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지키지도 못할 독도 박물관은 뭣합니까?”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0-04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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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완벽한 검정 머리, 그리고 강렬한 눈빛. 적어도 10년은 젊어 보였다. 역시 그는 점심식사까지 낀 4시간30분의 인터뷰 내내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 일흔 세살이라는 연세에 어디서 그런 정신력이 생기는 것일까?

    그는 지금도 일본 곳곳의 도서관과 문서보관소를 뒤지며 한일 관계사 자료를 악착같이 찾아내고 있다. 건강과 집념, 고집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타고난 건강’ 때문에 지금도 일본을 드나들며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독도박물관 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 정부가 독도를 지키려는 성의가 없는데 분통이 터졌습니다. 독도를 지키지 못할 바에야 박물관 문을 닫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독도박물관 운영비는 1년에 4억원 정도 됩니다. 울릉군 예산으로 이 운영비를 채울 수 없어 경북도청에 가서 사정하고, 중앙 정부에 가서 통사정을 해도 1전도 못받았습니다. 독도가 영해를 갖지 않는 바위섬이라는 정부 얘기는 더욱 기가 막힌 해석입니다.

    일본에 오키노도리시마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도쿄에서 무려 1700km 떨어진 일본 최남단 섬으로 최고 높이가 겨우 2.7m 밖에 안 되는 암초입니다. 1987년 일본은 이 지역을 조사해서 수면에 드러난 바위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건설성은 한화로 2850억을 들여 이 곳에 콘크리트를 들이 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이 섬을 중심으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도는 동도가 높이 99.4m, 서도는 174m나 됩니다. 오키노도리시마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온전한 섬입니다. 일본은 억지로 섬 형태를 유지해서라도 배타적 경제수역을 늘리는데 한국은 엄연한 섬까지도 암석으로 규정하여 입지를 스스로 축소해버린 것입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사록을 보면 독도에 대한 별의별 논의가 다 나옵니다. 내가 이런 일본 국내 기록까지 발굴해서 외교통상부로 들고 가면 외교부 관리들은 무슨 책장수 취급하며 귀찮아하고 상대도 안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이러니 내가 독도박물관 문을 안 닫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 정부의 주장은 이미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측 트집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실효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독도를 근거로 경제 활동을 하면서 관련된 법적·제도적 장치를 보완해가야 실효적 지배의 요건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시마네현 의회의사록같은 일본 국내 기록을 보면 현재 한국은 독도를 불법 점유하고 있으며, 독도에 있는 한국 정부 구조물은 불법 구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주장에 따르면 독도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 영토를 무력 점거한 침략자입니다. 그래서 일부 일본 의원은 독도의 불법 점유 상태를 해제하기 위해 일본 자위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일미(日美) 안보조약에 의거해 미군에 원조를 요청해서라도 독도의 한국 경찰을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또 한국에 경제 지원이나 차관을 줄 때마다 한국 정부에 독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자는 발언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므로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정부 주장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임진왜란, 한일합병이 바로 무대응 때문에 생긴 일 아닙니까.

    일본 의도를 면밀히 연구하고 대비하는 가운데 무대응 전략이 한 방법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이지 지금 같은 무관심한 자세로는 과거 전철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부가 독도 접안 시설 준공식을 할 때도 독도에서 하지 않고, 울릉도에 있는 독도박물관에 와서 숨어서 하는 것은 어떤 저의입니까. 그래서 일본이 만만하게 보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실망이 컸나 봅니다.

    “정부가 개인보다 정보력이 뒤진다면 문제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모르면 즉시 달려와 조언을 구하는 게 바른 자세 아닙니까. 내가 독도 관련 자료와 한일 관계 자료를 새로 발굴해 공개할 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오는 이는 바로 일본 학자들입니다. 정부 관계자는 항상 뒤늦게 왔고 마치 상부기관에서 지시하듯이 고압적인 자세로 자료를 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 일본인의 집요함과 치밀함, 한국 정부의 무성의와 무대응.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일본이 주민들에게 독도에 대해 채광권을 인정해주고 세금을 걷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셨는데요.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953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도 같은 섬을 두고 영토 분쟁을 일으킨 사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 분쟁에서 승리한 쪽은 영국이었습니다. 이유는 이 섬에 대한 과세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일본은 국제법학자들을 영국과 프랑스에 보내 자문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자국민에게 독도 광구권을 허가하고 광구세를 징수한 것은 바로 그 후 일입니다. 이에 대해 광구세를 내던 당사자가 한국측의 불법 점거로 사실상 채굴이 안되니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다며 1959년 국가와 시마네현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1961년 11월 도쿄 지방재판소는 이유가 없다며 소를 기각해 독도가 일본 영토란 사실을 판례로 남겼습니다. 이는 독도 영유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민관 합작으로 벌인 술수로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동해를 조선해로 불러야

