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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신용하교수의 독도문제 100문 100답

  • 신용하교수

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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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1 그 밖에 ‘독도’가 옛 우산국 영토이며 한국 고유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A예컨대, 1908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간행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가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의 민족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책으로, 1792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증보한 책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만기요람’ 군정편처럼 같은 자료를 인용해서,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영토)인데 우산은 곧 왜인이 말하는 松島(송도)다(輿地志云 鬱陵·于山 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고 기록하였다. 즉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옛 우산국 영토인데, 이중에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松島(오늘날의 독도)’임을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인용하여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독도’를 종래 다른 나라가 점유한 형적(形迹)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1월28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며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하고 1906년 3월 말부터는 일본이 한국 영토인 ‘독도’를 침탈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이 ‘증보문헌비고’를 간행한 것은 그 2년 후인 1908년의 일이다. 이때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 정부를 지휘 감독하고 있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정부는 ‘증보문헌비고’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우산국 때부터 한국 영토임을 기록하여 일제의 독도 침탈시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동시에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이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Q 22 고문헌 이외에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于山國)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는가?

A우선 ‘독도’를 ‘우산도’라고 하여 ‘우산’이라는 나라 이름을 따서 부른 명칭 자체가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증명해준다.



한자가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본래 우산국의 명칭은 ‘우르뫼’였는데, 이를 한자로 바꿀 때 ‘于山’국이라고 하였다. 우산국의 영토인 울릉도가 본도(本島)이고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한 속도(屬島)이므로, 원래는 ‘우르뫼’를 ‘우산도’라고 번역하여 울릉도(본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본도의 명칭이 울릉(鬱陵)·울릉(蔚陵)·무릉(武陵)·무릉(茂陵)·우릉(芋陵)·우릉(羽陵) 등으로 한자 번역되어 정착되자, 그 부속 섬인 독도(물론 당시에는 다른 명칭이었지만)가 ‘우산도’(于山島)의 명칭을 갖게 된 것이 명백하다. 독도가 한국에서 1882년까지 공식적으로 ‘우산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섬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Q 23 그렇다면, 일본측에서 일본 고문헌에 ‘독도’가 최초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A일본정부가 1960년에 한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1667년에 편찬된 ‘隱州視聽合記(은주시청합기)’라는 보고서가 일본 최초의 고문헌이다. 일본정부 외무성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출운(出雲)의 관리(蕃士) 사이토(齋藤豊仙)가 번주(藩主: 大名, 봉건영주)의 명을 받고 1667년(일본 寬文 7년) 가을에 은기도(隱岐島: 隱州)를 순시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松島’로, 울릉도를 ‘竹島’로 호칭하면서 언급했다고 하였다. 그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隱州(은주: 은기도)는 北海(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隱岐島라고 말한다. … 戌亥間(술해간: 서북방향)에 2日 1夜를 가면 松島(송도)가 있다. 또 1日 거리에 竹島(죽도)가 있다. ‘속언에 磯竹島(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神書(신서)에 말한 소위 50猛일까.’ 이 두 섬(松島와 竹島)은 무인도인데, 高麗(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雲州(운주: 出雲國)에서 隱岐(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乾] 경계지는 이 州(隱州: 隱岐島)로 그 限(한: 限界)을 삼는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보고서는 항해거리 일수(日數)를 통하여 ‘독도’를 ‘松島(송도)’로,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호칭하면서 ‘독도’를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Q 24 이 밖에 일본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기록한 고문헌은 없는가?

