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끝나지 않은 후계전쟁 4000억짜리 옥새는 어디로

  •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6-10-19 13: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현대號가 격랑에 휩싸였다. 'MK-MH'전쟁은 일단락됐지만 '최후의 승자'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정주영의 '그랜드 디자인'은 어떤 모양새일까?》
    “답답하고 한심해. 이게 무슨 창피야. 얘들이 이젠 좀 컸나 싶었더니 머리만 히끗히끗했지 아직 멀었어. 아니, 애비 속을 그렇게들 모르나. 언론들도 그래. 뭐? 대권 승계가 끝났다구? 증권만 쥐면 현대를 다 먹은 거라구? 걔들이 뭘 해보기나 했어? 내가 앞으로 15년은 더 살 텐데 벌써 날 허수아비로 아는 거야?…”

    내놓고 치고 받던 두 아들의 주먹다짐을 보다 못해 노구를 끌고 그룹 경영자협의회에 나가 교통정리를 해주고 돌아오던 날, 정주영(鄭周永·85)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스무 살 때인 1935년 서울 신당동에 쌀가게 ‘경일상회’를 내면서 처음 경영자가 된 이래 대한민국 매출 1위 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구기까지 상속과 분가(혹은 분배)는 정명예회장이 기업 성장의 고비마다 치러야 했던 통과의례였다. 그 과정에 더러 갈등도 노출되고 구구한 억측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정주영씨 일가에서 분가란 ‘자기 몫 찾아 떠나기’가 아니라 ‘큰형님(아버님)이 주는 대로 받고 물러나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70년대 무렵부터 시작된 현대 집안의 분가와 승계작업은 지금까지 대략 네 차례의 국면을 거치며 진행됐다. 70년대에 이뤄진 정명예회장 형제들의 독립, 80년대 후반 정세영(鄭世永·72) 회장의 부상, 90년대 중반부터 불거진 정세영·정몽구(鄭夢九·62) 회장의 갈등, 그리고 최근의 몽구·몽헌(夢憲·52) 형제의 세 겨루기 단계가 그것이다.

    형제는 ‘황금 콤비’



    정명예회장은 “형제들이 힘을 합쳐 기업을 일으키고, 그 후에는 장자가 다른 형제들의 분가를 돕는 것이 현대의 전통”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정주영씨가 거의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켜 갖은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의 다섯 남동생 중 요절한 신영(信永)씨를 제외한 인영(仁永·80), 순영(順永·78), 세영, 상영(相永·64)씨는 모두 학업과 생계를 팽개치고 달려가 맏형을 도왔다. 이들 형제들은 사실상 정명예회장의 창업동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현대에 쏟아부었다.

    기업 규모가 커지고 그룹이 면모를 갖추면서 형제들은 각 계열사를 떠맡아 자기 책임 아래 경영했고, 이 구도가 훗날 계열 분리의 밑그림이 됐다. 형제 분가의 출발선을 끊은 사람은 인영씨. 그러나 그의 분가는 형과의 의견 충돌과 예기치 않은 외부 상황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

    강원도 통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씨는 소년기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네 차례나 가출을 시도했다. 그나마 맏이인 주영씨는 보통학교라도 다녔지만 차남인 인영씨는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그 또한 14살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인쇄소에 취직, 낮에는 문선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YMCA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 야간과정을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인영씨는 특히 영어공부에 흥미를 느꼈는데, 결혼한 주영씨가 쌀가게 배달원으로 일하며 현저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살 때 형 부부가 덮고 자는 이불 속에서 밤새 영어공부를 하다 형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형이 “그까짓 꼬부랑 글씨 배워서 뭐 할거냐”고 면박을 주면 아우는 “언젠가는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 두고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인영씨의 말마따나 그의 영어실력은 훗날 주영씨의 ‘돈줄’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인영씨는 일본으로 유학, 다이세이 중학과 미자키 영어학교 고등과, 아오야마 학원 영어과에서 공부를 계속하다 1943년 귀국했다. 4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던 중 6·25를 맞자 형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인영의 항명

    인영씨는 현대자동차의 초석을 닦는 데도 기여한 바 컸다. 66년 미국의 포드자동차가 한국 진출을 겨냥해 시장조사를 하고 돌아갔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신진공업이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로 ‘새나라’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고 있었는데, 현대는 포드의 접촉대상에 끼지도 못했다

    주영씨는 마침 미국에 머물고 있던 인영씨에게 “포드와 당장 자동차 조립계약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인영씨는 형의 명령 한 마디에 아무 안면도 없는 포드사로 무작정 달려가 매달렸다. 그는 형이 유능한 자동차 수리 기술자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설득을 거듭한 끝에 67년 2월 마침내 포드와 조립 기술계약을 하게 된다. 국산 부품 21%와 미제 부품 79%를 사용한다는 조건이었다.

