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인영씨에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찾아들었다. 매출 1조원 돌파를 눈 앞에 둔 89년 7월,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와 언어장애에 빠진 것. 워낙 증세가 심각해 재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소식을 듣고 주영씨가 병상으로 달려왔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고 드러누운 인영씨를 보자 감정이 복받쳤다. 형이 시키면 부산항 하적장으로 미국으로 중동으로 발바닥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도록 뛰어다니던 아우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맞잡고 눈물의 화해를 했다.
주영씨는 “한라가 어려워지면 내가 도울테니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라”며 인영씨가 미국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뒤에 주영씨는 동생들과 미국을 방문, 병상에서 고희를 맞은 인영씨에게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장자의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주영씨는 인영씨와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에도 한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라의 주력기업으로 자동차 부품을 주로 생산하는 만도기계는 대부분의 생산품을 현대자동차에 납품했고, 한라시멘트가 옥계공장을 지을 때도 주영씨가 건설비용을 지원하고 채무 보증을 서줬다. 현대는 한라 계열의 인천조선이 어려움을 겪자 설계도면을 빌려주기도 했다.
주영씨는 인영씨가 분가하는 과정에 구설에 올랐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다른 동생들에 대한 분가는 소리없이 추진했다.
69년부터 현대시멘트를 독자적으로 운영해온 순영씨에겐 현대시멘트와 서한개발 등을 떼주며 분가시켰다. 순영씨는 이를 바탕으로 (주)성우, 현대종합금속, 성우정공, 현대성우리조트 등 1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성우그룹을 일으켰다. 막내동생 상영씨에게는 고려화학과 (주)금강을 물려줘 금강고려화학그룹(현 KCC그룹)의 토대를 마련하게 했다.
주영씨는 형제들이 분가한 뒤에도 한라그룹과 그랬듯 끈끈한 보완·협력관계를 유지, 이들이 분배받은 계열사를 중심으로 다각화해 또다른 재벌로 성장하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성우그룹의 현대종합금속이 생산하는 용접봉은 대부분 현대중공업에서 사들이며, 서한정기가 만드는 브레이크와 서한벤딕스의 안전벨트는 현대자동차에 납품된다. KCC그룹에서 생산하는 도료와 유리제품의 주 수요처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다. 현대는 이들 형제그룹 계열사들에 정상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거나 이들이 발행한 CP(기업어음)를 낮은 금리로 매입, 부당 내부거래로 지탄받기도 했다.
2세들의 부상
정주영씨는 62년 독일 유학중 사망한 동생 신영씨의 몫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85년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신영씨의 부인 장정자(張貞子·65)씨에게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겼고, 유복자인 몽혁(夢爀·39)씨에겐 극동정유(현대정유 전신)를 물려준 것.
원래 극동정유는 장정자씨의 동생인 홍선(洪宣·60)씨가 경영하던 회사였는데, 투자 파트너였던 미국 쉘석유가 철수한 이후 경영난에 허덕이자 정주영씨가 사돈 집안을 도울 생각으로 홍선씨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따라서 몽혁씨는 친가 기업인 현대를 통해 외가 기업의 경영권을 양도받은 셈이다.
정주영씨의 매제(여동생 희영씨의 남편) 김영주(金永柱·80)씨는 정씨가 40년대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 때부터 정씨 형제들과 함께 일했는데, “고장이 나서 꼼짝 않던 기계도 김영주만 다가가면 저 혼자 굴러간다”고 했을 만큼 기계에 해박했다. 현대건설 창업 이후에는 경부고속도로와 울산조선소 같은 굵직굵직한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공사 중 사고로 인부가 죽으면 동요하는 동료 인부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기꺼이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고, 주영씨의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기도 했다.
정씨는 “김영주는 총각 때부터 평생 동안 내가 무슨 일을 시키든 한 번도 군소리를 붙인 적이 없다. ‘예 알겠습니다’, 평생 이 간단한 대답으로 내 뜻을 따라줬다. 또한 그렇게 대답한 일은 언제나 훌륭하게 수행했다”며 그를 치켜세웠다. 정씨는 그로 하여금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인연을 맺게 했고, 한국프랜지공업을 떼 주면서 현대로부터 독립시켰다.
