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샛길로 빠졌다 싶었던 김 전대통령의 94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얘기는 카터 대목에 이르러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판인데 카터가 여기에 오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카터는 내가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어떤 경우든 야당 당수를 만난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한국을 방문해서는, 국회에 임시 사무실을 만들어 나를 만났어요. 박정희가 심하게 반대를 했는데도 나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대통령을 그만둔 뒤에는 내가 애틀란타 사무실에 방문한 일도 있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북에 가겠다는 연락을 해왔어요. 그러면서 이 쪽으로 오겠다고 해요. 부인과 함께 와서 청와대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어요. 그 때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면 안된다는 이야기도 하고, 여러가지 얘기를 나눴어요. 이 사람이 (북한에) 가서 실제로 그렇게 말했어요.
카터가 방북 후에 다시 한국에 들러서 나를 만났으면 한다고 하길래 점심을 같이 했어요. 이것저것 얘기를 하는데, 북한에 갔을 때 예정에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김일성 주석 부부와 자기 부부가 대동강 뱃놀이를 한두시간 했다는 겁니다. 배 위에서 얘기하는 가운데 김일성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하고 대담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더니 ‘김영삼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얘기가 됐다, 이래요. 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건없이 만나겠다’고 했어요. 저 쪽에서 만나자고 제의해왔는데, 나도 오래 전부터 만날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만나자고 한 거예요.”
정상회담과 관련, 김 전대통령은 ‘건강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계기가 될 뻔했던 94년 정상회담 자체가 미완으로 끝난 데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는 대목이다.
“카터와 점심을 먹으면서 김일성의 건강이 어떻더냐고 물으니까 ‘좋다’고 그래요. 카터와의 점심에는 우리 쪽에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과 한승주 외무장관이 자리를 같이 했는데, 식사 후에 우리 셋이 앉았을 때 우리 생각은 카터와 달랐어요. 카터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날 카터를 만나고나서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발표를 한 거예요. 내가 조건없이 응했다, 이게 한국신문 및 외신을 다 차지했어요. 지금은 김대중씨가 만난다, 만난다, 언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니까 만날 것이라고들 보지만, 그 때는 그럴 만한 때가 아니거든. 그 때는 상황이 전쟁 일보 직전이었는데, 국민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준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발표하고 나서 (북한측에) 공식 통지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영덕 국무총리 이름으로 강성산 정무원 총리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냈어요. 좋다, 그러면 실무접촉을 하자고. 그래서 저 쪽에서 김용순, 우리 쪽에서 이홍구 통일부총리가 판문점에서 만나서 열너덧 시간 회의를 했어요.
이홍구 부총리가 합의를 하러 갈 때 내가 이런저런 지시를 했어요. 당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폐쇄회로로 회담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으니까. 회담하는 걸 보니까 내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더라고요.”
“김일성과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당시 실무접촉팀에 내린 지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중요한 내용은 장소 문제입니다. 내가 이홍구 부총리한테 그랬어요. ‘회담에 나가면 처음에는 서울에서 하자고 하라. 그러나 이것 때문에 회담이 깨지게 하지는 말아라. 서울을 요구하다가 저 쪽에서 평양을 주장하면 양보하라…’
또 하나 양보하라고 한 것 중에 ‘평양에서 1차로 (정상회담을) 하면 2차는 서울에서 하자’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요구하면 북측이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김일성의 건강이 절대 서울에 올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집하지 말고, (그 부분은 나와 김일성) 우리 두 사람에게 넘겨라…. 이번에 50년 만에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으니 2차 회담 시비로 회담을 깨지 말고, 그것은 두 사람에게 맡긴다는 합의를 보라’고 했고, 그대로 됐어요.
그 후에 세부적인 경호문제까지 합의를 봤어요. 양쪽 경호원 수까지 합의가 이루어졌어요. 회담 장소에는 우리 경호원이 두 사람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뭐든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저 쪽에서 술술술 OK가 나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인원인데, 수행원 100명, 기자단 80명으로 해서 모든 합의가 됐어요. 언제, 어떻게 가는 것까지 얘기가 다 됐어요. 평양은 가까우니까 자동차로 간다는 것까지 합의가 됐어요.
날짜만 기다리고 있을 때 통일원, 안기부, 외무부, 청와대 안보수석실이 모여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과연 어떤 얘기를 하느냐’ 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어요. 내가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해봤지만 준비해간 그대로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 입에 달려 있으니까 내 임의대로 하는데, 내가 대통령으로서 사전에 정해진 대로 딱 맞춰서 하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 다른 얘기도 해야 하는 거예요. 전부 그렇게들 해왔으니까. 그래서 내가 당시 혼자서 많이 준비하면서 노트에 기록을 해놓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노트가 완결된 건 아니지요. 왜 그런고 하니 정상회담까지는 아직 보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판단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미완이었기는 하지만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 제기하려 했던 주요 내용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우선 전쟁을 예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지요. 그래서 클린턴과 핫라인을 설치한 것처럼 김일성 주석과도 핫라인을 설치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정상간의 핫라인은 북한과는 없던 일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음으로 1000만 이산가족 상봉문제입니다. 저 쪽에서는 안 하려고 해요. 지금 일본과도 (북송된 일본인 처 문제를 의미하는 듯) 잘 안되고 있잖아요?”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 호칭 같은 것은 어떻게 할지 사전에 협의를 했습니까?
“협의보다는 나 스스로 생각한 게 ‘김일성 주석’이나 ‘김주석’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건 아니에요”
―처음 만나면 김일성 주석의 어깨 위에 툭 가볍게 손을 얹으면서 친근감을 표시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김일성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콘티를 짰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습니까?
