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재고품 창고에서 키운 드레스셔츠 명가의 꿈

  • 곽희자

    입력2006-10-25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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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어패럴 이성림(李成林·61) 사장은 직원들에게 “회사에 충성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 회사를 자기 발전의 도장으로 삼아라.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더 나은 길을 찾아 떠나라”고 부추긴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이직(移職)을 독려한다?

    실제로 그간 이 회사에서 일을 배운 후 독립, 경영인으로 변신한 사람은 7∼8명에 이른다. 이사장은 이들 가운데 창업자금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겐 사정이 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열린 경영’ 때문인지 우성어패럴에는 직원이 300여 명이나 되는데도 아직 노동조합이 없다. 사장이 사원들의 불편을 먼저 헤아리고 도와주다 보니 직원들도 노조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하다.

    1997년 노동부는 이 회사를 ‘노사협력우량기업’으로 선정, 인증서를 줬고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이사장을 모범 중소기업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우성어패럴이 국내 드레스셔츠 판매량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이처럼 탄탄한 노사협력의 결실인지도 모른다. 이 회사는 93년부터 영국 닥스와, 96년부터 프랑스 지방시와 제휴해 드레스셔츠를 만들어왔고, 지난해엔 자체 브랜드 ‘예작(藝作)’을 개발했다. 연매출액은 300억원대.

    큰돈은 쓰고 푼돈은 아낀다

    지난 3월 말,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자리한 우성어패럴을 찾았다. 300여 평의 공장 안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쳤다. 생산공정의 절반 정도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뤄지지만, 나머지 절반은 일일이 사람의 손길이 가야 한다. 고급품일수록 사람의 섬세한 손길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품은 형질에 따라 원단이 재단되고 부위별로 마름질되어 몸통, 칼라, 팔, 소매 순서로 봉제된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제품은 10여 명의 직원이 두 차례에 걸쳐 품질 검사를 한다. 품질 검사는 모두 육안으로 하는데, 칼라에서 단추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 작은 흠집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두 불량품으로 처리한다.

    이 회사에서 하루에 생산되는 드레스셔츠는 3000장. 1년이면 90만장에 이른다. 불량률은 1% 정도. 이렇듯 불량률이 낮은 것은 이성림 사장의 품질지상주의 철학이 직원들에게도 심어졌기 때문이다. 필자와 함께 공장을 돌아보던 날도 이사장은 예리한 눈으로 하자가 있는 물건을 가려내 조용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렇다고 이사장에게서 날카로운 기업가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사장은 그가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샌님 같은 외모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례적이지 않은 겸손함이 몸에 배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업은 자기를 ‘오픈’하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비즈니스에선 인간관계를 통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마음을 열고 진실을 보여줘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그는 20년 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修己而 敦本務實, 接人而 一輪赤心(자기를 닦는 데는 근본과 행동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접할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라)’이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학식은 짧지만 살아오신 삶 자체가 그대로 모범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부딪히면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았다”는 것.

    이성림 사장은 1939년 경남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결혼 후 그 역시 삼형제를 두어 3대째 딸 구경을 못 하는 집안이다.

    그가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부친은 “남자는 돈이 생기면 큰돈은 써야 하고, 푼돈은 아껴야 한다”고 충고했다. 큰돈은 반드시 써야 할 돈이니 써야 하지만, 푼돈은 낭비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들은 지금까지 그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

    교직 던지고 무작정 상경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학예회에서 늘 주인공을 맡을 만큼 노래도 잘 하고 영리했던 이씨는 4학년 때 같은 동네에 살던 말 더듬는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흉내내던 말버릇이 어느 결에 입에 배 자신도 그만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말 천천히 하라며 눈을 부라리고 혼을 냈다. 주변에서 문제 삼지 않고 내버려뒀으면 그러다 말 수도 있었는데, 자꾸만 “큰일났다” “애 저거 병신 다 됐다”며 수군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강박감에 빠져들어 정말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말 더듬는 버릇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까지 계속됐다. 한창 자기 성장의 밑바탕을 닦아야 할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말은 잘 못했지만 시험을 보면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아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등생이었다.

    10년이 넘게 콤플렉스였던 말더듬이 버릇은 교사 발령을 받고 출근하던 첫날 일시에 해결됐다. 단 카스트의 ‘정신력의 기적’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정신력의 일부분이고, 정신의 깊은 부분은 수면 아래처럼 무한한 잠재력이 내재하는데, 이 잠재된 정신력을 이용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모든 것이 자기 마음과 정신력에 따라 좌우되니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라는 것이었어요.”

