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범람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기술복제시대의 문화예술은 끝없이 복제되고 패러디되면서 이미지를 양산한다. 그 중에서도 광고는 영화와 뮤직비디오의 양식을 넘나들면서 화려한 영상을 펼친다.
짧은 15초 동안 이미지의 융단폭격을 하고 사라지는 최근의 광고들은 낯설고 생경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개연성없는 논리 구조, 기계적이고 차가운 이미지가 이들의 특성이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고 얼굴을 물 속에 집어넣는 10대 소녀, 나뭇가지를 움켜잡는 손가락, 손 안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올챙이, 이어 소녀가 굴을 입안에 밀어 넣는 장면, 마지막으로 왼쪽 뺨에 새겨지는 TTL. 화제를 불러일으킨 SK텔레콤의 TTL 론칭광고다.
이 광고로 촉발된 이미지 광고 열풍이 온통 대중매체를 잠식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광고산업을 이끌어 온 광고계의 원로들은 이 광고를 두고 “광고표현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우리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최근의 광고들은 n, @, e, i, m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기호들과 함께 사이버 세계로, 괴기스런 판타지의 세계로 넘나들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가면의 아이가 등장하는 마이크로 아이, ‘파란 피’가 흐르는 나우누리, “내 혈액형은 I”를 읊조리는 물갈퀴 여인의 터치 아이, 스타크래프트 영웅 ‘쌈장’이 등장하는 코넷, 제 5원소의 분위기를 차용한 움직이는(mobile) 인터넷 한솔 엠 닷 컴,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케 하는 카이(khai) 등. 수많은 광고들이 충격적인 이미지와 낯선 서사구조로 현란한 잔상을 남기고 점멸한다.
포스트모던의 징후들
사실 이미지 광고는 새로운 양식이 아니다. 제품과 제품의 컨셉에 따라 표현양식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패션업계 같은 분야의 광고는 이미지로 소구해온 지 오래다. 이들 광고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최근 이미지 광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그 강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련의 광고들은 포스트모던 광고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틀을 빌어 살펴보면, 그 특성은 현실과 허구의 뒤섞임, 서술구조의 해체, 공간과 시간의 해체, 예술장르의 혼합, 페미니즘적 시선, 카메라와 시청자간의 시선일치 파괴, 전통적 색채조화의 파괴 등에 있다.
해체되고 어두운 이미지들은 기성세대에게는 조금 불편하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상스런 광고가 마케팅에서 놀라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TTL같은 경우 당초 잡았던 매출신장률이 4배 이상 늘었고 괴기스럽다고 하는 마이크로 아이는 단말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이미지들은 이 시대의 ‘유스 마켓(you th market)’, 젊은 소비자층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얘기다.
광고는 사회가 만든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욕구와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는 이런 광고 양식들은 단순히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이 시대 문화의 속성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문화 생산자로부터 얘기를 들으면 그에 대한 긍금증을 풀 수 있을까.
닉스, TTL 등의 광고를 찍은 박명천이라는 CF 감독이 있다. 잿빛의 파리, 좁은 뒷골목을 질주하던 97년 청바지 닉스의 여운은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다. 원씬 원캇(one scene, one cut)으로 손톱을 깎거나 귀지를 파는 부부의 모습, 그 옆에서 하릴없이 장난치는 개와 고양이를 담은 한미은행 광고 또한 그의 손을 거쳐 나간 히트작이다. 그런가 하면 OB라거에서는 ‘YMCA’에 맞춰 펭귄과 춤추는 CF로 IMF에 멍든 사람들을 위로했다. 국제전화 002 전원주편도 빠질 수 없다. 온갖가지 70년대 문화가 뒤섞여 촌스러움을 자아내는 화면과 전원주의 열연에 사람들은 기가 막혀 했다. 최근에는 ‘초코바로 맞아 볼래’라는 생뚱맞은 광고를 내놓았다.
