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200년 6월13일 AM10:00, 평양 >
2000 년 6월13일 오전 10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 량 행렬이 평양 중심부에 위치한 만수대의사당 현관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바로 눈 앞에 둔 순간이다. 방 탄 리무진 안의 김대통령은 전날의 격정이 다시금 일렁거림을 느꼈다.
그 전날인 6월12일, 김대통령 일행은 서울에서 판문점을 거쳐 평양- 개성간 고속도로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차량 행렬이 평양 시내에 진입하자 연도에 대기하고 있던 환영 인파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여 성과 어린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환영 인파는 김대통령이 2박3일 간 머물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할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판문점을 건너면서부터 초긴장 상태에 있던 경호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맞아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김대통령이 군중에게 답례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기라도 한다 면…?’ 경호팀 요원들은 온갖 불길한 상상을 애써 떨쳐내며 사방을 경계했다. 94년 김영삼(金永三) 대통령 시절,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 하면서 경호팀은 평양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수행원들을 다 ‘버리고’ 대통령만 평양 시내의 중국대사관으로 피신시킨다는 계 획까지 마련했었다.
그러나 측근들의 그런 긴장감에는 아랑곳없이 김대통령의 흉중에는 격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환영인파는 사회주의 국가의 장기 중 하나인 군중동원임이 한 눈에 보였지만, 그토록 열렬한 환영을 직접 받고 나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반나절 거리도 못되는 이 곳까지 오는 데 50여 성상(星霜)이 걸렸구나…’ 김대통 령의 눈가에는 어느덧 물기가 어렸다.
‘준비된 대통령’의 ‘가장 잘 준비된 부분’
평양에 도착한 12일 저녁에는 북한의 형식상 국가 수반인 김영남(金 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주최로 목란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 에 참석했다. 1990년 10월 강영훈(姜英勳) 당시 총리가 이끄는 2차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에도 이 곳 목란관에서 만찬이 열렸었다. 평양시 중구역 창광거리에 위치한 목란관은 주변을 4m 담 장으로 둘러싸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한 북한 속의 별세계다. 당시 만찬에 참가했던 우리측 대표단은 “북한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니… ” 하면서 그 화려한 내부 치장에 놀랐었다.
만찬회장에는 북한이 자랑하는 보천보 경음악단이 시종 은은한 선율 을 연주하고 있었다. 남북한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남과 북의 교류협력과 평화공존은 세계평화에 기여하 는 일”이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참석자들마다 높이 쳐든 크리스털 글라스에 대형 샹들리에에서 나온 빛이 부딪쳐 반짝 거렸다.
백화원 초대소에서 보낸 첫날 밤, 김대통령은 온갖 상념과 구상으로 밤새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김대통령은 숙소에 통일부장관, 외교안보수석 등 참모 들을 불러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마지막 점검회의를 주재했다. 회의 내용은 서울에서 이미 몇 차례씩 논의한 사항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 다. 참모들은 누구보다 통일문제에 정통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김 대통령에게 구태여 이런저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김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이 날을 준비해왔다. 그런 준비 중에는 회 담 파트너에 대한 연구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야당 총재 시절 김 대통령은 “감옥(5공 초기)에서 남북문제를 푸는 데 있어 김일성(金 日成)과 여러 가지 경우의 수(手)를 놓고 장기를 둬 이겼다”고 말 한 적이 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는 곧바로 ‘김정일(金 正日) 연구’로 연구 대상이 옮겨졌다. 처음에는 박보희(朴普熙) 통 일그룹 회장,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개인교사’가 돼 주었다.
지난해 통일부 보고에서 김대통령은 “북한은 국가나 노동당보다 김 정일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를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 고 말했다. “과거 정권은 그를 형편없고 무능한 사람으로 설명했지 만 김일성 사망 후 정권을 장악해 나가는 것을 볼 때 똑바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지난 2월 일본 ‘도쿄 텔레비젼 방송’과 인터뷰에서 김정일을 “판단력과 식견을 갖춘 실용주의자”라고 묘 사한 것도 단순히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이런 집중적인 연구의 결과 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스타일은 김대통령과 다르지만 매우 치밀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통치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정보 전 문가들도 동의하고 있었다.
사실 김대통령은 외국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가질 때마다 상대방의 정치성향, 취미, 철학, 가족관계, 특성 등을 여러 측면에서 파악하 는 치밀함을 보여왔다. 그리고 이런 사전 준비는 실제 회담장에서 대화 실마리를 개인적 관심사에서 끌어내 의제를 주도해가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은 이른바 ‘가장 잘 준비된 부 분’인 것이다. 이제 그 진면목을 보여줄 순간이 다가왔다.
10시 정각, 이윽고 김대통령이 탄 차가 만수대 의사당 현관에 멈춰 섰다. 현관 앞에는 놀랍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 부가 대거 도열해 있었다. 생전의 김일성 주석은 외국 사절이나 정 부 수반을 만날 때 대체로 건물 안의 접견홀에서 만났다. 이렇게 보 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관 앞까지 나온 것은 북한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예우인 셈이다.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통령에게 다가왔다. 작열하 는 카메라 플래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순간이 사진으 로 기록되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네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환 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모습을 내보인다는 게 신경 쓰이는 듯 약간 어색한 몸짓이 다.
“반갑습니다”
김대통령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두 사 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 순간, 전세계가 숨을 죽이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상들의 대도박’
남과 북, 갈라진 체제만큼이나 극단적으로 상반된 정치 역정을 걸어 온 두 사람이 만났다. 투옥과 연금을 반복하며 죽음의 언저리에까지 갔던 김대통령과 세계사상 초유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서 차곡차곡 후계 수업을 받아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인동초‘로 상징되는 야 당 투사와 사회주의 왕국의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약관 27세였던 1969년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차관급)과 선전선동부 부부장, 32세가 되던 74년에는 정치국 정치 위원이자 ‘당중앙’으로서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 자리에 올 랐다. 그 시절 김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71년)로 나섰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73년에는 일 본 도쿄에서 납치돼 현해탄 바다 에서 수장(水葬)될 뻔한 일생일대 의 수난을 겪고 있었다.
1980년 김대통령이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82년 12월 쓸쓸하게 미국 망명의 길을 오르던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 정치국 상무위원·비서·군사위원으로서 ‘사실상’ 자신의 ‘왕국 ’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 역정의 차이는 두 사람의 성격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스스로가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을 단점으로 꼽을 정도 로 매사에 신중하고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인 김대통령과, 한때 ‘기 벽’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만큼 즉흥적인 면모가 강한 김정일 국방 위원장. 김대통령은 집권 후 해박한 지식으로 온갖 일을 직접 챙기 는 스타일을 보여온 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른바 ‘광폭(廣幅) 정치’ ‘인덕(仁德) 정치’로 표현되는 ‘통 크고 아량이 있고 자 애스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애써왔다.
또, 김대통령이 논리적이고 토론을 즐기는 외향적인 성격이라면, 김 정일 국방위원장은 지금껏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 을 정도로 ‘베일 속의 인물’이었다. 김대통령이 포도주 1∼2잔 정 도의 주량에 담배 연기조차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데 비해 김정일 국 방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소문난 ‘헤네시 코냑 애호가’에다 ‘체인 스모커’다.
이렇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모든 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 각 자 가슴속에 서로 다른 ‘계산서’를 품고서. 바야흐로 ‘정상들의 대도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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