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6-10-25 13: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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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230만 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292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한을 합쳐 5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이 전쟁은 기이하게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다. 6·25 전쟁은 전쟁이란 형태를 통해 남북한에서 수많은 리더가 등장해 리더십을 발휘한 치열한 경연장이었다. 이들은 피와 땀과 한숨과 함성을 토해내며 생존 투쟁을 위한 거대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리더십이 결국 지금의 남북 문제를 만든 근본 원인이다. 또 이 리더십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정전체제 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일보를 내디딜 수 있다. 6·25 전쟁은 또 생각밖으로 치열한 기동전이었다. 소설 ‘삼국지’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었다. 50년 전 남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은 어떻게 싸웠는가.》
    [ 제1편 전쟁발발 ]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임부택(林富澤·당시 31세)은 1950년 6월25일 춘천에 본부를 둔 육군 제6사단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인 그는 한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경찰예비대(1946년 1월15일 창설)의 창설 멤버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사병 군번 제1번인 110001번과 함께 중사 계급을 받고, 한국 육군의 모태가 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그러다 4개월 후인 1946년 5월1일 미 군정청이 조선경찰예비대훈련소(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육사의 전신)를 만들자 입교해 약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었다. 소위가 된 날부터 만 5년이 지난 1950년 6월25일에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중부 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는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은 29세의 홍안 청년 김종오(金鐘五) 대령. 김대령은 일본 중앙대를 다니다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5일 미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자 입교해 참위(지금의 소위)가 되었다. 김대령 휘하에는 7연대 외에도 2·19연대가 있었다. 함병선(咸炳善·당시 30세) 대령이 이끄는 2연대는 홍천에 본부를 두고 7연대 우측 전방을 방어하고, 민병권(閔炳權·당시 32세) 중령이 지휘하는 19연대는 예비대로 6사단 사령부와 함께 후방인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태풍 ‘엘시’



    1950년에는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다. 농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비 소식을 기다리는데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이 와도 큰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서 규모가 작은 태풍 ‘엘시’가 발생해 서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던 농민들이 겨우겨우 모심기를 끝낸 그해 6월23일 오후 2시쯤,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춘천 일대에 모처럼 가랑비가 내렸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샘밭골은 당시는 38선 바로 남쪽이었다.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는 북한강에는 ‘모진교’라는 길이 약 250m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다리 북쪽인 화천군에는 함흥에 주둔하다 수일간 야간 행군 끝에 6월17일 이곳으로 이동해온 인민군 2사단(사단장 李靑松 소장·인민군 소장은 국군 준장과 같다)이 포진해 있었다. 인민군 2사단이 춘천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당시 이 다리 지역을 방어한 것은 박용덕 상사가 이끄는 7연대 수색대였다.

    그러나 다리 북쪽 지역에 있는 38선 이남 지역이 너무 좁아 7연대 수색대는 다리 남쪽만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리 북쪽에는 인민군 초소가 생겨났으니, 사실상 모진교가 38선인 셈이었다. 당시에도 지뢰가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리 한복판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리고 원격장치로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게끔 별도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다.

    가랑비를 맞는 모진교 아래 북한강에서 을씨년스럽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다리 북쪽에서 홀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는 인민군이 월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할 때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민군 초소로부터 전혀 총격을 받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흰옷은 한 노인이었다. “어! 저 영감이-!” 하며 7연대 수색대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터지고, 노인은 다리 한복판에서 꼬꾸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인은 장씨였고, 화천으로 출가한 딸 집에 살고 있었다. 장씨의 평생 소원이 38선 남쪽 춘천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청송 인민군 2사단장은 개전을 앞두고 사단 정치장교인 이시혁(李時赫)에게 “요충지인 모진교의 방어 상황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을 찾던 이시혁은 장노인을 찾아내, 설득 반 위협 반으로 “아들 집으로 가라”며 모진교로 내몬 것이다. 장씨의 죽음으로 인민군은 모진교에 폭파 시설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로부터 10여 시간 후인 6월23일 24시(6월24일 0시), 육군 본부는 6월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이 경계령은 5월1일 메이데이 시위와 2대 총선인 5·30선거, 그리고 6월7일 북한이 남북한 선거를 제의하고 6월10일에는 북쪽의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의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을 교환하자고 제의함에 따라 취해진 조처였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육본 장교들은 토요일인 6월24일 저녁부터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댄스 파티에 들어갔다.

    댄스파티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전미 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에서 제외된다”고 밝힌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애치슨 선언은 6·25전쟁을 유발한 첫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47년 발족한 미 CIA 극동 책임자로 1981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비노출 요원으로 활동하던 하리마오박 (당시 31세·한국명 朴承德)씨는 미국이 고의로 6·25전쟁을 유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인 KLO부대와 미 극동공군의 첩보부대인 ASIS, 한국 육군의 일선 부대 그리고 미 CIA는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1195개 문건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워싱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23일 망설이는 채병덕 육군총참모장(蔡秉德·당시 29세)을 설득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댄스파티를 열게 한 이는 미군 고문단장 대리인 헨리(가명) 대령이었다”

    하지만 6사단 7연대만은 모진교 사건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았다. 7연대는 이미 6월19일 귀순해온 인민군 2사단 포병연대의 박철호 전사에게서 “원산에 주둔하던 포병연대가 대규모 야외훈련을 한다며 1주일간 야간행군을 계속해 철원-김화를 거쳐 6월18일 밤 화천 남쪽 신포리 백사장에 도착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바 있었다. 7연대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큰 관심을 표시했지만, 육본 정보국의 미군 고문관(대위)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김대령의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한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인민군은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인민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인민군과 별도로 북한은 내무성(한국의 내무부에 해당)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지도 참조).

    선제 타격전략

    국군에는 4사단이 없지만 인민군에는 4사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군 사단은 연대를 시발로 생겨났다. 1연대가 1여단이 됐다가 1사단이 되는 식이다(그 후 각 연대는 계속 배속 사단이 변경돼, 1사단에 꼭 1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군이 연대로만 구성돼 있을 때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에 따라 군내 좌익 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대규모 숙군 작업이 펼쳐졌는데 유독 4연대(연대장은 6·25전쟁 당시 8사단장인 李成佳 대령)에 좌익이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은 4연대 예하 대대를 모태로 창설한 14연대(연대장 박승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49년 5월 4여단(여단장 金白一 대령) 예하 8연대에서 표무원(表武源) 강태무(姜太武) 소령이 자기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그렇지 않아도 4자는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켜 개운치 않은데다 자꾸 좌익 관련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24~34~40 등 4자가 든 부대 명칭은 아예 쓰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국군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빨갱이’가 싫어서 4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10과 18도 욕설을 연상시켜 사용하지 않는 숫자가 되었다.

    이른바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인민군의 전쟁 개시 작전계획은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국군 17연대를 공격하고, 6사단과 1사단은 국군 1사단을, 4사단과 3사단은 국군 7사단을, 2사단과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국군 8사단을 밀어붙인다는 것이었다.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3배 이상 강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2 대 1로 우세한 상황에 국군을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1950년 2월부터 인민군 각 사단은 북한 중앙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전쟁 소모물자를 대량 확보해놓았다. 더구나 국군은 1대도 없는 전차를 무려 242대, 한국 공군은 연락기 10대뿐인 데 비해 인민군 공군은 211대의 각종 공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 타격만 하면 공자와 방자 비율에 관계없이 이긴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지금처럼 미군에 작전권을 넘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인민군의 이러한 부대 배치에 대비해 지금의 합참본부와 같은 구실을 한 육군본부는 ‘육본작전계획 제38호’를 작성해 인민군의 선제타격전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육본작전계획 38호는 인민군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6월23일 밤 12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장교구락부 댄스파티에서 술을 마신 채병덕 총참모장 일행이 명동의 카바레로 나가 2차를 즐기고 귀가한 것은 6월25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 무렵 춘천 일대에는 7년 대한에 단비 오듯 ‘쫙쫙’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 속에 두 눈을 부릅뜨고 손목시계를 노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인민군 2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대령에 해당)였다. 폭우가 걷히는 기세를 보인 정각 4시, 이학구 총좌는 김광협 중장에게 지시받은 대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짧게 외쳤다. “폭풍!”

