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죽은 목소리의 최우영씨(30세)로부터 전화 연락이 온 것은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발표한 날로부터 사흘째 되던 4월12일이었다. 그 하루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최씨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그리고 4월10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설렘과 기대에 들떠 있던 그녀였다.
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발표되자 언론 매체들은 정상회담에서 집중 논의될 의제로 북한의 도로, 항만, 전력시설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연일 크게 부각했다. 언론은 특히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전망과 이산가족들의 반응을 크게 실어 실향민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4월11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이산가족이 있으나 상당수는 세상을 뜨고 고령이기 때문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최우영씨는 87년 1월 백령도 인근 서해 해상에서 납북된 제27 동진호 선원 최종석씨의 외동딸이다. 동진호 피랍 당시 여고생이었던 최씨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최씨가 정상회담 소식을 듣고서 13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고향(북한)에 두고 온 딸을 그리워하는 비전향 장기수의 이산(離散)의 아픔을 보도하면서도 정작 납북자 가족들이 겪는 ‘강제 이산’의 아픔을 다루는 기사는 한 건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납북자 문제는 인권의 사각지대
최씨가 기자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런 데서 온 초조함 때문이었다. 최씨는 대뜸 “다른 이산가족 문제는 다들 나오는데 왜 납북자 문제와 그 가족들의 한(恨)은 (언론에) 안 나오느냐.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안타까워했다. 최씨는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와야 정부의 실무대표단이 4월말 실무협상에서 회담 의제를 설정할 때 납북자 문제도 논의될 수 있을 것 아니냐”고 했다. 기자는 최씨에게 “(납북자 문제를 취재중인) ‘신동아’에는 어차피 그 내용이 실리겠지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납북자 문제 해결을 호소하는 글을 써서 언론사에 투고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랬더니 최씨는 다음날 즉각 글을 보내왔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뻤던 ‘어부의 딸’입니다. 예전과는 세상이 달라졌기에 억울하게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납북자 가족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지난날 남북회담이 열릴 때와 다름없이 납북자 가족들은 소외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투고라도 해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내 아버지 주민등록번호는 460426-*******’라는 제목의 원고는 감성에 호소하는 짧은 글이지만 거기에는 납북자 문제의 핵심 쟁점들이 응축되어 있다.
기록상으로 6·25 전쟁 휴전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은 무려 3756명이나 된다. 그중 현재까지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미귀환 납북자 수효만도 454명이나 된다. 이들의 억류 기간은 짧게는 5년에서부터 길게는 45년이나 된다. 물론 이들의 생사 여부는 대부분 미확인 상태다. 다만 일부의 경우 드물게 당사자들의 대남 방송이나 기자회견 출연, 혹은 탈북 망명자나 자수한 공작원의 증언 등으로, 또 더러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중인 것이 밝혀져 ‘생존’이 확인되곤 했다.
납북 귀환자 상당수 ‘간첩’으로 몰리기도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등학생 시절 남파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어 이남화(以南化)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억류중인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사정이 이런 데도 미귀환 납북자 문제는 그동안 정부 당국의 무위무능(無爲無能)과 여론의 무관심 속에서 그 실태조차 파악이 안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물론 납북자 문제의 원인 제공자는 북한이지만 납북자 문제와 그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반북(反北)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곧 ‘납북=세뇌’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부독재 시절에는 ‘남파간첩’ 혹은 ‘조작간첩’ 공포에 늘 시달려온 납북자 가족들부터가 스스로 ‘쉬쉬’해 왔다. 이는 납북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납북 어부에 대한 정부 당국의 기본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당국이 국방상 기타 공익적 견지에서 설정하여 놓은 동서 양해의 어로작업할 수 있는 최북단 어로저지선 내지는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여 조업하다가 북한의 무장선에 의하여 예인 납북, 북한지역 내에 장기간 억류되어 북한의 소위 평화통일 지도원 등으로부터 공산주의의 우월성 등의 학습과 공장견학 등의 세뇌공작에 의하여 교육받으며, 그 기간중 자기들이 취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반 정보를 수차례에 걸쳐 제공하고 소위 북한의 평화통일 방안과 대한민국 내에서 지하조직 구축, 반미·반정부 사상 유포 등의 지령과 함께 다량의 금품을 받고 일정기간 후 대한민국 지역 내로 귀환한 자.”(임상현, 납북어부의 죄책, ‘검찰’ 1969년 9월호)
이것이 공안당국이 규정하고 있는 납북 어부의 개념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한국 경찰사’(내무부 치안국) ‘대공 30년사’(국군보안사령부) ‘북괴만행 40년’(한국반공교육연구원) 같은 정부측 발간자료를 토대로 집계한 ‘간첩사건 사례’ 통계(‘국가보안법연구’, 1992년)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간첩 사건으로 구속된 납북 귀환어부는 30명이 넘는다.
이처럼 납북 어부는 그야말로 납북되어 북쪽의 사람들과 일단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간첩으로 만들어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납북 귀환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위반으로 입건, 처벌되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이 지난 후에 어느날 갑자기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207쪽의 ‘주요 납북 어부 간첩사건’ 도표는 이런 사례를 정리해본 것이다.
이 가운데 납북 어부 김성학씨 사건은 72일 간의 불법 구금 속에서 온갖 형태의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으로 조작된 대표적 사례다. 김씨는 납북 귀환 14년 만에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 경감에게 조사를 받았다. 지난 3월 서울고법은 1심과 마찬가지로 김씨를 고문해 간첩으로 조작한 혐의로 이근안씨에게 7년형을 선고했다. 이처럼 납북되어 귀환한 어부들까지도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미귀환 납북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납북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귀환해도 걱정이고 억류되어도 걱정’인 비극적 상황에 처한 납북자 가족들이 터득한 생존 방법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쥐 죽은 듯이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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