A일본측이 현재까지 공개 발표한 고문헌들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한 것은 없다. 도리어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 고문헌들에서 ‘독도’를 기록한 고문헌들은 모두 이 섬이 울릉도의 부속도서(섬)로 조선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다. 혹시 일본측이 공개하지 않은 고문헌 자료에 그런 것이 있다. 그러나 한·일 간에 고문헌자료 조사를 통해 ‘독도’ 영유권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과정에 일본은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할 듯한 일본 고문헌들을 총동원하여 논쟁을 전개해온 사실을 고려하면, 비공개 일본 고문헌들 속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증명 자료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고,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증명자료가 다수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Q 25 일본정부는 최근에 ‘역사적’으로도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600년 전후부터 약 80년간 일본이 면허장을 민간인에게 주어 ‘독도(竹島)’를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A일본정부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라고 드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일본 어업가 오오다니(大谷甚吉)와 무라가와(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다. 이 두 개의 ‘도해면허(渡海免許)’는 얼핏 보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의 점유권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가졌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보면 도리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자료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건너갈 때 허가해 주는 ‘면허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쟁점이므로 그 자초지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1592∼98년) 전후에 울릉도는 일본군(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직후 일본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라는 사람이 월후(越後)라는 곳을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나 조난하여 ‘울릉도’에 표류해 닿았다. 오오다니가 울릉도(죽도)를 답사해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지만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배로운 섬임을 알았다. 이에 오오다니는 이 섬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릉도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울릉도(죽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幕府)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외국(外國)의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 고기잡이를 해도 월경죄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막부의 공식 허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오다니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당시 백기주(白耆州) 태수(太守) 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Q 26 그러면 당시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일본인이나 ‘도해면허’에 관련된 자들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섬)임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A물론이다. 오오다니(大谷) 가문과 무라가와(村川) 가문이 1661년 ‘송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 직전에 그 신청을 논의하는 과정에 1660년 9월5일자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九山庄左衛門)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大屋九右衛門)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또 내년(1661년…인용자)부터 竹島之內 松島(울릉도 안의 독도)에 귀하의 배가 건너가게 되면”이라고 하여, ‘송도도해면허’를 막부에 신청한 근거가 이미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1618년에 받았으므로 “울릉도 안의 독도(竹島之內松島)”에 월경하여 건너가는 ‘송도(독도)도해면허’는 송도(독도)가 죽도(울릉도) 안에 속한 섬이므로 신청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이 무렵 6월21일자로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에게 보낸 편지에 “竹島近邊松島(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에 도해(渡海)의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받은 두 가문은 ‘송도(독도)도해면허’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구산장좌위문이 1660년 9월8일자로 필사해서 무라가와 가문에 보낸 편지에는 독도(송도)를 “竹島近所之小島(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에 소선(小船)으로 도해(渡海)하는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 즉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지하였다.

Q 27 일본측이 조선정부 몰래 일본 어민 두 가구에 울릉도와 독도에 국경을 넘어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해도 좋다고 허가하는 면허장을 내주고,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 근해에 출현해도 조선정부와 조선 어민들은 그대로 방관만 했는가?

A조선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출어(出漁)나 ‘죽도도해면허’ ‘송도도해면허’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어민들과는 충돌했다.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대해 섬을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국민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공도·쇄환정책’을 실시했다 할지라도, 울릉도·독도 연해에는 수산자원이 풍부하므로 동해·남해안 조선 어부들이 조정 몰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1663년(숙종 19년) 봄 동래·울산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울릉도가 조선 영토였으므로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대응하다가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隱岐島)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島主)에게 울릉도는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 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伯耆州) 태수(太守)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사람인 자기가 들어간 것은 일본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앞으로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도쿠가와 막부에서 오오다니 가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승인하여 국경을 넘어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을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의 막부 관백(關白: 執政官, 여기서는 장군)에게 이송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이므로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한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서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厚待)한 후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 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 도주(島主)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해서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 竹島(죽도: 울릉도)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묶어서 1693년 11월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면서 앞으로는 조선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에서 고기잡이 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부르면서 이 기회에 울릉도(및 부속도서 독도)를 침탈하려는 대마도 도주의 외교활동이 시작되었다.