    이씨는 이 책을 읽고 말을 더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출근 첫날 단상에 올라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멋지게 인사말을 했다. ‘정신력의 기적’이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활시간이면 말 더듬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가 교직에 몸 담게 된 것은 1957년 우연한 기회에 치른 ‘국민학교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하면서다. 그는 이후 10년간 밀양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 사이에 대학 진학을 시도하고 고등고시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제대한 후에는 모든 걸 접고 교직에만 충실했다. 그러다 30세가 되던 1969년, 그는 더 이상 교직에 전망이 없다고 생각, 떠나기로 했다.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교직의 인기도 떨어지고, 새로운 직장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교사가 교단을 떠났어요. 나보다 10살 많은 선배교사를 보니 사회에서 ‘한물 간 중늙은이’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그냥 있으면 10년 후엔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아무 대책도 없이 사표를 쓰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창고지기로 출발

    그때껏 미혼이던 이씨는 전화국 말단 직원으로 있던 둘째 형 집에 얹혀 살면서 월부 책장사를 시작했다. 시골 교사로 10년을 살아온 그에게 이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이때 그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곳이 있고, 일 때문에 만날 상대가 있는 사람’이 한없이 부러웠다고 한다.

    책 세일즈는 2년 만에 그만뒀다. 그가 갈 곳은 당시 7촌 아저씨가 운영하던 시대복장주식회사뿐이었다. 시대복장은 194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의류업체의 태두. 무역업 등록 1호로 정장과 숙녀복, 와이셔츠에 이르는 갖가지 의류를 생산하던 종합의류업체였다. 이 회사는 1960년대 말에 이미 소비자가격을 정찰제로 바꾸고 상품권까지 발행한 앞서가는 회사였다. 직원만 1000명이 넘고, 전국에 30여개에 달하는 체인점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시대 와이셔츠’와 ‘사자표 와이셔츠’는 당시 드레스셔츠 분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사장을 만나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만 했다고 하면 문전박대당할 것 같아 책 세일즈도 하고 청계천에서 컴프레서 납품도 했다며 사회 경험이 많은 것처럼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사장은 일언지하에 그를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후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다섯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사장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대뜸 “니를 도대체 어디다 쓰란 말이고?” 하고 내뱉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여기에서 물러서면 일자리 구하기는 꿈도 못 꾸게 된다 싶었다. 그는 한껏 독하게 마음먹고 쏘아붙였다.

    “아저씨는 안 돌아가시고 끝도 없이 살 줄 아십니까? 제가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민석이(사장의 아들로 당시 대학생이었다)가 사장할 때도 제가 회사에 도움이 안 되고 중요한 존재가 안 되겠습니까? 지금 일을 맡겨주시면 그때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어떤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그는 집안에서 꽤 말발이 센 큰형님에게도 SOS를 보냈다. 큰형님이 올라와 사장을 만나고 얼마 후에 그는 구로동에 있는 창고 담당자로 발령이 났다.

    1971년 겨울, 발령을 받고 구로동 창고를 찾아가니 덜렁 건물 하나에 경비 한 명과 파견 나온 대리급 직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를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고,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창고 문을 열어봤다. 재고품들이 먼지를 가득 덮어쓴 채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우선 재고품 묶음을 풀어 같은 종류의 옷끼리 분류했다. 그가 출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매일같이 제 시간에 나와 같은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창고에 들른 사장이 말끔히 정리된 재고품더미를 보며 “이런 물건이라면 다시 팔 수 있을 텐데… 이런 게 또 있나?” 하고 물었다.

    “예. 저쪽에도 많은데 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시키던가?”

    “시킨 사람은 없지만 그냥 이렇게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고 있습니다.”

    사장은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갔다. 뒤에 듣기로는 그날 회사로 돌아간 사장이 직원들에게 “구로동 창고에 있는 이성림 좀 닮아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정리해 놓은 재고품들은 나중에 회사가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유용한 자금원이 됐다. 이씨는 창고에 온 지 1년 만에 대리로 특채됐다. 얼마 후엔 창고 부지에 기계를 들여와 공장을 본격 가동하면서 이곳이 전국으로 나가는 제품의 출구가 됐는데, 그는 이 공장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당시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자신을 ‘오픈’했기 때문이다.

    “장부 정리도 제대로 할 줄 몰랐죠. 가령 장부에 출고수치는 검은 펜으로, 입고수치는 빨간 펜으로 써야 하는데, 침침한 전깃불 밑에서 검은 펜으로 쓰니까 글씨가 잘 안 보여 모두 빨간 펜으로 써버렸어요. 다음날 경리과에서 전화를 걸어 난리를 치더군요. 그래서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기가 막힌지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경리과 여직원이 달려오더군요.”

