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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시나리오|미리보는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운명의 대도박?

  • 송문홍 songmh@donga.com

2000년 6월 13일 운명의 대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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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6월12∼14일에 평양에서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미리 그려본 것이다. 남북이 정상회담에 합의 한 4월8일부터 실제 회담일까지는 불과 60여일. 양측이 보낸 비밀 특사들 사이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합의인만큼 의제·의전·경호· 통신·방북단 규모 등 구체적인 회담 준비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 다.

그러나 이런 실무적인 부분에서 합의를 이루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 을 것으로 보인다. 94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전례’가 있기 때 문이다. 당시 이홍구(李洪九) 통일원장관과 김용순(金容淳) 최고인 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은 6월28일 판문점에서 열린 13시간에 걸친 마라톤 예비접촉에서 94년 7월25∼27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그 후 두 차례 실무접촉(7월1, 2일), 통신 실무접 촉(7월7일), 경호 실무접촉(7월8일) 등을 통해 초스피드로 세부일정 과 절차에 합의했었다. 그러나 그 때 준비했던 것들은 7월8일 김일 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무위로 돌아가버렸다.

사실, 이번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많은 국내 전문가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정상회담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었다. 북한 경제 가 작년 하반기에 바닥을 치고 이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다는 전 망, 최근 몇 년간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고수해온 북한이 북· 미 고위급 회담, 북·일 수교협상 등 굵직한 외교 일정을 앞두고 굳 이 남쪽과 대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분석 등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북한은 오히려 4·13 총선 을 사흘 앞두고 남북 정상회담 성사 사실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 와주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도움’이 별 ‘효과’를 발 휘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은 왜?



그러면 북한은 왜 이제서야 남북 정상회담을 받아들였을까? 김대통 령은 취임 이래 줄기차게 정상회담을 제의해왔는데, 왜 하필이면 20 00년 4월8일 한국에서 총선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응해왔는가? 그 배경을 파악하는 것은 실제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의제와 결과를 추론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논리적 과정이 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흔히 들 얘기하듯 ‘경제적 요인’이 가장 컸다는 데에 여러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94년 김일성 주석 사후 최대 위기에 처했던 북한이 그동안 내부적인 체제정비 작업을 웬만큼 마무리짓고, 이제는 본격 경제재건에 나설 차례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전망은 올해 들어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대표 적인 예가 공동사설 형식으로 발표한 올해 신년사. “당 창건 55돌 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 대고조의 불길 속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 내이자”라는 긴 제목의 올해 신년사는 “사상 중시, 총대(군사) 중 시, 과학기술 중시 노선을 틀어쥐고 총진군으로 다그쳐 나가야 한다 ”는 게 그 골자다. 신년사는 또 어느 정도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 는 경제 성과에 자신감을 표현하면서 ‘당(黨) 중심의 경제정책 운 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당 중심의 경제정책 운용’ 부분과 관련, 북한 내부 사정 에 밝은 한 전문가는 흥미로운 얘기를 전했다.

“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99년 말까지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 던 집단은 군부였다. 군부는 특히 대내적 사안에서 엄청난 파워를 누렸다. 예를 들면 98∼99년간 보위부는 당소속 대외 일꾼들을 부정 비리 혐의로 대거 체포했다. 젊고 개혁지향적 성향의 당 일꾼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작년 말부터 당 쪽에서 ‘이런 상황에는 일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에 따라 보위부와 당 사이에 상호비판이 벌어졌고, 보위부 세력이 밀리는 한편 당 쪽의 힘이 강 화됐다. 이게 대략 99년 말부터 올 3월까지의 일이다. 그동안 ‘체 제관리’라는 소극적 입장에 머물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향 전 환을 결심하면서 당쪽에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다시 말해 권력 사이클이 군부에서 당 쪽으로 돌아섰고, 이는 북한 의 정책방향을 개혁·개방 쪽으로 돌려 놓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 이다.

