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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人 성공학|우성어패럴 이성림사장

재고품 창고에서 키운 드레스셔츠 명가의 꿈

  • 곽희자

재고품 창고에서 키운 드레스셔츠 명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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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갔다. 뒤에 듣기로는 그날 회사로 돌아간 사장이 직원들에게 “구로동 창고에 있는 이성림 좀 닮아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정리해 놓은 재고품들은 나중에 회사가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유용한 자금원이 됐다. 이씨는 창고에 온 지 1년 만에 대리로 특채됐다. 얼마 후엔 창고 부지에 기계를 들여와 공장을 본격 가동하면서 이곳이 전국으로 나가는 제품의 출구가 됐는데, 그는 이 공장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당시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자신을 ‘오픈’했기 때문이다.

“장부 정리도 제대로 할 줄 몰랐죠. 가령 장부에 출고수치는 검은 펜으로, 입고수치는 빨간 펜으로 써야 하는데, 침침한 전깃불 밑에서 검은 펜으로 쓰니까 글씨가 잘 안 보여 모두 빨간 펜으로 써버렸어요. 다음날 경리과에서 전화를 걸어 난리를 치더군요. 그래서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기가 막힌지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경리과 여직원이 달려오더군요.”

이씨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바람에 일도 빨리 배울 수 있었고 동료들에게도 진실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공장에서 3년간 제품관리를 하다가 서울지점 영업부로 발령받아 회계장부 정리와 외판원 관리를 맡게 됐다. 그는 특히 외판원 관리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탄탄하게 잘 나가던 시대복장은 갑작스레 찾아든 오일 쇼크를 견뎌내지 못하고 1974년에 부도를 맞았다. 그는 남은 직원들과 1년간 회사를 운영하다 회사가 채권단에 넘어가자 영업총괄을 맡아 다시 3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그 후 채권단이 ‘시대상사’라는 회사를 차려 나가면서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회사를 떠맡게 되었다. 이래저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대복장이 무너지자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옷장사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사장은 5년간 이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하고 80년 9월, 자본금 3000만원을 빌려 남대문시장 뒤편에 30평 남짓한 규모의 시대셔츠를 설립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의류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지 9년 만에 그는 창고지기에서 창업주로 변신한 것이다. 6명의 직원과 함께 출발했는데, 제품 생산은 신갈에 있는 한 공장에 하청을 주었다.

시대셔츠는 재래시장을 겨냥한 ‘사자표 와이셔츠’를 대량 생산했다. 이미 한물 간 원단을 이용해 다른 제품의 절반 값에 물건을 내놓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서너 해가 지나자 시대셔츠는 직원이 120여 명이 될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이 무렵 상표 도용 시비가 일면서 제품 생산이 어려워져 이사장은 창업 5년이 채 못 돼 상표를 돌려주고 회사를 정리했다.

부도 위기를 넘기고

이사장은 1985년 ‘우성어패럴’로 상호를 바꾸고 사업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을 것인지 고민했다.

“당시 국내 드레스셔츠는 질보다는 양 위주였어요. 재래시장은 내가 하다 넘겨준 시대셔츠가 꽉 잡고 있었고, 백화점은 이제 막 태동기라 고급품을 들고 백화점에 뛰어들기엔 아직 일렀어요. 그래서 고급품을 만들되 수출 쪽으로 나가자고 생각했어요. 얼마 동안은 OEM으로 하다가 자리가 잡히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수출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고급품 생산을 위해 시설투자를 늘리는 한편 유능한 기술자를 대거 영입했다. 삼성(지방시)과 신세계(이브생로랑)가 들여온 해외 브랜드를 OEM으로 생산해 납품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시장만 뚫으면 세계 어느 시장이라도 뚫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먼저 일본 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정부는 한일 무역역조 개선을 위한 ‘한일수출 촉진단’을 발족, 중소기업인들을 모아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사장도 공들여 만든 20장의 드레스셔츠를 들고 여기에 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시장조사 한번 하지 않고 일본 백화점들을 돌아다니다 백화점에 많이 나와 있는 와이셔츠 상표 몇 개를 ‘찍은’ 뒤 무턱대고 그 회사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어쨌든 당시 일본 방문으로 그는 도쿄백화점과 의류업체 다반을 거래처로 뚫었지만, 도쿄백화점은 2년 만에, 다반은 1년 만에 그만뒀다.

다반과 관계가 끊긴 것은 직원들의 안일함 때문이었다. 주문한 물건을 보낸 후 다반에서 항의전화가 왔다. 하나같이 팔이 짧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어깨 형질을 잘못 사용해 길이가 짧아졌는데, 이를 알고도 사장에게 쉬쉬하고 대충 눈속임으로 옷을 만들어 보냈던 것. 이사장은 다반에 손해액 전액을 보상했지만, 그 후 더 이상 주문은 없었다.