    그 순간 화천 일대에 포진한 인민군 포병연대 소속 122㎜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국군 7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영삼(鄭永三) 중위는 포성에 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그 어떤 지휘관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터. 상급 부대에 보고한 후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이 바람에 국군 각 중대는 진지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이 고장나 상급부대와 연락이 두절되는 부대도 늘어났다.

    전통적인 지상전은 먼저 화력을 퍼부은 후 기동부대를 앞세워 돌파하고, 이어 보병부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순서로 진행된다. 날이 밝자 국군 부대가 고립된 틈을 타 SU76 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2사단이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T34 전차가 아니라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인민군은 모진교가 T34 전차 무게를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진교에 설치된 폭발물 때문에 전차가 파괴될까 두려워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이다.

    임부택 중령은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건너기 전에 모진교를 폭파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하 중대가 인민군의 포격으로 고립돼 있을 뿐, 아직 전부대가 후방 방어선으로 후퇴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다리를 조기에 폭파하면 차후 국군의 진격 작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이런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진교를 건너온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삽시간에 소양강까지 진격해버렸기 때문이다.

    불 뿜는 자주포

    당시 국군 병사들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할 줄 몰랐다. 그래서 SU76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하고,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인민군 전차 공포증’이 시작된 것이다. 치열한 전투의지는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7연대 대(對)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沈溢) 소위가 그런 경우다. 적 기갑부대의 진격을 막는 것이 주임무인 심소위 소대는 57㎜ 대전차포를 쏘아 SU76 자주포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자주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포 사격을 하며 전진해왔다.

    이러한 기세에 눌려 심소위 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숨어서 적 자주포가 더 가까이(30m 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57㎜ 대전차포를 쏘았다. 선두로 달려오던 SU76 자주포는 대전차포를 맞더니 ‘끼룩 끼룩’ 하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2번 자주포도 기동을 멈췄다. 그 사이 심소위를 비롯한 특공대가 두 대의 자주포에 뛰어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져넣었다.

    화염병 투척은 의외로 효과가 높았다. 화염병의 불꽃은 SU76 자주포 안에 있던 포탄 추진제를 점화시켜 삽시간에 자주포를 폭발시켰다. 이 일은 아마 대한민국 역사(일제 시대는 제외된다)에서 최초로 화염병이 등장한 사건일 것이다. 심소위 특공대의 쾌거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적 전차를 잡았다”는 오보(誤報)로 전달됐는데, 이 오보가 전차 공포증에 시달리던 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민군 2사단은 임부택 중령의 국군 6사단 7연대가 지키는 춘천으로 진입하고, 12사단은 홍천에 본부를 둔 함병선 대령의 국군 6사단 2연대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7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6사단의 결사항전은 눈부셨다. 이로써 인민군 2사단은 38선에 근접한 춘천을 전쟁 시작 3일(6월27일)만에 겨우 점령했다. 이 공격에서 인민군 2사단은 40%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SU76 자주포 7문과 45㎜ 대전차포 2문이 파괴되는 피해를 보았다.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김일성(金日成 6·25 당시 38세)은 중국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활동하며 중대장급 지휘자로 성장했다. 이 부대는 그 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된다. 1941년부터 일본군이 공산 유격대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극동지역에 포진한 소련 극동군으로 하여금 소련 땅으로 도주해온 중국 공산군들을 모아 ‘88특별저격여단’(여단장은 중국인 周保中)을 편성케 했다. 이때 김일성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의 제7대대장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중공군과 소련군에 몸담고 있던 조선인 장병들을 두루 알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 전투

    훗날 김일성은 춘천 전투에서 진격이 늦어진 것이 6·25 전쟁 전체를 망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김일성은 그와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2군단장 김광협 중장과, 소련군 출신인 2사단장 이청송 소장, 그리고 12사단장 최춘국(崔春國) 소장을 전격 교체해버렸다.

    이러는 사이 38선에 배치된 여타 국군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백선엽(白善燁·당시 30세)은 당시 대령 계급장을 달고 1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육군의 ‘선봉’ 사단인 1사단은 황해도 청단에서 경기도 개성을 거쳐 적성에 이르는 90㎞ 전선을 커버한다. 1사단 예하에는 개성에 본부를 둔 12연대(연대장 全盛鎬 대령)와 문산에 본부를 둔 13연대(연대장 金益烈 대령)가 전방에 나가 있고, 11연대(연대장 崔慶祿 대령)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수색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백선엽 대령은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가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이때 이미 1사단 병력은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절반 정도가 토요일인 6월24일부터 외출·외박을 나가 있었다. 25일 오전 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백대령은 파주초등학교 앞산에 올라 전황을 관측했다. 파주초등학교 전방에는 임진강이 있고 12연대는 이 강 북쪽인 개성 일대에서 싸웠다.

    개성 지역으로 돌진해 들어온 것은 인민군 105전차여단 소속 206기계화연대고, 그 뒤로는 중국 공산군에서 이미 사단장 대우를 받던 방호산(方虎山)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이 따라오고 있었다. 문산에 위치한 13연대 쪽으로는 역시 105전차여단 소속의 203전차연대를 선두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최광(崔光)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1사단이 진격해 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진강을 등진 ‘배수진’ 형태로 인민군과 싸운 것은 개성의 12연대였다. 문산 쪽의 13연대는 큰 강이 없어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치닫지 않을 것이다. 백대령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색에 위치한 11연대가 외출·외박 나간 병사를 모아 임진강변에 방어선을 칠 때까지, 12연대로 하여금 버티게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문산에 있는 13연대는 인민군 1사단이 우회하지 못하게 결사 항전해야 한다.

    당시 임진강에는 유일한 다리인 임진강 철교가 걸려 있었다. 지금 임진각 앞에 가면 시커멓게 교각만 남은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강 철교로 12연대를 빼냄과 동시에 철교를 폭파하고 11연대 병력으로 임진강변에서 방어선을 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백대령은 임진강 철교에 폭파시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자 사단 공병대장 장치은(張治殷) 소령이 달려와 “폭파 준비가 다 됐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일행과 함께 스리쿼터를 타고 임진강 철교를 건너왔다. 12연대 병사들은 대부분 철교를 건넌 것 같았다. 잠시 후 전방에 나가 있는 척후대로부터 “인민군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백대령은 짧게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굉음은 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사색이 된 장소령이 달려와 “도화선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폭파에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공병대가 도화선을 재점검할 틈도 없이 임진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군이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인민군 전차는 이 다리로 진격해오지 않았다. 인민군은 당연히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할 것으로 계산하고 전차를 13연대가 방어하는 문산 쪽으로 돌린 것이다.

    13연대의 57㎜ 대전차포는 인민군 T34전차를 세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개전 첫날부터 ‘부나비’처럼 수류탄을 지고 인민군 전차로 뛰어올랐으나, 전차는 파괴되지 않았다. 13연대의 분전으로 6월26일 저녁에야 인민군 1사단은 문산을 장악할 수 있었다. 부슬비가 뿌리는 이날 저녁 국군 1사단은 현재의 파주시 금촌동과 조리면에 있는 작은 하천 봉일천(奉日川)을 잇는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TNT특공대

    무서운 투혼은 종종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개전 첫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라는 치욕적인 실수를 범한 1사단 공병대 부대대장 김영석(金永錫) 소령이 21명의 지원자와 함께 백대령 앞에 나타났다. 김소령 일행는 “특공대 전원이 유서를 작성했다”며 “죽음을 맹세코 야간 기습하는 적 전차를 격멸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가운데 넣고 TNT로 묶은 ‘묶음’을 들고 뛰어나갔다.