조금 긴 시각에서 봐도 북한이 경제부문을 점점 더 중시한다는 징후 는 드러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98년 1월 최초의 경제부문 현지 지도로 자강도를 방문했고, 이 때부터 50년대 군중동원 방식인 ‘제 2 천리마 대진군’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부터 ‘사상 중시, 총대 중시, 과학기술 중시’를 강조하는 ‘강성대국’ 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렇게 보면 올해 신년사에서 ‘천리마 대 진군’ 얘기가 다시 나온 것은 ‘경제재건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강조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북한경제 전문가의 말이다.

“98년의 경우 북한은 9월17일자 ‘노동신문’ 사설에서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을 재천명하고, 9·9절에는 강성대국의 기치를 내걸 었으며, 그 후 현대와 금강산관광 문제를 타결지었다.

99년에는 4월 김정일의 중국대사관 방문(이는 언론에 공표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여러 정보전문가들이 확인하고 있는 사항이다), 5월 페 리 방북, 6월 김영남 방중, 9월 베를린 합의와 10월 정주영 2차 면 담 등 굵직한 일들이 줄을 이었다. 이를 통해서 북한은 중국으로부 터 코크스탄 40만t과 식량 15만t을 무상 지원받았고, 미국으로부터 는 경제제재 일부 완화조치와 함께 북·일 수교협상에 대한 용인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북한은 올해 들어와 경제재건과 함께 외교관계 복원 에 나서고 있다. 그중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 이붕(李鵬) 총리의 방 중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 복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핵심이다.

이런 움직임은 모두 경제부문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게 특징인데, 이렇게 보면 김정일의 행보는 97년 9월 노동당 총비서직에 취임한 이래로 점점 보폭이 커져왔고 그 연장선 상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다 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정일은 이제 확실하게 명분보다 실리를 중 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미·일·중과의 외교관계가 개선된다고 해도 당장 북한의 경제재건에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특히 북한은 올 11월에 대선을 앞두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지원 에 대한 기대감을 당분간 접어두고 있는 상태라는 게 여러 전문가들 의 말이다. 반면에 북한 경제가 예년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 직 공장가동률이 30%에도 못미치는 등 ‘외부 수혈’은 이르면 이를 수록 좋다. 이렇게 볼 때 즉각적인 대규모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상 대는 결국 한국 밖에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와 관련, 베이징의 한 인사는 “북한은 작년 말부터 이미 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측 인사들은 작년 말부터 ‘DJ가 총선에서 패배하면 남북관계 도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자주 해왔다. 이 말은 곧 ‘김대통령이 확실한 의지만 보여주면 한번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볼 수 있다’는 뜻이고, ‘남쪽에 선거 변수가 있을 때 더 큰 것을 얻어낼 수 있다 ’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도 주변국 관계를 고려할 때 올해와 내년 중 남북관계에 변화가 없으면 자기네 사정이 힘들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상회담?

결론적으로 이번 정상회담은 정치·군사부문보다는 경제 쪽에 무게 를 둔 회담이 될 공산이 크다. 구체적으로는 ▲ 92년 김달현(金達 玄) 북한 부총리의 서울방문 때부터 논의됐던 한국내 유휴설비의 북 한 이전 문제를 비롯한 경협확대 방안 ▲ 투자보장협정 등 남북 경 제교류의 제도적 기반 마련 ▲ 문화·체육 등 정치 외적 교류 확대 ▲ 장기적으로 북한의 SOC(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이 논의될 수 있 다.

