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골리앗이라니요? ‘키다리 다윗’으로 불러주세요”

  • 전창 jeon@donga.com

    입력2006-10-25 14: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프로농구 데뷔 2년만에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MVP를 함께 거머쥔 서장훈. 센터이면서도 골밑에만 머물지 않고 코트 구석구석을 누비는 전천후 플레이어. 그러나 그에겐 '싹수'노랗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만년 벤치워머에서 한국 최고의 농구선수로 거듭난 스물여섯 살 청년의 이야기.》
    서장훈(26). 신장 207cm의 프로농구 최장신 선수. 하지만 ‘키가 제일 큰 선수’라는 것만으로는 그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농구계 원로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량과 신체조건을 가진 농구선수’다. 다시 말해 이 세대에는 그와 같은 선수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뜻이니 운동선수에겐 이보다 더한 찬사가 없다.

    98∼99시즌에 SK 나이츠 소속으로 프로농구에 뛰어든 서장훈은 데뷔 2년 만인 99∼2000시즌에 팀을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SK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3년 연속 챔피언 등극을 노리던 철옹성 현대 걸리버스를 꺾고(4승2패) 새로운 최강자로 올라섰을 때도 서장훈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정규리그 MVP에 이어 플레이오프 MVP까지 ‘싹쓸이’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4개 스포츠신문이 다투어 개최한 프로농구 시상식에서도 하이라이트인 최우수선수상은 모두 서장훈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서장훈은 시즌이 끝난 뒤에도 신문과 방송의 인터뷰 공세와 연일 계속되는 우승축하 행사, 팬 사인회 등에 파묻혀 쉴 틈이 없었다.

    기자를 만난 서장훈은 “제 얼굴 좀 보세요. 살이 하나도 안 남아 있죠? 차라리 시즌 때 코트에서 뛰는 게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 든다니까요”라며 투정 반, 애교 반으로 하소연부터 했다.

    과수원 가꾸며 살고파



    겉보기엔 무뚝뚝하고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서장훈에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프로농구를 취재하면서 서장훈처럼 유머와 위트가 풍부하고 조리있는 말솜씨를 갖춘 선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한 번 내뱉은 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킨다.

    엄청나게 큰 키(‘평균신장’인 기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고 무심코 팔을 들어올렸더니 정확하게 그의 엉덩이에 닿았다)와 결코 곱상하지 않은 얼굴, 판정에 대한 강렬한 어필 같은 면만 보고 그가 과격한 청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이다. 그를 처음 만나본 몇몇 체육부 기자들조차 “서장훈 그 친구, 생각했던 것 하고는 딴판이더라”고 하는 것을 보면 평소 그가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월10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는 ‘스포츠서울’이 주최한 ‘올해의 농구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도 어김없이 MVP상을 받은 서장훈에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집에서 하루종일 비디오 보면서 밍크랑 놀았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밍크’는 그가 2년째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세 살짜리 흰색 마르티스 암컷이다.

    이번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코트에서 은퇴한 후에는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인적이 뜸한 교외로 나가 전원주택 지어놓고 과수원 가꾸면서 살고 싶어요.”

    좀 엉뚱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곰곰 씹어보면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키가 남들보다 유난히 커서 농구를 시작한 뒤로 그는 단 한 순간도 남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의 자리.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한다고 기다렸다는 듯 혹독한 질책이 날아오는 그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더욱이 사람들은 코트 바깥에서도 그를 평범한 청년으로 봐주지 않았다.

    그렇듯 많은 이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평범한 것보다 소중한 게 없다는 ‘진리’를 일찌감치 깨쳤던 것 같다. ‘전원주택’과 ‘과수원’. 정년퇴직을 앞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여드름투성이의 스물여섯 청년에게서 들어야 했으니.

    현주엽과 벤치 지키던 농땡이

    서장훈은 처음엔 운동에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도 농구선수가 아닌 야구선수였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것은 휘문중학교 1학년 때. ‘주전자 당번’을 전전하다 주전으로 공식 전국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로,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서장훈의 우상은 그 또래 아이들처럼 OB베어스 투수 박철순이었다. 야구가 좋아 아버지를 졸라대다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 유니폼을 입었다. 부친 서기춘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서장훈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을 뿐이다)이 운동선수가 되려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진 않았지만, 장훈이 워낙 야구에 미치다시피 해서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으로 허락했다.