    현대는 3년은 걸려야 차 생산이 가능하리라는 포드의 예상을 깨고 불과 1년만에 ‘코티나’를 조립 생산, 세계 유수 자동차 메이커로의 첫 걸음을 뗐다.

    주영·인영씨 형제의 ‘찰떡 궁합’은 두 사람의 성격이 정반대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주영씨가 이것저것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몰아붙이고 보는 성미라면 인영씨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내려진 다음에야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었다. 사업 규모가 작고 창업 초기에 있는 성장 일변도 기업에서라면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의 두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모자란 부분을 메워주는 순기능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업이 어지간히 성장해 투자규모가 커지고 여러 방향의 목표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사령탑의 혼선과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다. 75년, 중동 진출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그런 상황이 빚어졌다.

    당시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중동 특수가 한껏 달아오르자 주영씨는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1억달러 규모의 바레인 조선소 공사를 따내기 위해 현대건설의 해외건설 담당 부사장이던 인영씨를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영씨는 중동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계약을 따내는 데 급급해 입찰가를 무리하게 낮출 경우 회사의 경영부실을 야기한다”며 신중론을 폈다.

    그는 휴전 직후 현대건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발주공사인 고령교 복구공사를 맡았다가 빚더미에 올랐던 때를 떠올렸다. 형제들이 집을 팔고 다리 밑 판잣집을 전전하며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기억이 새로웠다. 더욱이 기후와 풍습이 다른 만리 이역에서 수지가 맞을지조차 불투명한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주영씨는 인영씨가 기어이 고집을 꺾지 않자 현대양행 군포공장으로 전보시키고 만다. 현대양행은 62년 설립된 후 인영씨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종합기계업체. 주영씨는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회사에서는 아우 인영을 비롯해서 나의 중동 진출 결심이 회사를 망하게 만드는 욕심 아니냐고 근심하는 반대파도 꽤 있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한다는 식으로는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어려운 일을 피하다 보면 쉬운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나는 중동 진출에 대비해 아랍어 강좌를 열게 했고 아랍말로 영화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인영은 끝내 나의 결정에 따라주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해외 대형 공사 계약 관련자는 파면한다’는 위협을 가하며 중동 진출을 막으려는 아우를 전보 발령하고 내가 중동 공사를 총지휘하기로 하면서 사내의 반대론자들을 일소했다.”

    그후 인영씨가 현대로부터 분가해 나간 사정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 75년 말 주영씨가 인영씨를 불러 “너도 이젠 독립해야겠다”며 일방적으로 분가를 통보했다는 설도 있고, 인영씨가 먼저 떠나겠다고 하자 주영씨가 “형제가 모두 재벌이 되긴 어렵다”며 만류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그해에 열린 현대그룹 체육대회에 현대양행의 7개 계열사는 모두 불참해 분위기가 냉각됐고, 2년 뒤 인영씨는 마침내 분가 절차를 밟기에 이른다. 주영씨는 아우가 떠난 후에도 1년간 현대건설 사장 자리를 비워놓고 그의 복귀를 기다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별, 10년간의 외면

    인영씨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76년 경남 창원에 3억2000만달러를 투자, 세계 굴지의 종합기계공장을 설립하려 했다. 창원공장 설립 당시만 해도 정부는 발전설비 부문을 현대양행으로 일원화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적극적인 로비를 펼친 끝에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이 잇따라 이 부문에 참여하면서 독점 발주를 기대하고 막대한 투자를 했던 현대양행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현대그룹의 지붕을 벗어난 현대양행은 혼자 힘으로 하루하루 빚 틀어막기에 급급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2차 오일 파동까지 터졌다. 막판까지 몰린 인영씨는 하는 수 없이 주영씨에게 SOS를 보냈지만 형은 차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79년 5월 중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조정조치를 단행, 발전설비의 경우 현대중공업이 현대양행을 흡수하게 하고 삼성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을 하나로 묶어 업체를 2원화했다. 인영씨는 이 조치가 현대의 입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이해, 가뜩이나 소원했던 형과 더 멀어졌다.