    이씨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바람에 일도 빨리 배울 수 있었고 동료들에게도 진실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공장에서 3년간 제품관리를 하다가 서울지점 영업부로 발령받아 회계장부 정리와 외판원 관리를 맡게 됐다. 그는 특히 외판원 관리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탄탄하게 잘 나가던 시대복장은 갑작스레 찾아든 오일 쇼크를 견뎌내지 못하고 1974년에 부도를 맞았다. 그는 남은 직원들과 1년간 회사를 운영하다 회사가 채권단에 넘어가자 영업총괄을 맡아 다시 3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그 후 채권단이 ‘시대상사’라는 회사를 차려 나가면서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회사를 떠맡게 되었다. 이래저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대복장이 무너지자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옷장사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사장은 5년간 이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하고 80년 9월, 자본금 3000만원을 빌려 남대문시장 뒤편에 30평 남짓한 규모의 시대셔츠를 설립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의류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지 9년 만에 그는 창고지기에서 창업주로 변신한 것이다. 6명의 직원과 함께 출발했는데, 제품 생산은 신갈에 있는 한 공장에 하청을 주었다.

    시대셔츠는 재래시장을 겨냥한 ‘사자표 와이셔츠’를 대량 생산했다. 이미 한물 간 원단을 이용해 다른 제품의 절반 값에 물건을 내놓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서너 해가 지나자 시대셔츠는 직원이 120여 명이 될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이 무렵 상표 도용 시비가 일면서 제품 생산이 어려워져 이사장은 창업 5년이 채 못 돼 상표를 돌려주고 회사를 정리했다.

    부도 위기를 넘기고

    이사장은 1985년 ‘우성어패럴’로 상호를 바꾸고 사업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을 것인지 고민했다.

    “당시 국내 드레스셔츠는 질보다는 양 위주였어요. 재래시장은 내가 하다 넘겨준 시대셔츠가 꽉 잡고 있었고, 백화점은 이제 막 태동기라 고급품을 들고 백화점에 뛰어들기엔 아직 일렀어요. 그래서 고급품을 만들되 수출 쪽으로 나가자고 생각했어요. 얼마 동안은 OEM으로 하다가 자리가 잡히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수출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고급품 생산을 위해 시설투자를 늘리는 한편 유능한 기술자를 대거 영입했다. 삼성(지방시)과 신세계(이브생로랑)가 들여온 해외 브랜드를 OEM으로 생산해 납품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시장만 뚫으면 세계 어느 시장이라도 뚫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먼저 일본 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정부는 한일 무역역조 개선을 위한 ‘한일수출 촉진단’을 발족, 중소기업인들을 모아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사장도 공들여 만든 20장의 드레스셔츠를 들고 여기에 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시장조사 한번 하지 않고 일본 백화점들을 돌아다니다 백화점에 많이 나와 있는 와이셔츠 상표 몇 개를 ‘찍은’ 뒤 무턱대고 그 회사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어쨌든 당시 일본 방문으로 그는 도쿄백화점과 의류업체 다반을 거래처로 뚫었지만, 도쿄백화점은 2년 만에, 다반은 1년 만에 그만뒀다.

    다반과 관계가 끊긴 것은 직원들의 안일함 때문이었다. 주문한 물건을 보낸 후 다반에서 항의전화가 왔다. 하나같이 팔이 짧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어깨 형질을 잘못 사용해 길이가 짧아졌는데, 이를 알고도 사장에게 쉬쉬하고 대충 눈속임으로 옷을 만들어 보냈던 것. 이사장은 다반에 손해액 전액을 보상했지만, 그 후 더 이상 주문은 없었다.

    이후 그는 몇몇 일본 백화점들에 물건을 납품했지만 대부분 소량이다 보니 채산이 맞지 않았다. 그때서야 이사장은 수출로 방향을 튼 자신의 계획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우리나라 원단으로는 세계 시장을 뚫을 수가 없었어요. 소재 경쟁력이 없는 겁니다. 질은 떨어지면서 값은 비싸니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죠. 요즘 대구를 밀라노 같은 세계 섬유의 중심지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섬유산업을 다시 꽃피우겠다고 하는데, 이건 결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소재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사장은 지금처럼 대형화한 우리 방직업계 구조로는 절대로 소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처럼 분야별로 소규모 분업화하고 충분한 기술축적이 밑받침될 때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는 무모하게 수출의 길을 꿈꾸다 86년에 부도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막상 부도를 내려니 그때껏 자신을 믿고 도와준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살인보다 더 큰 죄라는 생각에 ‘어차피 죽은 목숨이면 발악이나 해보고 죽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도 주위의 도움이 원군이 됐다. 그는 이들의 지원과 보증보험을 이용해 어렵사리 부도위기를 넘겼다.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마치 껍데기를 까고 나온 것처럼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한다. 이제 회사는 내 것이 아니다, 이 회사는 남의 도움으로 건진 것이니 사회의 것이다, 나는 그저 봉사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판매 1위 등극

