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대통령님, 평양에 가시면 납북가족들 찾아오셔야 합니다”

  • 김당 dangk@donga.com

    입력2006-10-19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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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희 납북자 가족들도 햇볕정책의 수혜자이고 싶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정 그늘진 곳에 있는, 분단으로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햇볕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
    풀죽은 목소리의 최우영씨(30세)로부터 전화 연락이 온 것은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발표한 날로부터 사흘째 되던 4월12일이었다. 그 하루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최씨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그리고 4월10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설렘과 기대에 들떠 있던 그녀였다.

    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발표되자 언론 매체들은 정상회담에서 집중 논의될 의제로 북한의 도로, 항만, 전력시설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연일 크게 부각했다. 언론은 특히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전망과 이산가족들의 반응을 크게 실어 실향민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4월11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이산가족이 있으나 상당수는 세상을 뜨고 고령이기 때문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최우영씨는 87년 1월 백령도 인근 서해 해상에서 납북된 제27 동진호 선원 최종석씨의 외동딸이다. 동진호 피랍 당시 여고생이었던 최씨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최씨가 정상회담 소식을 듣고서 13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고향(북한)에 두고 온 딸을 그리워하는 비전향 장기수의 이산(離散)의 아픔을 보도하면서도 정작 납북자 가족들이 겪는 ‘강제 이산’의 아픔을 다루는 기사는 한 건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납북자 문제는 인권의 사각지대

    최씨가 기자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런 데서 온 초조함 때문이었다. 최씨는 대뜸 “다른 이산가족 문제는 다들 나오는데 왜 납북자 문제와 그 가족들의 한(恨)은 (언론에) 안 나오느냐.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안타까워했다. 최씨는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와야 정부의 실무대표단이 4월말 실무협상에서 회담 의제를 설정할 때 납북자 문제도 논의될 수 있을 것 아니냐”고 했다. 기자는 최씨에게 “(납북자 문제를 취재중인) ‘신동아’에는 어차피 그 내용이 실리겠지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납북자 문제 해결을 호소하는 글을 써서 언론사에 투고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랬더니 최씨는 다음날 즉각 글을 보내왔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뻤던 ‘어부의 딸’입니다. 예전과는 세상이 달라졌기에 억울하게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납북자 가족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지난날 남북회담이 열릴 때와 다름없이 납북자 가족들은 소외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투고라도 해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내 아버지 주민등록번호는 460426-*******’라는 제목의 원고는 감성에 호소하는 짧은 글이지만 거기에는 납북자 문제의 핵심 쟁점들이 응축되어 있다.

    기록상으로 6·25 전쟁 휴전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은 무려 3756명이나 된다. 그중 현재까지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미귀환 납북자 수효만도 454명이나 된다. 이들의 억류 기간은 짧게는 5년에서부터 길게는 45년이나 된다. 물론 이들의 생사 여부는 대부분 미확인 상태다. 다만 일부의 경우 드물게 당사자들의 대남 방송이나 기자회견 출연, 혹은 탈북 망명자나 자수한 공작원의 증언 등으로, 또 더러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중인 것이 밝혀져 ‘생존’이 확인되곤 했다.

    납북 귀환자 상당수 ‘간첩’으로 몰리기도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등학생 시절 남파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어 이남화(以南化)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억류중인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사정이 이런 데도 미귀환 납북자 문제는 그동안 정부 당국의 무위무능(無爲無能)과 여론의 무관심 속에서 그 실태조차 파악이 안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물론 납북자 문제의 원인 제공자는 북한이지만 납북자 문제와 그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반북(反北)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곧 ‘납북=세뇌’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부독재 시절에는 ‘남파간첩’ 혹은 ‘조작간첩’ 공포에 늘 시달려온 납북자 가족들부터가 스스로 ‘쉬쉬’해 왔다. 이는 납북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납북 어부에 대한 정부 당국의 기본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당국이 국방상 기타 공익적 견지에서 설정하여 놓은 동서 양해의 어로작업할 수 있는 최북단 어로저지선 내지는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여 조업하다가 북한의 무장선에 의하여 예인 납북, 북한지역 내에 장기간 억류되어 북한의 소위 평화통일 지도원 등으로부터 공산주의의 우월성 등의 학습과 공장견학 등의 세뇌공작에 의하여 교육받으며, 그 기간중 자기들이 취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반 정보를 수차례에 걸쳐 제공하고 소위 북한의 평화통일 방안과 대한민국 내에서 지하조직 구축, 반미·반정부 사상 유포 등의 지령과 함께 다량의 금품을 받고 일정기간 후 대한민국 지역 내로 귀환한 자.”(임상현, 납북어부의 죄책, ‘검찰’ 1969년 9월호)

