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주석궁과 청와대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김일성과의 ‘불발 정상회담’ 내막

  • 대담: 김종심 동아일보 출판국장, 황의봉 신동아 편집장 정리: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0-16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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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4월12일 김영삼전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내부적으로는 국내정치 질서를 재편하게 될 4·13총선을 바라보는 전임 대통령의 시각과 경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전대통령은 저녁식사를 포함해 5시간여 동안 진행된 특별인터뷰에서 94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처음 공개되는 몇 가지 중요한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또한 김대중 정부 후반기, 특히 차기정권 창출과 관련해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임을 시사했다.<편집자>
    4·13 총선 바로 전날인 12일 오후 5시30분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 2층 응접실. 김 전대통령은 1분도 어김없이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짙은 감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사각무늬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약속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해 차를 대접받으며 벽에 걸린 재임 당시 사진 등을 화제로 담소하고 있던 ‘신동아’ 일행을 김 전대통령은 일일이 악수로 맞았다.

    김 전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의 봄을 그린 서양화를 가리키며 소년같이 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여기가 전부 초가집이었는데 이제 우리집이 제일 나빠요. 전부 기와집이 됐어.”

    방한한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대도무문(大道無門)’ 휘호를 써주는 사진을 가리키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붓을 들고 한 번에 써내려 가니까 클린턴 말이, 태어나서 붓글씨 쓰는 걸 처음 봤답니다. 내가 쓴 글씨 뜻이 뭐냐고 물어서 수첩에 적어갔어요. 자기 가까이에 두고 보겠다고. 백악관 복도에 걸어놨대요. 한문이니까 뜻은 아시아 사람밖에 모르겠지….”



    고통의 시간 너무 길었다

    ―연세(올해 74세)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산에는 자주 가시는지요?

    “산에도 가고, 될 수 있는 대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찾아와서 현실 얘기나 정치 얘기를 많이 합니다.”

    ―흔히들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던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봐요. 머리를 많이 쓰다가 건강이 아주 나빠진 사람들이 많아요. 이혼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면 금방 죽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솔직히 나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용한 일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가….

    내가 연금 당했던 그 때는 집 주위에 전경이 몇백명씩 좍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한테도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는 거지요. 내가 이 집에서 살면서 청와대에 들어 갔다 왔는데,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키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저기에 전경이 눈앞에 아른아른 하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너무 오래 계속되다 보니까 그런가 봐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는데….”

    김 전대통령은 건강 얘기를 하다가 훌쩍 군사독재 시절에 연금 당하고 고생했던 얘기로 옮아갔다. 아직도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 ‘그때 그시절’을 길게 술회하는 마음 속에는 퇴임 후 이런저런 이유로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답답함이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연금이 얼마나 힘든 건지,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습니다. 연금됐다는 사실은 신문에도 안 나오거든. 그러니까 국민들은 김영삼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런 판인데, 내가 회고록에도 썼지만 당시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이 세 차례 나를 찾아왔어요. 권익현이가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11기 동기생이거든. 그 세 사람이 내 문제로 상의를 했는지, 권익현이가 나에게 미국으로 가라는 거예요. 당시 김대중이는 미국에 가 있었거든. 생활비 걱정은 조금도 안해도 된다, 가는 곳은 일본도 좋고 미국도 좋고 유럽이든 어디든 내가 원하는 나라로 가서 살아라, 집도 사주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때는 애들도 어렸으니까, 다 데리고 가달라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참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권총장, 김대중이 미국 보내고 나마저 내보내면 박정희처럼 18년 아니라 20년도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안가. 나쁜 X들. 전두환이한테 일러라. 나는 죽어도 그런 짓 못해’ 이랬어요. 권익현이가 세 번째 왔을 때에는 내가 ‘권총장, 나를 미국에 보낼 방법이 있어’ 그랬더니 ‘무슨 방법인가요?’ 하고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를 시체로 만들어서 부치면 돼’ 그랬더니 그 다음엔 다시 안오더라고.

    아무튼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너무 길었거든. 대통령 5년 하면서 괴로움도 많았고….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난의 시간은 길었다’고 내가 퇴임 기자회견에서 표현했잖아요? 그게 진심이에요.”