    LG 투수 전승남, 두산 포수 이도형 등이 당시 서장훈과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들이다. 서장훈은 자신이 “또래들보다 키가 크고 재능은 있었지만 누구나 알아줄 만큼 특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더러는 ‘땜빵’ 노릇도 했다. 기량이 엇비슷한 초등학교 야구에선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의 포지션이 치맛바람에 따라 정해지곤 한다. 서장훈은 “내가 더 잘 치고 잘 던지는데 엉뚱한 애들이 4번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입을 삐죽거렸다.

    덕분에 포수를 빼놓고 전 포지션을 다 해본 그는 6학년 때 OB베어스기 서울시 어린이 야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맛본다. 반 장난 삼아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중학교 진학을 앞두게 되자 부모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원래 학동초등학교 출신들은 강남의 휘문중으로 진학하는 게 관례. 하지만 서장훈은 강북의 한 야구명문 중학교로 진학했다. 아버지의 친구가 같은 재단의 고교 감독을 맡고 있었던 인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장훈은 3개월 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있던 휘문중으로 전학했다. 압구정동에서 혼자 강북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고 당연히 그에게 우호적인 선배나 동료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서장훈만 빼놓고 가곤 했고 매도 많이 맞았다. 그야말로 ‘왕따’를 당했던 것. 이것이 서장훈에겐 아픈 추억일지 모르지만 한국 농구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서장훈은 친구들이 있는 휘문중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서울시내에서 전학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쪽 학교에서도 휘문중에 가서 야구를 하겠다면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농구선수로 전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는 농구선수로 전학을 갔지만 기회를 엿보다 다시 야구를 시작할 속셈이었다. 농구부에서 그는 “특별한 포지션도 없었고 물당번이나 하면서 그냥 쭐레쭐레 따라다녔다”고 한다.

    농구라는 운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기본기가 중요한 농구에서 그는 형편없는 ‘왕초보’였다. 게다가 그때는 키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의 키는 중1 때 ‘겨우’ 170cm였고 중2때 185cm가 됐지만 “나보다 큰 얘들이 많아서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 불만을 툴툴거리면서 놀 궁리만 했다.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났던 선수는 동기생 윤제한(현 상무). 서장훈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고 놀기 좋아하던 1년 후배 현주엽과 함께 수영장 다니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때웠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처럼 싹수가 노란 후보 신세로 게으름만 피워대던 서장훈과 현주엽이 지금은 한국 프로농구를 짊어진 대표선수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서장훈이라는 존재가 부각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서장훈은 왼쪽 고관절이 빠져 꼬박 3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2학년 때 공식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미 승부가 난 상황인 게임 말미에 2분 정도 뛴 게 전부인 이른바 ‘삐꾸’ 선수였다.

    센터의 한계를 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겨울에 입원해 석 달을 꼼짝 않고 누워 있던 그가 봄에 병원을 나서며 키를 재봤더니 자그마치 197cm였다. 3개월만에 12㎝가 자란 것이다. 농구선수들의 신장은 운동화를 신고 잰다(207cm라는 서장훈의 지금 신장도 실제로는 205cm쯤 된다). 당시 대회 프로그램에 나온 서장훈의 신장은 약간의 과장까지 보태져 202cm. 2m가 넘는 중학생 선수가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농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죠. ‘작은 애들’ 하고 농구를 하니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더군요. 코치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사뭇 달라졌고… 하루아침에 왕이 된거죠.”

    서장훈은 중3 때 출전한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고교 2학년 때 농구 인생에 또다른 전기가 찾아왔다. 고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남들보다 큰 키만 믿고 농구를 했지, 기량은 별로 없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런 그에게 농구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휘문고 김원호 코치였다. 서장훈은 지금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고2가 돼서 정말 해볼 것은 다 해봤어요, 3점슛도 쏴보고, 비하인드 패스도 해보고, 신나게 드리블링도 해보고….”

    센터는 보통 동료에게 득점 기회를 주기 위해 스크린을 걸어주고 골밑 슛과 리바운드에 주력하는 게 임무. 그래서 센터 출신들은 중장거리 슛과 드리블링 등 볼 핸들링 솜씨가 다른 포지션에 비해 뒤떨어진다. 센터들의 이런 일반적인 단점들을 서장훈은 장점으로 갖추고 있다. 그 기초를 닦은 것이 고교 2학년 때였다.

    김원호 코치는 센터에만 제한하지 않고 서장훈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신이 난 서장훈은 나름대로 이리저리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회에 나가서도 가드처럼 드리블과 어시스트를 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골밑에서 ‘기어나와’(농구판에서는 센터가 골밑을 지키지 않고 외곽으로 나오는 것을 가리켜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다) 3점슛을 쏘곤 했다.

