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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 이정훈 hoon@donga.com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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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구락부 댄스파티에서 술을 마신 채병덕 총참모장 일행이 명동의 카바레로 나가 2차를 즐기고 귀가한 것은 6월25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 무렵 춘천 일대에는 7년 대한에 단비 오듯 ‘쫙쫙’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 속에 두 눈을 부릅뜨고 손목시계를 노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인민군 2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대령에 해당)였다. 폭우가 걷히는 기세를 보인 정각 4시, 이학구 총좌는 김광협 중장에게 지시받은 대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짧게 외쳤다. “폭풍!”

그 순간 화천 일대에 포진한 인민군 포병연대 소속 122㎜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국군 7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영삼(鄭永三) 중위는 포성에 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그 어떤 지휘관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터. 상급 부대에 보고한 후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이 바람에 국군 각 중대는 진지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이 고장나 상급부대와 연락이 두절되는 부대도 늘어났다.

전통적인 지상전은 먼저 화력을 퍼부은 후 기동부대를 앞세워 돌파하고, 이어 보병부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순서로 진행된다. 날이 밝자 국군 부대가 고립된 틈을 타 SU76 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2사단이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T34 전차가 아니라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인민군은 모진교가 T34 전차 무게를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진교에 설치된 폭발물 때문에 전차가 파괴될까 두려워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이다.

임부택 중령은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건너기 전에 모진교를 폭파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하 중대가 인민군의 포격으로 고립돼 있을 뿐, 아직 전부대가 후방 방어선으로 후퇴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다리를 조기에 폭파하면 차후 국군의 진격 작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이런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진교를 건너온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삽시간에 소양강까지 진격해버렸기 때문이다.

불 뿜는 자주포



당시 국군 병사들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할 줄 몰랐다. 그래서 SU76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하고,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인민군 전차 공포증’이 시작된 것이다. 치열한 전투의지는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7연대 대(對)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沈溢) 소위가 그런 경우다. 적 기갑부대의 진격을 막는 것이 주임무인 심소위 소대는 57㎜ 대전차포를 쏘아 SU76 자주포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자주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포 사격을 하며 전진해왔다.

이러한 기세에 눌려 심소위 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숨어서 적 자주포가 더 가까이(30m 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57㎜ 대전차포를 쏘았다. 선두로 달려오던 SU76 자주포는 대전차포를 맞더니 ‘끼룩 끼룩’ 하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2번 자주포도 기동을 멈췄다. 그 사이 심소위를 비롯한 특공대가 두 대의 자주포에 뛰어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져넣었다.

화염병 투척은 의외로 효과가 높았다. 화염병의 불꽃은 SU76 자주포 안에 있던 포탄 추진제를 점화시켜 삽시간에 자주포를 폭발시켰다. 이 일은 아마 대한민국 역사(일제 시대는 제외된다)에서 최초로 화염병이 등장한 사건일 것이다. 심소위 특공대의 쾌거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적 전차를 잡았다”는 오보(誤報)로 전달됐는데, 이 오보가 전차 공포증에 시달리던 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민군 2사단은 임부택 중령의 국군 6사단 7연대가 지키는 춘천으로 진입하고, 12사단은 홍천에 본부를 둔 함병선 대령의 국군 6사단 2연대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7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6사단의 결사항전은 눈부셨다. 이로써 인민군 2사단은 38선에 근접한 춘천을 전쟁 시작 3일(6월27일)만에 겨우 점령했다. 이 공격에서 인민군 2사단은 40%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SU76 자주포 7문과 45㎜ 대전차포 2문이 파괴되는 피해를 보았다.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김일성(金日成 6·25 당시 38세)은 중국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활동하며 중대장급 지휘자로 성장했다. 이 부대는 그 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된다. 1941년부터 일본군이 공산 유격대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극동지역에 포진한 소련 극동군으로 하여금 소련 땅으로 도주해온 중국 공산군들을 모아 ‘88특별저격여단’(여단장은 중국인 周保中)을 편성케 했다. 이때 김일성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의 제7대대장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중공군과 소련군에 몸담고 있던 조선인 장병들을 두루 알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 전투

훗날 김일성은 춘천 전투에서 진격이 늦어진 것이 6·25 전쟁 전체를 망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김일성은 그와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2군단장 김광협 중장과, 소련군 출신인 2사단장 이청송 소장, 그리고 12사단장 최춘국(崔春國) 소장을 전격 교체해버렸다.