정주영씨는 아들을 8명 낳았다. 평소 “자식들이 모두 국내외에서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전문경영인 자질도 갖췄다”며 뿌듯해 했던 그는 학업을 마친 아들들을 일찌감치 현대 계열사에 입사시켜 경영수업을 쌓게 했고, 기대만큼 능력을 발휘하고 때가 이르렀다 싶으면 지분을 내주고 직접 경영을 맡게 했다.
현대 집안의 전통에 따를 것 같으면 정주영씨의 후계자는 당연히 장자인 몽필(夢弼)씨였다. 실제로 몽필씨는 아버지의 배려로 현대양행 과장, 현대건설 상무, 현대상사 부사장 등을 거치며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주영씨는 장남에 대한 기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몽필씨에게 지나칠 만큼 엄격하게 대했다. 훗날 그 스스로 “늘 윽박지르며 키운 것을 후회한다”고 털어놨을 정도였다. 아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불같이 화를 냈고, 내성적이었던 몽필씨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앓기만 했다.
몽필씨는 지나친 부담감 때문에 한때 술에 의지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경영을 맡긴 동서산업이 부도 직전에 이르자 영국으로 도피해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세영씨와 상영씨 등 삼촌들이 중간에 나서 어렵사리 그를 귀국시켰는데, 주영씨는 ‘돌아온 탕아’에게 인천제철 경영을 맡기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러나 몽필씨는 경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82년 4월 출장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뜨고 만다.
정몽구 회장 시대
장남을 잃은 슬픔에서 힘겹게 헤어난 정주영씨는 몽필씨의 처남인 이영복(李英馥·54)씨를 동서산업 사장에 임명, 유족들을 챙겼다. 정씨는 이씨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이번 인사에는 공적인 이유보다는 사적인 감정이 더 많이 들어 있다”면서 아들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그는 몽필씨의 혈육인 은희(29)·유희(27)씨가 아버지를 잃은 지 8년 후 어머니마저 여의자 두 손녀를 청운동 자택으로 데려와 지성으로 보살펴 키웠다.
두 자매는 현재 동서산업 지분을 2.95%, 2.81%씩 보유한 대주주다. 98년 동서산업이 건설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자 동서관광개발(동서산업의 100% 출자회사)이 동두천과 제주도에 짓고 있던 2개의 골프장을 시공자인 현대건설과 현대산업개발이 각각 매입, 자금난에 숨통을 터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였음은 물론이다.
몽필씨 일가의 지분 정리를 마친 정주영씨는 대규모 인사를 단행, 전문경영인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2세 중심의 경영체제로 분위기를 일신했다. 84년 1월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주영 회장은 왼쪽에 둘째 아들인 정몽구 현대정공 사장, 오른쪽에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을 배석시켜 후계구도의 일단을 내비쳤다.
형의 타계로 사실상의 장자가 된 몽구씨가 그룹 차원의 대외 공식행사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포스트 정주영’은 동생이냐 아들이냐에 재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몽필씨가 세상을 뜬 뒤에는 6남 몽준(夢準·49)씨를 주목하는 이가 많았다. 학교 공부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MIT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수재인데다 경영능력도 뛰어나 아버지의 신임이 두터웠다.
몽필씨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인 82년 5월, 몽준씨가 불과 31세의 나이로 형들을 제치고 그룹 주력기업인 현대중공업 사장에 오르자 그가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당시 몽구씨는 현대정공 현대자동차써비스 현대강관을, 5남 몽헌씨는 현대상선을 맡아 경영하고 있었지만 이들 기업은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 축에 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86년 12월 “항간의 추측과는 달리 2세들 대신 성실하고 능력있는 동생을 후계 회장으로 선임할 계획”이라고 밝혀 정세영 회장 시대를 예고했다. 이듬해 2월 세영씨가 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때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주영씨는 “정세영 회장체제는 결코 과도체제가 아니다. 정회장이 앞으로 10년간은 그룹을 이끌 것”이라며 세영 회장을 ‘임시 관리자’로 보는 시각에 쐐기를 박았다.