    ─한국의 일부 국제법학자들이 독도 문제를 아예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것은 일본이 이미 1954년부터 주장하던 내용입니다. 일본으로서는 지더라도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한국으로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또 일본은 이미 1950년대부터 독도에 대해 광구권을 설정하는 등 치밀하게 법리적 논리를 준비해왔습니다. 만약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된다면 독도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북방 4개 섬 문제처럼 변하게 됩니다. 국력이 항상 지금과 같은 수준일 수 없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는 주장은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독도박물관에는 어떤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까.

    “모두 독도에 관한 자료입니다. 특이한 점은 거의 일본측 자료라는 점입니다. 나는 1981년부터 독도에 관한 일본측 자료를 모으기 위해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했는데 그 횟수가 50번도 넘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자료 열점보다 일본측 자료 한 점이 일본 주장을 반박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삼십년 동안 독도를 공부하고 자료를 모으다보니 이제는 일본이 어떤 트집을 잡더라도 반박할 자료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국제사회에서 ‘일본해’로 불리고 있는 동해를 ‘조선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바다든지 동쪽에 있는 바다는 동해기 때문에 적절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 바다의 원래 이름은‘조선해’입니다. 우리측 기록 뿐만 아니라 불과 한세기 전의 일본측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의 동쪽 바다를 조선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해’표기 지도만 해도 총 30여종이고 이 가운데 일본이 제작한 지도는 12점입니다. 이 조선해는 일본이 제국주의 색채를 드러내면서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서해’나 ‘조선일본양해(朝鮮日本兩海)’로 명칭이 바뀌다가 어느 순간 일본해로 이름이 굳어졌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에 조선해는 일본해로, 독도는 다케시마(竹島)로, 조선해협은 쓰시마해협으로 완전히 일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말하자면 일본의 한국 강점은 명칭 침탈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현실이 이런데도 한국측 대응은 고작 ‘동해’ 찾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바다의 이름이 일관된 역사성을 지닌 ‘조선해’란 사실을 학문적으로 구명하고 체계화하여 차분하게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수백년 묵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시는 것을 보니 근성이 대단한 것 같은데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8살 때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는 숫기가 너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약한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따돌림을 많이 받는 바람에 성질이 강해졌습니다.”

    ─소장님은 원래 서지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서지학자는 그저 남들이 붙여준 이름이고 정식으로 서지학 공부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도 고서적을 모으고 읽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집안 여건이 허락지 않아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책보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표지부터 끝장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입니다. 그래서 군대 제대한 뒤 직업도 서점을 택했지요.

    1955년에 종로5가에서 ‘권독 서당’이라는 서점을 6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신촌 연세대 앞으로 옮겨 ‘연세서림’을 경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세대 도서관은 고서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었어요. 내가 그걸 전량 납품했지요. 그러면서 고서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등록금을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자란 그는 연세대 도서관에 고서를 납품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방대한 고서적을 소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다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1968년에 서인달씨를 만난 것이다. 교육자 출신인 서인달씨는 당시 일흔쯤 된 노인이었는데 이종학 소장의 서점에 와서 일제 시대에 출판된 식물 관계 책 두 권을 사라며 당시 돈으로 1만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군말 않고 만원을 내드린 뒤 우유까지 대접했다. 그랬더니 그가 명함을 직접 써서 주면서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시간을 내서 서울 장위동에 있는 그 어른 집에 갔는데, 집 2층에 고서적이 꽉 차 있었다. 그 책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이 책은 모두 당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남들은 1만원달라고 하면 값을 후려쳐 7000원 정도 쳐주는데, 당신은 군말 않고 값을 쳐주었다. 물건은 임자를 만나야 빛을 발한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책들은 모두 엿장수에게 넘어갈 텐데 그럴 바에야 당신 같은 사람이 인수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서인달씨는 죽기 전에 장서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넘겨줄 이를 찾았던 것이다.

