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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이빨 아홉개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농정개혁 29개월 비망록’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잃은 것은 이빨 아홉개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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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용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세간에서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와본 사람은 금방 알아요. 우선 120평 짜리 집이 아니잖아요. 실평으로 48평이에요. 우리집은 300호 짜리 그림은 커녕 100호 짜리도 붙일 벽이 없어요. 김강용이 우리집 현관문을 빠루로 따고 들어왔다는데 자국이 없잖아요. 그래서 기자들 보고 우리 집에 와서 보라고 했는데, 확인도 않고 사실과 다른 기사를 쓰는 거예요. 모 신문사는 논설실장이 내 동서라서 한 달이 멀다 하고 우리 집에 왔었는데 그 신문조차 다르게 쓰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피똥을 싸서 병원에 갔더니 직장이 찢어졌대요. 그런데 ‘고맙게도’ 김강용이 우리집 약도를 그린 다음 현장검증을 했는데 그게 다른 곳이라서 오해가 풀렸던 거예요. 하지만 신문들은 그 얘기를 써주지 않았어요. 이번에 캐나다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얘기를 묻는데 뭔가 못 믿겠다는 투더라구요.”

―사건 초기에 농림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어졌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뭔가 잃어버린 게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오해의 시작이었습니다. 김강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한달쯤 전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전화로 ‘부적을 잃어버렸냐’고 물었습니다. 김강용이 우리집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어서 기념으로 부적을 가져갔다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나 우리 집엔 부적 같은 게 없거든요. 기증하고 남은 그림 몇 점도 그대로 있었구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광개토대왕비 기와 탁본이 없는 겁니다. 탁본을 자세히 보면 부적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농림부 공보관에게 ‘탁본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답니다. 중국돈 10위안을 주고 산 탁본이었습니다. 나중에 야당 대변인이 발표하는 걸 보니까 6억짜리 운보의 그림과 1억짜리 남농 그림을 우리집에서 훔쳤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김강용이 한 건지, 김강용을 만난 국회의원이 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10위안 짜리 탁본이 7억원짜리 그림 두 장으로 뒤바뀐 거예요. 더 재미있는 건 그 탁본도 나중에 우리집 문갑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김성훈 장관이 물러난 속사정은 무엇일까. 개각을 앞두고 그의 거취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이미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심전심’으로 김대통령과 의견조율이 끝났다는 것. 김전장관은 지난해 가을에도 사의를 표한 일이 있다. 당시 김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더 할 일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한다. 김전장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전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건강이다. 장관으로 일하면서 그는 이가 아홉 개나 빠지고 두 번이나 졸도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다. 다음으로 개혁에 대한 김전장관의 지론이다. 그는 올 초부터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개혁의 완성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마지막으로 대학 교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는 벌써부터 ‘대학에 돌아가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구제역 파문이 번졌을 때 졸도하신 적이 있었지요.

“선거 때였는데 봄가뭄이 대단했어요. 축협이 전국의 민주당사만 골라서 데모를 하니까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망생들이 아우성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구제역이 퍼졌어요. 서둘러 ‘구제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뛰어다니는데 동해안에 돌풍을 동반한 산불이 났어요. 국가적 재난이 연이어 터졌는데 지방자치단체들이 자기 할 일을 안해요. 옛날엔 산불이 나면 군수의 목이 달아났어요. 그런데 선출직으로 바뀌면서 나몰라라 하는 거예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대통령께 건의하려고 해요.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가 좋다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봐요. 그때는 정말 촌각을 다투는 위기였어요. 구제역이 났다는 소리만 들리면 새벽이든 밤중이든 달려가서 사태를 파악하고 가축들을 땅에 묻으라고 지시했어요.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으면 안되거든요. 산불 현장에도 여섯 번이나 갔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점심을 굶고 야전침대에 앉아있는데 몸이 뻣뻣해지면서 반신마비 증세가 오는 거예요. 누구한테 알리지도 못하고 2시간을 혼자서 끙끙 앓았어요. 며칠 있다가 또 한번 마비가 오는데 그때는 집무실에서 그냥 쓰러졌어요. 어떻게 꼼짝할 수가 없더라구요.”

협동조합 개혁 비화

98년 3월3일 ‘국민의 정부’가 조각 명단을 발표했을 때 농림부는 교육부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부서였다. 이해찬 교육부 장관과 김성훈 농림부 장관. 두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개혁장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임기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83년 묵은 수세를 폐지하고 4개 협동조합을 개혁한 겁니다. 일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던 우리 농업의 해묵은 숙제를 풀었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새천년농촌농업기본법을 마련해 농정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에도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렇게 세 가지가 제가 2년5개월 동안 전력을 다해 만들어 놓은 겁니다.”

―농림부가 최초에 제안했던 3개 개혁안은 협동조합중앙회장단에서 결렬되고 국회 심의과정에 수정됐습니다. 결국 김전장관께서도 한발 물러난 셈인데요.