    뒤이어 80년 초 신군부의 집권과 함께 출범한 국보위도 중화학 투자조정에 착수했는데, 현대에겐 승용차 생산을 전담케 하는 대신 발전설비는 대우로 일원화했다. 이에 따라 현대양행은 대우로 넘어갔다가 석 달 만에 대우가 경영을 포기하자 다시 한국중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국영화의 길을 걸었다. 인영씨로선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기업을 고스란히 국가에 헌납한 셈. 더욱이 그는 이 조치에 저항하다 신군부의 미움을 사 81년 업무상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까지 겪었다.

    사무실 한 칸 남은 게 없던 인영씨는 그후 압구정동 배나무밭 사이에 있는 자택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 이를 악물고 재기에 나선 끝에 마침내 한라그룹을 일으킨다. 82년 만도기계 안양공장을 증설했고 84년엔 한라시멘트 옥계공장 증설을 재개했으며, 89년엔 그룹 매출액이 1조원에 육박했다. 그 10년 동안 주영·인영 형제는 얼굴을 맞닥뜨린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인영씨에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찾아들었다. 매출 1조원 돌파를 눈 앞에 둔 89년 7월,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와 언어장애에 빠진 것. 워낙 증세가 심각해 재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소식을 듣고 주영씨가 병상으로 달려왔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고 드러누운 인영씨를 보자 감정이 복받쳤다. 형이 시키면 부산항 하적장으로 미국으로 중동으로 발바닥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도록 뛰어다니던 아우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맞잡고 눈물의 화해를 했다.

    주영씨는 “한라가 어려워지면 내가 도울테니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라”며 인영씨가 미국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뒤에 주영씨는 동생들과 미국을 방문, 병상에서 고희를 맞은 인영씨에게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장자의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주영씨는 인영씨와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에도 한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라의 주력기업으로 자동차 부품을 주로 생산하는 만도기계는 대부분의 생산품을 현대자동차에 납품했고, 한라시멘트가 옥계공장을 지을 때도 주영씨가 건설비용을 지원하고 채무 보증을 서줬다. 현대는 한라 계열의 인천조선이 어려움을 겪자 설계도면을 빌려주기도 했다.

    주영씨는 인영씨가 분가하는 과정에 구설에 올랐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다른 동생들에 대한 분가는 소리없이 추진했다.

    69년부터 현대시멘트를 독자적으로 운영해온 순영씨에겐 현대시멘트와 서한개발 등을 떼주며 분가시켰다. 순영씨는 이를 바탕으로 (주)성우, 현대종합금속, 성우정공, 현대성우리조트 등 1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성우그룹을 일으켰다. 막내동생 상영씨에게는 고려화학과 (주)금강을 물려줘 금강고려화학그룹(현 KCC그룹)의 토대를 마련하게 했다.

    주영씨는 형제들이 분가한 뒤에도 한라그룹과 그랬듯 끈끈한 보완·협력관계를 유지, 이들이 분배받은 계열사를 중심으로 다각화해 또다른 재벌로 성장하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성우그룹의 현대종합금속이 생산하는 용접봉은 대부분 현대중공업에서 사들이며, 서한정기가 만드는 브레이크와 서한벤딕스의 안전벨트는 현대자동차에 납품된다. KCC그룹에서 생산하는 도료와 유리제품의 주 수요처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다. 현대는 이들 형제그룹 계열사들에 정상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거나 이들이 발행한 CP(기업어음)를 낮은 금리로 매입, 부당 내부거래로 지탄받기도 했다.

    2세들의 부상

    정주영씨는 62년 독일 유학중 사망한 동생 신영씨의 몫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85년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신영씨의 부인 장정자(張貞子·65)씨에게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겼고, 유복자인 몽혁(夢爀·39)씨에겐 극동정유(현대정유 전신)를 물려준 것.

    원래 극동정유는 장정자씨의 동생인 홍선(洪宣·60)씨가 경영하던 회사였는데, 투자 파트너였던 미국 쉘석유가 철수한 이후 경영난에 허덕이자 정주영씨가 사돈 집안을 도울 생각으로 홍선씨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따라서 몽혁씨는 친가 기업인 현대를 통해 외가 기업의 경영권을 양도받은 셈이다.