    수류탄의 안전핀만 뽑으면 TNT가 폭발할 테니 육신과 함께 적 전차를 폭파하겠다는 투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 인민군 전차는 기동하지 않았다. 특공대는 인민군 척후병만 저격하고 날이 밝자 소화기 10여 점을 노획해 귀대했다. 다음날(6월27일) 저녁 백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서를 받았다. 하지만 백대령의 마음은 후퇴로 기울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은 다음날(6월28일) 새벽 3시였다. 이어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1사단으로 전해졌다. 인민군 6사단이 기차를 타고 파괴되지 않은 임진강 철교를 통해 남하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사람은 단 하루만 못 자고 단 하루만 굶어도 파김치가 된다. 벌써 1사단 병사들은 3일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사단 포병대장 노재현(盧載鉉·1979년 12·12사건 때 국방장관) 소령은 “포탄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백대령은 육본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퇴로가 막혔으니 사단 지휘부는 행주산성 부근에서 뗏목을 타고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 백대령은 인민군 방어를 위해 남아 후순위 도강자(渡江者)가 된 장병들에게는 “알아서 도강해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시흥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겪은 가장 길고 긴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는 개성-문산 축선(국도 1호선)이지만, 이곳에는 임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있다. 하지만 38선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길은 큰 강이 없는데다, 동두천 축선(국도 3호선)과 포천 축선(국도 43호선) 두 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육본은 인민군 주공(主攻)이 의정부 축선에 투입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육본은 ‘작전명령 38호’에서 ‘동두천과 포천에서 적을 막다 여의치 않으면 동두천과 포천 축선이 합쳐지는 의정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려 놓았다. 이곳 방어는 전방 사단장 중 유일한 장성인 유재흥(劉載興·당시 29세) 준장이 이끄는 7사단이 맡았는데, 7사단 예하에는 한국군 최선봉이자 최정예인 1연대(동두천)를 필두로 3연대(예비)와 9연대(포천)가 배속돼 있었다. 그만큼 7사단이 육군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런데 전쟁은, 육본의 부대 이동 명령에 따라 7사단이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李鍾贊 대령) 예하로 보내놓고, 온양에 있는 2사단 25연대가 배속돼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터졌다. 당시 7사단도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상당수의 장병을 외출·외박 보낸 상태였다. 7사단 사(師團史)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로 기록될 ‘서울 함락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월25일 새벽 4시 국군 7사단 1연대 지역에 인민군이 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5시30분이 되자 인민군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 소속 전차 40대가 동두천 축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이권무(李權武)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4사단이 따라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국군 9연대가 포진한 포천 축선으로는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가 진격해오고, 그 뒤로 이영호(李英鎬)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3사단이 진격해왔다.

    이때 인민군이 구사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점양면(一點兩面) 전술’과 ‘양익포위(兩翼包圍) 전술’이다. 일점양면 전술은 인민군 1개 연대가 정면에 있는 국군 1개 연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사이, 다른 연대는 인접 도로로 우회해 같은 시간에 국군 연대 옆구리로 ‘훅’을 날리는 연대 단위 전술이다.

    양익포위 전술은 2개 사단이 협동해서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 인민군 6·1사단이 국군 1사단을, 인민군 3·4사단이 국군 7사단을 포위해 각각 섬멸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군 2·12사단이 국군 6사단을 공격해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것이 양익포위 전술이다. 이러한 포위전술 덕분에 개전 첫날 인민군은 동두천과 포천을 각각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취침 중인데…”

    이날 술에 취해 잠든 채병덕 총참모장을 깨운 것은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었다. 새벽 5시20분쯤 임중령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총참모장 관사로 전화를 걸자, 전속부관인 나(羅)모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총참모장 각하를 대주시오.” “지금 취침중이신데 급한 일입니까?” “그렇소. 우리 7연대 전방에 포탄이 낙하하고, 인민군이 대거 남침중이오.” 이 전화는 나중위가 거세게 혀끝을 차는 소리를 끝으로 잡음을 내다 끊어지고 말았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채병덕 총참모장이 110㎏의 거구(巨軀)를 흔들며 의정부에 있는 7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것은 이날 새벽이었다. 인민군의 전면 남침임을 확인한 채총참모장은 수도경비사로 배속한 3연대를 다시 7사단으로 재배속시켜, 포천 방면을 방어하는 9연대를 지원케 했다. 육본의 배속 변경 명령에 따라 서울에 와 있던 2사단 예하 5연대와 수경사 예하 18연대도 7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날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2사단장 이형근(李亨根·당시 30세) 준장이 대전에서 서울 육본으로 올라왔다. 이때 매우 당황한 채총참모장이 이준장을 보고 “잘 왔소. 곧 의정부로 가서 반격을 해주시오”라고 청했다. 채총참모장은 경황이 없는 듯 광주에 있는 5사단(사단장 李應俊 소장·당시 60세)과 대구의 3사단(사단장 劉升烈 대령·당시 60세)에 대해서도 총출동 명령을 내렸다. 외출·외박을 간 병력이 모이는 대로 달아오른 전장에 투입하는 것을 ‘축차(逐次)투입’이라고 하는데, 축차투입은 ‘선두를 따라 계속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들쥐 떼’와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군사학에서 첫번째 금기 사항으로 꼽힌다.

    채총참모장의 지시가 축차투입이라고 판단한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날이 저무는데 적정과 지형도 모르는 후방 부대를 축차투입해서는 안 된다. 후방에서 올라오는 3개 사단은 영등포에 집결시켜 한강 방어선을 펼치고 이어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범석·김홍일·이응준·김석원 등 50∼60대 원로 장군들도 후방에 새로 방어선을 만들자는 이준장 의견에 동의했으나, 채총참모장은 “대통령 명령이다. 2사단은 당장 의정부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형근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사영어학교 동기로 이준장은 대한민국 군번 제1번인 10001번이고, 채총참모장은 10002번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인데 채총참모장은 49기, 이준장은 56기였다.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이준장은 대위, 채총참모장은 소좌였다. 채총참모장은 일본군에서 후배인 이준장이 한국군에서 선임 군번을 받은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따라서 채총참모장은 먼저 진급했음에도 사사건건 이준장과 부딪쳤다. 6·25전쟁 개전 첫날 두 사람의 다툼도 거의 싸움으로 변질되다시피 했다.

    축차투입

    채총참모장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며 성을 낸 데다가, ‘계급 끝발’에 이준장은 밀려 의정부 7사단으로 갔다. 이때 7사단 9연대를 지원하러 달려간 7사단 3연대의 연대장은 이준장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었다. 유재흥 7사단장은 이준장을 붙잡고 “동생을 봐서라도 역습해달라”고 부탁했다. 군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준장은 흔들렸다. 동생을 생각한 그가 축차투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2사단 예하 부대를 축차투입해버린 것이다.

    채총참모장의 일관된 주장은 “역습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6월26일) 7사단은 동두천으로 진격하고, 2사단은 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7사단은 순조로이 동두천을 탈환했다. 단지 몇 시간 만에 승리를 얻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마치 국군이 북진에 성공한 것’으로 과장 보도되었다. 이날 방송은 “국군의 총반격으로 인민군은 퇴각하고 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포천으로 진격한 2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인민군 3사단에 밀려,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2사단이 대오도 없이 흩어져 의정부로 도주해오자 인민군 3사단의 선두가 2사단 꼬리를 물고 6월26일 저녁 의정부로 진입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동두천까지 진격한 국군 7사단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일부는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삼송리 쪽으로 후퇴해버렸다. 도미노처럼 2사단의 붕괴가 7사단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인민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여단은 의정부를 장악했다. 전쟁은 결코 감정 싸움이 아닌데, 여기서 국군은 또 한 번 만용을 부렸다. 청주에 주둔하다 급히 창동으로 올라온 2사단 25연대에 날이 밝자(6월27일) 의정부 탈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인데, 또다시 축차 투입을 범한 것이다. 이미 집단으로 ‘전차 공포증’에 감염된 국군 병사들은 맥없이 무너져, 미아리고개 쪽으로 철수했다. 미아리고개마저 무너지면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육군에서 보병-포병-기갑-공병 등 전투에 투입되는 병과를 전투병과라 하고, 병참이나 경리-병기처럼 비전투병과는 지원병과라고 한다. 전투병과 장병들이 연이은 패전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자, 육본은 지원병과 장병을 미아리고개로 총출동시켰다. 그리하여 3000여 병력이 모이자, 고개 좌측에 포진한 부대는 5사단 이응준 소장이, 고개 우측에 모인 부대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생도 1기로 불리는 육사 10기 교육생도와 일부 패잔병은 육사교장 이준식(李俊植) 소장 지휘하에 불암산 일대로 배치시키고 경찰대대까지 출동시켰다.