    ―지난 4월10일에는 청와대 측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연락받고 축하 말씀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말을 하셨는데, 김대통령에 대한 그간의 비판적인 태도와는 좀 다른 느낌이군요?

    “내가 그 쪽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데, 황원탁 안보수석이 오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파나마 대사로 임명했던 사람이지요. 유능한 사람이에요. 특히 어학에 능한데, 육군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 시절에 판문점 대표로 임명했거든. 그 사람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안보문제에 대해서 말할 게 있다고 해서 오라고 했어요. 그 일(남북정상회담) 때문인지 짐작했지요.”

    “이번 회담은 94년 ‘연기’의 연장선”

    ―재임 시절에 정상회담이 합의됐다가 북한측 사정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지요. 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다고 했다가 보름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지요. 그때 내가 ‘아쉽다’고 표현했어요. 그게 정부의 공식 논평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논평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통령이 논평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며칠 뒤에 김용순이가 그 쪽의 유고로 정상회담을 연기한다는 통지문을 보냈거든. 그러니까 ‘연속성이 있는 거다, (남북정상회담은)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번에 성사되어서) 축하한다’ 그렇게 말한 거예요.

    물론 소소하게 얘기할 건 많았지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왜 하필이면 선거 때에 발표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는 방식도 나와는 전혀 다르거든. 하지만 그런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내가 지금 재임 5년간의 회고록을 쓰고 있는데, 거기서도 남북 정상회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질 겁니다.”

    ―그렇지만 야당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특급 카드가 아니냐고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전임 대통령이 뜻밖에 축하한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놀라워 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남북정상회담)는 앞에서도 잠시 얘기했지만 내가 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잘못됐다’, 말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반대하더라도 이건 좀 다른 문제이지요. 이것은(남북정상회담은)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계승하는 일인데, 무작정 잘못됐다고만 할 수 없죠. 지엽적으로 잘못한 점도 있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컨대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자신의 재임 시절에 성사됐다가 북측 사정 때문에 ‘연기됐던’ 게 이제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축하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축하와는 상관없이 김 전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여전히 악감정과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대화 중간중간에 여러 차례 분명히 확인됐다. ‘대통령’ 호칭을 붙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이따금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쓰기도 했다(이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말하는 부분은 문장을 최소한만 다듬는 식으로 정리했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김 전대통령의 지나친 표현은 적절하게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전쟁은 절대 안된다”

    ―94년 당시의 정상회담 얘기좀 자세히 해주시지요.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경험담 아닙니까?

    “취임 1주년인가 됐을 때 내가 공식적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요. 베를린에 가서 그렇게 말했고. 김대중이 말한 내용도 비슷해요. 그런데 그 때는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었어요. 당시 미국이 동해에 항공모함과 전투함을 갖다 놓고서 이북을 폭격하고 함포를 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동해안에 와 있을 때인데, 내가 클린턴에게 강력하게 반대한 거예요. 너희 국민이 죽는 게 아니니까 그러느냐고.

    그 때 나는 북한이 휴전선에 좋은 무기를 갖다 놓고 있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주도까지 날아가는 포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1000만명이 죽을지 몇백만명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미국이 전쟁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레이니 미국 대사를 만났어요. 그 때 기록은 없는데, 대사를 부르는 건 웬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좀처럼 없는 일이에요. 내가 개별적으로 만난 대사는 미국, 일본, 중국 대사 정도였어요. 내가 레이니를 들어오라고 한 것은, 레이니가 다음 날 오후 4시에 기자회견을 하는데, 대사관 가족 및 군인들을 전부 철수시킨다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보고 때문이었어요. 그건 미국이 전쟁을 개시하기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이예요.

    안보수석에게서 그 사람이 다음 날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서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전쟁은 절대 안된다. 우리 65만 군인중 단 한 사람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한국 땅을 빌려서 폭격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는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냐. 북한 사람들도 우리 동포인데. 또 남한 사람들은 죽지 않겠느냐. 북한이 가만 있느냐’ 이러면서 내가 강력하게 반대한 거예요.

    그날 저녁에는 클린턴에게 전화를 했어요. 32분 동안 전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용은 레이니에게 한 것과 똑같아요.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나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때는 일반 전화로 전화를 했어요. 아주 급박하게 연락을 한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 측에서는 전쟁 일보 직전이던 그 당시 카터를 만나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전쟁 위기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설득한 게 효과가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장이니까. 전적으로 거짓말을 많이 해요. 카터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김대중 대통령)의 그런 얘기는 믿을 것 없어요.