    이것이 공안당국이 규정하고 있는 납북 어부의 개념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한국 경찰사’(내무부 치안국) ‘대공 30년사’(국군보안사령부) ‘북괴만행 40년’(한국반공교육연구원) 같은 정부측 발간자료를 토대로 집계한 ‘간첩사건 사례’ 통계(‘국가보안법연구’, 1992년)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간첩 사건으로 구속된 납북 귀환어부는 30명이 넘는다.

    이처럼 납북 어부는 그야말로 납북되어 북쪽의 사람들과 일단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간첩으로 만들어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납북 귀환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위반으로 입건, 처벌되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이 지난 후에 어느날 갑자기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207쪽의 ‘주요 납북 어부 간첩사건’ 도표는 이런 사례를 정리해본 것이다.

    이 가운데 납북 어부 김성학씨 사건은 72일 간의 불법 구금 속에서 온갖 형태의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으로 조작된 대표적 사례다. 김씨는 납북 귀환 14년 만에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 경감에게 조사를 받았다. 지난 3월 서울고법은 1심과 마찬가지로 김씨를 고문해 간첩으로 조작한 혐의로 이근안씨에게 7년형을 선고했다. 이처럼 납북되어 귀환한 어부들까지도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미귀환 납북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납북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귀환해도 걱정이고 억류되어도 걱정’인 비극적 상황에 처한 납북자 가족들이 터득한 생존 방법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쥐 죽은 듯이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납북자 문제 또한, 비록 그 유형은 특수하지만 분단 상황이 낳은 이산가족 문제다. 그러나 여러 이산가족 유형 가운데 하나임에도 바로 그 유형의 특수성 때문에 이 문제는 남북한 당국 모두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또 이 문제는 남북관계에서 우선 풀어나가기 쉬운 것부터 접근하려는 남북한 양측의 ‘의제 기피심리’와 부담감 때문에 서로 밀쳐 놓는 사이에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고황(膏)처럼 굳어버린 측면도 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본질적으로 월북·월남자와 그 가족의 문제다. 이중 월남자는 남파공작원·빨치산 출신 ‘억류자’(비전향 장기수)와 자진 월남자(피란민과 탈북 망명자 등)로 나눌 수 있다. 북한은 이중 후자는 ‘조국을 등진 배신자’일 뿐 이산가족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즉 북한에서 ‘월남 이산가족’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월북자는 자진 월북자와 납북·억류자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미귀환 납북자와 미귀환 국군포로, 그리고 자기 의사에 반해 억류중인 북송 일본인처 등이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 문제는 자진 월북(북한측 표현은 ‘의거 입북’)이 아닌 후자의 경우 북한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남한에서 ‘전쟁중 북한에 체포·억류된 국군’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국군포로라는 개념이 북한에서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는 그 대신 ‘해방전사’만 있을 뿐이다. 해방전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한의 군대에서 종사하다가 포로가 된 후, 북한이 진짜 조국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귀화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북한 당국은 “공화국에는 남조선 당국이 주장하는 소위 국군포로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송 일본인처’는 1959년 12월 재일 조총련의 북송사업에 의해 재일동포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 여성들을 말한다. 1800명 ‘북송 일본인처’ 문제는 북·일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 초기단계부터 현재까지 중요 현안이 되어 왔다. 북송 일본인처 가운데 일본 땅을 밟은 사람은 15명뿐이다. 그것도 잠깐의 방문만 허용되었을 뿐, 북한 당국이 귀환을 허용한 사례는 전무하다.

