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훈(26). 신장 207cm의 프로농구 최장신 선수. 하지만 ‘키가 제일 큰 선수’라는 것만으로는 그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농구계 원로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량과 신체조건을 가진 농구선수’다. 다시 말해 이 세대에는 그와 같은 선수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뜻이니 운동선수에겐 이보다 더한 찬사가 없다.
98∼99시즌에 SK 나이츠 소속으로 프로농구에 뛰어든 서장훈은 데뷔 2년 만인 99∼2000시즌에 팀을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SK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3년 연속 챔피언 등극을 노리던 철옹성 현대 걸리버스를 꺾고(4승2패) 새로운 최강자로 올라섰을 때도 서장훈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정규리그 MVP에 이어 플레이오프 MVP까지 ‘싹쓸이’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4개 스포츠신문이 다투어 개최한 프로농구 시상식에서도 하이라이트인 최우수선수상은 모두 서장훈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서장훈은 시즌이 끝난 뒤에도 신문과 방송의 인터뷰 공세와 연일 계속되는 우승축하 행사, 팬 사인회 등에 파묻혀 쉴 틈이 없었다.
기자를 만난 서장훈은 “제 얼굴 좀 보세요. 살이 하나도 안 남아 있죠? 차라리 시즌 때 코트에서 뛰는 게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 든다니까요”라며 투정 반, 애교 반으로 하소연부터 했다.
과수원 가꾸며 살고파
겉보기엔 무뚝뚝하고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서장훈에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프로농구를 취재하면서 서장훈처럼 유머와 위트가 풍부하고 조리있는 말솜씨를 갖춘 선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한 번 내뱉은 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킨다.
엄청나게 큰 키(‘평균신장’인 기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고 무심코 팔을 들어올렸더니 정확하게 그의 엉덩이에 닿았다)와 결코 곱상하지 않은 얼굴, 판정에 대한 강렬한 어필 같은 면만 보고 그가 과격한 청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이다. 그를 처음 만나본 몇몇 체육부 기자들조차 “서장훈 그 친구, 생각했던 것 하고는 딴판이더라”고 하는 것을 보면 평소 그가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월10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는 ‘스포츠서울’이 주최한 ‘올해의 농구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도 어김없이 MVP상을 받은 서장훈에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집에서 하루종일 비디오 보면서 밍크랑 놀았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밍크’는 그가 2년째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세 살짜리 흰색 마르티스 암컷이다.
이번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코트에서 은퇴한 후에는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인적이 뜸한 교외로 나가 전원주택 지어놓고 과수원 가꾸면서 살고 싶어요.”
좀 엉뚱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곰곰 씹어보면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키가 남들보다 유난히 커서 농구를 시작한 뒤로 그는 단 한 순간도 남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의 자리.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한다고 기다렸다는 듯 혹독한 질책이 날아오는 그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더욱이 사람들은 코트 바깥에서도 그를 평범한 청년으로 봐주지 않았다.
그렇듯 많은 이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평범한 것보다 소중한 게 없다는 ‘진리’를 일찌감치 깨쳤던 것 같다. ‘전원주택’과 ‘과수원’. 정년퇴직을 앞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여드름투성이의 스물여섯 청년에게서 들어야 했으니.
현주엽과 벤치 지키던 농땡이
서장훈은 처음엔 운동에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도 농구선수가 아닌 야구선수였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것은 휘문중학교 1학년 때. ‘주전자 당번’을 전전하다 주전으로 공식 전국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로,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서장훈의 우상은 그 또래 아이들처럼 OB베어스 투수 박철순이었다. 야구가 좋아 아버지를 졸라대다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 유니폼을 입었다. 부친 서기춘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서장훈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을 뿐이다)이 운동선수가 되려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진 않았지만, 장훈이 워낙 야구에 미치다시피 해서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으로 허락했다.
LG 투수 전승남, 두산 포수 이도형 등이 당시 서장훈과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들이다. 서장훈은 자신이 “또래들보다 키가 크고 재능은 있었지만 누구나 알아줄 만큼 특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더러는 ‘땜빵’ 노릇도 했다. 기량이 엇비슷한 초등학교 야구에선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의 포지션이 치맛바람에 따라 정해지곤 한다. 서장훈은 “내가 더 잘 치고 잘 던지는데 엉뚱한 애들이 4번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입을 삐죽거렸다.
