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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의 감춰진 진실

  •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의 감춰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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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최대의 비극이 이곳 발굴을 독점한 특정 학맥이 없었다는 것이라면, 그 두 번째 비극은 한국고대사학계 태두(이병도)와 한국고고학계 대부(김원룡)라는 두 사람의 ‘풍납토성=사성’이라는 주장이 학설을 뛰어넘어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을 하지 못할 만큼 권력화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권력화의 단적인 보기는 몽촌토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몽촌토성이 문화유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6년에 이뤄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80년대 초 88올림픽대회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되고 이곳을 포함한 주변 일대를 올림픽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촌토성이 백제왕성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이성산성이 기대했던 백제의 흔적 대신 신라 유물을 대거 쏟아내면서 하남위례성 후보군에서 탈락해버리자 백제왕성 제1후보로 몽촌토성의 콧대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몽촌토성은 83년 이후 87년까지 서울대박물관이 주도한 6차례의 연차 발굴과 이에 따른 정비 복원이 이뤄진 뒤부터 97년 풍납토성이 발굴되기까지 10년 넘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기 힘들만큼 유일한 백제 왕성 후보였다.

여기에 김원룡 교수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김교수는 이미 67년에 몽촌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고, 몽촌토성 발굴 작업에도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촌토성은 유례가 없는 대규모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쏟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출토된 목탄과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로도 3세기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이런 결과는 설사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라고 해도 3세기 이후에나 그런 구실을 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88올림픽개최 를 즈음해 너도 나도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하나같이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점이다. 89년에 나온 몽촌토성 마지막 보고서 서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간의 조사성과에 의하여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면서 이 성을 한성시대의 중심적인 거성(居城) 또는 도성(都城)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지나 관청지 등의 내부 시설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어 몽촌토성의 성격 규명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몽촌토성=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보고서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몽촌이 왕성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그 때까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황으로 보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몽촌토성의 성격규명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몽촌이 꼭 백제왕성이어야 한다는 발굴단의 의지를 내보임과 동시에 이곳이 그렇다는 선입견 혹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하튼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이 낳은 걸출한 스타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몽촌토성 제친 풍납토성

다시 풍납토성 얘기로 돌아가보자.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서북쪽 성벽이 한강과 맞닿았던 서울 송파구 풍납1, 2동의 풍납토성은 애초 성벽 둘레만 3.5㎞에 넓이 22만6000평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 성곽이다.

이런 풍납토성이 몽촌토성 대신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최근 2~3년 사이의 일이다. 풍납토성이 유력한 하남위례성 후보지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1년 간격으로 개최한 특별전 두 군데서 확연히 감지된다.

98년 10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고유물로 본 한국고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특별전은 부산시립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옮겨가며 다음해 3월21일까지 계속됐다.

특별전을 개최할 경우 행사 주최자는 반드시 전시 물품에 대한 풍부한 원색 사진자료를 담은 도록이라는 것을 발간하게 된다. 철기문명 시작과 이를 통한 고대국가 형성을 탐구한다는 뜻에서 마련된 이 특별전 또한 도록이 나왔다.

이 도록은 제3장 3절에서 ‘백제의 형성’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록에서는 “(백제) 토성으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데 풍납토성의 경우는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시기 및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면서 “몽촌토성은 1983년에서 1989년에 걸쳐 연차적인 전면조사가 실시되어 한성기의 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풍납토성보다는 몽촌토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특별전에 출품된 백제 유물 중 몽촌토성 출토품이 풍납토성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꼭 1년 뒤인 99년 9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2000년 2월6일까지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을 옮겨가며 치른 특별전 ‘백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작한 특별전 도록은 풍납토성 출토 유물로 가득차 있다. 흙을 구워 만든 십각형 초석을 비롯해 풍납토성 주거지 발굴 전경, 무늬없는 전돌, 아궁이틀, 일종의 상·하수도관인 도관, 돌절구, 어망추, 숫돌을 비롯해 풍납토성 출토 유물들이 도록을 온통 도배하다시피 했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에 밀려 바로 뒤에 나온다. 말하자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의 자리를 꿰차기에 이른 것이다.

두 도록을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전히 백제 왕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몽촌토성을 밀어내고, 풍납토성이 드디어 백제의 가장 중요한 성곽으로 올라섰음을 잘 알 수 있다. 두 도록 발간 사이의 그 1년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풍납토성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주인공은 역사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선문대)였다. 70년대에 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80년대 초부터 96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가락동 고분군을 비롯한 한강유역 일대 초기백제 유적 보존운동을 벌여 왔다. 이런 활동 중 하나가 1996∼1997년에 있었던 풍납토성 실측조사 사업이었다.

이미 94년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교수는 97년 1월1일 신년 연휴에 풍납토성에서 실측조사 작업을 벌이던 중 토성 안쪽 현대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목격하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 공사는 즉각 중단되고 공사장 2300여 평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 해 11월까지 계속되게 됐다. 이것이 풍납토성에 대한 첫 본격 발굴이었다. 뜻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실시되는 이런 발굴을 구제, 혹은 긴급발굴이라 한다.

실평수 25평형 고급 주택

그런데 이곳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기를 비롯한 수많은 초기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단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왔다.

유적과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모았던 게 20평이 넘는 대규모 건물터와 기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주춧돌이었다.

총 19기의 건물터 중 상당수는 일반 민가로 보기 힘들었다. 규모가 가장 큰 건물터는 실평수가 25평에 달했고 기와와 전돌, 주춧돌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일반 민가가 아닌 관공서 같은 공공건물이 분명했다. 어떤 건물터는 기둥과 서까래, 보같은 목조건물이 고스란히 불타 내려앉은 상태로 발견됐다.

더구나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분석 결과는 물론 출토된 목탄 및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 대부분 축조 시기가 기원 전후로 나왔다. 한반도에서 기원 전후 시기에 목조 기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을 곧 왕성이 아닌 다른 건물로 생각하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음에도, 더구나 그것들이 곧 왕성임을 증명해줄지도 모르는 중요성을 지닌 것들이었음에도 이곳은 보존되지 못하고 곧 아파트가 들어서고 말았다.

일부 학술단체와 언론이 보존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으나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다만 풍납토성이 아주 중요한 백제 초기 성터라는 학술적 성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발굴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이 발굴이 있은 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99년 6∼9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성벽 발굴이었다. 풍납토성 보존정비 계획의 하나로 서울시가 의뢰한 성벽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맡았다.

발굴단은 원래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라 보았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성벽은 높이 5m가 될까 말까 했고, 너비는 맨 아래쪽이 기껏해야 20m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을 잘라가던 발굴단은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규모에 놀랐다. 형편없어 보이던 성벽이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성벽이 백제 당시보다 많이 깎였을 터이고 또한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이자 연못인 해자까지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백제 당시 성벽은 대단한 규모였음이 드러났다.

더구나 절개한 성벽 단면을 살펴보니 단순히 흙만 쏟아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뻘층을 깐 다음 10㎝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켠 한켠 쌓아올린 판축토성임이 밝혀졌다. 비록 두 군데 밖에 잘라보지 않았지만 풍납토성이 한강과 바로 맞닿은, 구릉 하나 없는 평야지대임을 감안할 때 둘레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을 같은 수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거대한 성벽을 치밀하게 쌓았다면 그것을 왕성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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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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