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서장훈이 고려대에 진학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휘문고 출신은 고려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연세대행이었다. 방심한 고려대가 느긋하게 굴다가 대어를 놓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장훈은 연세대로 간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상민이형(현대 이상민)하고 꼭 한팀에서 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마구 우겨대서 연세대로 간 겁니다.”
이상민과 서장훈의 인연은 서장훈이 고1 때인 90년에 맺어졌다. 청소년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된 서장훈은 당시 홍대부고 3학년으로 그보다 2살 많은 이상민과 금세 친해졌다. 압구정동에 살던 서장훈은 잠원동에 살던 이상민과 집도 가까워 늘 붙어다니다시피 했다. 서장훈은 “둘 다 형제가 없었고, 성격이 정반대였던 것이 단짝이 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상민은 여성스럽고 말이 없지만 자신은 떠벌이여서 같이 있으면 서로 보완이 돼 심심하지 않았다는 것. 이상민이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털털한 성격인데 비해 자신은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던 점도 빨리 친해진 이유가 됐다고 한다. 코트 밖에서 친해진 둘은 함께 청소년 대표를 지내면서 코트 안에서도 호흡을 맞추게 된다.
요즘은 프로농구가 인기지만, 서장훈이 대학에 진학하던 93년에는 대학농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농구를 주제로 한 TV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리에 방영됐고, 역시 농구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청소년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청소년들은 연예인 스타들은 제쳐놓고 스포츠 스타들에게 열광했다.
그 무렵 대학 최고의 호화군단을 자랑하던 연세대 농구팀은 스타들의 보고였다. 최희암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4학년에 ‘람보슈터’ 문경은(삼성), 3학년에 ‘컴퓨터 가드’ 이상민, 2학년에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신세기)이 있었고, 신입생으로는 서장훈이 포진했다. 현재 프로농구 각 팀을 대표하고 있는 얼굴들이 당시 연세대 멤버들이었다. 서장훈은 1학년 때인 93년, 팀의 주축으로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최강 기아자동차를 꺾고 파란을 일으킨 데 이어 결승전에서 상무를 누르고 우승하는 데 결정적으로 한몫했다.
미국 대학농구 경험
입학하던 해 봄 ‘조직력의 농구’를 신봉하는 최희암 감독에게 야단을 맞고 며칠간 숙소에서 도망쳤던 것을 빼면 다른 생각 없이 농구에만 전념하던 그에게 2학년 때인 94년 예기치 않은 불운이 찾아왔다.
그해 2월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 삼성전자의 박상관과 부딪치면서 경추 마비 증세를 보여 40일간 병원에 드러누운 것. 중2 때 입원했다가 키가 부쩍 크는 바람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서장훈은, 이번에는 병상에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비록 국내에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농구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 제대로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그는 9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대학에 편입했다. NCAA(미국 대학체육협의회) 규정상 편입생은 1년 동안 정식경기에 나설 수 없었지만, 엄청난 체격의 미국 선수들과 코트에서 부대끼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처음엔 미국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면 마치 콘크리트 벽에 팽개쳐지는 느낌이더라구요. 그때 골병 들어가면서 익힌 노하우가 지금 많은 도움이 됩니다. 요즘도 용병들과 부딪쳐가며 한 게임 뛰고 나면 숙소에서 밤새 끙끙 앓긴 하지만요.”
그는 1년 만에 귀국했는데, 이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그렇게 빨리 돌아올 거면 뭐하러 갔나. 실력이 안 돼 돌아온 것 아니냐’ ‘특정 팀으로부터 돈을 받고 다른 팀의 지명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잠시 도피한 것 아니냐’는 등의 억측이 난무했다.
이는 그가 무척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그는 “미국 대학농구에서 비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해명한다. 미국 프로리그에서 뛰려면 오랜 기간의 캠프생활을 거쳐야 하고, 그나마 소수의 선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는 것.
“미국에서 빈둥거리느니 다시 돌아가 농구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혼자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도 너무 외로웠구요.”
