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오후 7시 서울 서초동 ‘레떼컴’ 김경익(34) 사장의 방. 인터넷 카드업체인 레떼컴의 김사장 방에 화장품 전문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코스메틱랜드’의 최선호(35) 사장이 찾아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벤처기업 사장들의 격식을 차린 만남이라기보다는 오랜 친구가 재회한 듯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누고 최근 벤처기업의 동향 등에 대한 대화가 진행될 즈음 인터넷 검색엔진인 ‘네이버컴’의 이해진(34) 사장이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사장은 네이버컴이 지난 3월16일 인터넷 무료전화인 다이얼패드로 유명한 ‘새롬기술’과 인수·합병한다는 발표 이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터라 가벼운 핀잔이 쏟아졌다. 하지만 비난하는 어조라기보다는 큰 결단을 내린 것에 대한 격려성 발언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해진 사장은 장기간 ‘잠수’한 ‘죄가(罪價)’로 이날 저녁값을 내기로 했다(하지만 4월11일 새롬기술과 네이버컴은 코스닥 시장의 침체에 다른 새롬 주가의 하락때문에 인수합병을 포기했다).
이어 허겁지겁 김사장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전자우편을 통한 광고 마케팅 홍보 등을 대행하는 ‘에이메일’의 백동훈(36) 사장. 이제 막 인쇄돼 나온 책이라며 자사에서 발행하는 ‘메일 매거진 가이드’를 내놓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시계는 이미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밥 먹고 합시다”를 외치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가 있지만 이들은 부근의 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9년 10월부터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만나는 이 모임은 ‘시작닷컴’.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기술개발에 땀흘리던 순수한 시절을 잊지 말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전한 벤처문화를 정착시키자는 취지로 시작한 친목 모임이었으나, 지난해 12월에는 아예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들을 모아 시작닷컴(www.sijaq.com)이라는 ‘브리지 사이트’를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새로운 벤처기업을 양성하는 ‘벤처 인큐베이팅’ 노릇을 하는 한편, 자신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는 상담 및 컨설팅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오전 8시 조찬모임을 가졌지만 다음날이 휴일이어서 이날은 오랜만에 술 한잔 하기 위해 저녁에 모였다는 것이 김경익 사장의 설명. 뒤늦게 저녁식사 자리에 합류한, 세대별 사이트와 엔터테인먼트 포털사이트인 ‘인츠닷컴’을 운영하는 이진성(34) 사장도 “저녁시간에 이렇게 자리를 같이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며 “저녁에 만나니 마음이 여유롭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이 모임에 참가하기 직전 홍콩 파이어니어 캐피털 등 해외자본과 하나은행 LG창업투자 등 18개 업체로부터 400억원을 투자유치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발표한 직후라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업과 벤처업계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벌어진 이들의 맥주파티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내가 산다 100잔”
지난 3월16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정보카페’에서는 정보통신기업, 벤처기업, 벤처투자사, 벤처컨설팅사, 관련정부기관, 언론인 등 200여 명이 모여 명함을 교환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작닷컴’이 7명의 벤처기업 사장만 모이는, ‘진입장벽’이 있는 폐쇄적인 모임이라면 T-밸리 클럽은 참여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개된 모임. ‘내가 살게 (맥주)100잔’이라는 슬로건이 모임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홍보대행사인 링크인터내셔널이 주관하고 삼보컴퓨터가 주최하는 이 모임은 벤처와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아이디어와 사업 아이템을 공유하고 격의 없이 의견을 교환한다는 취지로 지난 1월 처음 모였다. T-밸리의 T는 벤처밸리로 다시 태어난 테헤란로의 ‘Teheran’, 세계 최고의 기술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Technology’, 그리고 벤처인들이 추구하는 신조류를 의미하는 ‘Trend’라는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 테헤란 밸리의 각 기업이 매달 한 번씩 릴레이식으로 맥주 100잔을 산다.
모임 성격과 규모는 판이하지만 테헤란로 벤처밸리에는 시작닷컴과 T-밸리클럽 같은 오프라인 모임이 봇물을 이룬다. 이름이 알려진 것만 해도 50 개가 넘고 이름 모를 모임까지 모두 합치면 줄잡아 수백 개는 될 것으로 추산된다.
등록된 업체만 5000여 개에 이르고 등록되지 않은 회사까지 합치면 4만여 개나 되는 벤처기업. 모임이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모임을 이루는 구성원의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온라인에서 일하고 온라인에서 대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얼굴을 맞대고 부대껴보겠다는 열망은 같다.