    이 기사의 주제인 내국인 납북 억류자는 더 민감한 문제다. 대부분이 순수한 민간인인데다 선박·항공기 납치와 관련돼 있고 심지어 공작원 양성을 위한 고교생 납치 같은 반인륜적인 테러·납치 사례도 있어 북한으로서 이런 유형의 납북 억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올려줄 것을 자청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납북자 문제는 남한의 ‘통계수치’로만 존재할 뿐 북한은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군포로 11명 귀환, 납북 귀환자는 전무

    99년 3월15일 정원식 대한적십자사총재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국제적십자사연맹(IFRC) 각국 적십자사, 국제사면위원회(AI: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인권 관련 비정부간 국제기구(NGO)에 서한을 보내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조속한 송환을 위해 협조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 서한은 정전협정 이후 북한에 납북된 한국 국민 3756명 중 어부 407명을 비롯해 454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신원이 확인된 국군포로 470명 중 231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있다. 그후 99년 9월30일 당시 임동원 통일부장관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신원을 확인해 명단을 확보하고 있는 생존 국군포로 숫자를 244명으로 정정했다.

    그러나 납북자 문제는 국군포로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간헐적으로 열린 남북대화에서 직접적인 의제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남북한은 양측 총리가 합의·서명하고 92년에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규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한 남북한간 ‘인도적 사안’의 협의·해결을 남북적십자사에 위임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11차 본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국군포로 송환문제를 함께 협의·해결하거나 국군포로를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 포함시켜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시도도 못하고 있다.

    이처럼 납북자 문제는 국군포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국군포로 문제의 경우, 미흡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성과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잊혀진 존재’였던 국군포로 문제를 일깨워준 것은 바로 국군포로 자신들이었다. 53년 포로교환 이후 40여년 만인 94년 10월 조창호 소위가 ‘기적’처럼 귀환한 이후 지난 3월말 귀환한 김길호씨(71)에 이르기까지 국군포로 귀환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또 이들이 재북 국군포로들의 참상에 대해 증언한 것을 계기로 6·25 전쟁 기간에 북한 당국에 의해 생포된 국군포로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었고 정부는 국군포로 송환 문제에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탈북, 귀환하는 국군포로와 달리 민간인 납북 억류자 중에는 귀환자가 단 1명도 없다는 데서도 납북 억류자의 존재가 북한에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납북자 문제의 거론 자체를 금기시하는 북한의 태도와 국군포로와 달리 탈북 귀환자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크다. 그리하여 똑같이 분단 상황이 낳은 이산가족이지만 납북자 문제는 남북한의 이산가족 문제 협상에서도 제외된 채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물론 그 가족들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미귀환 납북자의 네 가지 유형

    전반적인 납북자 실태가 처음 공개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1년 뒤의 일이다. 국가정보원은 99년 3월 휴전 이후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파악한 미귀환 납북자 454인의 명단을 공개했다(국정원 자료를 인용한 언론 보도 시점은 그보다 앞선 1월말이었음). 그 이후 정부는 국정원 자료를 근거로 추가 확인작업을 거쳐 그 결과를 지난 1월 통일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북한인권백서 2000’에 등재해 처음으로 ‘미귀환 납북자 454인’의 존재를 공식 확인했다. 통일연구원은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납북 억류자가 북한에 더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납북자 유형은 크게 ▲해상에서 조업중 납북된 어부 ▲해상에서 납북된 해군 함정 승선자 ▲공중에서 피랍된 항공기 승무원 ▲기타 해외근무 또는 국내외 여행중 공작원에 의한 납북자로 분류할 수 있다. ‘납북 및 납북 억류자 현황’ 도표에서 보듯이, 이 가운데 납북 어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총 납북자(3756명)의 97.5%(3662명)가 어부이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3255명 88.9%)은 송환되었다. 가깝게는 95년 5월30일 제86우성호의 어부 8명을 강제 납북했다가 7개월여 만에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귀환 납북 어부는 407명으로 여전히 미귀환 납북자의 절대 다수(89.6%)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납북 억류기간은 짧게는 13년(87년 1월15일 피랍 동진27호 선원 12명)에서부터 길게는 45년(55년 5월28일 피랍 대성호 선원 10명)에 이르고 있다.