    어떻든간에 그 일이 계기가 돼서 한미 정상간에 핫라인도 놓여졌어요. 클린턴 얘기가 ‘앞으론 정상끼리 언제나 통화가 가능하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한 일은 없지만 한국의 대통령 관저에 전화를 설치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더라고. 그래서 ‘좋다’고 했지. 이 전화는 도청불가능한 전화입니다. 모든 전화는 도청이 된다고 하는데, 이 전화는 국내에서든 미국에서든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비밀전화입니다. 그래서 사흘도 안돼서 전화 놓으러 사람이 왔어요.

    지금도 그때 설치한 전화가 청와대에 있는데, 그때 클린턴과 약속된 게 ‘내가 필요해서 클린턴에게 전화하면 언제든지 받는다’는 거였어요. 회의 중이든 잠자리에든 받는다, 그리고 자기가 전화했을 때도 밤중이라도 받아달라, 이렇게 약속했어요. 아마 역대 대통령 가운데 내가 미국 대통령과 가장 많이 전화했을 거요. 필요하면 수시로 하는 거지. 클린턴은 문제가 생겼을 때 나에게 전화하면서 미안하니까 ‘김영삼 대통령 목소리를 듣는 게 인생의 낙’이라고 하더라고.”

    잠시 샛길로 빠졌다 싶었던 김 전대통령의 94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얘기는 카터 대목에 이르러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판인데 카터가 여기에 오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카터는 내가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어떤 경우든 야당 당수를 만난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한국을 방문해서는, 국회에 임시 사무실을 만들어 나를 만났어요. 박정희가 심하게 반대를 했는데도 나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대통령을 그만둔 뒤에는 내가 애틀란타 사무실에 방문한 일도 있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북에 가겠다는 연락을 해왔어요. 그러면서 이 쪽으로 오겠다고 해요. 부인과 함께 와서 청와대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어요. 그 때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면 안된다는 이야기도 하고, 여러가지 얘기를 나눴어요. 이 사람이 (북한에) 가서 실제로 그렇게 말했어요.

    카터가 방북 후에 다시 한국에 들러서 나를 만났으면 한다고 하길래 점심을 같이 했어요. 이것저것 얘기를 하는데, 북한에 갔을 때 예정에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김일성 주석 부부와 자기 부부가 대동강 뱃놀이를 한두시간 했다는 겁니다. 배 위에서 얘기하는 가운데 김일성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하고 대담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더니 ‘김영삼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얘기가 됐다, 이래요. 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건없이 만나겠다’고 했어요. 저 쪽에서 만나자고 제의해왔는데, 나도 오래 전부터 만날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만나자고 한 거예요.”

    정상회담과 관련, 김 전대통령은 ‘건강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계기가 될 뻔했던 94년 정상회담 자체가 미완으로 끝난 데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는 대목이다.

    “카터와 점심을 먹으면서 김일성의 건강이 어떻더냐고 물으니까 ‘좋다’고 그래요. 카터와의 점심에는 우리 쪽에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과 한승주 외무장관이 자리를 같이 했는데, 식사 후에 우리 셋이 앉았을 때 우리 생각은 카터와 달랐어요. 카터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날 카터를 만나고나서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발표를 한 거예요. 내가 조건없이 응했다, 이게 한국신문 및 외신을 다 차지했어요. 지금은 김대중씨가 만난다, 만난다, 언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니까 만날 것이라고들 보지만, 그 때는 그럴 만한 때가 아니거든. 그 때는 상황이 전쟁 일보 직전이었는데, 국민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준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발표하고 나서 (북한측에) 공식 통지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영덕 국무총리 이름으로 강성산 정무원 총리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냈어요. 좋다, 그러면 실무접촉을 하자고. 그래서 저 쪽에서 김용순, 우리 쪽에서 이홍구 통일부총리가 판문점에서 만나서 열너덧 시간 회의를 했어요.

    이홍구 부총리가 합의를 하러 갈 때 내가 이런저런 지시를 했어요. 당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폐쇄회로로 회담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으니까. 회담하는 걸 보니까 내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더라고요.”