정치·군사 부문에서는 ▲ 정례적 고위급회담 합의 ▲ 주요 경제부 문별 실무회담 ▲ 장기수 문제 ▲ 제한적·시험적 차원에서 이산가 족 상봉 등이 논의될 수 있다. 최대 걸림돌인 주한미군과 국가보안 법 문제도 거론될 수 있지만, 북한측은 자신이 받을 경제적 대가의 크기에 따라서 대립의 수위를 조절하려고 것이다. 대가가 크다면 정 상회담 합의 뒤부터 한국측에서 거론돼온 불가침선언(혹은 평화선 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SOC 부분과 관련, ‘한국경제신문’ 4월4일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지난 2월 중순 권 병현 주중 한국대사를 통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SOC 건설을 요청해 왔다는 것. 즉 북한은 향후 3년 동안 30억 달러 규모의 SOC 건설을 요청하는 제안서를 보내왔는데, 그 건설비용 지불과 관련해 ▲ 현재 일본과 교섭 중인 대일 청구권자금 50억 달러로 투자비를 지불하는 방안 ▲ 참여업체가 해당 시설물을 20∼30년간 독점 사용한 후 북한 당국에 기부하는 방안 ▲ 남북이 공동으로 건설하는 방안 등을 제시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또 이 제안서에서 ▲ 올해 계약재배를 기초로 비료 등 영농 물자를 공급해달라 ▲ 휴전선을 통해서 남측의 전기를 받을 용의가 있다 ▲ 발전소를 돌리는 데 필요한 기관차 등 수송시설과 발전소 보수자재, 채광설비 등 2억달러 상당의 설비를 지원하면 향후 3∼5 년간 북한산 철강과 모래, 석재류 등을 현물로 내겠다 ▲ 중장기적 으로는 중국 하얼빈-북한-부산간 복선화된 철도 건설 ▲ 러시아 이 르쿠츠-북한-한국을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 ▲ 북한 통신시설 건설 등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요청은 공식문서 형태로 한국 정부에 전달됐지만 북한쪽 주체가 대남공작을 주로 담당하는 조평통이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의 본격 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SOC 건설비용으로 청구 권 자금을 제시한 대목이 김대통령의 ‘북한 특수(特需) 발언’과 관련해 관심을 끌었다. 아직 협상중인 청구권 자금에 대해서 북한이 먼저 용처(用處)를 제시하는 것도 이상한데, 그것이 묘하게도 김대 통령의 ‘북한 특수’ 발언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남북한과 일본 사이에 모종의 막후 협의가 있었 던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사실, 향후 북·일 수교협상에서 타결될 ‘50억 달러 + α’ 규모의 청구권자금은 북한의 대규모 SOC 건설비용으로는 가장 그럴 듯한 자 금줄이 될 수 있다. 정상회담 합의 직후 우리측에서 얘기가 나온 90 00억∼1조원 상당의 차관은 SOC 건설용으로는 규모가 작고, 대규모 국제 차관 공여도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SOC 건설자금이 투입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투자보장협정 등 제도적 장치가 확보되는 한편, 미국과의 외교협상이 원만하게 진행 돼 국제기구의 대북진출 길이 열려야 한다.

무엇보다 전자통신 분야 등이 북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국의 용 인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냉전시절 대공산권 수출통제기구(COCOM) 이후 1996년 ‘바세나르 협정’을 통해서 테러국가에 대한 전략적 품목 수출을 제한하고 있고, 한국도 여기에 가입돼 있다(이 대목과 관련, 박태준 총리는 4월12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사회지도층 인사 오찬에서 “북한이 최근 열린 미국과의 회담에서 한국이 북한에 전 기를 공급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요청, 교섭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의 함의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이렇게 볼 때, 이번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단순히 남북한간의 줄다 리기일 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간의 역학관계에도 심대 한 파장을 미치는 ‘돌출변수’가 될 수 있다.

< 제3부 2000년 6월13일 PM10:00, 백화원 초대소 >

오늘은 대통령 이하 모든 이에게 힘든 하루였다. 김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겨룬 ‘기 싸움’에 있는 힘을 다 쏟아 넣었고, 수행 원들은 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한편 부문별로 북한측 실무 진과 협상에 임하느라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하루를 보 냈다. 수행기자들도 서울 본사에 기사를 보내느라 절반쯤 정신이 나 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오늘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오전 10시15분 수행원 몇 명이 배석한 정상회담, 11시30분 양 정상간의 단독 회담, 12시 공동 기자회견, 12시30분 오찬, 오후 2시 김일성종합대 방문…. 양측 실 무진이 어제 평양도착 직후부터 공동성명 문안을 놓고 씨름을 해왔 던 터라 오늘 일정은 대체로 예정대로 진행됐다. 저녁에는 양형섭 (楊亨燮)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주최하는 만찬이 있었다.