    정주영씨의 매제(여동생 희영씨의 남편) 김영주(金永柱·80)씨는 정씨가 40년대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 때부터 정씨 형제들과 함께 일했는데, “고장이 나서 꼼짝 않던 기계도 김영주만 다가가면 저 혼자 굴러간다”고 했을 만큼 기계에 해박했다. 현대건설 창업 이후에는 경부고속도로와 울산조선소 같은 굵직굵직한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공사 중 사고로 인부가 죽으면 동요하는 동료 인부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기꺼이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고, 주영씨의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기도 했다.

    정씨는 “김영주는 총각 때부터 평생 동안 내가 무슨 일을 시키든 한 번도 군소리를 붙인 적이 없다. ‘예 알겠습니다’, 평생 이 간단한 대답으로 내 뜻을 따라줬다. 또한 그렇게 대답한 일은 언제나 훌륭하게 수행했다”며 그를 치켜세웠다. 정씨는 그로 하여금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인연을 맺게 했고, 한국프랜지공업을 떼 주면서 현대로부터 독립시켰다.

    정주영씨는 아들을 8명 낳았다. 평소 “자식들이 모두 국내외에서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전문경영인 자질도 갖췄다”며 뿌듯해 했던 그는 학업을 마친 아들들을 일찌감치 현대 계열사에 입사시켜 경영수업을 쌓게 했고, 기대만큼 능력을 발휘하고 때가 이르렀다 싶으면 지분을 내주고 직접 경영을 맡게 했다.

    현대 집안의 전통에 따를 것 같으면 정주영씨의 후계자는 당연히 장자인 몽필(夢弼)씨였다. 실제로 몽필씨는 아버지의 배려로 현대양행 과장, 현대건설 상무, 현대상사 부사장 등을 거치며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주영씨는 장남에 대한 기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몽필씨에게 지나칠 만큼 엄격하게 대했다. 훗날 그 스스로 “늘 윽박지르며 키운 것을 후회한다”고 털어놨을 정도였다. 아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불같이 화를 냈고, 내성적이었던 몽필씨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앓기만 했다.

    몽필씨는 지나친 부담감 때문에 한때 술에 의지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경영을 맡긴 동서산업이 부도 직전에 이르자 영국으로 도피해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세영씨와 상영씨 등 삼촌들이 중간에 나서 어렵사리 그를 귀국시켰는데, 주영씨는 ‘돌아온 탕아’에게 인천제철 경영을 맡기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러나 몽필씨는 경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82년 4월 출장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뜨고 만다.

    정몽구 회장 시대

    장남을 잃은 슬픔에서 힘겹게 헤어난 정주영씨는 몽필씨의 처남인 이영복(李英馥·54)씨를 동서산업 사장에 임명, 유족들을 챙겼다. 정씨는 이씨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이번 인사에는 공적인 이유보다는 사적인 감정이 더 많이 들어 있다”면서 아들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그는 몽필씨의 혈육인 은희(29)·유희(27)씨가 아버지를 잃은 지 8년 후 어머니마저 여의자 두 손녀를 청운동 자택으로 데려와 지성으로 보살펴 키웠다.

    두 자매는 현재 동서산업 지분을 2.95%, 2.81%씩 보유한 대주주다. 98년 동서산업이 건설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자 동서관광개발(동서산업의 100% 출자회사)이 동두천과 제주도에 짓고 있던 2개의 골프장을 시공자인 현대건설과 현대산업개발이 각각 매입, 자금난에 숨통을 터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였음은 물론이다.

    몽필씨 일가의 지분 정리를 마친 정주영씨는 대규모 인사를 단행, 전문경영인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2세 중심의 경영체제로 분위기를 일신했다. 84년 1월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주영 회장은 왼쪽에 둘째 아들인 정몽구 현대정공 사장, 오른쪽에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을 배석시켜 후계구도의 일단을 내비쳤다.

    형의 타계로 사실상의 장자가 된 몽구씨가 그룹 차원의 대외 공식행사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포스트 정주영’은 동생이냐 아들이냐에 재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몽필씨가 세상을 뜬 뒤에는 6남 몽준(夢準·49)씨를 주목하는 이가 많았다. 학교 공부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MIT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수재인데다 경영능력도 뛰어나 아버지의 신임이 두터웠다.