    “김일성과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당시 실무접촉팀에 내린 지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중요한 내용은 장소 문제입니다. 내가 이홍구 부총리한테 그랬어요. ‘회담에 나가면 처음에는 서울에서 하자고 하라. 그러나 이것 때문에 회담이 깨지게 하지는 말아라. 서울을 요구하다가 저 쪽에서 평양을 주장하면 양보하라…’

    또 하나 양보하라고 한 것 중에 ‘평양에서 1차로 (정상회담을) 하면 2차는 서울에서 하자’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요구하면 북측이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김일성의 건강이 절대 서울에 올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집하지 말고, (그 부분은 나와 김일성) 우리 두 사람에게 넘겨라…. 이번에 50년 만에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으니 2차 회담 시비로 회담을 깨지 말고, 그것은 두 사람에게 맡긴다는 합의를 보라’고 했고, 그대로 됐어요.

    그 후에 세부적인 경호문제까지 합의를 봤어요. 양쪽 경호원 수까지 합의가 이루어졌어요. 회담 장소에는 우리 경호원이 두 사람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뭐든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저 쪽에서 술술술 OK가 나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인원인데, 수행원 100명, 기자단 80명으로 해서 모든 합의가 됐어요. 언제, 어떻게 가는 것까지 얘기가 다 됐어요. 평양은 가까우니까 자동차로 간다는 것까지 합의가 됐어요.

    날짜만 기다리고 있을 때 통일원, 안기부, 외무부, 청와대 안보수석실이 모여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과연 어떤 얘기를 하느냐’ 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어요. 내가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해봤지만 준비해간 그대로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 입에 달려 있으니까 내 임의대로 하는데, 내가 대통령으로서 사전에 정해진 대로 딱 맞춰서 하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 다른 얘기도 해야 하는 거예요. 전부 그렇게들 해왔으니까. 그래서 내가 당시 혼자서 많이 준비하면서 노트에 기록을 해놓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노트가 완결된 건 아니지요. 왜 그런고 하니 정상회담까지는 아직 보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판단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미완이었기는 하지만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 제기하려 했던 주요 내용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우선 전쟁을 예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지요. 그래서 클린턴과 핫라인을 설치한 것처럼 김일성 주석과도 핫라인을 설치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정상간의 핫라인은 북한과는 없던 일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음으로 1000만 이산가족 상봉문제입니다. 저 쪽에서는 안 하려고 해요. 지금 일본과도 (북송된 일본인 처 문제를 의미하는 듯) 잘 안되고 있잖아요?”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 호칭 같은 것은 어떻게 할지 사전에 협의를 했습니까?

    “협의보다는 나 스스로 생각한 게 ‘김일성 주석’이나 ‘김주석’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건 아니에요”

    ―처음 만나면 김일성 주석의 어깨 위에 툭 가볍게 손을 얹으면서 친근감을 표시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김일성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콘티를 짰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습니까?

    “분단 이래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나는 거니까 친근하게 대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내가 걱정한 것은, 과연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몇 시간 얘기를 했을 때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거든. ‘이 사람이 쇼크를 받거나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내가 걱정한 대로 돼버렸어요. 당시 나는 김일성의 건강이 아주 나쁘다고 생각했었거든”

    김일성 만나면 ‘전쟁 책임’ 얘기했을 것

    ―김일성을 만나면 인간적으로 꼭 듣고 싶었던 얘기나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선 남북간에 전쟁을 했던 사람이니까, 남북 간에 민족의 참사,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얘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겠지요. 이산가족의 아픔이나, 이런 것도 얘기했겠지. 물론 김일성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이박사 시절에 국내에는 KNA이라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다녔는데 강릉에서 서울에 올 때 몇 번인가 이북이 납치해갔어요. 그 승무원들이 상당히 미인들이었거든. 나도 부산에 갈 때 그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자꾸 납치해다가 강제로 이북 사람들과 결혼을 시켰어요. 아나운서도 시키고, 대남방송도 시키고…. 이렇게 강제로 납치해간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건 절대로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94년 당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한반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왔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양쪽의 평화를 위해서는 정상들끼리 대화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정상간의 만남 자체로 대단히 큰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봤어요. 이북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상당히 변했을 거라고 봐요. 내가 그 때 하루 온종일 생각했던 것이 그거였어요.