    역시 해상에서 피랍된 해군 방송선 I-2정의 경우, 승선자 20명이 70년 6월5일 납북된 이후 20명 전원이 선박과 함께 억류중이다. 한편 69년 12월11일 탑승객으로 가장한 ‘고정 간첩’에 의해 피랍된 강릉발-서울행 대한항공(KAL) YS-11기의 경우, 피랍 두 달 만에 승객 39명은 송환되었으나 성경희씨(당시 28세) 등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 등 12명은 현재까지 강제 억류중이다. 이들 가운데 KAL기 스튜어디스였던 성경희·정경숙씨 등 일부는 대남 방송 등에 ‘활용’되고 있으며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 인권단체가 확인했다.

    마지막 유형은 해외근무 혹은 국내외 여행중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북한에 송환된 경우인데 이들 가운데서도 23명 중 15명이 억류중이다.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고씨는 78년 4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연수중 여권을 분실해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가다가 택시 기사의 착오로 북한대사관에 들어가 북한 공관원에 의해 강제 납북되었다. 또 최근 사례는 95년 7월9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안승운 목사로 그는 납북되어 5년 동안 억류중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탈북 망명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런 유형의 납북 억류자 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늘어났다기보다는 탈북자들이 이런 유형의 납북 억류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71년 4월 가족과 함께 실종된 주서독 한국대사관 노무관 유성근씨(당시 48세)의 경우 부인 정순섭씨와 두 딸 경희(7)·진희(1)양과 함께 서베를린을 여행하다 북한 공작원에게 강제 납북되어 30년째 억류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77∼78년 고교생 신분으로 여름방학 때 실종된 김영남, 이민교, 최승민, 이명우, 최진표 등 5명도 남파 공작원들의 증언에 의해 납치 억류 사실이 추가로 확인된 경우이다.

    지난 대선을 한 달 앞둔 97년 11월20일 국정원은 이른바 ‘북한 직파 부부간첩 및 연계고첩망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북한이 80년대 초반까지는 6·25 당시 월북자 등을 공작원으로 양성, 남파해 남한 내 일가·친척을 포섭하는 이른바 ‘연고선 공작’을 전개해왔으나, 이들이 고령화함에 따라 어릴 때부터 장기간 간첩교육을 받은 이른바 새세대 공작원을 남파해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직접 침투 공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대남공작 실태는 당시 검거된 부부간첩 최정남의 진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정남은 자신이 공작원으로 남파되기 전 남한 출신 교관들로부터 한국사회 적응훈련인 ‘이남화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해 대공수사관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최정남의 진술을 토대로 의심이 가는 실종·행불자를 추적해 인상착의를 대조한 결과 최정남이 이남화 교육을 받은 ‘홍교관’과 ‘마교관’은 지난 78년 8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홍건표(당시 17세)·이명우(당시 17세)군으로 밝혀졌다. 또 같은 해 8월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된 김영남군(당시 17세) 또한 당시 북한 조사부(현 작전부) 공작원 김광현(62·80년 자수)에 의해 납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국정원의 이런 수사결과 발표를 접한 최준화씨(71세)는 ‘승민이도 혹시 납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최씨의 아들 승민군(당시 17세)은 앞서의 두 고교생이 납북된 홍도에서 그보다 1년 전인 77년 8월 친구와 함께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당시 함께 실종된 아들 친구 민교군(당시 18세)의 아버지 이헌우씨(90년 사망)와 함께 전남 해안지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내려가 백방으로 자식들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두 고교생의 실종 사건을 수사했던 전 전남도경 대공분실장 O씨가 국정원 수사발표를 보고 납북 가능성을 국정원에 제보해옴에 따라 국정원이 두 학생의 주소지와 연고자 등을 내사해 사진을 입수해 최정남과 부여간첩 김동식, 귀순자 안명진씨 등에게 확인한 결과 이들 역시 북한의 사회문화부 및 작전부에서 대남 공작원 및 안내원들의 남한 현지 적응훈련을 위해 운영중인 ‘이남화 환경관’에 근무하는 남한 출신 강사임이 밝혀졌다.