    이렇게 국군 패잔병들이 최후 결전을 준비하기 훨씬 전인 이날(6월27일) 새벽 2시 이승만(李承晩·당시 75세) 대통령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떠나버렸다. 한 시간 후 열린 심야의 비상국무회의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는 정말로 식언(食言)이었던 것이다. 1950년만 해도 상당수 국민은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그가 조선 왕조와 같은 전주 이씨라는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난에 처해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몽진(蒙塵)’, 수도를 옮기는 것은 ‘천도(遷都)’라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몽진과 천도를 한국인들은 대명천지인 20세기 중반에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6월28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더라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결의하고 이를 서울 시민에게 공포했다. 이 발표는 훗날 “점심은 평양에서”란 방송과 더불어 국민을 기만한 정부의 대명사로 꼽히게 된다.

    한편 신성모 국방장관의 결정과는 별도로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날 오전 인민군이 창동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방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만용을 부리는 사람일수록 겁이 많은 법일까? 이날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인 최창식(崔昌植) 대령을 불러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 2시간 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후 3시쯤 최창식 공병감이 “한강 다리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고 보고하자,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동시켜라”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동을 앞두고 육본은 상당량의 비밀 문서를 소각했다. 박정희(朴正熙·당시 33세)는 남로당원을 하다 여순반란 사건 후 군내에서 대규모 숙군 작업을 벌일 때 검거되었다(계급은 소령). 당시 군법대로라면 박정희는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박정희를 좋게 보고 있던 국방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구명운동을 벌여 퇴역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 후 박정희는 문관으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다 전쟁을 맞았다.

    당시 육본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군내 좌익사범에 대한 방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시흥으로 육본을 옮기면서 이를 태워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는 좌익 족쇄에서 자유로워지고, 곧 현역 소령으로 복귀함으로써 장차 5·16을 거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기회를 잡는다. 전쟁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다.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할 당시 안두희(安斗熙)는 육군 중위였다. 6·25전쟁 때 안두희는 육군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육본은 안두희를 석방하고 중위로 재임관했다. 이처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시에는 한 순간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인민군의 미아리 우회

    육본이 시흥으로 막 철수한 이날 저녁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미 극동군 사령부로부터 6·25선에 전방지휘연락단을 설치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로 인해 날이 어두워진 후 채총참모장은 다시 육본을 서울 용산으로 복귀시켰다. 맥아더 원수의 통보는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에도 ‘미군 참전’으로 과장 전파돼 국군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이날 밤 미아리고개에서는 동네 부녀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국군에 제공하는 등 열띤 분위기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6월27일 자정을 넘기고 28일 새벽 2시가 되자 인민군은 국군이 포진한 미아리고개를 피해 전차 2대를 홍릉 방향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뜻밖의 방향에서 적 전차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시민들은 겁을 먹고 당황해했다. 이미 패배에 익숙해진,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 병사들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오판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겁쟁이’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둘러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무너진 것은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이때 인도교 위를 걷고 있던 민간인과 군인, 차량들도 교각과 함께 한강으로 떨어졌다. 아비규환. 한강다리 폭파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아리고개에 포진해 있던 국군 병사와 서울 시민들을 패닉(panic) 상태로 몰아 넣었다.

    이날 국군 공병대는 인도교와 철교는 폭파했으나 두 다리 사이에 있던 단선철교 폭파에는 실패했다. 공병대가 단선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재차 폭약을 장전하는데 멀리서 인민군 포격이 날아왔다. 이때 인민군 포격은 매우 엉성했는데도 ‘겁을 먹은’ 공병대는 재폭파를 포기하고 강남으로 철수했다.

    한강인도교 폭파

    인민군 주력이 서울 시내에 진입한 것은 6월28일 오후 3시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강 다리 폭파는 6∼8시간 정도 연기했어야 한다. 그 6시간 동안 아군 3개 사단이 장비와 함께 더 도강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병력이다. 장비야 공장에서 재생산하고 급하면 외국에서 도입할 수도 있지만, 병력은 한번 죽으면 20여 년이 지나야 재생산된다. 때문에 적의 공세가 거셀수록 병력을 안전하게 빼내 훗날의 반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채총참모장은 이를 외면한 것이다.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서울에 남게 된 국군은 군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지켜야 하는 무리가 되었다. 이 무리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주로 한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 한강을 도하했다) 밥을 얻어먹으며 남쪽으로 내려간 자기 부대를 찾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중대 규모의 국군 결사대가 자생적으로 구성돼, 남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과 최후 결전을 벌이다 전원 사살되었다.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은 별자리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농군 출신의 장병들이었다.

    한강 다리 폭파는 다른 국군 부대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춘천 사수”를 외치던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이 소식을 듣고 이날 저녁 6시쯤 춘천시민에게는 “피난하라”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춘천의 소양교를 폭파하고 원주로 후퇴했다. 봉일천 일대에서 인민군 6사단과 1사단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백선엽 대령의 1사단도 사수를 포기하고 한강을 건넜다.

    한편 동해안에 포진한 이성가(李成佳·당시 28세) 대령의 국군 8사단은 전창덕(全昌德)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5사단으로부터 수륙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즉 인민군 5사단은 2개 연대를 정면으로 침투시켜 국군 8사단을 압박하고 동시에 1개 연대를 태백산맥 쪽으로 우회침투시켰다. 또 게릴라부대인 766부대와 549부대를 함정에 태워 동해안 곳곳에 상륙시켜 동해안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인민군은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서부전선에서 일점양면 전술과 양익포위 전술을 구사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 바람에 8사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릉-대관령-평창을 거쳐 제천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8사단 병력은 흩어지지 않았다. 6·25전쟁을 통해 끝까지 사단 편제가 유지된 것은 1·6·8사단뿐이다.

    사실 섬이나 다름없는 옹진반도에는 백선엽 1사단장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당시 27세)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17연대가 포진해 있었다. 17연대는 연대급 부대인데도 사단 작전 규모(당시에는 80∼90㎞)와 맞먹는 64㎞의 전선을 담당했다. 때문에 ‘육본 작전명령 38호’는 ‘전쟁이 일어나면 17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다 해상으로 철수한다’로 돼 있었다. 17연대는 북한 내무성 산하 제3경비여단과 인민군 6사단 예하 14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춘천 6사단의 후퇴

    백인엽 대령은 개전 초기에는 인민군의 공세를 의례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다가 곧 전면 남침임을 알아챘다. 이에 따라 그는 1개 대대로 적 공격을 차단하며 2개 대대를 철수시키는 전형적인 철수작전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17연대는 편제를 유지한 채 6월26일 해군 LST를 타고 인천으로 철수해 이후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6·25전쟁 초기에 맛본 패전 공포는 오랜 세월 한국을 지배했다. 이후 한미연합군은 서울·의정부 북방 도로 곳곳에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고 ‘알파’ ‘부라보’ ‘찰리’ 등으로 불리는 인민군 방어선을 계획했다. 기동부대의 진격을 막는데는 기동부대를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서울 함락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이후 한국 육군은 의정부 축선 일대에 기동부대 주력을 배치하고, 문산 축선에 일부 배치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한국 육군의 부대 배치까지 규정해버린 것이다.