“분단 이래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나는 거니까 친근하게 대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내가 걱정한 것은, 과연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몇 시간 얘기를 했을 때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거든. ‘이 사람이 쇼크를 받거나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내가 걱정한 대로 돼버렸어요. 당시 나는 김일성의 건강이 아주 나쁘다고 생각했었거든”
김일성 만나면 ‘전쟁 책임’ 얘기했을 것
―김일성을 만나면 인간적으로 꼭 듣고 싶었던 얘기나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선 남북간에 전쟁을 했던 사람이니까, 남북 간에 민족의 참사,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얘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겠지요. 이산가족의 아픔이나, 이런 것도 얘기했겠지. 물론 김일성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이박사 시절에 국내에는 KNA이라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다녔는데 강릉에서 서울에 올 때 몇 번인가 이북이 납치해갔어요. 그 승무원들이 상당히 미인들이었거든. 나도 부산에 갈 때 그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자꾸 납치해다가 강제로 이북 사람들과 결혼을 시켰어요. 아나운서도 시키고, 대남방송도 시키고…. 이렇게 강제로 납치해간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건 절대로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94년 당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한반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왔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양쪽의 평화를 위해서는 정상들끼리 대화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정상간의 만남 자체로 대단히 큰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봤어요. 이북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상당히 변했을 거라고 봐요. 내가 그 때 하루 온종일 생각했던 것이 그거였어요.
김일성과 핵을 갖지 않는다는 원칙을 합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이산가족 문제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때 생각한 것 중에는 이산가족의 만남, 편지 교환 등을 자유롭게 하고, 최소한 가족끼리 자유롭게 편지 왕래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어요. 그때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면 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됐으리라고 봐요. 카터 전대통령이 나한테 얘기하기를, 김일성이 나를 만나는 데 대해서 굉장히 의욕적이더라는 겁니다. 나도 깜짝 놀랐어요. 그 때 사전에 (남북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94년 당시의 정상회담 배경과 지금의 정상회담 배경이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요새는 경제협력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것은 2차적인 문제였어요. 왜냐하면 그 때는 만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김대중씨가 먼저 만나자고 했으니까 상황이 조금 다르지요. 김일성은 50년 동안 집권했고 6·25전쟁도 일으켰던 사람이지만 김정일은 그 아들이고…. 김일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감각이 김정일과는 다르지요. 나부터 다른데요.
과연 김일성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저 쪽에서 요구해와서 모처럼 평양에 가서 만나는 건데, 딱 부러지게 내용을 미리 확정하는 것은 무리 아닙니까? 필요에 따라서 김주석과 한번 더 만난다, 이런 것도 있고 해서 처음부터 일정을 그렇게 (넉넉하게) 잡아달라고 했고, 저 쪽에서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3박하는 것으로 해놨다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김일성, 건강 나쁘다는 것 알았다”
―당시 북한과 공식 접촉한 자료가 이번에 많이 참고가 되겠군요. 당시 양측이 준비회담을 한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그것은 비밀사항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아요. 다만 판문점에서 공식 접촉한 내용은 회의록이 있고 녹음테이프도 있습니다. 그 때 이홍구 부총리가 혼자 발언한 거예요. 이홍구 부총리는 모든 것을 나와 의논했고, 항상 연락이 됐어요. 문제가 제기되면 회의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보냈거든요. ‘이 문제는 싸우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이죠. 수없이 그랬어요. 오죽했으면 북측 김용순과 13시간이나 회의를 했겠어요? 그때 상황은 전쟁 일보 전 상황이니까 하나하나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국가원수가 정상회담을 하러 다른 나라에 가면 국립묘지도 참배하고 그러잖습니까? 평양에 가면 애국열사능을 참배한다든지, 아니면 주체탑을 참배한다든지, 그런 북측 요구는 없었습니까?
“협의과정에서 그런 건 일체 없었어요. 그보다도 김주석이 쓰러질 때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김주석은 나를 만나는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해서 죽은 거예요. 그때 나는 김일성이 서울에는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건강 때문이고, 둘째는 안전문제 때문이에요. 그 사람이 전쟁을 일으켜서 서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과연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겠느냐, 이런 것도 있고,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것으로 봤어요. 그런 사람들이 김일성이를 환영한다고 나올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북한에) 가는 이상 김일성 주석도 당연히 서울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김일성의 남한 방문은 그 사람의 건강문제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봤어요.”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것을 놓고 우리 내부에서도 대응방안을 놓고 논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회담 파트너의 돌연한 사망소식에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글쎄, 참 희한한 일이에요. 여성단체 책임자들을 청와대에 불러다가 12시 정각에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3분 정도 됐는데 김석우 의전수석이 쪽지를 전하는 겁니다. 보니까 ‘12시 평양방송에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써놨어요. 내가 그걸 보고 ‘여러분들도 아시지만 2주 후에 김일성 주석과 평양에서 회담을 하기로 돼 있는데, 죽었다고 보도됐답니다. 민족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참 아쉽게 생각합니다’라고 했어요.
그 때 안기부장,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통일부총리가 다른 곳에서 회의를 하다가 그 일 때문에 급하게 왔어요. 그 중 ‘정부가 뭔가 코멘트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코멘트는 필요없다. 대통령이 코멘트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쉽다고 하는 것으로 끝내라’고 했어요. 김일성이 죽고 나서 내가 조문을 갔어야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며칠 후에 김용순에게서 (정상회담을) 무기 연기한다는 통지가 온 겁니다. 폐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기’해둔 거예요. 김정일은 여태까지 유훈(遺訓)통치를 해온 것 아닙니까? 이번 정상회담도 그 유훈에 따라서 한다고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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