특정 팀이 미국에 보냈다는 풍문에 대해 그는 “미국에 있는 아버지 친구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분이 그 그룹 직원이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입단 조건으로 20억원을 미리 받았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먹고 살 만한데, 그런 돈을 받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어쨌든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돌아왔지만 그는 신문기사를 통해 자신이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명단에서 빠졌음을 알게 됐다. 그는 지금까지도 이를 아쉬워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못해 올해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장훈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30세가 되는 2004년 대회와 34살이 되는 2008년 대회 정도밖에 없는데, 체력 소모가 많은 센터 포지션에서 그 나이에 과연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서장훈은 연세대의 44연승 행진에 기여하면서 대학시절 출전한 4번의 농구대잔치에서 목에 부상을 입은 94년을 제외하고 세 차례나 팀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97년에 서장훈은 송사에 휘말렸다. 그해 프로구단을 창단하는 진로에 지명된 그는 팀의 일방적인 지명권이 직업 선택의 자유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년 넘게 소송을 계속하다 진로그룹이 해체되자 소를 취하했다. 그 무렵 같은 이유로 그보다 먼저 소송을 제기한 프로야구의 임선동에 대해 재판부가 사실상 임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서장훈으로서도 소송을 계속 끌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팀의 모기업이 무너져 명분이 약해진데다, SK에서 만족스러운 대우를 약속해 더 끌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섬세한 남자”
98년, SK에 입단해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프로농구에 뛰어든 서장훈은 2년 만에 최고 선수의 자리에 올랐다. 프로농구에 용병들이 참가하면서 이제는 그의 기량이 코트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서장훈은 팀은 비록 정규리그 8위에 머물렀지만 개인 기록에서는 득점 3위, 리바운드 1위로 용병들을 압도했다.
서장훈은 종종 심판의 판정에 대해 강력하게 어필하다가 테크니컬 파울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액션’이 강하고 감정을 숨길 줄 모른다는 비난도 받는다. 이를 지적하자 그는 자세를 고쳐앉더니 표정마저 진지해졌다.
“심판에게 항의할 때도 정중해야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수들끼리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스포츠맨십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성격이 좀 급한 편이라 상대방으로부터 고의적인 반칙을 당하면 억울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 그렇지만 고의적인 반칙을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얘기다.
그는 “부드러워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심판에 대한 어필은 이기고자 하는 근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팬 서비스 차원의 액션으로 헤아려주면 좋겠다”고 팬의 이해를 구했다.
서장훈은 ‘골리앗’ ‘국보 센터’ ‘공룡’ 등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것은 다 좋지만 제발 ‘골리앗’이라고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는 크리스천이다. 원정경기가 많아 교회를 찾지는 못해도 신앙심엔 변화가 없다. 그런데 성경 속의 골리앗이 누군가. 타도의 대상, 다윗의 돌팔매질로 무너뜨려야 하는 괴물 아닌가.
서장훈에겐 그만큼 예민한 구석이 많다. 경기가 있는 날 그는 행여 숟가락을 떨어뜨릴까 싶어 밥을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 한다.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깨뜨리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것 같아서다. SK 나이츠 숙소에서는 서장훈의 방이 가장 깨끗하다. 머리카락 한 가닥, 먼지 하나도 참지 못한다. 비디오광이지만 하루에 한 편만 보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도 영화를 워낙 집중해서 보기 때문. 두 편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다소곳하고 잘 나서지 않는 여성이 이상형이라는 서장훈은, 그러나 당장은 여자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다. “예민한 내 성격을 맞춰줄 여자도 드문데다 합숙생활로 자주 만날 수도 없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해주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는 게 이유다.
그런 그에게 요즘 들어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올 시즌 초 감기를 앓고 난 뒤 열꽃처럼 생겨서 없어지지 않는 여드름이 그것. 약도 꼬박꼬박 먹고 신경을 쓰는데 좀처럼 차도가 없다고 한다.
오는 11월 시작되는 2000∼2001시즌에는 서장훈이 더이상 최장신 선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농구연맹(KBL)이 4월11일 이사회에서 신장 상한선을 종전의 205.7㎝(6피트7)에서 208.28㎝(6피트10)로 올려 서장훈보다 더 큰 용병선수가 한국에 올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최고의 자리를 지켜나갈지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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