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하루 3만보 걸으면서 정치신인 한계 극복했다

  • 원희룡

    입력2006-10-19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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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많은 유권자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유권자들을 찾아다녔다. 만보계를 차고 다녔는데 하루 3만보를 걸은 날도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서는 악수하는 손의 느낌과 표정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향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00년 2월18일에 한나라당 양천갑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았다. 선거일인 4월13일을 56일 남겨놓고 있었다. 지역유권자는 17만 5000 명, 상대후보는 집권여당의 중진인 재선의원. 12년간 지역관리를 해온 사람이다. 지역연고나 지역활동이 없던 야당 정치신인과 12년간 지역 관리를 해온 여당 재선의원과의 대결이었다.

    난관은 공천을 받은 직후부터 찾아왔다. 공천과정에 경합했던 기존 지구당위원장이 공천에 반발한 것이다. 조직의 인수인계가 안된 것 은 물론, 당원명단도 인계받지 못했다. 기존 지구당위원장은 민국당 으로 가서 출마했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 지지표가 분산되는 사 태를 걱정했다. 전 지구당 위원장은 자신이 당선이 안되더라도 원희 룡을 떨어뜨리면 다음에는 기회가 자신에게 올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 녔다고 한다.

    공천과 지구당위원장의 반발

    한편 지역구 10개동 중 6개동의 구의원이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이 들은 공천자를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취해주 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단합시켜 적극적으로 뛰 게 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빨리 정비되어야 했다. 구의원들을 중심으 로 지구당 조직이 정비되어 갔다.

    사무국이 정비되기까지 10여일이, 갈라졌던 사람들이 모이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조직작업은 투표일 직전까지 계속됐다. 나는 공천을 받자마자 지역구로 갔다. 구의원들을 비롯한 핵심당원들 에게 지역에 뿌리내리고 당을 지켜온 분들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갈 라진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자세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했고, 선거기간 내내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선거처 럼 적극 나서주는 바람에 지구당조직이 빠른 시일내에 나름대로 정비 되어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공천받을 무렵 지역구 내에서 나의 보조인지도(경력 등을 이야기해주 고 아느냐고 물었을 때 안다고 대답하는 비율)는 15% 가량이었다. 1 0명 중 8.5명은 내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 상대방 인 현역의원의 인지도는 90%를 넘어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를 알리기 위한 시도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현행 선거법 은 선거기간(3월28일부터 4월12일까지 16일간)전 사전선거운동을 금 지하고 있다. 홍보물을 우편으로 보내거나 유권자들을 모아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물론, 지구당 개편대회를 마치고 지구당위원장이 되 기 전까지는 지구당 사무실 간판에 후보 이름도 쓰지 못하게 되어 있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람을 직접 만나 구두로 인사를 하는 정도이 고, 명함을 건네는 것도 후보자 본인 외에는 할 수 없다. 통상적인 의례의 범위를 넘어서 명함을 건네줄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통상 적인 의례 범위’의 명함교부가 어디까지냐는 해석이 모호했다.

    반면 현역의원은 의정보고서라는 명목으로 모든 유권자에게 무제한 으로 홍보물을 보낼 수 있다. 또 무제한으로 유권자들의 모임을 만 들고 1인당 3000원 이하의 범위에서 다과도 제공할 수 있게 돼 있 다. 실제로 지역구 내 모든 상가와 가정에 늘 상대후보의 의정보고서 가 배달되어 꽂혀 있었고, 심할 경우 하루 100군데서 의정보고회가 열렸다.