덕분에 포수를 빼놓고 전 포지션을 다 해본 그는 6학년 때 OB베어스기 서울시 어린이 야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맛본다. 반 장난 삼아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중학교 진학을 앞두게 되자 부모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원래 학동초등학교 출신들은 강남의 휘문중으로 진학하는 게 관례. 하지만 서장훈은 강북의 한 야구명문 중학교로 진학했다. 아버지의 친구가 같은 재단의 고교 감독을 맡고 있었던 인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장훈은 3개월 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있던 휘문중으로 전학했다. 압구정동에서 혼자 강북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고 당연히 그에게 우호적인 선배나 동료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서장훈만 빼놓고 가곤 했고 매도 많이 맞았다. 그야말로 ‘왕따’를 당했던 것. 이것이 서장훈에겐 아픈 추억일지 모르지만 한국 농구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서장훈은 친구들이 있는 휘문중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서울시내에서 전학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쪽 학교에서도 휘문중에 가서 야구를 하겠다면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농구선수로 전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는 농구선수로 전학을 갔지만 기회를 엿보다 다시 야구를 시작할 속셈이었다. 농구부에서 그는 “특별한 포지션도 없었고 물당번이나 하면서 그냥 쭐레쭐레 따라다녔다”고 한다.
농구라는 운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기본기가 중요한 농구에서 그는 형편없는 ‘왕초보’였다. 게다가 그때는 키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의 키는 중1 때 ‘겨우’ 170cm였고 중2때 185cm가 됐지만 “나보다 큰 얘들이 많아서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 불만을 툴툴거리면서 놀 궁리만 했다.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났던 선수는 동기생 윤제한(현 상무). 서장훈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고 놀기 좋아하던 1년 후배 현주엽과 함께 수영장 다니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때웠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처럼 싹수가 노란 후보 신세로 게으름만 피워대던 서장훈과 현주엽이 지금은 한국 프로농구를 짊어진 대표선수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서장훈이라는 존재가 부각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서장훈은 왼쪽 고관절이 빠져 꼬박 3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2학년 때 공식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미 승부가 난 상황인 게임 말미에 2분 정도 뛴 게 전부인 이른바 ‘삐꾸’ 선수였다.
센터의 한계를 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겨울에 입원해 석 달을 꼼짝 않고 누워 있던 그가 봄에 병원을 나서며 키를 재봤더니 자그마치 197cm였다. 3개월만에 12㎝가 자란 것이다. 농구선수들의 신장은 운동화를 신고 잰다(207cm라는 서장훈의 지금 신장도 실제로는 205cm쯤 된다). 당시 대회 프로그램에 나온 서장훈의 신장은 약간의 과장까지 보태져 202cm. 2m가 넘는 중학생 선수가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농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죠. ‘작은 애들’ 하고 농구를 하니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더군요. 코치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사뭇 달라졌고… 하루아침에 왕이 된거죠.”
서장훈은 중3 때 출전한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고교 2학년 때 농구 인생에 또다른 전기가 찾아왔다. 고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남들보다 큰 키만 믿고 농구를 했지, 기량은 별로 없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런 그에게 농구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휘문고 김원호 코치였다. 서장훈은 지금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고2가 돼서 정말 해볼 것은 다 해봤어요, 3점슛도 쏴보고, 비하인드 패스도 해보고, 신나게 드리블링도 해보고….”
센터는 보통 동료에게 득점 기회를 주기 위해 스크린을 걸어주고 골밑 슛과 리바운드에 주력하는 게 임무. 그래서 센터 출신들은 중장거리 슛과 드리블링 등 볼 핸들링 솜씨가 다른 포지션에 비해 뒤떨어진다. 센터들의 이런 일반적인 단점들을 서장훈은 장점으로 갖추고 있다. 그 기초를 닦은 것이 고교 2학년 때였다.
김원호 코치는 센터에만 제한하지 않고 서장훈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신이 난 서장훈은 나름대로 이리저리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회에 나가서도 가드처럼 드리블과 어시스트를 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골밑에서 ‘기어나와’(농구판에서는 센터가 골밑을 지키지 않고 외곽으로 나오는 것을 가리켜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다) 3점슛을 쏘곤 했다.
이런 ‘이단아’ 같은 행동에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코치는 “내가 가르친 선수들 중 장훈이가 가장 슛감각이 좋다”라며 그를 두둔했다.
“그때 단지 센터 노릇에만 충실했다면 지금처럼 뛰지 못했을 겁니다. 정통 센터로만 훈련받았다면 저 난다 긴다 하는 용병 센터들과 대적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3점슛을 터뜨릴 때 기분이 가장 상쾌하다고 한다. 휘문고는 서장훈이 뛴 3년 동안 10개의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서장훈이 대학 진학을 앞두게 되자 농구 라이벌 고려대와 연세대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연세대의 경우 하얏트호텔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서장훈 스카우트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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