    사업방향도 전환했다. 그 동안 거래해온 일본의 거래선을 모두 끊고 내수시장을 겨냥했다. 이때 국내에서는 재래시장은 쇠퇴하고 백화점들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백화점에는 해외 브랜드가 속속 입성하고 있었다.

    이성림 사장은 1987년 피에르 발망(프랑스)의 상표와 기술을 도입, 후발주자로 백화점에 들어갔다. 대(對)백화점 영업능력이 뛰어난 전문가를 영입해 적극적으로 판매망을 뚫었다. 90년엔 파올로 구치(이탈리아)를, 93년엔 닥스를 들여오면서 회사는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외국 기술을 들여온 것은 늦었지만, 다양한 해외 브랜드와 접촉하며 기술력을 높여간 것. 93년에는 일찌감치 구조조정에 착수, 30%의 인원을 감축하는 등 군살을 뺐다.

    87년 판매량 7∼8위를 오르내리던 우성어패럴은 이런 노력에 힘입어 90년에 4위, 98년에 들어서면서 1위에 올라섰다. 외환위기가 터진 98년에도 우성어패럴은 매출이 11%나 성장했고, 지난해에는 30%의 성장률을 보였다. IMF 관리체제에서도 현금거래 원칙을 고수해 남들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소재를 구입할 수 있었고, 94년부터 도입한 판매사원들의 인센티브제가 정착되면서 판매율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190명의 우성어패럴 생산직 직원 중 20여명은 청각장애인이다. 직원의 10% 이상은 장애인을 고용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이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몇 명을 데려왔을 때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일 시키기도 힘들고, 그 아이들도 소외감을 느껴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그만두더군요. 그래서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더 많은 장애인을 데려왔고, 수화통역사를 불러다 관리자들로 하여금 수화를 배우게 했어요. 지금은 이들이 비장애인들보다 일을 더 잘해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집중력이 높은 것 같습니다.”

    우성어패럴의 지방 출신 직원들은 사원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이사장은 88년, 15평형짜리 아파트 13실을 지어 필요한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난해엔 5000만원의 사비를 내놓아 사원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첫해엔 직원 자녀 15명에게 학자금을 지원했다. 이사장은 이 재단에 매년 5000만원을 투자해 주택자금과 생활안정자금 등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걸 이제서야 하게 됐어요. 직원들이 수고한 것에 비해 충분한 대우를 못해줘 늘 안타까웠습니다.”

    우성어패럴은 소비자의 편의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잇따라 선보였다. 93년부터는 칼라나 소매깃이 낡은 드레스셔츠를 무료로 수선해주고 있다. 이런 제품을 매장으로 가져오면 언제든지 수선해주는데, 한 달이면 1000장 가까운 수선 제품이 들어온다고 한다.

    98년부터는 시중 제품에 사이즈가 맞지 않는 소비자들을 위해 매장에서 직접 치수를 재 제품을 주문하는 맞춤식 드레스셔츠를 만들고 있다.

    드레스셔츠는 그해에 유행할 정장 스타일과 색상을 남보다 빨리 예측해 여기에 맞는 소재와 색상을 계절에 맞게 신속하게 상품화해 내놓아야 한다. 우성어패럴은 춘하, 춘추 1년에 두 차례 신상품을 개발해 내놓는데, 그 종류만도 200여 종에 달한다.

    지난해 자체 브랜드로 개발한 ‘예작(藝作)’은 20∼30대를 겨냥한 상품으로 색상이 밝고 활동하기에 편리한 ‘루미(roomy·품이 넉넉한) 스타일’이 주를 이루는데, 이사장은 앞으로 이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그는 이를 위해 중소기업으로는 하기 힘든 TV광고를 19억원이나 들여 만들기도 했다.

    이사장은 오는 5월 40대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영입, 새로운 경영방법을 도입해 회사를 더욱 발전시킬 계획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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