    정치신인과 현역의원 간 기회의 불균등. 그것은 정도가 너무 심하여 마치 농구시합을 하면서 한쪽 편은 손발을 묶어놓고 시합을 하라는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치신인에 대한 진입장벽을 과도하게 쳐놓고 현 역의원의 기득권만 보호하는 현행 선거법을 개정해서 똑같이 홍보를 할 기회를 주든지, 똑같이 못하게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손발 묶은 농구시합

    지구당 개편대회를 하기 전까지는 사무실 간판을 걸 수도 없었다. 고 민 끝에 기획팀이 “○○○입니다. 곧 만나뵙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 를 사무실 외벽에 내걸었다. 선거법상 후보자 이름을 표시할 수 없 어 선거법을 지키면서 홍보를 하기 위해 ○○○이라고 쓴 것이다. 정 책은 고사하고 이름도 알릴 수 없게 해놓은 선거법의 문제점에 대한 정치신인의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홍보효과는 만점이 었다. 많은 시민들이 호기심을 가졌고, 아이디어가 기발하다고 재미 있어 했다.

    한번은 아파트 부녀회에서 윷놀이행사를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인 사를 하고 가라고 지지자가 귀띔해주어 간 적이 있었다. 그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고 다른후보 측 시의원 등이 참석해 있었다. 나는 참석 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그중 몇 분에게 내 명함을 건네주 었다.

    그런데 내가 돌아간 직후 경찰에서 그 모임 참석자들을 찾아왔다는 소 식이 들려 왔다. 경찰은 누가 나에게 그 모임을 알려줬는지 등에 대 해 이후로 일주일도 넘게 그 모임 사람들을 조사하였다. 경찰은 명함 배포로 신고가 들어와서 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는데, 실제 조사 는 누가 그 모임을 나에게 알려주었는지를 알아내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또 자꾸 조사를 거듭해 사람들이 나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게 하려는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였다.

    급기야 경찰은 나에게도 경찰서로 출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분일초 가 금쪽같은 후보자를 몇몇 사람에게 인사하면서 명함을 주었다는 이 유로 불러서 조사를 한다? 나는 강력하게 항의했고, 다음날 경찰서장 을 만나 사과를 받았다. 어찌됐건 관권의 개입 및 편파적 행사는 여 전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3월 초에 사무국이 출범하여 3월4일 사무실 개소식을 치르면서 지구 당활동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기획팀도 급조되다 보니 시행착오 가 빈발해 차질이 생기면 응급보완을 하는 식이었다. 3월15일로 예정 된 개편대회 전까지만 지구당조직과 기획팀이 손발이 맞으면 성공이 라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시간이 걸렸다. 일을 하면서 서로 생 각이 다른 부분은 조정을 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갈등으로 삐끗거 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3월 15일 지구당개편대회에는 1200여명이 뜨거운 열기 속에 참석했 다. 지구당개편대회 때는 정당법에 의해 참석 당원들에게 식사와 차량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경찰은 우리 지구당 개편대회 후 식사한 사람들 중 즉석에서 입당원서를 쓴 사람이 있는지 찾아내기 위하여 당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조사했다.

    모 후보 측에서는 우리 당직자들 중 일부를 구속시키겠다는 등의 말 을 퍼뜨렸다. 경찰 일부가 야당에 대해 흠집을 찾으려고 너무나 열심 이었다. 또 이를 이용하려는 모후보 측의 헛소문 퍼뜨리기도 너무나 능수능란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개편대회를 마치고 지구당위원장으로서 이름을 간판에 내걸고 당원배 가운동을 전개하고 당원모임, 입당권유 활동이라는 형태로 지역구민 들을 접촉해나갔다. 정당법상 보장된 지구당위원장의 활동인 셈이다.

    선거전의 고약한 단골손님, 흑색선전

    공천을 받고 지역구 활동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나에 대한 인신 공격, 비방유인물이 노인정과 테니스장 등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 러한 유인물은 선거법상 명백한 불법이다.그러나 바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암암리에 뿌려지는 유인물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실을 설명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또 나의 이름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단계에서 그 러한 유인물이 이름을 알리는 효과는 있기 때문에 급하게 대응할 필 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적절한 시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 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날, 유인물이 뿌려진 장소와 정황을 확보하게 됐다. 누 군가가 테니스장 휴게실에 유인물을 뿌리고 간 후 곧바로 선관위에 신고를 했다. 그런데 선관위는 출동은 했지만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흐지부지해버렸다. 명백한 불법유인물이 이곳 저곳에 수시로 뿌려지 고 있는데도 수사 의지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몇 사람에게 명함 몇 장을 건네줬을 때, 그리고 지구당개편대회 식사 후 경찰이 참석자 들을 일일이 일주일 넘게 조사하면서 괴롭히던 것과 비교하면 관권의 편파적 행사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보였다.