    최씨는 “아무런 죄도 없고 공부만 하던 애들을 납치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원망스럽다. 간첩으로 넘어오면 또 여기서 죄인이니 이리 가도 죄인, 저리 가도 죄인 아니냐”며 안타까워 했다. 또 최군의 어머니 이동금씨(66)는 “말로는 철통같이 지킨다고 하지만 1년 뒤에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고등학생들을 납치한 것 아니냐.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이제나 저제나 통일이나 되어 만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동진호와 김만철 가족의 기구한 악연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 중에서 안타깝지 않은 사연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기구한 것은 동진호의 경우일 것이다.

    당시 부산에서 여고 1년생이던 최우영씨는 아버지가 납북되던 87년 1월15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의 고향이자 어머니(김태주씨)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남해 본가에 모여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동생(당시 13살)이 어디선가 텔레비전 긴급뉴스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아버지가 탄 제27 동진호의 납북 소식을 전했다.

    여수 선적 저인망 어선인 동진호는 당시 백령도 서북방 28마일 공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다. 정부 당국에서는 곧 풀려날 것이라고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송환 요청에 대해서도 남북 직통전화를 통해 ‘관계기관 조사후 송환해주겠다는 긍정적인 회신이 왔다.

    그러나 불운이 겹쳤다. 그 무렵 신문은 부산 출신인 박종철군(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년) 고문치사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동진호가 납북된 그날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쇼크사’했다는 짤막한 신문 보도가 나오더니 며칠 안가 내무장관과 치안본부장이 경질되는 문책인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공교롭게도 김만철(金萬鐵)씨 일가족이 일본으로 탈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씨 일가는 박종철군이 사망한 1월14일 밤 북한 청진항을 떠났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김씨 일가 12명한테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군 사건으로 곤경에 몰린 정부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김씨 일가 탈출 소식을 집중 보도했다. 시중에서는 “종철이가 종을 치니 만철이가 그만 쳐라”라고 한다는 냉소 섞인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북한은 1월23일 해운총국 대변인 성명을 내고 김씨 일가가 탄 배가 기관고장으로 표류한 것이라며 일본에 정박한 김씨 일가가 한국으로 가게 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김만철씨 가족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동진호는 억류된 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구정 무렵 동진호가 석방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씨 가족들은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대만이나 제3국으로 간다던 김만철씨 일가족이 남한으로 오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최씨 모녀는 불길한 예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최씨 가족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 정부가 김씨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공작을 진행할 때 북한은 ‘동진호 선원의 신병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한국 정부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최씨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가 동진호 선원 12명과 김만철 일가 12명을 바꾼 셈이다. ‘체제 선전’을 위해서건 아니면 박종철 사건의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건. 그래서 최씨는 김만철씨 가족을 제3국으로 보낸 다음에 천천히 데려와도 될텐데 왜 하필이면 그때 데려왔는지가 원망스럽다. 목숨 걸고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온 김씨 일가는 나중에 소원대로 경남 남해에 둥지를 틀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최씨 가족에게는 너무 기이한 악연이다.