Q 28 그렇다면 이때 대마도 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와 어떠한 관계였으며, 대마도 도주의 요구에 조선의 조정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A도주는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 중세의 특징인 봉건성으로 약간의 지방분권적 권리도 갖고 있었다. 조선 세종 이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은 대마도 도주만이 공식 창구로 공인되어 왔다. 이때 대마도 도주 종의륜(宗義倫)은 울릉도를 침탈해서 대마도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하여 자기가 막부 정권을 대신한다고 전제하면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사절로 임명해서 안용복·박어둔을 부산에 호송하는 길에 조선정부에 문서를 보내서, 마치 울릉도가 아니면서 그와 비슷한 별개의 일본 영토인 ‘竹島(죽도)’가 있는 것처럼 문구를 만들어서 이제 이후로는 竹島에 조선 선박이 출어(出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이니 귀국도 (조선 어민의 출어를) 엄격히 금지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을 가둔 채, 집권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우의정 민암(閔) 일파의 온건 대응론과 남구만(南九萬)·유집일(兪集一)·홍중하(洪重夏) 등의 강경 대응론이 대립하였다. 당시 실세인 좌의정 목내선과 우의정 민암은 국왕 숙종에게 온건 대응론을 건의하였다. ‘숙종실록’(1693년 11월 丁已(18일)조에는 강경 대응론과 온건 대응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접위관 홍중하가 하직 인사를 하고, 좌의정 목래선·우의정 민암이 홍중하와 함께 청대하였다.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이 말하는 ‘竹島(죽도)’는 바로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리신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리 명확히 판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 저들의 인민이 들어가서 살게 한다면 어찌 뒷날의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목내선·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民戶(민호)를 옮겨서 들어간 사실은 이미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300년 동안 비워서 내버려둔 땅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흔단(端: 틈새의 발단)을 일으키고 우호를 상실하는 것은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이에 목내선·민암 일파는 대마도 도주에게 예조를 시켜 다음과 같은 온건 대응의 회답서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동해안의 어민에게 외양(外洋)에 나갈 수 없도록 한 것은 비록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 鬱陵島(울릉도)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에 있어서랴. 이제 이 고깃배가 귀국의 경지인 竹島(죽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아보내오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이웃나라 사이의 친선의 우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바다백성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으니 물에 표류해 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만,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혼잡하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법률로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의거해서 죄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 규칙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게 할 것이다.”

조선 조정이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이 회답문서는 온건대응에 매달린 나머지 일본측이 주장하는 ‘竹島’(죽도)가 곧 우리나라 영토인 ‘鬱陵島’(울릉도)인 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체해서 “귀국(일본)의 경지(境地) 竹島(죽도)” 운운하고 ‘죽도’에의 조선 어부들의 고기잡이 왕래를 엄격하게 다스려서 벌주어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회신한, 굴욕스러운 외교문서였다. 만일 “우리나라 경지 울릉도”라는 문구가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울릉도를 ‘竹島’라고 부르면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문서를 조선 조정이 외교문서로 승인하는 증거 문서가 되는 회답문서를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Q 29 당시 조선 조정은 그렇게 나약하고 국토 수호 의지도 없었는가? 온건 대응파의 결정을 비판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말인가?

A그렇지 않다. 먼저 사관(史官)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관들은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竹島(죽도)는 곧 우리나라의 鬱陵島(울릉도)인 바 울릉도의 이름은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적에도 보인다”고 지적하고, 울릉도와 죽도는 1島2名(한 섬의 두 이름)인데 왜인이 ‘울릉도’의 이름을 감추고 단지 ‘죽도(竹島)’만 내세운 것은 우리나라 회답서에서 ‘귀국(일본) 경지 죽도’ ‘죽도 어채’를 금단하겠다는 문구를 증거 삼아 뒷날 울릉도를 점거할 계책이라고 분석하면서, 자기 강토를 다른 나라에 주는 것은 불가하니 곧 명확하게 밝히고 판별하여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울릉도 점거의 생심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하거늘, (온건 대응파) 일부 신하들이 두루 신중함이 지나쳐서 울릉도를 점거당할 근거 문서나 만들어 주고 울릉도에 들어간 죄 없는 바다백성들에게 죄를 주자는 말을 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무신들은 일본이 울릉도를 가지면 가까운 시기에 동해안에서 왜구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국왕에게 아뢰면서 온건 대응파를 비판했다.