    불법유인물 배포는 수사의지만 있으면 2~3일 이내에 잡을 수 있다. 지역구내의 모든 유권자가 그 유인물을 누가 뿌린 것인지 말하지 않 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인데도, 선거기간이 끝날 때까지 유인물 배포자 의 그림자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었다.

    선관위가 후보들의 병역, 세금, 전과를 공개하면서 흑색선전은 더 심 해졌다. 다른 후보 측은 유인물을 계속 배포할 뿐 아니라, 구전홍보 팀을 가동해서 인신공격성 헛소문을 퍼뜨렸다. 목욕탕이나 마을버 스, 은행대기석 등에서 아줌마들이 “원희룡 후보는 어떤 어떤 결함이 있는데 뽑아서 되겠느냐”는 식으로 말을 퍼뜨리는 것이다. 선거운 동기간에는 아예 유세차 스피커로 공개적으로 떠들어댔다. 병역기피 자니, 세금을 한 푼도 안 냈느니, 파출소를 때려부순 폭력전과자니 하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해댔다.

    흑색선전은 대응하기가 참 고약하다. 그 후보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흑색선전을 해댔는지 알 수도 없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유권자들은 한쪽의 흑색선전만 접하고 그에 대한 해명을 듣지 못하면 후보자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기 쉽다. 바로 이 점 을 이용해 일부 후보자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흑색선전을 해서 상대방 을 흠집내는데 골몰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지역구의 모 후보 는 선거기간 내내 흑색선전을 해댔다.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개적으로 사실을 밝히고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해 흑색선전을 하는 쪽에 비난이 쏠리게끔 해 야 했다. 만일 정면돌파에 실패해 유권자들이 의혹을 가지고 찜찜해 한다면 선거에서 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4월5일의 합동유세에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병역을 기피했다는 선전 에 대해서는 연단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가락이 절단되었던 내 오른발을 기자들과 유권자들에게 공개했다. 세금에 대해서는 검사생 활 2년 8개월과 변호사 생활 4개월의 소득에 대해 1272만원을 납부했 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파출소로 연행되어 조사받았던 사건에 대해서는 당 시 함께 조사를 받았던 현직 검사의 실명을 공개하였다. 그동안 뿌 려졌던 유인물 수거한 것을 유권자들 앞에 들이댔다. 상대후보가 유 세차로 흑색선전했던 장소와 그 내용을 지목했다. 누가 흑색선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유권자들에게 물었다.

    합동유세의 결과는 성공이라고 평가받았다. 모두 납득했을 뿐 아니 라, 내 말을 들은 일부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양 말을 벗어던졌다는 것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그 후로는 상대후보 의 흑색선전이 거의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나는 흑색선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였지만, 다른 지역구의 후보들, 특히 정치신인들의 경우 흑색선전 때문에 억울하게 패배한 경우도 적 지 않을 것이다. 선거를 혼탁한 비방전으로 몰고가는 낡은 정치의 대 표적인 악폐가 흑색선전이었다.한심한 것은 여당의 중앙당 부대변 인이 경합지역의 야당 후보들을 지목하여 마약사범이니, 파렴치범이 니 하면서 비방성명을 냈다는 것이다.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 이다. 여당이 마약사범이나 파렴치범이라고 비방성명을 냈던 그 후보 들은 대부분 당선되었다.