    지금 서울 창동-상계동 일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수락산과 도봉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공터로 둔 것은, 유사시 이곳을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 결전터로 삼기 위해서였다. 수락산과 도봉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이곳에 후방 사단을 집결시켰다가 수락산과 도봉산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아 의정부를 장악하고 몰려오는 인민군을 궤멸하겠다는 것이 유사시 한국군을 통합 지휘할 미 8군의 방어계획이었다.

    한강 다리 폭파가 끼친 영향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때 서울 강남을 집중 개발하고, 한강에 수십 개의 다리를 건설했다. 인민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2층 다리인 잠수교를 건설하고,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한강 하저를 관통하는 지하철(5호선)을 건설하게 되었다.

    처절한 싸움 끝에는 논공행상이 따르는 법이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 기분이 좋아진 김일성은 105전차여단을 105전차사단으로 승격했다. 이어 선두로 서울에 들어온 3사단~4사단~105전차사단에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 3개 사단과 역시 서울에 들어온 6사단에 대해 ‘근위(近衛)’라는 칭호를 내렸다. 3·4사단과 105전차사단은 ‘근위 서울 3사단’ ‘근위 서울 4사단’ ‘근위 서울 105전차사단’이 되고, 6사단은 ‘근위 6사단’이 된 것이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다 전쟁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정일권(丁一權·당시 33세)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 총참모장’으로 임명하고, 채병덕 소장을 국방예비군 총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가장 충격적인 조치는 한강다리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처형이다. 노회한 이대통령은 한강다리 폭파가 정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분위기가 반전된 직후 9월21일 비밀리에 최대령을 처형케 했다.

    최대령은 채소장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죽고, 명령을 내린 채소장은 목숨을 구한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채소장은 부산 제4지구 계엄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최대령이 처형되기 전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때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다. 이대통령이 외면한 상벌을 역사가 대신 집행한 것이다.

    당시 한국군에는 한 가족이 함께 장교가 된 경우가 많았다. 백선엽 1사단장(대령)과 백인엽 17연대장(대령)이 형제간이고, 유승렬 3사단장(대령)은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유재흥 7사단장(준장)의 아버지였다. 이상근 7사단 3연대장(대령)의 형인 이형근 2사단장(준장)은 이응준 5사단장(소장)의 사위였다. 그러나 1950대의 ‘장년’ 장교단은 요직에 있지 못했다. 한국군의 주력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참 대위나 신참 소령에 해당하는 나이의 30세 전후의 젊은 장성들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런 구도는 큰 불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생국일수록 감정 통제가 가능한 50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있어야 젊은이들간의 경쟁과 혈기방장함, 그리고 공포를 제어할 수 있다. 당시 한국군에도 광복군이나 중국 국부군(국민당군), 일본군에서 고급 지휘관을 지낸 장년층이 있었다. ‘선수 교체.’ 서울이 함락되자 노련한 장년층이 축 처진 ‘젊은 어깨’들을 대신해 최전선에 나왔다.

    6월28일 새벽 수원으로 쫓겨온 육본은 시흥보병학교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어 중국 국부군에서 중장(2성 장군)을 지낸 김홍일(金弘壹·당시 51세) 소장을 사령관에 임명해 패잔병 수습에 나섰다. 먼저 영등포 일대에 패전한 수도경비사 병력이 몰려오자 타 부대 패잔병을 모아 ‘혼성 수도사단’을, 노량진 쪽에 7사단 패잔병이 도착하자 같은 방법으로 ‘혼성 7사단’을 편성했다.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 대좌(대령)를 지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군 안팎에서 존경받던 예비역 김석원(金錫源) 준장이 분연히 일어나 혼성 수도사단을 이끌겠다고 하자 장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김 예비역 준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처럼 ‘봉기’한 것이었다. 그 후 김준장은 7월7일 벌어진 충북 진천 전투에서 직접 권총을 뽑아들고 포탄이 떨어지는 최일선에서 “김석원이 여기 있다. 후퇴하면 쏜다”라고 독전하여 장병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국군 전력은 축차 투입 실패로 30%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편제를 유지하고 한강을 건너온 것은 시흥전투사 예비대로 편입된 1사단뿐이었다. 이러한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어쩐 일인지 7월1일까지 만 3일간 포만 쏘고 진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 쪽은 인민군 2·1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후 서남진해 수원을 점령해야 하는데, 국군 6사단의 분전으로 춘천 진입이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인민군 2·12사단이 수원 쪽으로 진격해 올 때를 기다리느라 바로 한강을 건너지 않고 3일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김석원 장군의 분투

    그러나 북한 쪽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하는 북한 제2자연과학원 기자로 활동하다 귀순한 김길선씨는 “195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최용건 민족보위상을 비롯한 인민군 지도부는 전쟁 준비를 하느라 거의 자지 못했다. 국군이 겪은 전쟁은 불과 4일에 불과하지만, 인민군 병사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부대 이동 등으로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이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너무 쉽게 점령되자, 최용건 등 전쟁 지도부는 긴장이 풀려 술을 마시고 3일 밤낮을 자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나이가 많은 최용건을 ‘형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울을 점령한 부대가 남진하지 않자, 후방에 있는 김일성은 “왜 진격을 하지 않느냐”며 속을 태웠다. 6·25전쟁이 끝난 후 최용건은 병사했는데, 이후 김일성은 “최용건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다”는 내용의 교시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전쟁 초기 공교롭게도 남북한 군 지도부는 모두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다.

    6월30일 미명(未明) 인민군 3사단 특공대 30명이 목선을 타고 흑석동 강변에 도착해 국군 혼성7사단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7월1일 새벽에는 인민군 4사단이 여의도로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혼성 수도사단이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7월3일 새벽 인민군은 끊어지지 않은 단선 철교를 통해 혼성 7사단이 있는 노량진으로 단 4대의 전차를 내려보냈다. 이 4대가 어마어마한 공포를 몰고와 영등포에 포진한 혼성 수도사단도 겁을 먹고 퇴각해, 드디어 한강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후인 7월5일 정일권 총참모장은 1군단을 만들고 김홍일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했다. 1군단에는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1사단(白善燁 대령) 2사단(李翰林 대령)을 배치했다. 이때 2사단장이던 이형근 준장은 장인인 이응준 소장이 신설된 전남관구 사령관을 맡자, 자진해서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어 7월15일에는 김백일(金白一) 준장이 이끄는 2군단을 편성하고 6사단(金鐘五 대령)과 8사단(李成佳 대령)을 지휘케 했다. 3사단과 17연대는 육본 직할부대로 편성했다.

    이로써 국군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5사단과 7사단이 사라졌다. 이러한 사단 해체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반복된다. 이런 체제 정비로 국군 1군단은 인민군 1군단, 국군 2군단은 인민군 2군단과 대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도하에 인민군과 싸우면서 소백산맥 방어선까지 계속 밀려 갔다. 7월2일 국군 8사단에서는 인민군의 야습을 받자 혼비백산해 도주한 소대의 소대장을 연대장이 “지휘 능력이 형편없다”며 현장에서 즉결처분(총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한국군도 악이 받치기 시작한 것이다.