그후 몽준씨가 정계 입문을 선언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데 이어 88년 4월13대 국회에 진출하자 비로소 정세영 회장 시대의 개막이 실감됐다. 이 무렵부터 세영 회장에게 본격적으로 줄을 대는 임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결국은 몽구씨에게 대권이 넘어갈 것이라는 풍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도 그럴 듯이 세영 회장이 취임한 뒤에도 중장비사업 우주항공사업 헬기사업 엔진사업 등 당시의 ‘첨단 미래사업’들은 속속 몽구씨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정명예회장은 91년 10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딱 잘라 말하지만 몽구가 그룹 회장을 맡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 중 그룹 회장을 맡는 것은 정세영 회장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으나 그리 설득력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정세영 회장이 10년간은 그룹을 이끌 것”이라는 정명예회장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몽구가 그룹 회장을 맡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95년 12월, 정명예회장은 세영 회장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하고 몽구씨를 그룹 회장에 앉혔다. 69년 평사원으로 현대에 입사했던 몽구씨가 30년에 걸친 ‘세자’ 신세를 마감하고 마침내 보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부친과 숙부에 대한 예우로 나이 60이 다 되도록 현대 사옥의 뒷문으로 출퇴근했던 몽구씨는 그제서야 정문 출입의 ‘감격’을 맛본다. 물론 ‘상왕’의 통치는 그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시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정명예회장이 80대에 접어듦에 따라 그의 후계체제가 불투명한 데 따른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문에 지난날 현대의 최대 강점이었던 강력한 리더십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 있는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87년 부친의 타계로 회장에 오른 것이 45세 때였고, LG의 구본무 회장은 50세 되던 95년에 구자경 회장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았는데, 당시 57세였던 몽구씨는 여전히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96년에는 코오롱의 이동찬 회장이 아들인 웅렬 부회장에게, 금호의 박성용 회장이 동생인 정구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길 예정이어서 정명예회장으로서도 더 이상 양위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현대자동차 놓고 신경전
세영씨는 이와 같은 인사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 굵은 조카들이 득실대는 마당에 일흔을 코 앞에 둔 자신이 천년 만년 그룹을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외아들 몽규(夢奎)씨는 그때 겨우 서른 셋이었다. 세영씨는 잠시 위탁 관리했던 그룹을 적통(嫡統)의 조카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자신이 평생을 바쳐 키운 현대자동차를 물려받아 독립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에 유학, 정치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세영씨는 석사학위를 따던 해인 57년, 주영씨의 요청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현대건설 상무로 현대 경영에 참여했다.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을 유학 보내준 맏형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67년 현대자동차 설립과 함께 사장을 맡은 이래 30년 동안 기름밥을 먹어가며 현대를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로 길러냈다. 75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독자모델 ‘포니’를 개발한 데 이어 85, 86년에는 캐나다와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가 진출 첫 해에 수입차 판매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운 주역이었다. 그랬던 만큼 자동차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세영씨는 몽규씨가 고려대에 다닐 때 비밀리에 그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으로 보내 잡역부 생활을 체험케 했고, 88년 현대자동차 회계과 대리로 입사케 한 뒤에는 신입 기술자를 교육시키는 공장내 자동차학교에 입소시켜 자동차의 구조와 조립기술을 배우게 하는 등 일찍부터 자동차 승계에 대비했다고 한다. 세영씨 부자는 94년부터 장내 거래를 통해 꾸준히 현대자동차 주식을 매입하기도 했다.
그의 바람은 순탄하게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몽구씨를 그룹 회장에 발령한 95년 12월 인사에서 몽규씨가 현대자동차 부사장에서 몇단계를 건너뛰어 일약 현대자동차 회장에 임명된 것. 당시 몽규씨의 현대자동차 지분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그는 96년 7월 현대자동차 보통주 13만주(시가 40억원)를 사들여 지분율을 0.71%에서 1.04%로 끌어올렸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세영씨도 공개 석상에서 “현대자동차가 세계 일류라는 평가를 받을 때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동차 사업을 챙기고 싶다”고 하는 등 자동차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자동차에 관한 한 정주영 창업주의 애정과 집착도 세영씨에 뒤지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광복 후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그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아우의 몫”이라는 뜻을 밝혔지만, 이를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엔 자동차가 너무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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