    이런 ‘이단아’ 같은 행동에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코치는 “내가 가르친 선수들 중 장훈이가 가장 슛감각이 좋다”라며 그를 두둔했다.

    “그때 단지 센터 노릇에만 충실했다면 지금처럼 뛰지 못했을 겁니다. 정통 센터로만 훈련받았다면 저 난다 긴다 하는 용병 센터들과 대적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3점슛을 터뜨릴 때 기분이 가장 상쾌하다고 한다. 휘문고는 서장훈이 뛴 3년 동안 10개의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서장훈이 대학 진학을 앞두게 되자 농구 라이벌 고려대와 연세대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연세대의 경우 하얏트호텔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서장훈 스카우트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사람들은 서장훈이 고려대에 진학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휘문고 출신은 고려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연세대행이었다. 방심한 고려대가 느긋하게 굴다가 대어를 놓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장훈은 연세대로 간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상민이형(현대 이상민)하고 꼭 한팀에서 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마구 우겨대서 연세대로 간 겁니다.”

    이상민과 서장훈의 인연은 서장훈이 고1 때인 90년에 맺어졌다. 청소년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된 서장훈은 당시 홍대부고 3학년으로 그보다 2살 많은 이상민과 금세 친해졌다. 압구정동에 살던 서장훈은 잠원동에 살던 이상민과 집도 가까워 늘 붙어다니다시피 했다. 서장훈은 “둘 다 형제가 없었고, 성격이 정반대였던 것이 단짝이 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상민은 여성스럽고 말이 없지만 자신은 떠벌이여서 같이 있으면 서로 보완이 돼 심심하지 않았다는 것. 이상민이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털털한 성격인데 비해 자신은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던 점도 빨리 친해진 이유가 됐다고 한다. 코트 밖에서 친해진 둘은 함께 청소년 대표를 지내면서 코트 안에서도 호흡을 맞추게 된다.

    요즘은 프로농구가 인기지만, 서장훈이 대학에 진학하던 93년에는 대학농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농구를 주제로 한 TV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리에 방영됐고, 역시 농구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청소년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청소년들은 연예인 스타들은 제쳐놓고 스포츠 스타들에게 열광했다.

    그 무렵 대학 최고의 호화군단을 자랑하던 연세대 농구팀은 스타들의 보고였다. 최희암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4학년에 ‘람보슈터’ 문경은(삼성), 3학년에 ‘컴퓨터 가드’ 이상민, 2학년에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신세기)이 있었고, 신입생으로는 서장훈이 포진했다. 현재 프로농구 각 팀을 대표하고 있는 얼굴들이 당시 연세대 멤버들이었다. 서장훈은 1학년 때인 93년, 팀의 주축으로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최강 기아자동차를 꺾고 파란을 일으킨 데 이어 결승전에서 상무를 누르고 우승하는 데 결정적으로 한몫했다.

    미국 대학농구 경험

    입학하던 해 봄 ‘조직력의 농구’를 신봉하는 최희암 감독에게 야단을 맞고 며칠간 숙소에서 도망쳤던 것을 빼면 다른 생각 없이 농구에만 전념하던 그에게 2학년 때인 94년 예기치 않은 불운이 찾아왔다.

    그해 2월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 삼성전자의 박상관과 부딪치면서 경추 마비 증세를 보여 40일간 병원에 드러누운 것. 중2 때 입원했다가 키가 부쩍 크는 바람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서장훈은, 이번에는 병상에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비록 국내에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농구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 제대로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그는 9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대학에 편입했다. NCAA(미국 대학체육협의회) 규정상 편입생은 1년 동안 정식경기에 나설 수 없었지만, 엄청난 체격의 미국 선수들과 코트에서 부대끼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처음엔 미국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면 마치 콘크리트 벽에 팽개쳐지는 느낌이더라구요. 그때 골병 들어가면서 익힌 노하우가 지금 많은 도움이 됩니다. 요즘도 용병들과 부딪쳐가며 한 게임 뛰고 나면 숙소에서 밤새 끙끙 앓긴 하지만요.”

    그는 1년 만에 귀국했는데, 이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그렇게 빨리 돌아올 거면 뭐하러 갔나. 실력이 안 돼 돌아온 것 아니냐’ ‘특정 팀으로부터 돈을 받고 다른 팀의 지명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잠시 도피한 것 아니냐’는 등의 억측이 난무했다.

    이는 그가 무척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그는 “미국 대학농구에서 비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해명한다. 미국 프로리그에서 뛰려면 오랜 기간의 캠프생활을 거쳐야 하고, 그나마 소수의 선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는 것.