    불쾌한 작은 전쟁

    미국 지식인들은 이러한 6·25전쟁을 ‘불쾌한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 애치슨 선언대로 꼭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데도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했으니 미국의 자존심상 이를 막아야 하는 귀찮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남한의 전략적·지정학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으나, 북한군이 잠자는 사자(미국)의 코털을 건드렸으니(남침했으니), 귀찮지만 일어나서 싸우러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인의 이러한 정서는 꽤 오래 된 것이다. 광복 직후 하지 중장 지휘하에 한국에 온 미 24군단 장병들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 농부들이 논과 밭에 인분을 뿌려 악취를 풍기게 하는 것도 이들을 괴롭혔다. 하지 중장은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을 가리켜 “왜놈과 같은 품종의 고양이들”이라고 지칭하며 적개심을 표현했다. 하지 중장은 다른 곳으로 전출하기 위해 맥아더 원수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미군을 6·25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붙들어맨 사람은 미국인들이 ‘불 같은 성미를 가진 능수능란한 인물’로 평가해온 만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 몸소 도쿄 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관이 “총사령관께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자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는데 당장 깨우라”고 호통을 쳤다.

    6월29일 오전 10시쯤 학수고대하던 맥아더 원수가 만 70세의 노구를 끌고 수원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이대통령 일행이 영접을 나갔는데, 맥아더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4대의 인민군 야크기가 나타나 폭격을 했다. 그 바람에 70대의 이승만과 맥아더는 모자를 움켜쥐고 근처 논두렁으로 달려가 몸을 숨겨야 했다. 방문 인사치고는 아주 호된 인사를 받은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만 38세의 ‘애송이’ 김일성이 그의 운명까지도 바꿔 놓을 호적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만 70세의 맥아더가 어째서 퇴역하지 않고 극동군을 지휘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미 상원이 육군의 마셜·맥아더·아이젠하워·아놀드, 해군의 킹·니미츠·리히·핼시 대장을 원수로 승진시킨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이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하자 미국 의회는 1947년, 8명의 원수는 자신이 요청하지 않는 한 정년에 관계없이 퇴역하지 않아도 되며, 퇴역하지 않는 한 원수 계급장은 종신토록 달 수 있도록 결의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는 사상 최대의 감군(減軍) 바람이 몰아쳤다. 400만 병력이 100만으로 주는 등 군 예산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7명의 원수는 자신에게 투입되는 예산이 적지 않음을 알고 차례로 전역을 신청했다. 그러나 ‘오만한’ 맥아더만은 퇴역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참모장이나 합참의장보다 더 높은 계급을 달고 극동군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군은 통합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태평양과 유럽 극동 등 세계 곳곳에 육해공군 부대를 배치하고 이 부대를 통합 지휘하는 통합군 사령부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사령부 중 하나가 극동군 사령부고, 맥아더 원수는 이 사령부의 총사령관이었다. 극동군 밑에는 육해공군이 있는데, 주력은 육군(8군)이었다. 해공군 부대는 기동성이 좋으므로 다른 곳에서 운영하다 필요시 극동군에 배속시킨다.

    이날 한강 남쪽에서 남북한 군 사이의 포격전을 살펴본 맥아더는 ‘인민군 기갑부대 때문에 미 해공군의 지원만으로는 인민군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극동군 산하 미 5공군(일본 주둔)과 극동군으로 배속된 미 7함대는 이미 6월26일부터 참전했다. 이날 미 5공군의 F86 세이버 전투기는 문산 지역으로 출격했는데, 국군과 인민군을 구별하지 못해 국군 1사단을 공격하기도 했다.

    6월30일 미 합참이 건의를 수용하자, 맥아더 원수는 8군의 워커 중장에게 6·25 참전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에 본부를 두고 있던 8군은 4개 사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최정예인 7사단은 홋카이도(北海道)에 배치해 소련군 공격에 대비하고, 일본 본토에는 1기병·24·25사단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워커 중장이 군 예비대인 24사단에 출동 명령을 내리자 24사단장 딘 소장이 미스 중령 지휘하에 21연대 소속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한국에 파견했다.

    오산에 배치된 ‘스미스 특수임무대’가 인민군 전차를 향해 최초로 미군 포탄을 발사한 것은 7월5일 오전 8시16분이었다. 그러나 인민군 107전차연대 소속의 그 어떤 전차도 멈춰서지 않았다. 그때서야 미군은 왜 국군이 T34전차 공포증에 걸렸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차부대 뒤로는 인민군 4사단 예하 16·18연대가 달려왔다. 인민군 전차와 보병이 함께 진격하는 ‘보전(步戰) 협동작전’과 예의 ‘일점양면전술’을 펼치자 일부 미군 병사들은 철모와 워커를 벗어 던지고 도주해버렸다.

    이 전투에 참여한 미군은 540명이었는데 이중 150명이 전사하고 31명이 실종되었다. 반면 인민군 4사단은 42명이 전사했고, 107연대의 전차 4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역시 미군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대 주력은 대오를 갖춰 안성으로 후퇴한 것이다. 한국군은 포위 공격을 받으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부대 자체가 없어져버렸으나, 미군은 부대를 유지하며 철수했다.

    이때 미군은 2차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이 아니었다. 일본 여성을 첩으로 두고, 집에는 일본인 하인을 둔 ‘배부른’ 점령군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이국 땅에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때문에 입대한 애송이들이었다. 광복 직후 미 24사단은 7사단과 함께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군단 소속 군정 부대로 한국에 상륙했었다. 이때 아놀드 7사단장이 먼저 군정장관이 되고, 이어 딘 소장이 군정장관이 됐다. 이러한 인연을 갖고 딘 소장은 스미스 부대 패배 소식을 들으며 애송이들을 이끌고 주한 미지상군사령관 자격으로 한국으로 달려왔다.

    피란민 공포증

    7월7일 유엔은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정하고 다음날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3사단은 경부축선, 4사단은 공주 방면, 2사단은 대전 쪽, 6사단은 군산을 거쳐 전주로 진격했다. 이어 1군단 예비대인 13사단과 2군단 예비대인 15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고, 후방에는 7·8·9사단을 새로 편성해 총 사단 수를 13개로 늘렸다. 이렇게 인민군이 공세를 강화하자 남한 사회에서는 피란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원칙적으로는 군인들이 하는 것이어서 민간인들은 크게 동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복 직후부터 좌·우익간 갈등이 첨예했던 한국에서는 인민군이 남침하자 움츠려 있던 좌익들이 일어났다. 이들이 우익 인사를 공격하자 불안해진 주민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어군쪽에서 보면 이러한 피란행렬은 작전에 큰 장애가 됐다. 반면 인민군 쪽에서는 아주 좋은 침투 기회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흰옷만 입는 백의민족이었다. 인민군은 특공대에서 흰옷을 입히고, 봇짐 속에는 무기를 넣어 남하하는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집어넣었다. 어떤 인민군 병사는 치마를 입고 여자로 위장한 후 아이를 안은 보따리 속에 수류탄을 넣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특공대가 미군과 국군 후미에 나타나 총을 쏘면, 국군과 미군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황급히 철수하곤 했다. 미군들은 서서히 피란민 공포증에 걸리기 시작했다.

    7월11일쯤 미 24사단 본대가 조치원에 포진하자 워커 8군사령관이 딘 24사단장에게 “7월20일까지 대전지역을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7월12일 미 24사단은 금강교를 폭파하고 일단의 부대들로 금강 방어선을 쳤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후방에 두었다가 방어망이 뚫리는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투입한다는 ‘기동방어 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금강에 도착한 인민군 4사단은 미 24사단 34연대가 포진한 강 건너편을 향해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는 기만 전술이었다. 미군이 포사격에만 신경쓰는 사이 인민군 16연대가 다른 곳에서 작은 보트 두 척을 이용해 금강을 건너버렸다.

    깜짝 놀란 딘 소장은 예비부대를 긴급히 투입했는데, 이 예비대마저 인민군 매복에 걸려 궤멸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 24사단은 대전 갑천 방어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전투에서는 미 남북전쟁 때부터 활약했던 맬로이 대령이 지휘하는 19연대가 주력 부대로 나서게 되었다. 인민군 3사단 미 19연대 정면으로 돌진하고, 4사단은 유성 쪽으로 우회해 동시에 19연대를 포위 공격했다. 이름하여 일점양면전술. 여기서 전통의 19연대는 사실상 와해되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7월20일 견디다 못한 딘 24사단장은 ‘후퇴’를 명령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딘 소장이 사라져버렸다. 대전 시내에 끝까지 남아 시가전을 지휘하던 그는 인민군이 이미 대전 후방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전병에게 “논산 쪽으로 돌아서 남하하라”고 지시했는데, 한국 지리에 어두운 운전병이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오된 딘 소장은 실종 36일째 되는 날 전북 진안군에서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에 생포되었다.