“200회가 넘는 공청회를 통해 합의된 안을 국회에서 심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통합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내걸고 당선된 신구범 축협 회장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야 국회의원들이 축협 회장을 서너 차례 만나서 축협쪽 주장을 거의 다 받아들인 개정안을 만들었던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개혁이 변질됐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100점 짜리가 단계적인 70점 짜리 개혁안으로 바뀐 겁니다.”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상임위에서 통과되던 날 신구범 축협 회장이 할복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의장이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신구범 회장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문구칼로 할복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법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 그때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축협 임직원들이 흥분해서 국회의원을 구타하려고 했습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빠져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잡혀 구타 직전까지 갔고 나머지 국회의원과 장차관, 농림부 간부들은 상임위원회실에 갇혀서 나오질 못했습니다. 2시간쯤 그렇게 무법천지가 지속됐습니다. 정말 공포의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나이 드신 의원 한 분은 공포에 질려서 헛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들도 정신적 피해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개월 정도는 새벽 2시에서 4시까지 조직적으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가정파괴적인 비난을 퍼부었어요. 나도 위협을 느껴서 한 3일간은 경찰이 우리 집을 지켰어요. 200여회에 걸쳐 신문광고를 통해 나를 음해하는 거짓말을 내보내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장관인 것이 그렇게 싫었대요. 방안에서 꼼짝을 안하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는데 인사조차 안해요. 그때의 스트레스로 잇몸이 붓는 바람에 이빨 5개가 빠지고 나중에 4개를 더 뺐어요. 농림부 장관 2년5개월에 잃은 것은 이빨 9개고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입니다.”

막내아들은 학교에서 ‘왕따’

―농축인삼협 통합이 어려움을 겪자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사당을 찾으셨다면서요.

“이제는 그때의 일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도 저항이 심하니까 통합의 당위성을 잘 모르는 정치인들이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나와 뜻을 같이 했던 지인들마저 고개를 젓더라구요. 그무렵이었어요. 이동장관실을 운영하고 돌아오다보니까 무등산 자락에 정암 조광조의 사당이 있어요. 저는 평소 조광조 선생의 인간평등 사상과 토지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해가 어스름히 질 무렵 사당 문을 따고 들어가 영정 앞에서 몇시간을 앉아 있었어요. 그때 조광조 선생에게 물었어요. ‘당신의 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왜 당신을 등용했던 중종과 당신을 지지했던 사림파마저 등을 돌렸는가’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하고 나서 두 가지 해답을 얻었어요. ‘개혁을 할 때 한꺼번에 얻으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군도 적이 된다’ ‘정책 수혜자를 우군으로 만들어라. 그들이 집단 이기주의에 맞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계시를 받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와서 축협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고, 시민단체와 농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통합에 박차를 가했던 겁니다.”

농축협 통합 외에 빼놓을 수 없는 개혁이 일제시대의 잔재인 수세를 폐지한 일이다. 수세를 폐지하는 과정에 농어촌진흥공사, 농지개량조합, 농지개량조합연합회 등 3개 기관을 농업기반공사로 통합했는데, 내부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도 김성훈 장관의 우군은 시민단체와 농민단체였다. 이들은 ‘농조 농진공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농림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김전장관 특유의 ‘역포위 개혁작전’이 이번에도 적중했던 셈이다.

―수세를 폐지하는 과정에도 마음 고생이 크셨지요.

“멀쩡하게 군대에 다니고 있는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나오고 각종 루머가 끊이질 않았어요. 6억 짜리 그림을 받았다느니, 농협 회장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받았다느니 하는 괴문서도 나돌았어요. 협동조합 통합 때는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나를 그려놓고 달걀을 던지는 게임도 했어요. 입을 맞히면 10점, 배를 맞히면 5점, 뭐 그런 식이었어요. 그때는 속이 상했지만, 지나고 보니까 즐거운 추억이네요. 그때 나온 각종 유인물을 묶어서 백서로 만들고 있어요.”

―당시 시위과정에 장관님의 허수아비를 불태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떠셨습니까.

“우선 대통령을 불태우지 않고 장관을 불태운 것이 고마웠어요. 그 사람들이 장관을 주모자로 모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집회를 열 때마다 나보고 ‘물러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물러가겠다. 다만 해놓고 물러간다’고 대답했어요. 나는 결국 약속을 지킨 겁니다. 여의도에서 처음으로 화형식을 하는데 정말 섬뜩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나하고 팔자눈썹이 똑같을 수 있어요? 옷도 똑같아서 ‘정말 제대로 만들었구나’ 하고 웃었어요. 내가 태어날 때 무당이 단명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 무당을 또 하나의 어머니로 삼았어요. 화형식으로 몇 번 죽었으니까 ‘이젠 장수하겠구나’ 했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극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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