현재 매스 메스 에이지라는 프로덕션을 이끌고 있는 그는 상종가를 치고 있는 최고의 CF감독이다. 실험적인 작품만 선별되는 해외광고 클립 ‘SHOT’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그의 광고가 실렸다.
사실 박명천이라는 감독은 그 인물 자체가 하나의 기호인 듯하다. 이 시대와 궁합이 잘 맞는 그의 존재, 그의 감각, 그의 상상력과 생각을 되짚어보면 이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치달아가는 현대사회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30여년의 한국사회를 보여준다. 그의 인구통계학적 프로필을 살펴보면 드러나듯 그는 신세대가 아니다. 기성세대의 주문에 따라 신세대의 감각으로 광고를 만들어내는 그는 88학번 1969년생이다. 즉, 세간에서 일컫는 ‘386’의 끄트머리 세대인 것이다. 이 프로필은 그를 이해하고 이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코드다.
이미지가 건네는 말
그의 CF에는 언어적 메시지가 최소한으로 들어가 있다. 아예 말없는 광고이거나 동시녹음 때문에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가 말이나 글에 비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글은 약속된 텍스트의 체계를 통해 의미를 담지만, 그림은 보여주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각도에 따라, 얼굴에 따라 많은 표정과 이야기가 들어 있고 미묘한 차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스니커즈 CF같은 경우 표정과 모습에는 그들의 계층, 생활 등이 드러나 있고, 머리 모양 등을 통해서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가 보이지 않습니까.”
최근의 이미지 광고 유행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웃어버린다.
“우리나라는 유행의 조류가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패션의 전이가 빠르고 사회 분위기나 문화적 현상들도 마찬가지지요. 그것은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항상 ‘몰려다니면 죽는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 광고 패턴은 이미 이미지 광고에서 라이브한 일상생활 쪽으로 넘어갔어요.”
그의 전략은 ‘치고 빠진다’이다. 그래서 그의 광고는 한편 한편이 다르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다. TTL CF에 감탄한 사람은 한미은행 광고와의 연계성을 찾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스니커즈의 생뚱맞고 낯선 이미지 표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런 변신에 대해 그는 “회사와 제품의 컨셉에 맞출 뿐”이라고 말한다. 마케팅 브리핑을 받고 기업환경과 전달의도를 파악한 다음 표현강도와 뉘앙스를 결정한다. 소비자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박감독의 경우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가 잘 먹힌 셈이다. 광고가 예술이 아닌 이상 기업이 요구하는 의도를 잘 반영하는 일이 우선이다. 더구나 광고주가 기업의 생사가 달려 있다는 긴박한 자세로 나오면 그 역시 사생결단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만든 작품이 대체로 히트쳤다. TTL과 스니커즈같이 새로운 표현방식이 나온 것은 그런 배경.
이 과감한 광고들이 오히려 상당한 매출 신장을 보인 것을 보면 그의 모험은 도박이 아닌 것이다. 실지로 아이디어를 도출한 후 작업에 착수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결코 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정밀한 장소 헌팅과 모델선정, 연기, 조명 모든 것이 짜여진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그는 소품 하나 하나에도 신경쓰는 편이다. 굿모닝증권 CF에 나오는 물잔은 하나에 700만원짜리다. 증권가를 다루려면 고급 이미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명효과 뿐 아니라 소품도 명품으로 고른 것. 세트 촬영이 많은 것도 정교한 이미지를 뽑아 내기 위한 것이다.
인터넷 업체의 광고는 이미지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광고하는 제품이 무형의 서비스이므로 제품을 보여주거나 실연할 수 없는 것이다. 박감독은 회사의 특성과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일에 고심한다.
“늘 이 회사가 어떤 곳인가, 이 집이 무엇을 하는 집인가를 먼저 생각해요. 최근에는 광고주 측에서 제 마음대로 해보라고 말하지만 마음대로 하면 큰일나지요. 기업의 이미지와 회사의 사활이 달린 메시지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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