    북한 당국은 나중에 동진호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정탐행위를 했으며 간첩활동을 시인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북한은 방송 말미에 동진호에 대한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혀 김씨 일가의 ‘교환 협상’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 이후 92년 제8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북한측의 이인모 노인 송환 요구에 연계해 남한측이 동진호 선원 송환을 요구할 때까지 동진호 선원은 ‘잊혀진 존재’였다.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고위급회담 대표접촉이 결렬되자 동진호는 또 잊혀져 갔다. 동진호 사건 이후에도 어선이 납북된 사례는 여럿 있었으나 여지껏 억류된 선원은 한 명도 없다.

    가족 사진 없는 가족들

    납북 동진호 선원 가족들한테는 정작 가족 사진이 없다. 최씨에게도 아버지와 함께 네식구가 찍은 가족사진이 없다. 납북 초기에 귀환 소식이 들릴 때 기자들이 집에 들러 사진이란 사진은 다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정작 최씨는 기사에 난 가족사진을 복사해 품고 다닌다. 최씨가 늘 소지하고 다니는 스크랩에는 사진말고도 동진호 관련 기사 그리고 호소문 등이 담겨 있다. 그중에는 동진호 선원 양용식씨(납북 당시 27세)가 지난 96년 1월13일자 북한 ‘통일신보’의 ‘내 삶의 보금자리’라는 수기에 썼다는, 북한 여성과 결혼해 황해북도 은파군 공장기술자로 잘 살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의 납북 선원 아내들도 상당수는 재혼을 했다. 최씨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지만.

    최씨는 그동안 통일원(통일부)이며 안기부(국정원)며 적십자사에 부친의 생사확인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으나 회답은 늘 북한은 통제된 곳이라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99년 1월말 신문 보도에서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생사 확인을 애타게 기다려온 가족에게 먼저 알려주지 않고 언론에 발표한 국정원의 처사가 원망스러웠지만 최씨는 그래도 살아계시다는 소식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최씨는 당장 국정원에 어느 수용소인지 문의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씨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의 스크랩 표지 안쪽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아빠가 계신 곳(추정) ●평남 개천시 14호 정치범 수용소 ●명칭:국가안전보위부 14호 관리소 ⇒탈북자의 증언(2000.2.29 현재) 2000.3.16 현재 아버지가 납북된 지 4810일”

    동진호 선원 박광현씨(당시 38세)의 아내 정경자씨에게도 남편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교육용 교재를 파는 사무실로 정씨를 찾아갔을 때 정씨는 결혼식 사진을 들고 나왔다. 정씨는 “동진호 선원들 사진은 전부 언론사에 있다. 87년 당시 석방된다는 보도가 나올 때 기자들이 다 가져 갔다. 그때는 당연히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진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빛바랜 결혼 사진밖에 없다”고 했다.

    정씨의 남편 박광현씨는 원래 장사를 하다 벌이가 시원찮아 배를 탄 지 보름 만에 납북되었다. 정씨는 동진호가 납북되고 나서야 남편이 배를 탄 사실을 알았다. 남편이 외국으로 돈 벌러 간다고 하고 가족들 몰래 고깃배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세 살이던 외아들은 지금 고교 1년생이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이 말한 대로 아들에게 ‘아버지는 외국에 돈 벌러 가셨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다른 납북 선원 가족들처럼 정씨도 남편의 생사 여부를 모른다. 이혼이나 사별이라면 차라리 깨끗할 텐데 북한에 납치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라고 했다. 정씨는 솔직히 빚과 짐만 안기고 떠난 남편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또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들이 대우를 잘 받는 것을 볼 때, 가장이 북한에 잡혀가고 남은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이 없는 정부 당국이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비행기 사고나 삼풍백화점 사고 같은 대형 사고가 터지면 피해자들이 대부분 가진 자들이지만 많은 보상을 받는데 납북 어부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다. 오히려 감시나 당하고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아왔다. 탈북자는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데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 있는 정부가 가장을 잃은 가정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또 납북자는 엄연히 특수한 유형의 이산가족인데 일반 이산가족은 생사 확인하는데도 경비를 지원해 주면서 납북자 가족은 지원이 전혀 없다.”

