 알선하는 부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대공황 시기여서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으므로 손다이크는 이러한 실업자들을 위한 한 가지 아이디어로, 잡지나 신문 등에 나온 각 단어의 수를 세어 정리하게 하였다. 그 일을 한 사람들이 센 단어가 총 450만 개에 달했으며, 오늘날 영어사전에 수록된 각 단어 앞에 별표(*)로 빈도수를 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조사에 기초한 분류다.

    후에 그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을 때, 이 조사결과를 이용해 사람들이 각 단어를 얼마나 좋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의미와는 관계없이 자주 쓰인 단어일수록 더 좋게 생각하고 자주 쓰이지 않은 단어들은 덜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은 각 단어의 빈도수와 그 단어에 대한 호감도를 그래프로 그린 것인데, 빈도에 따라 그 호감도가 거의 일정하게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단순히 어떤 단어를 자주 접함으로써 그 단어가 공연히 좋아지는 신기한 현상인데, 이를 ‘단순노출(mere ex -posure)에 의한 호감형성’이라 한다. 후에 많은 실험을 통해 입증이 된 이 이론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그 정보에 친밀감이 생기고, 그 결과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얼굴 사진을 찍어, 하나는 정상적으로 인화하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인화하였다고 하자. 즉 가르마를 비롯해 오른쪽과 왼쪽이 바뀌어 보일 것이다. 친구들은 정상적으로 인화된 사진이 더 잘 나왔다고 말하지만, 본인은 반대로 인화된 사진이 더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익숙한 얼굴을 더 좋아하는데, 본인은 항상 거울을 통해 거꾸로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반대로 나온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왕가의 공주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승마 선생과 눈이 맞았다거나, 유명 여가수가 보디가드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흥미를 끌곤 한다. 의아하게 들리지만, 누구든 가까이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이 점점 좋아지기 십상인 것이다. 이처럼 ‘반복된 노출’은 친근감을 가져오고 결국 우호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고운 면은 물론이지만 미운 면도 자주 보면 정(情)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미운 정’이라고 표현한다.

    소비자들이 매번 광고를 눈여겨보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저 스쳐 지나간다 하더라도 한 번 스쳐간 광고보다 두 번 접한 광고의 제품을, 두 번 접한 광고보다 세 번 본 광고의 제품을 더 잘 기억하고 더 친근감을, 더 나아가 호감을 갖게 되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과업계의 선두주자인 ‘구리코(Glico)’ 제과는 초등학교에서 칠판이 낡거나 농구대, 철봉 등이 망가졌다고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무료로 교체하여 준다. 다만 한쪽 구석에 구리코 제과의 상표를 새겨 넣었다. 학생들이 칠판을 쳐다보거나 밖에 나가 놀 때 자연히 그 상표에 노출되므로, 이 아이들이 가게에서 과자를 사게 되면 구리코 과자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연말에 각 기업은 사은품으로 달력을 배포한다. 소비자가 달력을 집에 걸어 놓는다면, 달력 밑의 상표를 1년 내내 보게 되는 셈이다. 그저 지나칠 뿐이라도 자꾸 보게 된다면 그 상표를 더 잘 기억하고 친근감, 더 나아가서 호감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된 이미지의 상표, 심벌, 로고(logo) 등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친밀감과 호감을 형성하는 것이 시각적 정체성(VI)을 추구하는 의의다.

    언어적인 정체성 표현

    기업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슬로건 등 언어로도 소비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정체성(verbal iden-tity)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알아보자.

    기억하는 원리 중에 재생기억(repro- ductive memory)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정보를 반복적으로 되뇜으로써 정보를 ‘주어진 그대로’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면 토씨, 쉼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생기억의 원리는 연쇄작용(associationism)이다. 다시 말해, 앞의 말이 자극(S:stimulus)이 되어 바로 뒤의 말(R:response)이 튀어나오고, 그 말 때문에 그 다음, 또 그 다음 말이 연쇄적으로 생각난다는 것이다. 무지개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라고 기계적으로 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재생기억이다.

    그런데 재생기억을 위한 연쇄작용을 촉발하려면 순서에 따라 첫번째 말부터 외우기 시작해야 한다. 맨처음부터 시작하면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중간부터 시작하려면 재생이 잘 안 된다. 이를테면 무지개의 색깔 중 초록색 다음이 무슨 색인지 얼른 기억해내기 쉽지 않다. 국민교육헌장도 중간부터 시작하면 외우기 힘들다. 처음 외운 순서대로가 아니면 재생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단어가 시작되면 뒤따르는 말들은 매우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재생기억의 연쇄성과 정확성을 이용해 기업 이미지를 쉽게 전달하곤 한다.

    예를 들어 AT·T라는 전화통신 회사의 광고에는 상표 다음에 “The Right Choice(올바른 선택)”라는 말을 항상 붙여 준다. 따라서 AT·T 하면 누구나 “The Right Choice”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외국 광고에서 “Cars That Make Sense”를 Hyundai라는 상표 다음에 반드시 붙인다. 그럼으로써 현대자동차가 저렴하면서도 쓸모 있는, 적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쉽게 기억시키려는 것이다.

    재생기억을 용이하게 하려면 첫째, 기억시켜야 할 문구를 상표와 함께 수도 없이 반복하여 광고해야 한다. 재생기억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연쇄작용을 촉발시켜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재생기억은 연쇄작용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므로 상표명과 기억되어야 할 문구는 항상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델몬트’ 오렌지 주스가 “따봉”이라는 재미있는 말을 유행시켰지만 사람들이 이 말을 델몬트 상표에 연결시키지 못해 선전문구의 유행만큼 매출이 오르지는 않았다. 또한 상표가 먼저 나와야 연쇄작용에 따른 이미지 전달효과를 높여준다. 따라서 “우리의 날개, 대한항공”에서처럼 ‘우리의 날개’ 때문에 ‘대한항공’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항공은 우리의 날개입니다”처럼 ‘대한항공’ 때문에 ‘우리의 날개’가 생각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따라붙는 문구는 간략해야 한다. “금성,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는 의미는 좋지만 상표명까지 합치면 다소 길다. 상표명(S) 다음에 나오는 슬로건(R)은 조건반사와 같이, 자동적으로 쉽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재생기억의 원리를 잘 활용하여 기업이 내세우고자 하는 이미지를 간략한 문구로 만들어 항시 상표명과 함께 반복 제시할 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자사의 상표와 핵심적인 이미지를 쉽게 기억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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