김대통령에 대한 북한측의 접대는 각별한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던 시절 북한이 평양을 방문하는 외부 인사를 극진하게 대접 했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양을 방문한 사람 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고 돌아왔다. 수많은 해외동포는 논외로 치더 라도 국내 인사들 중에서도 문익환 목사나 소설가 황석영씨 등이 그 랬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김일성 주석의 카리스마에 압도되고, 북한 주민들이 순박하게 말하는 ‘통일 열망’에 감동하는 식이었다. 그 렇지만 김대통령의 경우 더욱 특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그랬다. 회담장 에서는 정상끼리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얘기했지만, 좋아하는 담배도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상회담 전후에는 김대통령에게 깍듯이 연장자 대접을 했다. 하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통령보다 18세 나 연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기록상으로 보면 김대통령은 1924 년생, 김정일은 1942년생이다), 과거 남북한 간의 그 숱한 갈등과 대립을 생각해보면 이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도박’의 본선은 시작되고…

밤 10시. 사위에 어둠이 짙게 내려 앉은 지 이미 오래다. ‘적지’ 에서 권총 한 자루 달랑 가슴에 품은 경호팀의 신경조직이 최대한 팽창하는 시각. 김대통령과 수행원들도 아직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 다. ‘공식 일정은 끝났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다…’

10시15분,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 적인 방문이다. 두 정상이 다시 한번 만날 기회다.

정상회담 예비 접촉 때 북측은 양 정상간의 대좌를 단 한 차례로 하 자고 고집했다. 북측은 “주요 의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한 차례 상징적인 만남 으로 그치자”고 시종 주장해왔다. 반면 우리측은 정상간의 만남이 최소한 두 번은 돼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문제로 예비 접촉이 한 차례 결렬되는 등 난항을 겪다가 결국 “ 대외적으로는 한 차례 만나는 것으로 발표하고, 비공식적으로 별도 의 만남이 있을 수 있다”는 선에서 양보했다.

이런 방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상대방을 애타게 기다리게 하다가 밤 늦은 시각, 불쑥 숙소로 찾아와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 공식석상에 나타나기를 꺼리는 그의 성격에도 어 울리는 방식이었다. 98년 10월30일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을 처 음 만났을 때에도 꼭 이런 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측으로서도 별로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 비공식적 인 만남에서 양 정상은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흉중을 털어놓을 수 있 기 때문이다. 미세한 문구 하나를 놓고서 하염없이 줄다리기를 벌이 곤 했던 남북대화의 전례에서 볼 때, 양측 최고 지도자간의 담판이 오히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다만, 양 정상이 비공개리에 무슨 대화를 나눌지에 촉각을 곤두세울 주변국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하 지만, 김대통령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모두에게 이건 여러모로 ‘ 유익한 자리’가 될 터였다.

서둘러 접견실로 내려간 김대통령 일행 앞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용순 비서 등 최측근 인사 몇 명이 이미 도착해 서 있었다.

김정일의 일행 중에 연형묵(延亨默) 자강도당 비서가 끼어 있음을 발견한 우리측 수행원 한 사람이 일순 놀라는 듯 하더니 곧이어 그 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돈다. 90년대 초반 고위급 회담에 북측 대 표로 나섰다가 철직돼 지방으로 쫓겨났던 그의 컴백은 북한이 나름 대로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있다는 ‘성의 표시’일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번에는 김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고생 많으십니다.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 다”

한 차례 만난 탓인지 한결 친밀해진 어투다.

“뭐, 일 없습네다. 저는 밤에 일을 많이 하니까요. 어디 불편하신 점은 없습네까”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에도 친밀감이 묻어난 다.

“자,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두 정상과 양측의 최측근 인사들이 접견실에 들어가고 육중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그 안에서는 바야흐로 ‘정상들의 대도박’ 본 라 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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