    충무공 때문에 독도 문제에 관심 가져

    ─선생님은 이순신 전문가로도 유명하잖습니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서인달 어른이 주신 책 가운데 이순신 장군 관련 서적이 아주 많았어요. 몇날 며칠을 그 어른 댁에서 책을 실어낸 뒤 마지막 날 10만원을 따로 드렸어요. 그랬더니 그 어른이 신문지에 둘둘 만 휘호를 하나 주더라고요. 집에 가서 펴보니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의 친필 ‘한산도가’였어요. 필적을 확인해보니 진품이었고 1597년 8월 보름에 읊은 기록이었어요. 나는 그 때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장군의 정신에 감동해, 충무공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문헌이 난중일기였는데, 아마도 백 번도 넘게 읽었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자연히 한문과 고서에 문리가 터지더군요. 또 초서체를 읽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서인달씨가 건네준 충무공 친필의 한산도가는 그가 목숨처럼 보존하다 1998년에 다른 자료 800점과 함께 현충사에 기증했다. 그는 한산도가를 지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시가 한시였으며, 쓴 해와 장소가 1595년 한산도가 아니라, 정유재란으로 한산도를 빼앗긴 뒤인 1597년 8월 보름 전남 보성 열선루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나이가 그는 자료를 꼼꼼히 뒤져 1595년 을미년 8월은 한 달 내내 장마가 계속되어 보름달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의 근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인터뷰 내내 그는 충무공 관련 자료들을 꺼내 보여줬다. 그러면서 초서체라 식별하기도 힘든 400년 묵은 자료들을 그 자리에서 술술 번역해 읽어내렸다. 그는 이렇게 이순신 전문가가 되어, 난중일기 번역본이 오역 투성이라는 사실, 충무공이 해전 뿐만 아니라 지상전에도 능했다는 사실 등 수많은 사실을 새로 밝혀냈다.

    그가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충무공 때문이다. 영토와 민족을 한 몸 바쳐 지키겠다는 호국 정신에 감화한 것이다. 금상첨화로 그에게는 고서적과 자료를 판독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서지학이 케케묵은 일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이 될 수 있는 일임을 깨달았고, 충무공에 쏠려 있던 관심 폭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울릉군에 자리잡은 독도박물관 정면에는 큰 비석이 서 있다. 그가 사재를 털어 세운 이 비석에는 한자와 한글로 ‘독도박물관’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자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집자한 것이고 한글은 세종대왕이 월인천강지곡에서 집자한 것이다. 특히 난중일기에서 집자한 글씨는 글씨체의 아름다움보다는 특별히 의미가 부여된 글자에서 집자했다. 그는 독도박물관은 이순신 장군이 세워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종학 관장의 관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엄청난 집중력과 자료 해독력, 수집력으로 그는 한국 근세사를 정리하고 있다. 구한말 동학혁명에 관해서도 수많은 사료를 찾아내 이를 전시하고 국가에 기증했다. 특히 단군 이래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일제 강점사는 그의 전문 분야다. 그가 가장 안타까워 하는 사실은 이 분야에 대한 연구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한일합병 단일 사건을 놓고 일본에서는 관련 서적이 40여권이나 나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기범씨가 쓴 70쪽 분량의 단행본 ‘조일 합방사’단 한 권 뿐이라는 것이다.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면서 그는 일본 고문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물증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조선총독 한국병합시말’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내각에 보고한 극비 문서로 한국 병합은 일본 왕이 내각을 지휘하여 치밀한 계획에 따라 추진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추밀원회의 필기’는 병합이 절차상 문제로 일왕 재가를 거치지 않아 일본의 국내법조차 어긴 불법 조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한국 병합에 관한 서류’에는 당시 일본 정부와 통감부 간에 오간 수백통의 전문이 실려 있다. 이 자료들은 모두 일본 국립공문서관을 뒤져 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측이 뭐라고 변명할 근거가 없다. 그는 이 한일 합병사에 관한 자료를 한데 묶어 7월 말에 우리말로 번역해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를 영역해 국제사법재판소와 전세계 주요 도서관과 학술기관에 무료로 배포해 일제의 만행을 알릴 계획이다.