    김일성과 핵을 갖지 않는다는 원칙을 합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이산가족 문제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때 생각한 것 중에는 이산가족의 만남, 편지 교환 등을 자유롭게 하고, 최소한 가족끼리 자유롭게 편지 왕래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어요. 그때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면 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됐으리라고 봐요. 카터 전대통령이 나한테 얘기하기를, 김일성이 나를 만나는 데 대해서 굉장히 의욕적이더라는 겁니다. 나도 깜짝 놀랐어요. 그 때 사전에 (남북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94년 당시의 정상회담 배경과 지금의 정상회담 배경이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요새는 경제협력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것은 2차적인 문제였어요. 왜냐하면 그 때는 만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김대중씨가 먼저 만나자고 했으니까 상황이 조금 다르지요. 김일성은 50년 동안 집권했고 6·25전쟁도 일으켰던 사람이지만 김정일은 그 아들이고…. 김일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감각이 김정일과는 다르지요. 나부터 다른데요.

    과연 김일성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저 쪽에서 요구해와서 모처럼 평양에 가서 만나는 건데, 딱 부러지게 내용을 미리 확정하는 것은 무리 아닙니까? 필요에 따라서 김주석과 한번 더 만난다, 이런 것도 있고 해서 처음부터 일정을 그렇게 (넉넉하게) 잡아달라고 했고, 저 쪽에서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3박하는 것으로 해놨다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김일성, 건강 나쁘다는 것 알았다”

    ―당시 북한과 공식 접촉한 자료가 이번에 많이 참고가 되겠군요. 당시 양측이 준비회담을 한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그것은 비밀사항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아요. 다만 판문점에서 공식 접촉한 내용은 회의록이 있고 녹음테이프도 있습니다. 그 때 이홍구 부총리가 혼자 발언한 거예요. 이홍구 부총리는 모든 것을 나와 의논했고, 항상 연락이 됐어요. 문제가 제기되면 회의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보냈거든요. ‘이 문제는 싸우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이죠. 수없이 그랬어요. 오죽했으면 북측 김용순과 13시간이나 회의를 했겠어요? 그때 상황은 전쟁 일보 전 상황이니까 하나하나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국가원수가 정상회담을 하러 다른 나라에 가면 국립묘지도 참배하고 그러잖습니까? 평양에 가면 애국열사능을 참배한다든지, 아니면 주체탑을 참배한다든지, 그런 북측 요구는 없었습니까?

    “협의과정에서 그런 건 일체 없었어요. 그보다도 김주석이 쓰러질 때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김주석은 나를 만나는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해서 죽은 거예요. 그때 나는 김일성이 서울에는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건강 때문이고, 둘째는 안전문제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 전쟁을 일으켜서 서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과연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겠느냐, 이런 것도 있고,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것으로 봤어요. 그런 사람들이 김일성이를 환영한다고 나올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북한에) 가는 이상 김일성 주석도 당연히 서울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김일성의 남한 방문은 그 사람의 건강문제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봤어요.”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것을 놓고 우리 내부에서도 대응방안을 놓고 논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회담 파트너의 돌연한 사망소식에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글쎄, 참 희한한 일이에요. 여성단체 책임자들을 청와대에 불러다가 12시 정각에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3분 정도 됐는데 김석우 의전수석이 쪽지를 전하는 겁니다. 보니까 ‘12시 평양방송에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써놨어요. 내가 그걸 보고 ‘여러분들도 아시지만 2주 후에 김일성 주석과 평양에서 회담을 하기로 돼 있는데, 죽었다고 보도됐답니다. 민족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참 아쉽게 생각합니다’라고 했어요.

    그 때 안기부장,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통일부총리가 다른 곳에서 회의를 하다가 그 일 때문에 급하게 왔어요. 그 중 ‘정부가 뭔가 코멘트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코멘트는 필요없다. 대통령이 코멘트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쉽다고 하는 것으로 끝내라’고 했어요. 김일성이 죽고 나서 내가 조문을 갔어야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며칠 후에 김용순에게서 (정상회담을) 무기 연기한다는 통지가 온 겁니다. 폐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기’해둔 거예요. 김정일은 여태까지 유훈(遺訓)통치를 해온 것 아닙니까? 이번 정상회담도 그 유훈에 따라서 한다고 봐야지요.”