    그동안 각계에 생사 확인을 요청하는 진정이나 송환을 촉구하는 탄원도 해보지 그랬느냐는 질문에 정씨는 “먹고 살기 바빠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씨는 “그동안 죄인 아닌 죄인으로 너무 죽어서 살아온 것이 후회되고 억울한 심경이다. 이제는 2세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권리를 찾겠다”고 했다. 정씨는 아들의 사주관상이 장군감이고 본인도 사관학교를 진학하고 싶어하는데 아버지가 납북자면 장교로는 임관을 못한다고 하니 생사 확인이건 송환이건 가타부타 결말을 짓겠다고 했다.

    생활력 강한 정씨와 달리 동진호 선원 가족 가운데는 더 기구하고 어렵게 사는 경우가 많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릴 수 없어 재혼한 아내들도 있고, 생활보호 대상자인 할머니와 함께 한 달 10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온 가정도 있다. 또 아들이 납북된 지 몇 달 뒤에 웬 젊은 여자가 노모 앞에 갓난아이를 안고 찾아와 아들과의 동거 사실을 밝히고 그 아들의 딸이라며 내려놓고 간 일도 있다. 아이의 아버지도 딸의 존재를 모르고 그 딸도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는 기막힌 경우다.

    미귀환 납북자 가족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납북 KAL기 승무원의 한 딸은 “이미 체념했다”면서 납북자 가족들과 기자를 만나길 꺼렸다. 어쩌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정부의 무위무능과 북한의 무반응 그리고 사회적 무관심이 낳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려온 고상문씨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난 94년께 고씨의 정치범수용소 수감 소식이 알려지자 북한은 이를 부인하고, 고씨가 자진 월북해 북한에서 재혼해 지리학연구사로 일하고 있다는 회신을 유엔을 통해 고씨 가족에게 알려왔었다. 또 납북 어부 가운데도 북한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최근에는 북한측이 방북한 교회 관계자를 통해 안승운 목사가 북한에서 재혼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 2월28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는 제1회 납북자 가족 모임이 열렸다. 지난해부터 ‘북한민주화네트워크’(대표 조혁)의 도움으로 가족 모임 결성을 추진해온 최우영씨가 납북자 가족들을 수소문해 개최한 이 첫 모임에는 납북 동진호·안영호 선원, 납북 고교생, 납북 유학생, 납북 목사 등의 가족 15명이 참석했다. ‘작은 모임’이지만 휴전 이후 최초로 열린 납북자 가족 모임이었다.

    “저희는 이제 말하고 싶습니다. 납북자 문제를 기본적인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하여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그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저희도 햇볕정책의 수혜자이고 싶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정 그늘진 곳에 있는, 분단으로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햇볕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이제 정부에서는 지금까지의 무관심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라도 이 일에 힘껏 나서 주십시오. 성실하게 일할 전담 부서를 설치하여 적극적인 송환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탄원합니다.”

    이날 가족 모임에서 낭독한 ‘햇볕은 저희에게도 간절히 필요합니다’ 제하의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탄원서’의 한 대목이다. 이들은 또 정부에 가족들에 대한 납북자 동향 전달과 납북자 가족 생계 지원 등을 요청했다. 이들은 이날 우선 납북자 가족 모임을 만들어 북한에 억류된 가족들의 생환을 위해 국내 NGO(비정부기구)들과 함께 ‘454 납북자 구출 모임’을 이른 시일 내에 결성, 납북자에 대한 국내외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부에 납북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각종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휴전 이후 최초로 열린 납북자 가족 모임