이러는 사이 38선에 배치된 여타 국군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백선엽(白善燁·당시 30세)은 당시 대령 계급장을 달고 1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육군의 ‘선봉’ 사단인 1사단은 황해도 청단에서 경기도 개성을 거쳐 적성에 이르는 90㎞ 전선을 커버한다. 1사단 예하에는 개성에 본부를 둔 12연대(연대장 全盛鎬 대령)와 문산에 본부를 둔 13연대(연대장 金益烈 대령)가 전방에 나가 있고, 11연대(연대장 崔慶祿 대령)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수색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백선엽 대령은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가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이때 이미 1사단 병력은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절반 정도가 토요일인 6월24일부터 외출·외박을 나가 있었다. 25일 오전 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백대령은 파주초등학교 앞산에 올라 전황을 관측했다. 파주초등학교 전방에는 임진강이 있고 12연대는 이 강 북쪽인 개성 일대에서 싸웠다.

개성 지역으로 돌진해 들어온 것은 인민군 105전차여단 소속 206기계화연대고, 그 뒤로는 중국 공산군에서 이미 사단장 대우를 받던 방호산(方虎山)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이 따라오고 있었다. 문산에 위치한 13연대 쪽으로는 역시 105전차여단 소속의 203전차연대를 선두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최광(崔光)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1사단이 진격해 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진강을 등진 ‘배수진’ 형태로 인민군과 싸운 것은 개성의 12연대였다. 문산 쪽의 13연대는 큰 강이 없어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치닫지 않을 것이다. 백대령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색에 위치한 11연대가 외출·외박 나간 병사를 모아 임진강변에 방어선을 칠 때까지, 12연대로 하여금 버티게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문산에 있는 13연대는 인민군 1사단이 우회하지 못하게 결사 항전해야 한다.

당시 임진강에는 유일한 다리인 임진강 철교가 걸려 있었다. 지금 임진각 앞에 가면 시커멓게 교각만 남은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강 철교로 12연대를 빼냄과 동시에 철교를 폭파하고 11연대 병력으로 임진강변에서 방어선을 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백대령은 임진강 철교에 폭파시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자 사단 공병대장 장치은(張治殷) 소령이 달려와 “폭파 준비가 다 됐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일행과 함께 스리쿼터를 타고 임진강 철교를 건너왔다. 12연대 병사들은 대부분 철교를 건넌 것 같았다. 잠시 후 전방에 나가 있는 척후대로부터 “인민군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백대령은 짧게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굉음은 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사색이 된 장소령이 달려와 “도화선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폭파에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공병대가 도화선을 재점검할 틈도 없이 임진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군이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인민군 전차는 이 다리로 진격해오지 않았다. 인민군은 당연히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할 것으로 계산하고 전차를 13연대가 방어하는 문산 쪽으로 돌린 것이다.

13연대의 57㎜ 대전차포는 인민군 T34전차를 세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개전 첫날부터 ‘부나비’처럼 수류탄을 지고 인민군 전차로 뛰어올랐으나, 전차는 파괴되지 않았다. 13연대의 분전으로 6월26일 저녁에야 인민군 1사단은 문산을 장악할 수 있었다. 부슬비가 뿌리는 이날 저녁 국군 1사단은 현재의 파주시 금촌동과 조리면에 있는 작은 하천 봉일천(奉日川)을 잇는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TNT특공대

무서운 투혼은 종종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개전 첫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라는 치욕적인 실수를 범한 1사단 공병대 부대대장 김영석(金永錫) 소령이 21명의 지원자와 함께 백대령 앞에 나타났다. 김소령 일행는 “특공대 전원이 유서를 작성했다”며 “죽음을 맹세코 야간 기습하는 적 전차를 격멸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가운데 넣고 TNT로 묶은 ‘묶음’을 들고 뛰어나갔다.

수류탄의 안전핀만 뽑으면 TNT가 폭발할 테니 육신과 함께 적 전차를 폭파하겠다는 투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 인민군 전차는 기동하지 않았다. 특공대는 인민군 척후병만 저격하고 날이 밝자 소화기 10여 점을 노획해 귀대했다. 다음날(6월27일) 저녁 백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서를 받았다. 하지만 백대령의 마음은 후퇴로 기울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은 다음날(6월28일) 새벽 3시였다. 이어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1사단으로 전해졌다. 인민군 6사단이 기차를 타고 파괴되지 않은 임진강 철교를 통해 남하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사람은 단 하루만 못 자고 단 하루만 굶어도 파김치가 된다. 벌써 1사단 병사들은 3일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사단 포병대장 노재현(盧載鉉·1979년 12·12사건 때 국방장관) 소령은 “포탄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백대령은 육본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퇴로가 막혔으니 사단 지휘부는 행주산성 부근에서 뗏목을 타고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 백대령은 인민군 방어를 위해 남아 후순위 도강자(渡江者)가 된 장병들에게는 “알아서 도강해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시흥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겪은 가장 길고 긴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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