2∼3년 전부터 동호인들의 소모임 형태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던 벤처인들의 모임은 최근에는 성공한 벤처기업과 대기업을 주축으로 전략적인 모임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 벤처빌딩에 입주한 회사끼리 업종간 정보교환과 친목도모를 위해 모임을 결성한 경우도 있고, 해외시장에 공동 진출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사례도 보인다.
‘벤처리더스 클럽’. 이름이 시사하듯 소위 벤처업계에서 이미 성공한 ‘벤처 1세대’인사들이 주축인 모임이다.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 이민화 메디슨 회장,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 이건환 연우엔지니어링 사장, 김형순 로커스 사장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벤처기업 사장들이 회원이다. 거기에 서갑수 한국기술투자 사장, 연병선 한국IT벤처투자 사장, 곽성신 우리기술투자 사장, 이장우 경북대 교수, 공종렬 정보통신부 국장 등 벤처캐피털 경영진, 학계·관계·언론계·법조계 인사가 골고루 참여했다. 정보통신부장관 중소기업청장도 가끔 보인다.
벤처 신화를 이룬 신흥부자들이 사회·문화활동을 통해 이익을 환원하고 새로운 벤처문화를 정립하는 것이 지난 1월25일 벤처리더스클럽이 출범할 당시 대외적으로 공표한 설립취지. 이 밖에 ▲실리콘밸리 및 이스라엘 벤처기업인들과의 해외 네트워크 확대 ▲차세대 벤처기업인의 발굴 및 육성 ▲기업이익의 사회환원을 위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에 힘쓴다는 목표를 정했다.
테헤란밸리는 지금 미팅중
‘IB(Internet Business)리그’도 가입한 회원이 300 명이 넘는 모임. 인터넷 분야의 벤처기업인과 창투사직원, 대학교수, 언론인 등이 중심이 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 위한 모임으로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오후 7시에 만난다.
김이숙 e-코퍼레이션 사장과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사장, 장진우 3W투어 사장, 최선호 코스메틱랜드 사장, 전성영 지오이네트 사장, 이경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등이 창립멤버. 3월29일 르네상스호텔에서 150여 명이 모여 1시간여 동안 ‘스탠딩 파티’식으로 가벼운 인사와 정보교환을 포함한 식사를 한 뒤 오후 8시부터 메인행사에 들어갔다.
IB리그의 특색은 신참자에게 공식적으로 인사할 기회를 준다는 것. 이미 그 업계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내로라 하는 ‘벤처선배’들에게 동등한 자격으로 명함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이날도 새로 온 벤처인 10여 명에게 각각 3분씩 ‘스피치’를 할 기회가 마련됐다.
하지만 신참자에게 많은 기회를 주기 때문에 기존 회원 중 성공한 사람들이 일부 이탈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3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주제없이 와글와글 떠들다가 신참자의 ‘인사말씀’이나 듣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것이 ‘성공한 사장’들의 대체적인 탈퇴 이유. ‘개나 소나’ 다 참가하는 영양가 없는 모임에서 시간낭비하기 싫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IB리그를 주도하는 e-코퍼레이션측은 “기존 회원들이 대거 이탈하는 현상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 모임을 만든 이유가 새로운 사람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데 있으므로 신참자들의 참여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4월로 창립 1주년을 맞은 IB리그는 ‘홈커밍데이’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지난 1년간 눈부시게 발전한 회원사나 벤처기업 사장을 초청해 성공담을 듣겠다는 것.
초창기 벤처 모임은 자생적인 소모임이나 직능형 동호인회로 출발했다. 인터넷마케팅포럼, 한국웹마스터클럽, 말금회, 이브 등이 대표적. 1998년 2월 출범한 인터넷마케팅포럼은 기획·마케팅·웹디자인, 프로그래밍 실무자들이 만든 직능형 모임이다. 김형택 엔웍스 팀장이 대표를 맡고 정재윤 기획공방 사장, 김희정 시이즈 사장, 송희원 LG텔레콤 팀장 등 47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 수가 워낙 많아 이메일을 통해 웹마케팅 정보를 교환하며 무역·웹프로모션·전자상거래 등 5개 소모임별로 격주 세미나를 연다.
1997년 5월 소위 테헤란밸리가 자리잡기 이전에 이미 창립된 한국웹마스터클럽은 기업체 웹사이트 관리자들이 주축이다. 웹이 아직 생소하던 시절 생긴 모임으로 당초 목적은 건전한 웹문화를 한국에 심는 것. 이제는 정보교환과 함께 구인구직 등 헤드헌팅도 해주며 매달 기술세미나를 개최한다.