    몽필씨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인 82년 5월, 몽준씨가 불과 31세의 나이로 형들을 제치고 그룹 주력기업인 현대중공업 사장에 오르자 그가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당시 몽구씨는 현대정공 현대자동차써비스 현대강관을, 5남 몽헌씨는 현대상선을 맡아 경영하고 있었지만 이들 기업은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 축에 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86년 12월 “항간의 추측과는 달리 2세들 대신 성실하고 능력있는 동생을 후계 회장으로 선임할 계획”이라고 밝혀 정세영 회장 시대를 예고했다. 이듬해 2월 세영씨가 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때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주영씨는 “정세영 회장체제는 결코 과도체제가 아니다. 정회장이 앞으로 10년간은 그룹을 이끌 것”이라며 세영 회장을 ‘임시 관리자’로 보는 시각에 쐐기를 박았다.

    그후 몽준씨가 정계 입문을 선언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데 이어 88년 4월13대 국회에 진출하자 비로소 정세영 회장 시대의 개막이 실감됐다. 이 무렵부터 세영 회장에게 본격적으로 줄을 대는 임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결국은 몽구씨에게 대권이 넘어갈 것이라는 풍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도 그럴 듯이 세영 회장이 취임한 뒤에도 중장비사업 우주항공사업 헬기사업 엔진사업 등 당시의 ‘첨단 미래사업’들은 속속 몽구씨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정명예회장은 91년 10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딱 잘라 말하지만 몽구가 그룹 회장을 맡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 중 그룹 회장을 맡는 것은 정세영 회장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으나 그리 설득력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정세영 회장이 10년간은 그룹을 이끌 것”이라는 정명예회장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몽구가 그룹 회장을 맡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95년 12월, 정명예회장은 세영 회장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하고 몽구씨를 그룹 회장에 앉혔다. 69년 평사원으로 현대에 입사했던 몽구씨가 30년에 걸친 ‘세자’ 신세를 마감하고 마침내 보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부친과 숙부에 대한 예우로 나이 60이 다 되도록 현대 사옥의 뒷문으로 출퇴근했던 몽구씨는 그제서야 정문 출입의 ‘감격’을 맛본다. 물론 ‘상왕’의 통치는 그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시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정명예회장이 80대에 접어듦에 따라 그의 후계체제가 불투명한 데 따른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문에 지난날 현대의 최대 강점이었던 강력한 리더십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 있는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87년 부친의 타계로 회장에 오른 것이 45세 때였고, LG의 구본무 회장은 50세 되던 95년에 구자경 회장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았는데, 당시 57세였던 몽구씨는 여전히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96년에는 코오롱의 이동찬 회장이 아들인 웅렬 부회장에게, 금호의 박성용 회장이 동생인 정구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길 예정이어서 정명예회장으로서도 더 이상 양위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현대자동차 놓고 신경전

    세영씨는 이와 같은 인사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 굵은 조카들이 득실대는 마당에 일흔을 코 앞에 둔 자신이 천년 만년 그룹을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외아들 몽규(夢奎)씨는 그때 겨우 서른 셋이었다. 세영씨는 잠시 위탁 관리했던 그룹을 적통(嫡統)의 조카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자신이 평생을 바쳐 키운 현대자동차를 물려받아 독립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에 유학, 정치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세영씨는 석사학위를 따던 해인 57년, 주영씨의 요청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현대건설 상무로 현대 경영에 참여했다.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을 유학 보내준 맏형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67년 현대자동차 설립과 함께 사장을 맡은 이래 30년 동안 기름밥을 먹어가며 현대를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로 길러냈다. 75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독자모델 ‘포니’를 개발한 데 이어 85, 86년에는 캐나다와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가 진출 첫 해에 수입차 판매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운 주역이었다. 그랬던 만큼 자동차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세영씨는 몽규씨가 고려대에 다닐 때 비밀리에 그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으로 보내 잡역부 생활을 체험케 했고, 88년 현대자동차 회계과 대리로 입사케 한 뒤에는 신입 기술자를 교육시키는 공장내 자동차학교에 입소시켜 자동차의 구조와 조립기술을 배우게 하는 등 일찍부터 자동차 승계에 대비했다고 한다. 세영씨 부자는 94년부터 장내 거래를 통해 꾸준히 현대자동차 주식을 매입하기도 했다.