    이로써 이미 근위사단 칭호를 받은 방호산은 다시 한번 영웅 칭호를 받아, 이중 영웅이 되었다. 미군 장성이 적군에게 포로가 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혼마(本間) 중장의 일본군 14군이 필리핀을 공격하자 미 극동지상군을 이끌던 맥아더 대장은 견디지 못하고 필리핀을 탈출했다. 이때 웨인라이트 중장이 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지상군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하다 일본군에 생포되었다.

    웨인라이트 중장은 1945년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한 뒤 석방되었다. 1945년 9월2일 연합군이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重光葵)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을 때, 웨인라이트는 맥아더 뒤에서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매서운 눈초리로 시게미쓰를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딘 소장에게는 이러한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1953년 ‘무승부’로 휴전이 체결된 후 비로소 석방된 그는 바짝 여윈 몸을 이끌고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작전권 이양

    금강·대전 전투를 통해 미 24사단은 30%의 병력이 희생되고 후임 사단장에 처치 소장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희생은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권을 이양한다는 서한(letter)을 보낸 것과 더불어 미국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한국에서 싸우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국군 작전군 이양에 대해서는 ‘생사가 급하다고 마누라를 팔아먹은 것’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99년 코소보 내전 때 유고 세르비아계가 코소보에 있는 알바니아계 주민을 공격하자 불안해진 알바니아는 작전권을 NATO군에게 긴급 이양했다. 변변한 군대조차 없는 알바니아로서는 작전권을 이양해 NATO군으로 하여금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 당시로는 유일한 생존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전권 이양은 더 이상 방어 수단이 없을 때 팔아먹을 수 있는 ‘마지막 재산권’이다. 작전권 이양 때문에 미군은 무려 5만4000여 명의 병사를 한국전선에 바치게 된다.

    미 24사단이 궤멸하는 사이 25사단(사단장 킨 소장)이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유명한 패튼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게이 소장이 이끄는 1기병사단은 부산항이 너무 붐비는 관계로 포항 해안으로 행정상륙해 들어왔다. 이로써 일본에는 미 7사단만 남게 돼 맥아더 원수는 일본 방어가 위태롭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맥아더 원수는 평화헌법을 만들어 일본의 군대 보유를 금지했다. 그런데 미군 출동으로 일본 방어가 어려워지자 편법을 동원했다.

    일본 점령 직후 맥아더 원수는 한국에서처럼 경찰예비대를 창설해 치안 임무를 맡겼다. 맥아더는 이 경찰예비대의 전력을 강화해 일본을 방어케 했다. 경찰예비대가 발전해 보안대가 되고 보안대가 다시 자위대가 되면서, 일본은 재무장했다. 반제항일(反帝抗日)을 기치로 건 북한군의 남침으로 그들이 말하는 ‘제국주의자’ 미국이 참전하고, ‘타도 대상’인 일본이 재무장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전 함락 후인 7월22일 국군은 수도·8사단으로 1군단(군단장 김백일준장)을 편성해 동부전선을 맡게 하고, 1·6사단으로 2군단(군단장 유재흥준장)을 편성해 중부전선을, 그리고 3사단은 동해안 방어를 전담케 했다. 이로써 1·2군단은 동서부 작전 지역을 맞바꾸었고, 2사단도 사라져 한국 육군은 5개 사단만 남게 되었다.

    미 24사단과 교체해서 소백산맥 방어전에 투입된 미 1기병사단과 25사단은 인민군에 대한 공포감이 워낙 컸다. 이들은 도저히 남북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게릴라로 변모하는 흰옷 입은 사람이 무서웠다. 그래서 1기병사단은 대전 이남인 영동 등지에서 남하하는 피란민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에 몰아넣고 감시했다.

    노근리 쌍굴다리의 비극

    6·25전쟁 발발 다음날 발진한 미 5공군은 문산의 국군 1사단을 오폭했다. 개전 초기 F86세이버는 숱한 곳에서 오폭사고를 일으켰는데, 노근리 쌍굴 다리에 대해서도 오폭했다. 노근리의 1기병사단은 ‘요시카와’라는 일본인을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일본어가 통했다. 일본인을 통한 의사전달 과정에 생긴 오해, 세이버 전투기의 오폭 등으로 7월26, 27일 사이 노근리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마저 연이어 패배하자 다급해진 맥아더는 연속해서 SOS를 쳤다. 워싱턴은 110억 달러의 추가 예산을 통과시키고, 92개 주방위군 부대, 4개 사단, 그리고 전체 해병대와 해군 예비역에 대해 소집령을 내렸다. 미국은 2차대전 종전 5년 만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본에 있는 미군 병참부대들은 전쟁 물자를 초특급으로 부산으로 수송하기 위해 ‘레드 볼 작전’에 돌입했다.

    도쿄와 요코하마-사세보항를 잇는 육로와 사세보항에서 부산항을 잇는 해로를 70시간 안에 주파한다는 것이 이 작전의 요체였다. 이 긴급 수송작전이 패전 일본 경제를 살리는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미군 눈에는 이러한 부산이, 미군이 적진에 확보한 교두보로 보였는지 부산항을 ‘부산 교두보’로 불렀다.

    유럽을 무대로 한 2차대전 초기 독일군에 쫓긴 영불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의 던커크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영국으로 대거 피신했다. 그 탓에 프랑스 전역이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미국 언론은 서서히 ‘부산항이 제2의 던커크가 되지 않을까’란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50년 7월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맥아더 원수로부터 미군은 물론이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작전권을 위임받은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별명은 ‘불도그’다. 워커는 유럽을 무대로 한 2차대전 때 패튼 중장이 지휘한 3군 예하 20군단장으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전쟁 지휘관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불도그는 반짝반짝 윤을 낸 ‘알 철모’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워커가 “버릇이 없다”며 싫어했다. 그만큼 워커는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알철모가 작전명령 제1호를 내리면서 붙인 일갈(一喝)이 ‘죽느냐 사느냐(stand or die)’였다. 그만큼 전황은 다급해졌다.

    워커는 영덕에서 마산에 이르는 낙동강에 방어선(이른바 워커 라인)을 치기로 했다. 이때 워커가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었다(미 24사단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편제가 유지되었다). 이 8개 사단이 미 본토에서 증원 군이 올 때까지 평균 30㎞씩 도합 240㎞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했다. 방어 부대는 남쪽에서부터 미 25·24·1기병사단, 이어 군군 1군단((1·6사단)-2군단(수도·8사단)-마지막으로 동해안에 국군 3사단 순으로 배치되었다.

    워커 중장은 이 방어선을 X선으로 명명하고 이 선이 뚫릴 경우에는 포항에서 왜관·마산을 잇는 Y선에 다시 방어선을 치기로 했다. 이때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슨 준장은 Y선이 돌파되면 마산-밀양·울산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미군을 일본으로 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 마산-밀양-울산 선은 ‘데이비슨 라인’으로 명명됐고, 미군끼리만 알고 한국군에는 절대 비밀로 하였다.

    8월에 들어서자 인민군은 8·15광복절 전에 ‘해방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총공세에 나섰다. 인민군은 개전 초기 7개 사단을 남진시키다 뒤에 군단 예비대인 2개 사단을 더 투입했다. 그리고 3개 사단을 신설해 투입하고, 마지막에는 평양에 있던 총 예비대인 10사단까지 도합 13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김책 대장이 이끄는 전선 사령부는 수안보에 설치되고, 인민군 1군단은 주로 미군과 싸워야 하는 김천에, 2군단은 국군 정면인 안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13대 8의 처절한 낙동강 전투가 시작되었다.