    ―이번 정상회담이 이른바 햇볕정책의 성과라는 평가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북한에서 적극적으로 나오게 된 것에는 뭔가 다른 배경이 있다고 보십니까?

    “김대중씨가 만나자고 계속 사람을 보내고, 그렇게 해온 것 아닙니까? 그 때에도 특사교환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바다 발언이 나오는 바람에 비밀접촉을 그만두었지만, 여러 갈래로 대화를 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 장치혁 회장이 북한에 직접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북한에 다녀 오면 내가 직접 보고를 받았어요. (북한에 대해서는) 세계 여러 나라에 정보망이 있어요. 미국이 많이 갖고 있고, 중국이 갖고 있고, 특히 독일 대사관에 북한 정보가 많아요. 이스라엘 정보망도 대단합니다.”

    ―그런 다양한 접촉이 있었군요. 그런데 방금 질문한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참 어려운 입장에 있거든요. 김일성 시절에도 어려웠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쁘다고 봅니다. 내가 여러 경로로 보고를 받아보면 전기불이(천장의 전등을 가리키며) 이렇게 켜져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만큼 전기사정이 나쁩니다. 내가 재임때 케도(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차원에서 우리 기술자들이 많이 가 있는데, 전기가 계속 나가버린다는 거예요. 이북이 얼마나 가난하냐 하면 전화가 되는 데가 거기 뿐이라는 겁니다.

    또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북 사람들을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에 가서 보니까 이 사람들이 일을 잘 안하더라는 거예요. 배가 고파서 일을 못한다는 거예요. 식당에 칸막이가 돼 있어서 이 쪽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저쪽은 이북 사람들이 먹는 곳인데, 저 쪽이 너무나 못 먹고 지내는 거예요. 그래서 한전에서 이북 노동자들에게 점심을 해줬습니다. 한 끼를 해주는데, 겁나게 먹더라네요. 그렇게 한끼씩 주고부터 일을 굉장히 잘하더라는 겁니다.”

    ―정상회담이 성사된 게 햇볕정책 또는 정부의 대북한 포용정책의 효과라기보다는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 덕분이라는 얘기시군요. 그러나 배경이야 어쨌든 이번 정상회담이 앞으로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경우) 체제가 무너진다고 보기 때문에 그건 못하고, 한국·미국·일본에 손을 벌리는 일만 계속할 것으로 봐야지요. 일본의 최고 목표가 금년내로 북한과 수교하는 겁니다. 고노외상이 신년 초에 기자회견하는 것을 NHK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2주일 전인가 북·일 수교회담이 결렬됐거든요. (북한이) 미국과 하고 있는 것, 일본과 하고 있는 것, 한국과 하고 있는 것이 다 관련된다고 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주적(主敵)을 북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우리 군대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내가 북한에 대해서 100% 안다고 하면 지나친 이야기가 되겠고 남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셈인데, 내가 야당 총재이던 89년 모스크바에서 허담을 만났을 때 허담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을 우리 국민들이 다 잊었어요. 그때 허담이 얘기하는 요점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 나에게 무조건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고 최고의 환영을 할 것이다, ‘비행기 타고 평양으로 바로 가자, 두 분이 만나면 얘기가 참 잘 되실 겁니다’ 이러는 겁니다.

    또 하나는 미군철수, 세 번째는 국가보안법 폐지, 이렇게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점인데, 물론 내가 다 반대한 거지요. 나도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싶다, 그렇지만 내가 소련에 온 거지 이북에 가려고 온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건 안된다, 이렇게 말해도 계속해서 미군 철수, 보안법 폐지 얘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건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것 아니냐, 두 가지 다 절대로 안된다’ 두 시간 동안 그것만 갖고 씨름했어요.

    마지막에는 내가 ‘이야기 다 했으니 헤어지자’고 하면서 포도주를 한 잔씩 먹었어요. 그랬더니 허담이 ‘만나기 어려운 김영삼 총재를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져서야 되겠습니까. 둘이서만 잠시 만나시죠’ 이러더란 말이에요. 내가 순간적으로 가만 생각해보니까 저 쪽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허담 서기, 우리가 할 얘기 실컷 했지 않느냐.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평양방문 하자는데 나는 안된다고 했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어요. 만일 그 때 둘이서 별도로 만났더라면 무슨 이야기를 뒤집어 씌웠을지 몰라요.