    그의 바람은 순탄하게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몽구씨를 그룹 회장에 발령한 95년 12월 인사에서 몽규씨가 현대자동차 부사장에서 몇단계를 건너뛰어 일약 현대자동차 회장에 임명된 것. 당시 몽규씨의 현대자동차 지분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그는 96년 7월 현대자동차 보통주 13만주(시가 40억원)를 사들여 지분율을 0.71%에서 1.04%로 끌어올렸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세영씨도 공개 석상에서 “현대자동차가 세계 일류라는 평가를 받을 때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동차 사업을 챙기고 싶다”고 하는 등 자동차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자동차에 관한 한 정주영 창업주의 애정과 집착도 세영씨에 뒤지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광복 후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그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아우의 몫”이라는 뜻을 밝혔지만, 이를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엔 자동차가 너무 커져 있었다.

    그 심중은 아들 몽구씨가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혼자 힘으로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현대정공을 창업한 것은 현대자동차 인수를 위한 전초전의 성격이 짙다. 몽구씨는 자동차써비스를 통해 현대자동차의 수도권 이외 지역 판매권을 얻어내는가 하면, 현대정공을 통해 갤로퍼 등의 RV(레저용 차량)를 생산함으로써 현대자동차의 운신 폭을 좁혔다. 명색 세계 10위권의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자동차는 현대정공을 의식한 나머지 RV 애호가의 세계적인 급증세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RV 하나 내놓지 못했다.

    몽구씨는 96년 1월 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대자동차는 그룹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자동차 없는 현대그룹은 상상할 수도 하는 없다”고 못박았다. 숙부와 조카 사이엔 이내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2년 남짓 계속되던 미묘한 신경전은 98년 기아자동차 국제입찰을 둘러싸고 전기를 맞게 된다.

    세영씨 부자는 처음부터 기아차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환위기로 경영여건이 악화된 마당에 빚투성이 기아차를 인수할 경우 현대차마저 부실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 관계자의 얘기는 다르다. “세영씨 부자는,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면 현대차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져 정명예회장이 자신들에게 자동차를 넘겨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기아차 인수에 극력 반대했다”는 것.

    세영씨측은 98년 8월의 1차 입찰에서 기아차의 입찰가를 100원으로 써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대로했고, 그후의 입찰은 몽구 회장에게 일임했다. 몽구 회장은 10월의 3차 입찰에서 삼성과 대우를 제치고 기아차 인수권을 따냈다. 이제 세영씨 부자의 낙마(落馬)는 시간문제였다. 그해 12월 정명예회장은 몽구 회장을 현대차 및 기아차 회장에 임명하고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강등’했다. 세영씨는 이사회 의장에 눌러 앉혔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 후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왔다. 지난해 2월26일 열린 현대자동차 주총에서 몽구 회장은 이사진에 자신의 측근을 앉히려 시도했다. 숙부가 지난 30여년간 현대자동차에 구축해놓은 인맥이 워낙 두텁다 보니 명색이 회장인 자신의 말발조차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영씨는 조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얘기가 정명예회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3월2일, 격노한 정명예회장은 아우를 불러 올려 최후통첩을 했다. “현대자동차의 지분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맏형의 명령에 토를 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세영씨는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물러났다. 몽구 조카의 몫이던 현대산업개발을 ‘위자료’로 받은 것만도 형에게 감사해야 했다.

    아버지를 향하여

    숙부와의 상속분쟁에서 승리한 몽구 회장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친 김에 여세를 몰아 그룹 후계자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참이었다.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갔던 탓일까. 이번엔 그가 ‘모난 돌’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복병(伏兵)은 동생 몽헌이었다.

