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상부(劉常夫·58) 포항제철 회장을 만나려고 한 것은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유상부 체제 흔들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유회장 교체설을 흘리는 정치권의 외풍이 솔솔 불었던 것. 여당의 몇몇 중진 의원들이 포철의 대부인 박태준(TJ) 전총리의 지원으로 회장에 취임한 유회장을 퇴진시키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소문이었다. 유회장의 후임으로 전직 장관과 국회의원의 이름이 거명되기까지 했다.
임기 후반기에 나타나는 여권 인사 자리 챙기기의 소산일까. 아니면 지난 3월 주총에서 재선된 유회장에 대해 불만이 있는 일부 여권 인사들의 정치적 애드벌룬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먼저 유회장에 대한 주변 평가부터 들어보았다. ‘약간 무뚝뚝하고 원칙적이다’ ‘정치권의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미움을 샀을지도 모른다’는 시각이 있었지만 전문경영인으로서는 모두가 높은 점수를 줬다.
실제로 IMF 관리 체제 직후인 98년 3월에 취임한 유회장은 국내외 과잉투자 사업을 신속하게 취소·축소하고 고수익 위주로 계열사를 구조조정하는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사외 이사를 과반수 이상 두는 등 투명경영을 제도화했다. 그 결과는 98년과 99년 연속 세후 순이익 1조원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등 포철을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로 도약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1월 유명 경제지 ‘포브스’지는 세계 400대 기업중 금속광업 부문 1위로 포스코(포항제철)를 꼽았다.
전문경영인으로서 이런 성과를 올린 유회장의 임기가 2년반이나 남았음에도 ‘교체설’이 도는 것은 뭔가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을 듯했다.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을 던질 계획으로 9월14일 오전 서울 강남의 포항제철 회장 접견실에서 유상부 회장을 만났다. 29층에 위치한 회장실은 강남의 번화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김용순은 재미있는 사람”
접견실에 들어서는 유회장은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유회장은 바로 전날 포항에서 김용순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를 접대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자연스럽게 김용순 비서에 대한 인상부터 물었다. 유회장은 ”김용순 비서가 특별히 포항제철을 선택해주셔서, 덕분에 추석 연휴 이틀을 포항에서 잘 보냈습니다.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라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유회장은 이날 인터뷰의 절반 가량을 김용순 비서와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데 할애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과 함께 보낸 3시간의 생생한 여운이 말 사이 사이에 그대로 배어나왔다. 그래서 인터뷰의 무게 중심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유회장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가장 ‘새로운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김비서의 어떤 점이 재미있었습니까.
“북한 인사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뭔가 폐쇄적인 느낌을 받지 않아요? 그러나 김용순 비서는 전혀 달라요. 아주 개방적입니다. 상당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그 자신감 속에는 콤플렉스도 약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던가요.
“조그만 깊이 대화해보면 금방 감지할 수 있잖아요. 포철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질문이 굉장히 많아요. 둘이서 차 타고 가면서도 한참 동안 얘기했어요.”
김용순 비서는 포항제철에 3시간 머물렀다. 유회장과는 승용차안에서 20여분간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과정에 유회장은 김비서가 포철을 상당히 부러워하는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질문을 던져 보았다.
―김용순 비서가 제철산업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텐데… .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질문 내용을 미리 정리해온 것 같아요. 원자재 조달에서부터 생산과정과 제품 종류, 심지어 강판의 두께와 환경문제까지 일일이 질문을 해요. 철강산업 경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일관된 질문을 하기가 힘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게 되면 그 기업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거든요.”
―미리 예습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군요.
“글쎄요. 김비서가 평소에 그 정도 식견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김정일 위원장이 현장을 지도 방문할 때 사전에 체크하는 방식을 익히지 않았겠어요.”
―포항제철 방문은 미리 예정돼 있었던 것 아닙니까. 김용순 비서가 국내 많은 기업 중 왜 포철을 택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할 때를 대비한 사전 답사의 성격도 있겠죠. 그리고 18일 내려오는 경제고찰단, 즉 경제시찰단이 포항제철을 꼭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식량사정이 어려운 북한에서 제철산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군요.
“제철산업이라고 못박아 말하지는 않았어요. 김용순 비서가 말한대로 옮기자면 ‘신이 우리 조선반도에 남쪽에는 풍부한 농산물을, 북쪽에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공업용수를 주지 않았느냐. 우리가 합했으면 강성대국을 만들 수 있었는데…’ 라는 거지요. 앞으로 남북이 합치면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다소 정치적인 색깔이 있는 발언이었어요.”
“김비서, 환경문제 관심 많아”
―포항 제철 현장에서는 어디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원래는 제4고로와 제2열연을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우리가 만든 홍보용 비디오를 보는 것으로 대체했어요. 가장 관심을 보인 부분은 역시 컴퓨터로 전 생산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이었어요. 최첨단 시스템이 놀라웠든지 한동안 말을 잊는 것 같았어요.”
―김비서가 상당한 충격을 받고 돌아갔겠군요.
“속내야 알 수 없지만 포항제철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철강업체로 성장했는지가 놀라웠겠죠. 물론 그분은 제주도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남북을 갈라서 생각하지 않고 내 나라 내 조국이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더군요. ‘내 것도 내 거고 네 것도 내 거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소 그런 경향이 있었어요.”
유회장은 이 말을 한 후 껄껄 웃었다. 유머감각이 있는 김용순 비서 특유의 말투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렇게 유들유들한 김비서도 유회장이 무심결에 꺼낸 북한의 에너지 문제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일장 ‘연설’을 한 모양이다. 유회장은 91년 10월경 방북했을 때 김책제철소를 둘러본 경험이 있는데 당시 북한에서는 기름이 부족해 에너지 사정이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김비서를 조금 자극했던 모양이다.
“제가 에너지 문제를 거론하자마자 김비서는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께서 에너지란 공업의 기본으로서…’를 말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에너지 문제가 심각한 원인을 서방쪽에 전가하면서 자기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려고 노력한 것을 정당화하려는 거지요.”
김용순 비서는 포항제철의 생산시설뿐 아니라 환경문제, 근로자 주거지 문제와 교육 문제 등 전반적인 분야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유회장의 눈에는 김비서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북한에 적용하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을 만하다.
“사원주택 자금을 지원하는 문제, 포항공대가 과학기술 인재를 길러내는 것 등을 이야기하다가 예전에 모스크바대 총장이 포항제철을 방문했을 때 그분이 제게 한 말을 김비서에게 들려줬어요. 그분은 제 설명을 듣고 나서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국가가 이룩하려고 했던 목표인데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는 이것을 못하고 자본주의국가에서 이것을 실행했느냐’고 말했거든요.”
―김비서가 뭐라고 반응하든가요.
“특별히 기억나는 말은 없고 자동차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더군요. 김비서가 ‘자동차가 오죽 많습니까. 눈에 밟히는 것이 자동차인데 출퇴근할 때 자동차를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어요.
그래서 포항제철 직원 가구당 자동차 소유율이 97%인데 맞벌이하는 부부의 경우는 한 가구당 2대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100%가 넘는다, 그래서 교통 문제와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 생활 수준과 경제수준을 은근하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죠. 김비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성장과 번영을 북쪽에 이전할 수 있는가 하는 방향에서 자꾸 질문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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