    실제로 이날 납북자 가족 모임에서 총무로 선출된 최우영씨는 지난 3월말~4월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위원회 회의기간에 북한 내 억류된 한국인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최씨는 그곳에 상주하는 유엔 인권기관들과 국제 인권 관련 NGO(비정부기구) 단체를 방문해 영문 호소문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을 전달하고 유엔 인권기구들이 북한 인권 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호소했다. 최씨는 이에 앞서 일본의 피랍자 구출 모임에도 참석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일본과 국제연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휴전 이후 최초의 납북자 가족 모임이 결성된 데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현재 일본 정부 공식 통계에 따른 납북 억류자는 ‘10명뿐’이다. 한국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97년 3월 ‘납북 피해자 가족연락 모임’(대표 요코타 시게루)을 결성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왔다. 또 일본에서는 ‘가족 모임’ 결성에 맞추어 일본인 납북자의 상징적 인물인 메구미를 내세운 ‘요코타 메구미 납치 규명 구출 발기인회’가 발족되고 초당파 ‘북한 납치 의혹 일본인 구조 의원동맹’ 결성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유학생으로 87년 7월 오스트리아 여행중 납북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중인 이재환씨(당시 24세)의 아버지로 납북자 가족 모임에 참석한 이영욱 변호사는 가족 모임 결성의 의의를 이렇게 밝혔다.

    “일반적인 억류자 문제와 달리 북한이라는 특수한 집단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모임 자체가 북한에 대한 압력이 될 것으로 본다. 요즘에는 납북 억류자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운대가 맞으면 납북자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해본다.”

    미귀환 납북자의 대부분이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처한 어려움은 우선 당장 경제적인 현실의 문제다. 또 국군포로 문제와 비교할 때 단 한 명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결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창호 소위가 귀환할 때까지 국군포로가 ‘잊혀진 존재’였던 것처럼 납북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기적’처럼 돌아온다면 그 관심과 기대 또한 증폭될 것이다.

    지난 2월말 처음으로 모임을 갖고 대한민국 사회를 향해 말문을 튼 ‘납북자 가족 모임’(총무 최우영)은 그로부터 한달여 만에 역사적인 정상회담 개최라는 낭보를 듣게 되었다. ‘가족 모임’은, 4월18일 오후 1시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개최하는 ‘납북자 송환을 위한 한·일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 ‘지방의원 피랍자 구출협의회’와 함께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납북자 사진을 확대해 목에 걸고서. 성명서 초안의 제목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셨으니 북한에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찾아오셔야 합니다―남북정상회담을 열렬히 환영하면서’이다.

    www.comebackhome.or.kr

    “우리는 실로 분단 50년 만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에 충격에 가까운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단으로 생긴 이산가족의 일원으로서, 특히 남북 대립의 직접적인 희생자인 민간인 납북자의 가족으로서, 이제야말로 대립을 넘어 민족 화해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결국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오릅니다…이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정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이번에야말로 두 지도자가 단 한가지만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도 이산가족의 만남과 대북 경협을 최우선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지만 우리는 기회를 빌려 특히 북에 억류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송환도 반드시 관철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민족 분단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고기잡이를 하다가, 또는 여행을 하다가 납북된 채 수십년 동안 가족들과 헤어져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일입니까.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도 수십년 감금생활의 비인간적 대우를 청산하고 송환해야 한다는 당위가 제기되는 마당에 민간인 납북자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북한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경협도 꼭 필요하고, 이제 내일의 삶조차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린 이산가족의 상봉도,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와 전쟁포로 문제로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억울하게 억류되어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납북자들도 이제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수십년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 것을 다시 한번 두 정상께 간곡하게 요구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셨으니 그곳에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꼭 찾아올 것으로 믿습니다. 2000.4.18-작은 희망이라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납북자 가족 모임”

    가족 모임은 납북 억류자 454명 가족들의 연락처 확인 작업을 벌여 현재 200여명의 주소를 확보했다. 납북자 가족 모임의 인터넷 도메인은 ‘comeback home.or.kr’이고 이 모임 최우영 총무의 개인 E-메일 주소는 ‘papanet@hanmail. net’이다. 이들은 특히 그동안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온 납북자 가족들의 참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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