    데이비슨 라인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인민군의 일점양면전술, 양익포위전술, 정규전과 비정규전 배합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방어지역이 줄어들다 보니 한-미 8개 사단이 촘촘히 배치돼 도하작전을 위한 기만 포격이나 몰래 침투할 곳이 적어져버린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보급로가 길어진 인민군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실전을 통해 전술을 익힌 국군은 악에 받쳐 날로 용감해져 가고 있었다. 낙동강변에 서식하는 ‘지랄 같은’ 모기는 국군과 인민군 미군 모두를 물어뜯고 있었다. 인민군으로서는 정면돌파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도 낙동강은 얕았다. 상류에는 걸어서 도강할 곳이 많았다. 인민군은 공격부대를 개전 때처럼 4방향으로 나눠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동쪽에서부터 살펴본다면 ①포항을 향한 동해안 공격 ②경부 축선을 따라 대구 쪽으로 공격(주공) ③밀양 방면을 향한 공격 ④제일 남쪽인 마산 쪽으로 공격 순이 된다.

    이에 대해 7월29일 워커 중장은 미 25사단을 방문해 “여기서는 절대로 던커그나 바탄(필리핀에서 웨인라이트 중장이 생포된 섬)이 재연될 수 없다.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명령했다. 훗날 사수(死守)훈령으로 명명된 이 지독한 훈령이 공포에 처한 미군을 긴장시켰다. 8월3일 미 1기병사단이 피란민이 몰려드는 왜관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을 신호로 미군은 낙동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다.

    미군은 국군 각 부대에 3.5인치 로켓을 제공했는데 이 로켓이 T34전차를 관통했다. 드디어 전차 공포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국군은 괘도용으로 쓰는 ‘대한민국 전도’로 작전해왔다. 그런데 미군은 산과 골짜기가 분명히 표시된 5만분의 1 지도를 제공했다. 이러한 물자 공급이 국군의 방어 능력을 현저히 향상시켰다. 기절할 것 같은 더위와 지독한 모기, 그리고 숨박히는 긴장 속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민군의 4개 방향 공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②번 대구 쪽 공격이었다. 이 방향 공격을 위해 인민군은 1군단 주력 부대인 1·3·105전차사단과 8·10·13·15사단을 투입했다. 이곳에는 국군 1·6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지휘관 중에는 운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싸움은 잘하는데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명장은 운이 좋은 사람 중에서 나온다. 1905년 러일전쟁 때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수장하고 발틱함대 사령관 로베스트빈스키 제독까지 생포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운좋은 지휘관의 대표다.

    도고 제독은 둔한 사람인데도 운이 좋아 대장까지 진급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지휘부는 누구를 연합함대 사령관에 앉힐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는데, 이때 후방 병참부대 사령관인 도고를 ‘무능한 것 같아도 운이 좋은 사람’이란 이유로 선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완전 격파와 이어 발틱함대 완전 수장이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

    그 무렵 막 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1사단장과 김종오 6사단장도 비교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두 지휘관은 개전 때부터 잘 싸우더니 훗날 ‘다부동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에서도 방어전 성공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때 1사단은 평양 점령 1착 부대가 되고, 6사단은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대구를 향한 인민군의 공세가 거세 일시적으로 Y선까지 뚫리자 워커 8군사령관은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27연대를 투입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선두에 섰던 1사단이 특히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15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부동 전투는 그동안 뚫리기만 하던 대규모 방어전에서 처음으로 밀리지 않고 전선을 지켜낸 싸움으로 기록된다.

    그러는 사이 갓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대 임시1여단이 인민군 4사단을 막고, 미 25사단장 킨 소장이 이끄는 ‘킨 타스트 포스’가 인민군 6사단을 막아냈다. 5사단을 주축으로 한 인민군이 포항으로 밀려들자 백인엽 대령의 국군 17연대는 전차와 보병 대대로 편성된 ‘브래들리 타스크 포스’를 지원 부대로 받아 악착같이 막아냈다. 곳곳에서 방어전은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워커 중장이 펼친 방어전술은 딘소장이 대전에서 실패한 ‘기동 방어’였다. 워커 사령관은 미 27연대 등을 후방으로 빼놓았다가 위험한 곳이 있으면 즉시 투입해 불을 끄는 특급 ‘소방수’ 부대로 활용해 대성공을 거뒀다.

    민족과 국가는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하는 과정에 발전한다.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고 피압박 상태로 떨어지면 전멸하지만 응전하게 되면 지혜와 용기가 생겨 발전 속도가 빨라진다. 인민군 남침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다 죽어가던 국군은 미군의 참전으로 응전의 기회를 어렵게 마련했다. 이로써 인민군의 전력은 상당 부분 소진돼 공수를 교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이기고 싶었다면 이전까지의 전략·전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꿨어야 한다. 인민군은 총공세에 앞서 일본 사세보항과 부산 항을 잇는 미군의 초고속 병참 항로를 차단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해군은 미 해군 7함대에 밀려 제해권을 완전히 내주고 있었다.

    이렇게 제해권을 빼앗겼을 때 유용한 무기가 잠수함이다. 지금까지도 잠수함은 아무리 구식일지라도 일단 잠수하면 탐지해 낼 수가 없다. 북한 해군이 이러한 잠수함을 동원해 ‘레드 볼’ 작전에 참여한 미국 수송선 몇 척을 격침했다면, 단번에 미군은 데이비슨 라인으로 철수했을 것이다.

    이 쓰라린 교훈 때문에 그후 북한은 잠수함(정) 확보에 열을 올려 현재도 9대 1의 비율로 한국 해군보다 많은 잠수함(정)을 보유하고 있다.

    인민군이 해병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것도 큰 불행이었다. 개전 초기 동해안에서 인민군은 5사단을 침공할 때 특공대를 해안으로 상륙시켜 국군 8사단을 고립시켰다. 한·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몰렸을 때 인민군은 해병대나 특공대를 과감히 동해안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만들었어야 한다. 김일성이 돌격상륙작전을 감행하는 해병대가 유사시 전황을 어떻게 뒤바꿔버리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인천상륙작전).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인민군으로서는 큰 패착이었다. 이때의 기억 때문에 북한은 공군력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경제 붕괴로 인해 지금은 사실상 포기했다. 반면 한국 공군은 6·25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 공군은 연락기와 훈련기뿐인 한국 공군에 프로펠러기인 F51 무스탕 10대를 넘겨주었다. 한국 공군에 F51 조종술을 가르친 이는 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헤스 대령이었다. 원래 직업이 목사인 헤스 대령은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후송해 극진히 돌본 독특한 사람이었다.

    맥아더의 반격

    낙동강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사이 미 본토에서 2사단이 오고, 홍콩에서는 영국군 27여단이 들어왔다. 인디언 마크를 한 2사단은 이때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유엔군의 전력 증강은 인민군에 큰 부담이었다. 다부동 전투를 통해 국군 1사단은 미군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때 워커 사령관은 미 24사단과 1기병사단으로 편성된 미 1군단(군단장 밀번 소장)에 국군 1사단을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그때까지 제각각 싸우던 한·미군이 연합작전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

    낙동강 방어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처음 생각은 7월22일 한국에 온 1기병사단을 포항이 아니라 인천으로 돌격상륙시킬 생각이었다(블루 하트 작전). 그러나 7월20일 미 24사단이 대전에서 궤멸되자 인천 돌격상륙을 포기하고 포항으로 행정 상륙시켰다.

    이어 그는 미 본토에서 온 2사단과 1해병여단을 인천으로 돌격 상륙시킨다는 ‘크로마이드 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가 다급해 이것 또한 포기했다. 그런데 낙동강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맥아더 원수는 이제 ‘우리가 공격할 차례’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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