    그는 최근 고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기도 화성 태생인 그는 수원의 자택 근처에 자신의 호를 딴 사운(史芸)연구소를 열고 모으기만 하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수원성’으로 잘못 알려졌던 화성(華城)의 제이름도 그의 노력으로 되찾았다. 조선왕조시대 문명의 꽃이 가장 화려하게 핀 시기를 꼽으라면 15세기 세종 시대와 18세기 정조 시대를 들 수 있다. 세종시대의 상징이 한글이라면 정조 시대의 상징은 화성이다. 화성은 정조의 꿈이 녹아 있는 실학의 도시다.

    화성이란 이름은 정조대왕이 덕이 넘치는 도시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정조 이래로 철종까지 무려 171회나 나오는 이름이다. 수원성은 일제가 멋대로 왜곡한 명칭으로 역사적인 뜻이 사라져버린 의미없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1996년 정부와 수원시는 ‘수원성 축성 200주년의 해’라는 명칭으로 각종 행사를 열려 했다.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해 1월 문화재관리국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그 이름을 화성으로 바로잡았고, 12월에는 그 내용이 관보에 공시되었다.

    이에 따라 1998년에 발행된 초·중·고 국정교과서에는 한결같이 ‘화성’으로 표기되었으나 검인정 교과서에는 여전히 ‘수원성’또는 ‘수원성곽’이라는 명칭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는 1998년 4월 교육부와 해당 출판사, 언론사 등 모두 70여 곳에 청원서를 보내 이를 바로잡았다. 정보통신부가 발행한 ‘수원성 축성 200주년 기념 우표’가 계속 판매되고 있음을 지적하여 판매 중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그는 화성에 정열 뿐만 아니라 돈까지 쏟아부었다. 화성은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와 미국의 워싱턴 DC와 비슷한 시기인 1796년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건설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와 기자재, 건설 비용 등을 이잡듯이 적어 놓은 공사보고서를 남긴 곳은 화성 뿐이다. 그는 사재 1억6000만원을 털어 정조 시대의 화성건설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200년 전 원본 그대로의 재질과 크기로 영역해서 이 중 100질을 전세계의 주요 도서관과 학술기관에 보냈다.

    북한으로 넘어가는 이종학의 자료

    1997년 12월에 화성이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당시 이 화성성역의궤가 중요한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화성은 정조 시대 이후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원형이 상당히 훼손되었고, 지금의 성곽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복원된 것이다. 유네스코의 선정위원들은 복원된 성곽이 200년 전의 화성과 같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으나, 화성성역의궤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성 어느 부분의 공사는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는지, 누가 공사 감독을 맡았으며 소용된 물품과 인원은 어느 정도인지, 석재와 목재, 벽돌같은 기본 건축 재료의 출처며 수량과 가격은 물론이고 느릅나무 껍질, 집돼지 털, 개가죽 같은 소모품의 수량과 가격까지 적혀 있을 정도다. 또 행궁과 그를 둘러싼 5520m에 이르는 산성의 모든 건축물을 그림과 설명으로 기록하였다. 마치 설계 도면 같은 공사보고서로 언제든지 어느 부분이든지 복원과 보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소장 자료를 북한에도 넘겨준다지요?

    “자료 수집차 일본에 갔다가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대와 여러 차례 접촉했어요. 그래서 지난 2월 일본 조선대 금병동 교수에게 일본 왕실 내각 문고에 90년 동안 보관되어 있다가 제가 찾아낸 일제의 한국 강점 비밀문서를 넘겨주었지요. 한국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조약으로 이미 청구권을 주장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같은 민족인 북한이나마 제대로 일본과 수교 협상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이 밖에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국경선 협약 문서와 간도 협약 문서를 북한에 넘겨줄 작정입니다. 이는 북한이 중국과 국경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나는데 이종학 소장은 족히 10kg은 될 듯한 책꾸러미를 건네줬다. 모두가 지금까지 수십만건의 고서적과 자료를 뒤져 정리한 보물 같은 연구 성과물이었다. 이것들이 모두 너덜너덜한 한문투성이 고문서와 먼지가 잔뜩 낀 일본 문서 창고에서 알짜만 모아서 정리한 자료라니. 그동안 그가 본 1차 자료을 양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중 몇 번이나 독도문제에 관한 일본인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보다 더 치밀하고 집요했다. 이종학 같은 사람 때문에 독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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