    장남 몽필씨와 4남 몽우(夢禹)씨는 사망했고, 3남 몽근(夢根·58)씨, 7남 몽윤(夢允·45)씨, 8남 몽일(夢一·41)씨는 이미 그룹에서 독립했으며, 6남 몽준씨는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현대그룹의 차세대 맹주로 거론될 형제는 몽구·몽헌씨 두 사람뿐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형제들의 분가가 완료된 90년대 중반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라이벌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좀더 초조했던 쪽은 몽구씨였다. 몽헌씨가 현대의 불모지대나 다름없던 전자 분야를 개척, 현대전자를 설립 10년 만에 연 3조원의 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으로 키운 데 비해 몽구씨는 그에 비견될 만한 경영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97년 몽헌씨는 몽구씨가 맡고 있던 현대상사까지 수중에 넣었고, 현대 삼성 LG간의 3각 빅딜 과정에도 현대쪽 창구를 맡아 LG반도체 빅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사정을 의식한 몽구씨는 그룹 회장 취임 직후부터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던 종합제철소 사업을 추진했으나 중복투자의 폐해를 우려한 정부의 반대와 IMF 환란에 부딪혀 좌절됐다. 정명예회장은 몽구씨가 회장에 취임하던 96년, 없던 그룹 부회장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가며 몽헌씨를 앉힌 다음 지주회사격인 현대건설을 맡겼다. 이어 98년 1월에는 그를 회장으로 승진시켜 몽구씨와 공동으로 회장직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몽구씨측을 긴장시켰다.

    그후 몽구씨는 아버지의 또다른 숙원인 대북사업을 실현해 신임을 얻고자 했지만 여기에서도 몽헌씨에게 밀리고 만다. 89년에 북한을 다녀온 정명예회장은 몽구씨를 통해 북한측과 물밑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몽헌씨는 98년 초 아버지로부터 “대북사업을 재개하라”는 지시를 받자 마자 이익치(현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현 현대건설 사장) 등의 핵심참모 라인을 가동,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들과 마주앉아 협상의 물꼬를 텄다. 금강산 유람산 관광사업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도 몽헌 회장이었다.

    이 과정에도 몽구씨와 몽헌씨는 마찰을 빚었다. 당시 현대의 대북 접촉 채널로 활동한 일본 규슈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 교수에 따르면 98년 2월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했던 북측과의 첫 회합이 이틀 전에 돌연 취소됐다고 한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현대였다. 고바야시 교수의 설명.

    “정명예회장은 북한과 교섭 직전 몽헌씨를 회장에 앉히면서 몽구 회장은 국내, 몽헌 회장은 해외를 맡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북한이 해외냐 국내냐를 두고 이견이 있었던 듯하다. 그 전부터 북한과 접촉하고 있던 몽구 회장측에서 북한측에 ‘몽헌 회장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는 팩스를 보냈는데, 사정을 모르는 북한은 이 때문에 서둘러 회합을 취소했다. 이 싸움은 명예회장이 ‘북한과의 교섭책임자는 몽헌 회장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해결됐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정명예회장은 대북사업에서 몽구 회장 라인을 배제하고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을 비롯한 몽헌 회장 계열 경영진이 맡는 것으로 창구를 일원화했다. 이들은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직접 접촉하며 사업관련 협의를 해왔는데, 송부위원장은 최근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과 실무협의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이른 인물이다. 몽헌 회장은 송부위원장과 사석에서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박장관은 남북 정상회담 협의과정에 현대 관계자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박장관이 송호경 부위원장과 접촉하던 시점에 정몽헌 회장이나 이익치 회장이 중국에 머물렀던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MK의 선제공격

    최근 몽구 회장의 이익치 회장 인사로 촉발된 몽헌 회장과의 충돌은 이와 같은 세 불리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몽구 회장의 선제공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몽구 회장측은 특히 자동차 소그룹 분리를 앞두고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설비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할부 판매 부담 때문에 막대한 자금력을 필요로 하는 자동차사업의 특성상 반드시 현대증권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명예회장과 몽헌 회장의 신임을 등에 업은 이익치 회장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 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떠난 시점을 기회로 삼았다. 전격적으로 인사를 단행하면 명예회장으로서도 이를 번복하진 못하리라고 예상한 듯하다.

    몽구 회장은 96년 몽헌 회장으로부터 비슷한 경우를 당한 바 있다. 몽구 회장이 그해 8월 남미 출장 중일 때 몽헌 부회장이 현대건설 사장에 대한 전격 인사를 단행했던 것. 그는 당시 몽구 회장 계열로, 몽헌 부회장과 의견충돌이 잦았던 심현영 현대건설 사장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이내흔 현대산업개발 사장을 앉혔다. 그룹 종합기획실장을 역임한 심사장의 그룹내 위상도 만만치 않았지만, 정명예회장은 몽헌 부회장의 조치를 사후 승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명예회장의 반응이 달랐다. 몽헌 회장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몽구 회장의 인사조치를 철회한 것이다. “몽헌 회장은 현대전자를 통해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므로 현대증권은 자동차 그룹으로 가야 한다”는 몽구 회장측의 간곡한 설득도 먹혀들지 않았다. 몽헌 회장은 귀국 후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이익치 회장 인사를 원점으로 돌리면서 몽구 회장 계열인 고려산업개발(현대자동차가 최대 주주) 회장 인사까지 단행해 그룹 회장의 파워를 과시했다.