20여 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제는 1000여 명에 이르렀고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하루 200여 통의 이메일이 오가는 등 온라인 모임이 활발하지만 지역별로 ‘번개’모임도 자주 갖는다. 각 기업의 홈페이지를 모두 이들 웹마스터가 주무르기 때문에 이들이 끼치는 영향은 지대해서 초기에 각 기업 홈페이지에 태극기 달기 운동을 전개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최근에는 회원간에 경조사를 챙겨주는 일도 많아 자발적으로 모금하기도 한다.
1997년 11월 만든 말금회는 그해 가을 컴덱스 참가자 20여 명의 소모임. 벤처 창업정보를 교환하다 한·중·일 3국에 퍼져 있는 한국 벤처기업인의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활동하는 원성묵 아시아인트로닷컴 사장이 대표를 맡고 중국 베이징에 있는 박호민 K·C 사장과 문성일 코스모정보통신 사장, 성필문 어나더월드 사장, 이광석 인크루트 사장 등이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지난해 말 구성된 이브는 전자상거래와 인터넷 비즈니스를 주로 연구한다. 이태종 싸이버텍홀딩스 전자상거래담당이사를 중심으로 이상성 파이언소프트 사장, 최영일 네트로21 사장 등 벤처기업인과 대학교수 변호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의 동호회
골치아픈 사업이야기를 벗어난 순수한 동호회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보드카모임’이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까당스’ 등이 대표적. 보드카모임은 말 그대로 술과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모임이다. 1년 전쯤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앱솔루트 보드카’를 마시던 장영승 나눔기술사장, 김홍선 시큐어소프트사장, 김택진 엔씨소프트사장, 나성균 네오위즈 사장 등이 즉석에서 만들었다. 서울대 합창 동아리 ‘메아리’ 출신인 장사장이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모임의 시작을 자축했다.
프랑스어로 운율 또는 선율을 의미하는 ‘까당스’는 음악을 매개로 정보통신인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모임이다. 지난 1998년 말 몇몇 정보통신인들이 취미얘기를 하며 비공식적으로 만나던 이 모임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30여 명도 안 되는 작은 모임이었지만 최근에는 회원사가 100여개에 이를 만큼 덩치가 커졌다. 참여업체들의 면면을 보면 현대정보기술, 삼성SDS, 다음커뮤니케이션, 유니텔, 드림라인, 시티넷 등 벤처기업에서 PR코리아, 벤처PR, 링크인터내셔날, 드림커뮤니케이션 등 홍보대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까당스는 매월 한 번씩 모여 가수나 연주가들을 초청해 라이브 연주를 즉석에서 들으며 음악에 대한 정보를 교류해왔다. 올해에는 방송과 연계한 대규모 라이브쇼를 개최,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돕기에 나설 계획이다.
학연이나 지연 등 기성세대가 중시하는 ‘연줄문화’를 거부한다는 벤처지만 그래도 학연(學緣)이나 사연(社緣)으로 얽힌 모임도 있다. 스탠퍼드대 벤처비즈니스는 스탠퍼드대 비즈니스스쿨 연수 동기생들이 만든 벤처 모임. 당시 43명이 연수를 받았는데 이중 30명 정도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 전하진 사장, 이기대 드림서치 사장, 김병기 지오인터랙티브 사장, 김옥경 신화전자회장 등이 회원이다.
한국벤처포럼은 지난해 말 SK그룹의 후원으로 한국경영연구원과 벤처기업 연구회가 손잡고 만든 모임이다. 벤처기업 발굴과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경영기법 강연과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용희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연구원장) 등 학계 인사와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 임병진 성진씨앤씨 사장, 박석봉 지식발전소 사장, 임병동 인젠 사장, 배재광 벤처법률지원센터 소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 SK SK상사 SK텔레콤 SK옥시케미칼 등 SK그룹 계열사들이 돕고 있다.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 출신들도 ‘제일닷컴’이란 깃발 아래 자기들만의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명환 부사장, 새롬기술의 김대선 이사, 옥션의 이유찬 실장 등 70여 명이 멤버다. 모회사격인 제일기획에서도 이 모임에 직간접적인 관리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 성격은 다르지만 SVC포럼은 서울 역삼동 아주빌딩의 서울벤처타운에 입주한 46개 벤처기업 사장으로 구성됐다. 서로 다른 업종간 사업정보를 나누고 투자유치에 공동 협력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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