    “미국에서 빈둥거리느니 다시 돌아가 농구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혼자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도 너무 외로웠구요.”

    특정 팀이 미국에 보냈다는 풍문에 대해 그는 “미국에 있는 아버지 친구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분이 그 그룹 직원이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입단 조건으로 20억원을 미리 받았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먹고 살 만한데, 그런 돈을 받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어쨌든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돌아왔지만 그는 신문기사를 통해 자신이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명단에서 빠졌음을 알게 됐다. 그는 지금까지도 이를 아쉬워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못해 올해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장훈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30세가 되는 2004년 대회와 34살이 되는 2008년 대회 정도밖에 없는데, 체력 소모가 많은 센터 포지션에서 그 나이에 과연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서장훈은 연세대의 44연승 행진에 기여하면서 대학시절 출전한 4번의 농구대잔치에서 목에 부상을 입은 94년을 제외하고 세 차례나 팀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97년에 서장훈은 송사에 휘말렸다. 그해 프로구단을 창단하는 진로에 지명된 그는 팀의 일방적인 지명권이 직업 선택의 자유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년 넘게 소송을 계속하다 진로그룹이 해체되자 소를 취하했다. 그 무렵 같은 이유로 그보다 먼저 소송을 제기한 프로야구의 임선동에 대해 재판부가 사실상 임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서장훈으로서도 소송을 계속 끌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팀의 모기업이 무너져 명분이 약해진데다, SK에서 만족스러운 대우를 약속해 더 끌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섬세한 남자”

    98년, SK에 입단해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프로농구에 뛰어든 서장훈은 2년 만에 최고 선수의 자리에 올랐다. 프로농구에 용병들이 참가하면서 이제는 그의 기량이 코트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서장훈은 팀은 비록 정규리그 8위에 머물렀지만 개인 기록에서는 득점 3위, 리바운드 1위로 용병들을 압도했다.

    서장훈은 종종 심판의 판정에 대해 강력하게 어필하다가 테크니컬 파울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액션’이 강하고 감정을 숨길 줄 모른다는 비난도 받는다. 이를 지적하자 그는 자세를 고쳐앉더니 표정마저 진지해졌다.

    “심판에게 항의할 때도 정중해야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수들끼리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스포츠맨십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성격이 좀 급한 편이라 상대방으로부터 고의적인 반칙을 당하면 억울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 그렇지만 고의적인 반칙을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얘기다.

    그는 “부드러워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심판에 대한 어필은 이기고자 하는 근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팬 서비스 차원의 액션으로 헤아려주면 좋겠다”고 팬의 이해를 구했다.

    서장훈은 ‘골리앗’ ‘국보 센터’ ‘공룡’ 등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것은 다 좋지만 제발 ‘골리앗’이라고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는 크리스천이다. 원정경기가 많아 교회를 찾지는 못해도 신앙심엔 변화가 없다. 그런데 성경 속의 골리앗이 누군가. 타도의 대상, 다윗의 돌팔매질로 무너뜨려야 하는 괴물 아닌가.

    서장훈에겐 그만큼 예민한 구석이 많다. 경기가 있는 날 그는 행여 숟가락을 떨어뜨릴까 싶어 밥을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 한다.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깨뜨리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것 같아서다. SK 나이츠 숙소에서는 서장훈의 방이 가장 깨끗하다. 머리카락 한 가닥, 먼지 하나도 참지 못한다. 비디오광이지만 하루에 한 편만 보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도 영화를 워낙 집중해서 보기 때문. 두 편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다소곳하고 잘 나서지 않는 여성이 이상형이라는 서장훈은, 그러나 당장은 여자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다. “예민한 내 성격을 맞춰줄 여자도 드문데다 합숙생활로 자주 만날 수도 없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해주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는 게 이유다.

    그런 그에게 요즘 들어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올 시즌 초 감기를 앓고 난 뒤 열꽃처럼 생겨서 없어지지 않는 여드름이 그것. 약도 꼬박꼬박 먹고 신경을 쓰는데 좀처럼 차도가 없다고 한다.

    오는 11월 시작되는 2000∼2001시즌에는 서장훈이 더이상 최장신 선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농구연맹(KBL)이 4월11일 이사회에서 신장 상한선을 종전의 205.7㎝(6피트7)에서 208.28㎝(6피트10)로 올려 서장훈보다 더 큰 용병선수가 한국에 올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최고의 자리를 지켜나갈지 주목할 일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