    그렇다고 몽헌 회장의 앞길이 순탄하게 트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업계 1위로 떠올랐지만 거래수수료 감소 등에 따라 지난해 수준의 수익을 내기 힘들 전망이고, 현대건설도 건설경기 침체로 내수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전자 또한 기복이 심한 반도체 가격 때문에 안정된 수익이 불투명하다.

    더욱이 현대그룹은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구조조정보다는 유상증자에 주력했던 탓에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주가가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지난해 증권시장에 들어온 32조원의 증자액 중 12조원이 현대 계열사 증자액이었다. 이 때문에 매출액 순위 1위의 현대그룹 시가총액은 3월24일 종가 기준 26조5063억원으로 삼성그룹(74조3559억원)과 SK그룹(37조296억원)에 뒤지는 것은 물론, 삼성전자 주식 시가총액(55조7605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여곡절 끝에 형제간의 내분은 일단 수습됐지만, 몽구와 몽헌 두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낙점’을 주장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광경은 정명예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변함없는 ‘그랜드 디자인’

    그러나 현대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번 사태가 정명예회장 특유의 후계자 관리술과 분가(分家) 철학에서 비롯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향후의 상속과 계열사 분리에 대한 정명예회장의 ‘그랜드 디자인’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으며, 언젠가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도 결국 그가 주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의식한 두 형제의 경영 경쟁도 그 ‘디자인’에서 웬만큼 의도됐던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명예회장은 현대중공업과 현대건설 두 핵심 지주회사의 최대 지분(각각 11.56%, 4.58%)을 거머쥔 채 후계구도를 못박지 않음으로써 그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2세들의 경쟁을 자극하는 한편 이를 통해 그들의 능력과 성향을 치밀하게 관찰해왔다.

    현대중공업과 현대건설의 정명예회장 지분은 다른 계열사에 대한 거미줄 같은 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를 정교하게 지배하고 있다. 중공업은 자동차 증권 상사 고려산업개발의 1∼2대 주주며, 건설 역시 상선 자동차 중공업 등의 주요 주주다.

    포스트 정주영 시대의 진정한 후계자는 시가 4000억원대에 이르는 정명예회장의 핵심 지분을 물려받을 인물이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은 이 4000억원짜리 ‘옥새(玉璽)’의 향방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는 3월27일의 경영자협의회에서 일단 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몽헌 회장의 뒤에는)제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은 다 저와 의논할 것이니까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며 수렴청정의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몽헌 회장에게 자신의 지분을 떼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0년 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현대 경영에 관여할 것이냐”는 질문에 “한 25년쯤은 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되받았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백수(百壽)를 확신하고 있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거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기력은 여전히 왕성하다고 한다. 그가 지프를 타고 몇시간씩 서산농장을 돌아볼 때는 동승한 임원들이 먼저 힘에 부쳐 꾸벅꾸벅 졸 정도라는 것.

    이처럼 건강을 자신하는 정명예회장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는 실질적인 경영권을 할양하지 않고 저울질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됨에 따라 현대의 대북사업이 활기를 띠게 된다면 몽헌 회장의 행보가 빨라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몽헌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정명예회장이 생각보다 빨리 특단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헌 회장의 구상중인 대북사업은 영농사업과 공단 개발, 관광·레저사업에 이르기까지 1, 2, 3차 산업을 종횡으로 넘나든다. 경제기반이 무너진 북한으로선 실로 국가를 새로 세우는 작업에 가깝고, 몽헌 회장으로서도 전 그룹 차원의 총력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다.

    몽헌 회장은 대북사업과 관련, 4월4일 정명예회장과 일본을 방문했다가 8일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명예회장만 귀국했다. 몽헌 회장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실이 발표되던 4월11일 현재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冬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