이후 그는 몇몇 일본 백화점들에 물건을 납품했지만 대부분 소량이다 보니 채산이 맞지 않았다. 그때서야 이사장은 수출로 방향을 튼 자신의 계획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우리나라 원단으로는 세계 시장을 뚫을 수가 없었어요. 소재 경쟁력이 없는 겁니다. 질은 떨어지면서 값은 비싸니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죠. 요즘 대구를 밀라노 같은 세계 섬유의 중심지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섬유산업을 다시 꽃피우겠다고 하는데, 이건 결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소재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사장은 지금처럼 대형화한 우리 방직업계 구조로는 절대로 소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처럼 분야별로 소규모 분업화하고 충분한 기술축적이 밑받침될 때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는 무모하게 수출의 길을 꿈꾸다 86년에 부도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막상 부도를 내려니 그때껏 자신을 믿고 도와준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살인보다 더 큰 죄라는 생각에 ‘어차피 죽은 목숨이면 발악이나 해보고 죽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도 주위의 도움이 원군이 됐다. 그는 이들의 지원과 보증보험을 이용해 어렵사리 부도위기를 넘겼다.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마치 껍데기를 까고 나온 것처럼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한다. 이제 회사는 내 것이 아니다, 이 회사는 남의 도움으로 건진 것이니 사회의 것이다, 나는 그저 봉사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판매 1위 등극

사업방향도 전환했다. 그 동안 거래해온 일본의 거래선을 모두 끊고 내수시장을 겨냥했다. 이때 국내에서는 재래시장은 쇠퇴하고 백화점들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백화점에는 해외 브랜드가 속속 입성하고 있었다.

이성림 사장은 1987년 피에르 발망(프랑스)의 상표와 기술을 도입, 후발주자로 백화점에 들어갔다. 대(對)백화점 영업능력이 뛰어난 전문가를 영입해 적극적으로 판매망을 뚫었다. 90년엔 파올로 구치(이탈리아)를, 93년엔 닥스를 들여오면서 회사는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외국 기술을 들여온 것은 늦었지만, 다양한 해외 브랜드와 접촉하며 기술력을 높여간 것. 93년에는 일찌감치 구조조정에 착수, 30%의 인원을 감축하는 등 군살을 뺐다.

87년 판매량 7∼8위를 오르내리던 우성어패럴은 이런 노력에 힘입어 90년에 4위, 98년에 들어서면서 1위에 올라섰다. 외환위기가 터진 98년에도 우성어패럴은 매출이 11%나 성장했고, 지난해에는 30%의 성장률을 보였다. IMF 관리체제에서도 현금거래 원칙을 고수해 남들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소재를 구입할 수 있었고, 94년부터 도입한 판매사원들의 인센티브제가 정착되면서 판매율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190명의 우성어패럴 생산직 직원 중 20여명은 청각장애인이다. 직원의 10% 이상은 장애인을 고용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이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몇 명을 데려왔을 때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일 시키기도 힘들고, 그 아이들도 소외감을 느껴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그만두더군요. 그래서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더 많은 장애인을 데려왔고, 수화통역사를 불러다 관리자들로 하여금 수화를 배우게 했어요. 지금은 이들이 비장애인들보다 일을 더 잘해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집중력이 높은 것 같습니다.”

우성어패럴의 지방 출신 직원들은 사원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이사장은 88년, 15평형짜리 아파트 13실을 지어 필요한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난해엔 5000만원의 사비를 내놓아 사원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첫해엔 직원 자녀 15명에게 학자금을 지원했다. 이사장은 이 재단에 매년 5000만원을 투자해 주택자금과 생활안정자금 등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걸 이제서야 하게 됐어요. 직원들이 수고한 것에 비해 충분한 대우를 못해줘 늘 안타까웠습니다.”

우성어패럴은 소비자의 편의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잇따라 선보였다. 93년부터는 칼라나 소매깃이 낡은 드레스셔츠를 무료로 수선해주고 있다. 이런 제품을 매장으로 가져오면 언제든지 수선해주는데, 한 달이면 1000장 가까운 수선 제품이 들어온다고 한다.

98년부터는 시중 제품에 사이즈가 맞지 않는 소비자들을 위해 매장에서 직접 치수를 재 제품을 주문하는 맞춤식 드레스셔츠를 만들고 있다.

드레스셔츠는 그해에 유행할 정장 스타일과 색상을 남보다 빨리 예측해 여기에 맞는 소재와 색상을 계절에 맞게 신속하게 상품화해 내놓아야 한다. 우성어패럴은 춘하, 춘추 1년에 두 차례 신상품을 개발해 내놓는데, 그 종류만도 200여 종에 달한다.

지난해 자체 브랜드로 개발한 ‘예작(藝作)’은 20∼30대를 겨냥한 상품으로 색상이 밝고 활동하기에 편리한 ‘루미(roomy·품이 넉넉한) 스타일’이 주를 이루는데, 이사장은 앞으로 이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그는 이를 위해 중소기업으로는 하기 힘든 TV광고를 19억원이나 들여 만들기도 했다.

이사장은 오는 5월 40대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영입, 새로운 경영방법을 도입해 회사를 더욱 발전시킬 계획이다.冬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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