정계 원로인 남구만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역사서적들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울릉도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를 일본에서는 ‘竹島(죽도)’ ‘磯竹島(기죽도)’라고 했는데, 조상이 남겨준 우리 영토에 다른 나라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되니, 지난번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모호한 회답문서는 회수하고 새로운 회답서를 만들어 보내자고 간곡하게 건의하였다. 국왕 숙종은 거센 비판여론에 당황하여 남구만의 건의를 채택해서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지난번 회답문서는 취소하여 회수함과 동시에 새로운 회답문서를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1694년(숙종 20년) 음력 8월14일자로 새로 만들어 보낸 회답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섬이 있어 ‘울릉(鬱陵)’이라 이름하는데,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 우리나라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란 책에 기재되어 역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일의 족적은 매우 명료하다. 이번에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뜻밖에 귀국 사람들이 스스로 국경을 침범하여 넘어와서 서로 대치하여 마침내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을 구집(拘執)해서 강호(江戶)에 넘겼다. 다행히 귀국의 대군(大君)이 사정을 밝게 살펴서 노자를 많이 주어 돌려보내 주었다. […]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鬱陵島)’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竹島)’라고도 칭하지만, 이것은 1島(하나의 섬)에 2名(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1島 2名은 비단 우리나라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귀주인 역시 모두 알고 있다. 이제 이번에 온 서찰 가운데 ‘죽도’를 귀국의 땅이라고 하고 바야흐로 우리나라 어선의 왕래를 금지해 줄 것을 바라면서, 귀국인이 우리나라의 경지(境地)를 침섭(侵涉)하고 우리나라 백성을 구집(拘執)한 실책은 논하지 않고 있다. 어찌 성실한 신뢰의 길에 결함이 있다고 아니할 것인가.

장차 이 말의 뜻을 깊이 읽어서 동도(東都: 江戶: 지금의 도쿄로서 여기서는 막부 장군을 지칭)에 전하여 보고하고,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신칙(申飭)해서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하지 말게 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상호간의 우의에 더없이 다행일 것이다.”

조선 조정과 강경 대응파가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낸 이 새로운 회답문서는 ‘울릉도=죽도’의 1島2名임을 들고 ‘울릉도=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하게 천명함과 동시에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죽도’에의 왕래하는 것을 엄중히 금단해 줄 것을 요구한 당당한 외교문서였다.

Q 30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공식적 외교창구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정부의 위와 같은 당당한 외교답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A그렇게 쉽게 원상태로 돌아가려 했겠는가?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서 정권이 교체된 줄도 모르고 다시 귤진중(橘眞重)을 동래부에 보내 ‘우리나라 울릉도’라는 표현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귤진중은 강경 대응파의 새로운 회답문서를 받아 보고는 돌아가지 않고 또다시 새 회답문서를 고쳐 써달라고 조르면서 온갖 방법의 시위를 다하였다. 여기서는 번잡하여 그 주고받은 말과 문서를 다 소개하지 않지만, 1693년부터 1695년까지 3년간 치열한 외교논쟁이 전개되었다.

대마도 도주 측은 조선에 대한 유일 합법의 일본 외교담당임을 자처하였고, 심지어 동래에 와 있던 귤진중은 끝까지 조선이 ‘竹島(죽도=울릉도)’를 조선 영토라고 고집하고 조선인의 일본 영토 ‘죽도’왕래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대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강경 대응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끝까지 의연하게 국토 수호의 의지를 명확히 천명해서 일본측의 무례한 도발을 강경하게 성토하고 훈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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