    선거운동은 유권자에게 지지의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다. 조직을 통한 지지자 확보나 홍보를 통한 지지자 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후보자와 유권자 간의 직접 접촉이다.공천을 받은 후 지구당이 정비되기 까지는 지역의 주요 인사들과 기존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후보를 알리 고 적극 활동을 호소했고, 선거운동기간이 다가오면서는 유권자들과 의 무차별적 접촉의 비중을 높여나갔다. 내 경우는 활동기간이 짧아 이름에 대한 인지도 자체도 낮았지만, 이름은 알더라도 직접 얼굴 접 촉이 되지 않은 많은 유권자들로부터 “얼굴도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찍어”라는 반응이 있었다. 당연한 이치다. 또한 내 경력을 아는 사람 들 가운데는 잘 나가는 모범생이었으니 인간미는 없지 않을까 하는 선입관을 가진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는 대면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했다.

    지역 순방 - 만보계로 3만보

    그래서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 28일부터 초반 1주일 가량을 대면접 촉에 집중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유권자들을 찾아다녔다. 새벽에는 야산과 공원 약수터,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역 버스정류 장, 낮에는 상가 노래교실 스포츠센터, 식사시간에는 식당, 밤에는 호프집, 일요일에는 교회 등 유권자들이 있는 곳은 샅샅이 찾아다녔 다. 만보계를 차고 다녔는데 하루에 3만 보를 걸은 날도 있었다.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악수를 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일정 기간 이 지나서는 악수하는 손의 느낌과 표정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향을 직감할 수 있게 되었다. 중심집단에서는 지역감정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주변집단에서는 완화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 었다.

    상대 후보 지지층이 강한 지역을 다닐 때에는 상대측 핵심 인물들이 “왜 내 땅에 와서 돌아다니느냐”는 식의 지극히 배타적이고 어이없 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상대편 인물들이나 사무실에 도 찾아가서 인사를 했고 상대편 운동원들에게도 일일이 악수를 청 하고 인사를 하였다. 반응이 차갑건 어떻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 정 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통합의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 는 생각이었다.

    공천 직후 사무실 마련과 유급당직자 정비, 지구당개편대회비용 등으 로 자금이 소요되었다. 이는 선거비용항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선 거비용은 우리 선거구의 경우 1억 2000만원 가량으로 책정되어 있었 는데 법정홍보물, 유세차량, 유급선거운동원 등에 소요됐다. 30대의 정치신인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규모였다. 그러나 후원회 개최와 자발적으로 활동해주는 사람들 덕에 당초의 예상을 약간 넘는 수준 에서 전체적인 과정을 치렀다. 흔히 이야기되는 ‘30당 20락’이라 는 이야기는 내 경우에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선거브로커에 대해서는 진작에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경 우에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몇 표 가지고 있 다고 하면서 거래를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으나 아예 만나지 않았다. 몇 명이 모여 있으니 식사값을 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일절 응하지 않도록 하였다.

    자금, 브로커, 유권자가 바꾸어야 할 몫

    다행히 우리 지역구는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이 높은 편이었고, 자발 적으로 뛰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브로커나 밥값을 내라는 유혹에는 거의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권자들을 접촉하고 다니다 보면 식 사값을 달라, 막걸리 값을 달라, 어떻게 빈 손으로 왔느냐, 술값을 계산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요구를 받을 때마다 “선거기간에는 금지되어 있다”고 이야기 하고 돌아섰지만, 그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후보자에게 뭔가 얻어내보자는 심리는 유권자가 바꾸어야 할 몫이고, 이러한 심리에 편승하거나 조장해온 낡은 정치풍토는 바 뀌어야 할 부분이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마음고생, 시간과 자금이 소요된다.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국 회의원들이 진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선거기간을 통해 정치개혁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욕구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그러한 기대를 안고 당선된 만큼 국민의 마음 속 소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정치를 해나가 지 않으면 곧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 선이 끝이 아니라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거듭 새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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