    이번에도 북한이 두 가지 중 하나는 제의하지 않겠느냐고 볼 수 있는데, 미군 철수나 국가보안법 폐지 모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또, 이건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예요. 서로 연계돼 있어요. 미군이 철수하면 보안법은 있으나 마나이고, 보안법을 폐지하면 미군이 여기에 있지를 못해요. 나가라고 요구하면 결국 나가야 해요. 그러면 적화통일 되는 거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이번에 북한이 제의할 게 분명해요. 보안법이 생기고, 미군이 들어오고 나서 김일성, 김정일의 주장 중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미군철수와 보안법 폐지예요. 다른 것들은 다 변해요. ‘군사정권 도둑놈들과 다시는 안 만난다’고 했다가 뒤로는 만나고 하는데, 이것만은 절대 안 변해요.”

    ―94년 당시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사전에 이야기가 없었지요. 조건 없이 만난다는 거였어요.”

    ―이번에 예비 회담에서 그것도 의제로 나올까요?

    “일단은 피해 가고, 직접 만나서는 100% 제기할 겁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북한의 정책 중 변하지 않은 게 그 두 가지예요.”

    ―그 두 가지가 김대중 대통령이 절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되는 마지노선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그렇게 봐요. 김대통령이 보안법에 대해서 이런저런 소리를 하지만,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들어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무라야마 총리가 나한테 혼났지”

    ―앞으로 당국 차원이든 민간차원이든 경협 물꼬가 트인다든지 북일 수교가 이루어진다면 사람·상품·자본의 왕래가 상당히 있을 텐데, 이런 일들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개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요. 미국과의 관계도 그렇고, 나는 대통령 시절에 김대중씨와는 그런 점에서 정책이 달랐어요. 북한이 미국하고 수교하면 절대 안된다, 일본과도 수교하면 절대 안된다는 거였습니다.

    일본이 이상한 짓을 많이 했거든요. 무라야마 총리가 나한테 혼났습니다. 우리의 38선은 다 너희 때문에 생긴 거다, 우리가 식민지가 아니었더라면 어째서 이런 게 그어지노, 우리가 독립국가 같으면 어떻게 연합군이 그런 선을 긋노, 우리가 분단돼 50년간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너희가 북한과 수교해서 남북한이 영원히 분단되도록 큰 역할을 하겠다는 거냐, 그것은 우리 국민들의 큰 꿈인 통일을 영원히 막는 일이니까 안된다, 이렇게 반대를 했어요.

    내가 대통령일 때는 미국도 굉장히 어려워했어요. 북한과 비밀 접촉할 때는 사전은 물론이고 접촉 과정과 사후에도 나한테 알려야 된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이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었어요.”

    ―이번 회담이 성사되기 전부터 북한 특수(特需)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아이고, 없는 사람한테 특수가 있을 게 뭐 있어요.”

    ―야당에서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뒷돈을 주지 않았느냐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북한을 개방으로 끌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물자와 돈의 제공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인도적 차원에서나 통일비용 차원에서나 말이죠.

    “정주영 씨가 나한테 와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김대중 씨가 이야기한 것도 아니지만, 현대 정주영 씨가 그동안 제일 큰 역할을 해왔다고 봐요. 북한에 갔다 오고 일본에도 갔다 온 것이 전부 그거라고. 그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봐요.”

    ―돈과 물자를 상당한 규모로 지원할 것 같은데 그건 불가피한 겁니까?

    “그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북한을 도와줘야 하지만 우리 세금하고 관계 있는 것 아니요. 지나치면 문제가 되죠.”

    ―적절한 규모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내가 재임 때 북한에 쌀을 5만t 줘 본 일이 있는데 공산주의는 주면 줄수록 욕을 하더라고. 내 경험인데요, 그때 자기네들이 죽겠다고 해서 이석채 경제기획원 차관이 전금철과 평양에서 회담을 했어요. 내가 보통 차관에게서 보고를 받지는 않는데, 이것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이 쪽에서 파견할 사람 전체를 만나고, 갔다와서도 만났어요. 이석채 차관에게서 그 내용을 보고받았는데 수첩에 가득 적어왔더라고요. (북측이) 살려달라고 하면서 반 죽었더랍니다.

    그래서 그때 15만t을 주기로 해서 1차로 5만t을 주면서 성의를 다했어요. 북한이 나쁜 쌀을 줬다고 트집잡을 수 있으니까 햅쌀로 전국에서 방아를 찧어 좋은 쌀을 보내도록 했어요. 부산 목포 군산 속초 등 벼를 바닷가에서만 보낼 수 있잖아요. 전국의 정미소가 돌아가면서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난데없이 인공기 게양사건이 생기고, 우리 배와 사람들을 가두고 그랬잖아요. 죽는다고 해서 쌀을 제공해줬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그게 바로 북한이에요. 북한은 앞으로도 그렇다고 봐야 돼요.”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야 한다고 하는데, 공산주의는 정말 두드려보면서 가야 합니다. 내가 재임 때 세계 사회주의 정당들의 대표를 만난 일이 있어요. 옐친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소련 공산당 당수도 오고,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세계적으로 모였는데 내가 같이 점심을 먹은 일이 있어요. 그런데 소련공산당 책임자 말이 재미있어요. 공산주의자는 주면 줄수록 다 받아먹고 욕은 더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할 겁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김일성 주석은 자기가 만나자고 한 것 아닙니까? 김일성이 결정을 내려서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나와서 정상회담 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그것과 이번 일(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은 조금 다르죠. 김정일이 만나자고 한 게 아니라 여기서 김정일이를 계속 만나자고 한 것이거든요. 뭐하러 만나자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계속 만나자고 하니까 만나는 거예요. 그때(재임 때) 하고는 성질이 다르죠.”

    “정상회담, 김정일이 DJ 봐준 것”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북한으로서도 필요가 있으니까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그런 결정을 한 것도 다른 누구와 하는 것보다는 김대중이 우리하고 이야기가 된다, 그 이면은 짐작에 맡기고, 이 때에 하는 것이 좋다, 선거 전에 하는 것이 김대중을 도와주는 것도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김대중씨가 자꾸 빨리 하자고 그랬고, 김정일도 맞춰준 거예요. 효과가 어느 쪽이 제일 있겠느냐, 해가지고 맞춰준 거예요. 선거 사흘 전이 제일 좋겠다 해서. 0.001%만 선거에 영향을 주어도 (여당이) 이기는 거니까요. 이 쪽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을 거고, 뻔히 짐작하죠. 야당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어요. 김대중씨가 선거 끝나고 나서 내년쯤 하자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건 야당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야당에서는 정상회담을 위한 이면 접촉에 많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실제 정상회담 같은 것을 위해서는 비밀 접촉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대통령을 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한처럼 특수한 지역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하고 접촉하는 걸 공개하듯이 그렇게 접촉을 공개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가 대통령하던 시절만 보더라도 비밀접촉을 했어요. 그런데 ‘불바다 발언’이 나고 나서 사실상 걷어치우게 됐는데요, 그렇게 해도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가 있는 겁니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까?

    “김일성은 독재자로서 오랜동안 북한을 다스렸지만 세계 각국의 지도자를 많이 만나기도 한 사람이지요. 중국의 모택동, 소련의 스탈린, 흐루시초프와도 만났고 가깝게 지낸 사람이에요. 한국 전쟁도 스탈린과 상의한 것 아닙니까? 국제적인 감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김정일은 사실상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야당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헝가리 대사가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북한에 3년 가 있는 동안 김정일을 계속 만나려고 했지만 결국 못 만났다고 합니다. 면담을 계속 요구해도 김정일은 노동자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지방에 가있기 때문에 바쁘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동맹국 대사가 주재국 지도자를 한 번도 못 만나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대요. 끝내 안 만나주고 퇴임하기 며칠 전에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선물만 잔뜩 가지고 왔다고 해요. 김정일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깊게 얘기하지 않겠어요, 나도 아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러나 비밀 얘기를 하면 안되니까 그만 하겠습니다. 김정일이 어느 정도 선인지 알아요.”

    ―(김정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입니까?

    “그건 김대중씨 말이고요. 그렇게 표현하기는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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